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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십자가 2 (월터 챈트리)

월터 챈트리

by 김경호 진실 2013. 3. 15. 08:57

본문

자기 십자가를 지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3,24)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입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좁은 문은 인생 여정의 길머리에 놓여져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 에고(ego,이기심)로 부풀어 오른 사람은 그 문을 비집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삼가고 자기를 거부하고,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자기를 부정하라는 자신의 요구를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아를 포기하라는 예화를 생생하게 사용하심으로써 그 요점을 재삼 강조하셨습니다. 이 예화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과 함께 그분의 보혈로 곧 인(印)을 치셔야만 하셨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선지자께서는 복음서에서 여섯 번에 걸쳐 자기를 따르는 자는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언급하십니다. 자기 부정은 그분이 애착을 가지고 늘 사용하시는 예화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소유를 모두 팔 것을 말씀하시거나 목숨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라는 말에서 우리 생각에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갈보리언덕 위의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가하기 위하여 고안된 기구에 매달린 채 피 흘리시는 그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생각을 더 넓혀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이나 채찍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베드로나 요한, 여러 세기에 걸쳐 순교했던 순교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용기 있는 신체적 고통에 비추어 안일함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내가져야 할 십자가는 없어!’라고 스스로 말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그 말씀을 거듭하여 읽으면 그리스도의 반복적인 요청은 아마도 여러분의 양심에 경고를 할 것입니다.
실상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 이라는 사람들은 자기 십자가를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자기 처형, 자기 부정의 체험을 무시한 채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낯선 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 주님 자신은 이러한 개인들에게 의미심장한 경고를 하기 위하여 그의 예화와 요청을 하셨습니다. 만일 이것이 여러분의 상태라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 외에 구원의 확신을 얻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지만 우리 주님의 요청을 오해하고 실망감을 느낍니다. 여러분 중에 십자가를 지고 있으면서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도 정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두 가지 경우에서 그 주제는 여러분에게 생생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님의 생애는 십자가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여러분을 십자가를 지는 생활로 부르셨습니다. 이 분명한 복음의 소리는 무기력한 서구 사회에서는 쉽사리 망각되고 있습니다. 관습과 선전, 그리고 유혹의 대합창과 더불어 이 세상은 여러분을 방종의 생활로 손짓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은 그 호소에 이끌리게 되고 세상이 제안하는 데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주님은 여러분을 자기 부정의 생활, 곧 십자가로 부르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요청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전혀 여외가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모든 자들에게 하는 요청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말씀들을 ‘모든 자’에게 하셨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는 몇 사람의 소수에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8:34은 이 명령이 열두 명에게만 말해졌던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든지’ 이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이 필연성에서 면제되는 특별한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어느 누구라도 그분의 제자로 여기지 않으신다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
다시 누가복음 14:27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를 향하시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자기 부정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국가에 살든 하나님의 말씀에 적대적인 문화 가운데 살든지 간에 여러분은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옥에 이르는 세상 길 뿐입니다. 누가복음 9:24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for,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하지 않았음 - 역자 주)라는 말은 앞 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이 없는 종교는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전도에서 무시되거나 잊혀져온 바 가장 명백한 면입니다. 죄인들에게 생명을, 그리고 주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주려고 안달하면서도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애당초 자기 부정을 주장하신다고 언급하는 면에서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요청을 전달하는 것은 실패하고, 그것을 망각한 채 복음 전도자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회심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결코 질문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방종하면서도 천국을 지향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성경 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은 자아 중심적인 사람을 보다 고상한 영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합니다. 그때 은혜의 이차적 역사(役事)에 대한 요청으로써 자기부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은 사람이 자기 부정의 삶을 살지 않는 한 그는 은혜의 일차적 역사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줄 것입니다.

‘보다 더 심오한 삶’을 위하여 십자가를 요구하는 본문들을 뒤에 감추어 두는 자들은 전도에서 청중들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넓은 문을 통과하여 생명에 들어간다는 인상이 주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보다 심오한 영적 봉사를 위하여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반대로 자기 부정이 없는 넓은 길은 파멸에 이릅니다. 구원함을 받은 모든 자들은 그 좁은 십자가의 사귐이라는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십자가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영속적입니다. 자기 부정은 한 번 지불하고 그 다음에는 영원히 잊어버리는 일종의 입회비가 아닙니다. 새로운 회심자뿐만 아니라 오래 믿은 그리스도인도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한 사람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체험 가운데 일회용 물품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평생 져야 할 짐입니다.

앞선 본문의 대화는 분명히 가이사랴 빌립보 다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에 가까웠던 때입니다. 거의 삼년 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5장에서 부르심의 한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따라나섰을 때 치러야 할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대가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야 하는 것이었고, 조용한 마을에서 고기잡이라는 좋은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에게는 그가 감독하던 수지맞는 세무서를 등져야하는 것이었습니다. 2년을 훨씬 넘게 주님을 따르면서 가난과 소란과 망신을 고통스럽게 체험하였습니다. 지금, 그들의 훈련이 완료될 즈음 우리 주님은 그들 앞에서 십자가의 기대를 붙들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행한 세월이 일 년이든 사십 년이든 간에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셔야만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이 ‘날마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참 신자에게 십자가는 어디에든지 있으며, 평생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것이요 날마다 그 무게를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관할 곳은 다만 한 곳뿐입니다. 그것은 묘지입니다. 우리는 자기 부정의 고통을 천성까지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가 이생에서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소망을 제시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그리고 ‘누구든지’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오늘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가?’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 십자가는 고통스럽습니다. 만일 무서운 고통의 요소가 제거된다면 ‘십자가’라는 낱말은 중요성을 몽땅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에게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는 외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도 나타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온전하신 주님에게 십자가의 내적 고문은 외적인 것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히브리서 12:2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그분의 위엄에 있어서 못이나 몸에서 흘린 피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혹자는 그분에게서 십자가가 어떠한 것인지 측량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는 혼란 내지는 원수들 앞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개된 심판을 당하는 당혹감을 말합니다. 사람과 천사,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범죄자와 적나라하게 동일시되어야 하는 부끄러움은 그분의 민감한 영혼을 재빨리 단절시켰습니다.
내적인 고통은 이 구절에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의 초점이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신체적인 고통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날마다’ 돌에 맞은 것은 아닙니다만 구세주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악의 경우에조차도 사도들은 ‘날마다’ 옥에 갇히지는 않았습니다. 최악의 날뿐만 아니라 최고의 날에도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투쟁의 시간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평안한 때에도 십자가를 졌습니다. 십자가의 최악의 부분이 내면적인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자들로 하여금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요청을 오해하게 합니다. 참 성도가 우리 주님의 요청을 읽을 때 불필요한 긴장이나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오해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늘 아버지 외에는 볼 수 없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목사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시련을 통하여 회중 가운데 몇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를 깨닫고 얼마나 자주 경악 하는지요 십자가의 가장 깊은 고통은 공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의도적인 행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언급하신 십자가를 기록한 매 구절에서 그분은 그들에게 ‘그것을 짊어지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등에다 십자가를 끈으로 묶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섭리로 부과되는 위대한 고통이 있습니다. 항거할 수 없는 시련은 징계나 순화시키는 긍휼의 손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시련일 따름이지 십자가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아가 고통스럽게 부정된 사람만이 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갈보리로 이끈 것은 그분의 자발적인 복종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무장한 군인들이 그분을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스스로 그들의 구속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분의 제자들도 날마다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동기가 부여된 고통스러운 대안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겪으셨던 것과 유사한 내적 투쟁이 선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선택입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대단히 느리게 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즉 그것은 죽음이 자아에게 이르되 무자비하게 이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23,24에서 병행을 이루는 두 개의 사상은 우리 주님께서 이 점을 염두에 두셨음을 보여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 즉, 강한 자부심, 자기만족, 자기도취, 사리(私利)추구, 자기 신뢰를 죽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섬기기 때문에 사리사욕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이 적법한 이익이라고 하는 것조차 포기하라!

이제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예수의 비유는 그분께서 자기 부정을 정교하게 요청하시는 것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자아에게는 고통을 주고, 그리고 자아를 죽일 목적으로 이러한 선택의 권리를 날마다 의식적으로 택하는 그리스도인의 선택입니다. 그것은 단지 노병(老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병(神兵)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심오한 삶을 살아가는 베테랑 성도들로 구성된 정예부대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로 갓 입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구 사항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도가 깊어져가고 있는 사람에게도 또한 길잡이가 됩니다. 성장의 각 단계에서 자기부정은 더욱더 요청되며, 자아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더욱더 가중되며, 자기 자신의 생활은 결과적으로 포기하고 주 그리스도만 섬기라는 결단은 더욱더 쉴 사이 없이 가하여집니다.

십자가의 그림자는 참된 정신을 당혹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모든 생생한 양상 위에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만일 십자가가 제대로 이해되었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거슬러 불평하는 수많은 불평들이 잠잠해져야만 합니다. 목사의 연구 가운데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상담기간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적용함으로써 줄여지게 됩니다. 수많은 질문에 대하여 안이한 것이 아니라 심오하게 답해줍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전능하신 분을 예배하기 위하여 투쟁하여 오셨다면 여러분은 십자가 없이 지극히 높으신 분과 만족스러운 교제를 나눌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그분의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시기 오래 전에 부활하셨습니다. 중앙난방 장치도 없었으므로 이른 아침시간 그분의 신진대사가 서서히 살아나는 동안 그분은 추위에 몸을 으스스 떨으셨으리라는 것을 생각해내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 없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눈을 번쩍 뜨기 위하여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시고, 반대자들을 확신시키고,병자들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낮과 밤의 긴긴 시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은밀한 예배시간에 앞서 편안하게 밤잠을 주무시지 못하셨습니다. 아마도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지 않도록 서서 계셔야만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러한 투쟁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기도드리는 대신 잠이 들었을 때 그분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분은 인간 육신의 약함을 긍휼히 보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일찍 일어나겠고 작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것은 궤종 시계와 더불어 시작합니다. 자아는 한 시간만 더 자고 싶어합니다. 애기가 지난밤에 울어대는 통에 잠을 설쳤다는 것이 침대에 남아 있으려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불타고 있다면 여러분은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사업상의 필요에 빠져들기보다는 오히려 온종일 그분과 함께하지 못했음을 슬프게 인식하면서 여러분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고 하루를 마감할 것입니다. 더욱이 하루를 일찍 일어나기 위하여 여러분은 늦은 시간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는 즐거운 저녁 시간의 사교 모임에서 자아를 부정하고 일어서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경건의 시간으로 이끌고 가려면 고집스러운 자아는 잠잠하도록 억제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일상사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은 여러분의 마음에서부터 주의를 이끌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정직한 사색으로 채워지게 해야 합니다. 일천 개의 이기적인 번뇌들은 시작부터 참된 기도를 막아버립니다. 우리 주님은 마음에서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기도가 시작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맞물려진 치아가 벌어져야 입이 열리듯이 자기 유익이 영혼에서부터 무자비하게 벌어질 때에야 비로소 기도가 터져 나오는 법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설교자들은 ‘침체된 나의 영혼을 회복할 수 있는 그 무엇’, 즉 경건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책을 추천하여 달라고 요구하는 슬픈 눈매를 지니고 있는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개인적인 은밀한 장소는 사라지고 있고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청의 뒤에는 하나님의 궁정에 나아가는 새로운 비결이나 또는 하나님과 그분의 어린양과 즐거운 교제의 장소로 안일하게 되돌아갈 수 있는 아주 형편없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왕도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짊어지셔야만 합니다! 자아에다 목표를 설정하십시오. 자아를 죽이는 데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빨리! 일찍 일어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가 주님을 알아가는 단 하나의 목적과 신선하게 연합하도록 부르짖으십시오. 내일하겠다고요? 십자가는 거기에 다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자아에 고통을 가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한 번 더 냉기 속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에게 거리를 둔 채 후퇴할 것입니다.

가련한 피조물 가운데 더러는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중지하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셨을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분께서는 자기를 알려주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이 거하시는 은밀한 장소의 문지방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오기 위하여 여러분은 자아를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여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긴 그림자는 여러분의 가정에서부터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는 곳까지 따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증언은 무서운 고통과 직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게에 도착했을 때 동료들이 한쪽 구석에서 웃고 어깨를 툭툭 치면서 모여 있을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다가가서 감히 어울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좋은 유머의 주제란 더러운 것입니다. 낮 시간 동안 심각한 의견들이 토의될 때 죄 문제, 의(義), 또는 인생의 목적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전하기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할 때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견해와 아울러 여러분 자신을 거절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진리를 증거 할 때마다 여러분은 점점 더 박대를 당하게 됩니다. 오늘도 진리를 위하여 용기를 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민감합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유쾌하고 부드럽다는 것은 즐거운 것입니다. 동료들과 더욱 친밀하여지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하는 것을 개의치 않겠어’라는 자세로 증언하는 것을 잔인하게 대합니다. 그것은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무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재촉하듯 예절 감각을 강화하고 온유함과 화평에 대한 동경심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함께 우리 주님의 영광이 논의되어야 합니다. 인간 영혼의 영원한 복지는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데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증거해야 된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그는 자기 자신의 사회의식과 평화를 사랑하는 데 대하여 고통을 주는 말을 의식적으로 선택하여야만 합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기와 동료 사이에 쐐기를 더욱 깊게 박아야만 합니다. 증거를 쉽게 할 수 있는 단계는 없습니다! 고통이 있다면 당혹스러운 방법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긍휼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피해야 하는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불쾌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다 꿀 바른 옷을 입힐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젊은 여인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복음을 설명할 때 그녀는 냉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원할는지도 모릅니다. 진리가 어떤 방법으로 제시되든지 간에 어머니의 이생 일대의 실수가 그 진리의 내용 속에 암시되었습니다. 그것은 딸 앞에서 자신의 종교, 견해, 삶의 양식을 몽땅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수처럼 마음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수처럼 마음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검이 어머니의 마음을 도려낼 때 민감한 딸은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두 마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예배와 증거에 그늘을 드리울 때 그 그늘은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섬김 위에도 드리워집니다.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시겠습니까?’와 같은 질문은 ‘평온하고 즐거운 오전 시간을 포기하시겠습니까? 학급에서 가르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하여 휴식을 신중하게 희생하시겠습니까? 학생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려고 아까운 시간을 사용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각각의 임무는 도체에서 제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상(像)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앞에 매일의 십자가를 세워 놓으셨을 때 과장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돌아서는 것과 파멸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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