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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각과는 판이한 하나님의 생각들 (모리스 로버츠)

모리스 로버츠

by 김경호 진실 2013. 3. 1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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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님은 그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런데 타락 이후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다시 만들어 왔다. 인간의 모든 악함과 비참한 모습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모든 우상숭배의 기초가 여기에 있으며 모든 불신앙으로 조성하는 원조가 여기에 있고 참된 신앙을 경멸하는 근본이 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하도록 설득되어질 수만 있다면 악은 실질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이 올 때까지 불가능한 것이다. 여하튼 세대를 걸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저조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가령 우리가 죄를 범해도 하나님은 보시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전혀 상관치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악한 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적어도 충격적인 것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회심할 때에 우리들은 참 빛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된다. 물론 처음엔 희미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참된 것이며 하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분이란 것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은혜를 갖기 전에는 하나님을 존중받을 만한 분 그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나라에 진입한 후로는 그는 참되시며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우리의 깊은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우리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대하심에 대하여 희미한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들처럼 우리들은 모든 것을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주권적인 분임에 대하여 말하기를 배운다. 그러나 실지로 그 모든 언어들을 우리들은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들이 아직도 성경에 의하여 극히 작은 일부분의 지식만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만물이 다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은혜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학적인 지식 안에서 자란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일 우리가 빈약한 설교를 들었다든지 아니면 기독교 교리들을 다룬 책들을 소홀이 여겼든지 우리의 신학적 지식이 빈약하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의 생각들에 대한 온전한 지식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리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 및 그의 길들을 위한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어떤 유형의 무지이든지 그 모든 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이며 동시에 가장 흔한 문제이기도 하다. 회심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참되고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다. 그것은 참 빛이지만 아직도 새벽녘의 빛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에게는 깊은 깨달음과 통찰력이 향상될 가능성이 많다. 그와 같은 성장은 오직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묵상하는 일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청교도작품들과 같은 위대한 신앙서적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갈 길을 평생토록 성경을 읽으며 좋은 신앙서적들을 탐닉하며 출항하려 할 때 항상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인하여 갈등을 겪게 된다. 그 차이는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생각이 보다 더 현명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임을 발겨하게 될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방법이나 사고하는 방법은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항상 정반대의입장에 서 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희미하나마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참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주중에 6일 동안 노동하시듯 우주를 창조하시는 방법을 택하셨을까? 인간사상사와 철학의 역사는 하나님 편에서 창조하신 그와 같은 과정이 아주 타당치 못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수 만년 동안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면 그 방법이 인간의 지혜에 있어서 이해하기가 훨씬 용이하였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을 까? 그것은 여성의 인권과 평등성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처럼 이 세상의 지혜는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왜 하나님은 홍수로 인류의 모든 족속을 멸하시고 오직 8명의 식구들만 방주에 남겨두셨는가? 성경에서 노아의 홍수사건보다 더 공격을 받거나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건들은 거의 없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노아의 홍수사건 못지않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 몇몇이 더 있다. 바벨 사건은 어떠한가? 인간의 언어의 기원과 우리가 말하는 민족형성의 기초가 되고 있는 이 사건을 인간의 지혜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 이전의 모든 인류 족속들에게는 그냥 지나쳐 버렸고 구원의 복과 하늘나라의 소망은 오직 한 족속 즉,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주어졌다. 애급이나 바벨론 제국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은총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페르시아나 헬라 제국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2천년동안 하나님의 은혜는 아주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주어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이교도들의 탁월한 현인들이 본 것들은 여러 측면에서 아주 유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지혜를 다 합쳐도 인간의 구원문제와 영생에 있어서는 매우 어리석은 지식들뿐이다. 그들이 지녔던 깨달음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 아주 희미한 것들뿐이다. 그 지식은 참 하나님과 더불어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깨달음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였다.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가기고 있는 유일한 깨달음이란 다윗과 이사야, 아모스 및 다른 선지자들이 가진 것이 전부였다. 어느 철학자들도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왜 택하였는지를 말해줄 수 없었다. 만일 아주 현명한 자가 이 세상의 역사를 계획하였다면 이 세상은 아주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복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더듬어 보자. 다시한번 말하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선택한 길은 ‘측량할 수 없는 길’(past finding out)이며 그의 길은 헤아릴 수없는 기이한 것이다(엡 3:8). 세상 초기부터 예견된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심은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방법으로 된 일이었다.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 여인이었다. 요셉조차도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매우 혼란스러워 하였으며 당황하였다. 이 세상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제주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였다고 전 우주에 크게 알리는 하늘의 나팔 소리도 없었다. 단지 몇몇 경건한 사람들과 가난한 목자들만이 밝고 환한 천사들의 방문을 받았을 뿐이었다. 몇몇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따라 찾아왔을 뿐이며 그 밖의 세상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영원하신 주께서 오셨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베들레헴은 예전의 적막한 밤과 다를 바 없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필립 부룩스 목사가 표현 것처럼 ‘전역사의 소망과 두려움이 함께 만나는 밤’(the hopes and fears of all the years are met in her night)인 줄도 모르고 고요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가!

주 예수의 생애는 출발부터 마칠 때까지 놀람의 연속이었다. 인간의 지혜는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증명하는 것만 보여줄 뿐이었다. 외경 복음서들을 보면 소년 예수가 진흙으로 비둘기를 빚어 날아가게 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생산적인 상상력은 능히 동일한 효력을 더 많이 창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예수는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세례 받으시면서 성령이 두 번째 그에게 임하시기 전까지는 어떤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셨다. 그의 나이 30년 동안의 침묵의 세월은 호기심 많은 학자들의 지혜를 아주 난처하게 만든다. 그들은 예수가 어렸을 때 또는 사춘기 시절에 어떠했을까를 매우 발견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며 거룩하신 아들을 거의 완전한 전통에 둔 마광(磨光)한 살처럼 나이 30세 때까지 감추셨다(사 49:2).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그의 나이 12세 때의 일뿐이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예수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고 무엇을 위하여 온 자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 얼마나 장대한 하나님의 지혜인가!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그 모든 생애가 항상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고 참으로 난감한 생애를 살았다는 것 자체도 인간의 지혜에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헤롯은 그를 죽이려 했다(마 2:8). 나사렛에서의 그의 첫 번째 설교는 정말로 인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초자연적인 힘이 그를 구출하여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동네사람들에 의하여 그 날에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다(눅 4:30). 그의 공생애의 시작부터 예수는 그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의 악의에 찬 반대의 눈총을 받기 시작하였던 것이다(막 2:6-7). 그는 대적을 받았으며, 논쟁에 휘말렸고, 의심받았으며, 유혹당하였으며, 분노를 일으켰으며, 오해를 샀고, 중상모략을 당하였으며, 죽음의 공모를 받았다.

그의 3년간의 사역은 신의 영광과 선하심이 불같이 타오르는 찬란함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알세불의 도구라고 선언하게 하였고 악마의 특별한 일군이라고 비난받게 한 것은 인간의 지혜였다(마 12:24). 놀랄 문제는 3년 반 동안 살다가 그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를 그토록 오랫동안 살게 내버려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진 적대감정을 생각해 보라. 그를 없애려고 총회에서 결의까지 하였는데(요 11:53) 어찌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살려두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그가 부활하였다는 것조차도 숨기려고 거짓증인을 내세워 외치기까지 한 그들이었음을 생각할 때(마 28:13) 예수를 그토록 오랫동안 활동하게 내버려두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이 다 인간의 지혜와는 정반대되는 일이라고 하였다(고전 1:29). 실로 죄사함의 길인 십자가는 마치 북극과 남극이 다른 것과 같이 복음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것’이며 ‘장애물’이었다(고전 1:23). 십자가는 이렇게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측량할 수 없는 지혜이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인간의 지혜는 묻는다. 어떻게 죽어가는 예수가 자신도 구하지 못하면서 우리를 구원하는 전능한 구세주란 말인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 이 비밀에 대하여 이해한 관원들은 아무도 없었다(고전 1:25). 만일 이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면 어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토록 고통과 어두움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셨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잠긴 문에 다가와 참된 지혜의 문을 여는 열쇠를 주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은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 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가! - 이 세상에 살았던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지혜와 장차 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지혜를 다 합한 것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다(고전 1:25). 하나님은 그의 지혜에 있어서 죄로부터 이 세상을 구원하셨으며 그 방법은 인간의 지혜에 있어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벌하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였을 때(사 55:8) 그는 성경 모든 곳에서 그것이 사실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교리가 다 포함된다. 창조나 섭리, 선택과 유기(버림), 대속적인 죽음 및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들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보다 아주 광대하며 뛰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이처럼 우리의 지혜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이해는 것에 있어서 뛰어난 반전인 것이다. 여기에 도달한 사람들은 물론 불행하게도 모두가 여기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 이제 전혀 새로운 눈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 되며 새로운 경외감으로 대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자기들이 본 것이 정말 잘못되었던 것임을 발견케 되며 자신들의 지식이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었으며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견고한 지혜는 성경을 상고하면서 얻어지는 지혜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결코 높게 평가되지 않는 것이지만 이 지혜 외의 모든 지혜는 다 어리석은 것들뿐이다.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만족스럽게 여겨지면 영적인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극소수에 불과한 것임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는 결코 완전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지혜를 거절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 부른다. 회개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매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의무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본질적인 것으로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규범으로써 하나님의 지혜가 계시해 준 것을 믿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부른다. 이 신앙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가장 훌륭한 신학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코자 전심으로 상고하는 자이다. 가장 훌륭한 성도는 성경에 기록된 생활 규범을 신실하게 순종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의 지혜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한 그와 같은 삶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지혜나 의견에는 무관심하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삶은(요 5:44) 우리의 지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배우게 될 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능력 있고 복된 삶의 목적에 가까이 다가서는 일은 매일 우리의 삶에서 이와 같은 목적을 추구할 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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