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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 은혜로부터 타락이 가능한가

모리스 로버츠

by 김경호 진실 2010. 2. 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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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 은혜로부터 타락이 가능한가?(1)

(Can a Christian Fall from Grace?)


모리스 로버츠(Maurice Roberts) / 차광신 역  

이 글의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질문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생에서 불멸의 영혼을 직면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이다. 이 주제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전(全) 기독교 신앙의 신빙성(reliability)과 신뢰성(credibility)이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타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면에서 신자들이 불신자보다 나은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기독교 자체에 영생의 길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데도 아직도 멸망의 자리에 있다면, 스데반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순교자들은 무슨 연유로 죽음의 면전에서도 담대하게 확신에 찬 신앙을 고백하였을까? 그들에게 있어서 영광에 대한 확신과 천국에 대한 확신은 결국 환상과 광신의 효과가 아니었을까?

타락한 자들 때문에 복잡하게 된 주제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 (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간단하고 친숙한 문구에서 안전과 견인에 대한 성경적 교리로 표현하고 싶어진다. 이 같은 표현은 크리스천들 사이에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리고 이 문구는 쉽게 이해하고 당장 기억하는데 이점이 있다. 이것은 자기기만이나 간사한 귀신과 같은 것이 없는 완전한 세상에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 같은 공식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그같이 말할 수 있는 세상은 없다. 기독인으로서 실제로 살아야 하고 또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고, 자주 반복하는 이 슬로건(slogan)은 다양한 성경적인 관심과 수정을 통하여 보완되어야 한다. 성경의 진리들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간단한 표현으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 정말로 평범하고 단순한 이 문구가 오히려 크리스천을 위해 복잡하지 않는가? 만일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안전하다면 왜 더 많은 설명을 하려고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종종 우리에게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타락하여 영생을 놓쳤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우들은 가룟 유다와 같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경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많은 경우들, 즉 마지막 날(the Last Day)에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였던 많은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악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는 분명한 말씀을 듣게 되는 충격적인 경우들도 있다.
만일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이 현재의 주제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7장과 그 외에서 말씀하신 영혼들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크리스천이 분명하다. 예수님을 표현할 때 ‘주여, 주여’(마7:22)라는 단어를 습관적으로 말했던 자들이라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건 간에 자신들의 판단으로는 분명히 크리스천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서는 영원히 잃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혼란스러워진다. 심판장으로서 영생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만일 이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망설임이 있다면 우리 역시 대 심판 때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라는 효력 있는 말씀과 유사한 말씀을 통해 쫓겨날 것이다.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진리의깃발』 68호.

 

크리스천이 은혜로부터 타락이 가능한가?(2)

(Can a Christian Fall from Grace?)


모리스 로버츠(Maurice Roberts) / 차광신 역  

자기기만의 위험성

우리 구주께서 우리에게 이같이 준엄하게 말씀을 하신 동기는 명목상의 기독교가 되면 치명적으로 위험한 명목상의 크리스천 된다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도 없이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영원히 안전하다고 자기 스스로 약속함으로 쉽게 스스로 속이는 것을 알고 계셨다.
본문을 통해 볼 때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 그 ‘집’은 한 동안은 서 있지만 마지막 날 혹독한 시험에 서 있지 못한다. 참으로 많은 경우 이 생의 시험을 견디지 못한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 날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다’(마13:21). 돌짝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은 환란 날에 수많은 경우, 여기저기서 신앙고백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의 어떤 결점 때문이거나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에 단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고백에 결정적인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은혜는 구원을 이루는 은혜가 아니라 그보다 못한 어떤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영적으로 거듭난 열매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한’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위에서 언급한 주제는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4:25)라는 말씀을 보아 분명하다. 수수께끼 같은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종류라 할지라도 ‘쉽게 믿자는 주의(easy-believism)’에 쉽게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같이 의도해서도 안 된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더 많은 것을 받게 되지만 일반 은총만을 받은 자는 일반은총과 함께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진정하게 구원받은 자는 구원의 축복들 속에 풍성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자기 기만을 통한 ‘크리스천’은 조속한 시일이거나 후일에 그의 가면을 벗게 되고 불신자들과 함께 영원한 지옥에 보내질 것이다.

자기 진단(self-examination)의 시급성

그렇다 하더라도 환영 받지 못하는 그 같은 주장이 몇몇의 단체에서 존재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결론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점검하여야 한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견고한 기초위에 우리의 신앙고백을 세우고 있는지 확인하여야 한다. 즉 우리가 마음의 변화를 받아 구속받은 열매가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진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인가? 확인하여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자주 살피지 않고 산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순수하다고 잘못 판단하는 것으로 아주 심각한 것이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 같은 강조를 낯설어하거나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병적인 자기성찰일까?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둘 다 하여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구원 신앙의 가장 큰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all the time)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여야 한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표식들을 거슬려 정기적으로 점검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건강하다고 인정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중생할 때에 부여받은 것이다. 이 연합과 교제는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드러난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로부터 솟아나와 참 신자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숨겨진 은혜의 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넘쳐난다. 간단히 말해 진실한 믿음의 결과는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며 형제들을 위한 크리스천의 크나큰 사랑으로 나타난다. 참 믿음은 새로운 관심으로 인해 잃어버린 자들을 얻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진리의깃발』 68호.

 

 

크리스천이 은혜로부터 타락이 가능한가?(3)

(Can a Christian Fall from Grace?)


모리스 로버츠(Maurice Roberts) / 차광신 역  

구원의 수단으로서 공로를 소개해야 하는가?

앞에서 언급한 것은 성도의 견인이란 주제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지금도 비판(평가)받고 있다. 앞에서 진술한 우리의 견인에 대해 언급한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고 공로로도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잖은가? 이 같은 반대는 처음 듣기에는 그럴 듯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가지 큰 차이점 곧 칭의와 견인으로 인해 혼동이 생긴다.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공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칭의로 주입되는 의는 다른 이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을 때까지는 믿음만으로 되지만, 믿음으로만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를 버티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순종하여야 하며 날마다 풍성한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과 함께 협력해야 한다.
죄악 된 세상 속에 신앙의 순례 길에서 우리는 수많은 악의 세력을 만나게 되며 우리를 대항하는 모든 수단들을 만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처럼 고통을 배울 필요가 있다. 또한 시련과 유혹 가운데서 오랫동안 견디는 연습도 필요할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믿음과 행함(works)으로 견인의 길을 간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와 대치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의로운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어느 때라도 칭의 그 자체(substance) 속으로 들어가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진정으로 삶이 변화하였다는 열매로서 그리고 증거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죄인으로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나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성경 용어로는 ‘성도’이며 우리의 ‘행함’이 계속적으로 거룩한 삶으로 지속된다면 우리는 의롭다고 주장하는 칭의 상태이다.
신앙 고백한 어떤 크리스천도 그가 아직 알고 있는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동안 그의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반대자는 ‘그러나’, ‘그는 수년 전에 “결심(decision)”했다고 고 말했다. 사람의 문제는 그가 불신자라는 점에 있지 않다. 도리어 아직 그가 육신을 지닌 크리스천이라는 점에 있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는 구원을 받았다.” 이 같은 이야기는 성경을 복음적인 견해에서 보고 신앙을 고백한 자들에게는 무가치하다. ‘세속적인 크리스천’은 결코 크리스천이 아니다. 이 용어의 의미는 구원을 받아 마음이 변화하였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고백을 한 자를 의미한다.
물론 모든 신자는 어느 정도 세속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신자들이 완전해지는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들은 ‘경성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온전한 거룩’에 이르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여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어떤 ‘크리스천’을 만날 때는 즉시 경고의 등불이 켜져야 한다.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좋은 양심을 유지할 수 없고 그의 주변에 있는 세상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예 아니든지, 침륜에 빠지거나 위험한 상태에 있으므로 크리스천의 책임으로부터 멀어진다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진리의깃발』 68호.

 

 

 

 

크리스천이 은혜로부터 타락이 가능한가?(4)

(Can a Christian Fall from Grace?)


모리스 로버츠(Maurice Roberts) / 차광신 역  

영적 안전장치

그러므로 아무리 선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계속 교정하여 끊임없이 은혜 속으로 향하도록 하는 많은 경고문들이 성경에 있다. 성경에는 진실한 성도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장차 올 영광을 말해주는 약속들과 두 번째는 우리가 죄나 세상 속으로 되돌아 갈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적합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선한 사람이지만,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신자에게는 자신을 계속 제어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줄 장차 올 영광의 약속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내하며 신앙을 지키지 못할 때에 받을 고난으로 인해 상실할 것들에 대한 경고도 필요하다. 이 같은 경고들은 히브리서에서 특별히 볼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복음적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유형의 가르침들이 청중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하는 것은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신자들에게 확실하게 해 주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만일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한 영혼이 한 ‘결단’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다만 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요구는 운집한 군중 속에 결혼식에 입장하는 기념비적 경험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가 전심을 다해 우리 존재를 하나님께 드림이다. 전 생애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뜻을 따라 가는 것이 이 주제의 본질이다. 간단히 말해 신자들이 기쁨과 겸손, 사랑과 헌신의 고난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날마다 교제하는 것이다. 천국을 올바르게 사모하는 신자는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다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고전9:27)’ 라고 한 예(例)를 따른다.
가장 확실한 것은 이같이 사는 크리스천들은 은혜에서 후퇴하지 않으며 도리어 생명 끝 날에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 갈 것’이라는 것이다 (벧후1:11).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진리의깃발』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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