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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십자가 4 (월터 챈트리)

월터 챈트리

by 김경호 진실 2013. 3. 1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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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십자가의 굴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는 모두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각각의 교리는 각각 다른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원리는 다른 것과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와 게으름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진리를 구분하여 나누어 놓으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지식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러한 교리들을 격리시켜 놓으려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의 교리는 위험에 처한 배와 같이 오류의 심연에 가라앉게 될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단 종파들이 성경의 교훈을 파악하게 되고 뒷받침하는 교리의 지주를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자유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 보통 아디아포라(adiaphora, 헬라어의 의미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들’ [things indifferent]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 이 개념은 16세기 중반 개신교 운동이 독일에서 가톨릭 세력에 의하여 위협을 당할 때 루터파 신학자들이 발전시켰습니다. 기본적인 논의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거나 금하지 않는 특정한 예식이나 예배에 관계된 것입니다. 이 아디아포라의 문제는 또한 16세기에는 영국에서, 17세기에는 루터파 경건주의자들 간에 논란이 되었으며, 교회 내에서는 강한 입장과 약한 입장이 있었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삼았습니다 : 역자 주), 즉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라고 부르는 자유의 양상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위험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진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버리게 하는 유혹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교리를 고립시키려는 경향을 인정하면서 요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그 주제를 토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언급할 때 만일 최상의 것을 최악의 것으로 왜곡시키는 반항적인 영혼들을 신속하게 제재하지 않으면 욕정이 끓기 시작하거나 광적인 소란이 일어난다”(「기독교 강요」3:19:1). 과거와 현재의 역사는 칼빈의 관심이 전혀 사실 무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운 가르침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4,5에서 모든 창조가 선하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조성된 어떠한 사물도 그 자체가 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세상 만물을 감사함으로써 받고 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위와 주님의 찬송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을 사용할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물질계를 사용함에 있어서 양심은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장엄한 것이며 많은 유익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치 성경에는 자기 부정의 교훈을 올바른 것으로 설명하고 해명하는 교리가 없는 양 취급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기 부정이 따라야만함을 올바로 감사드리는 사람이 만사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자기 부정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떠나갑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방종으로 곤두박질쳐 왔습니다. 그들은 주님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다시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유라는 미명 아래 입술의 고백에 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치와 오락과 감각적인 쾌락으로 욕망을 채웁니다. 자유의 깃발 아래 남자들은 부에 대한 갈증의 고삐를 풀어놓고 여자들은 남의 이목을 끌기 좋아하는 허영심을 채우기 위하여 음란하게 옷을 입고 청년들은 운동 경기와 오락에 자신을 내버려둡니다. 자아가 이 같은 방법으로 충족될 때 뻔뻔스럽게 되고 과잉으로 치닫게 되고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몰아냅니다.
명백한 부도덕으로 빠져드는 그리스도인의 타락의 배후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자유가 자아에 의하여 허가증으로 돌변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남용이라고 보는가 하면 반대로 자유에서부터 새로운 율법주의로 후퇴하기도 합니다. 양극단은 모두 해롭습니다. 성경적인 길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바울이 대수롭지 않은 것의 사용을 논의하고 있는 두 개의 중요한 구절이 신약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14:1~15:7과 고린도전서 8~10장입니다. 두 본문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옹호합니다만 그는 자기부정에 대한 그의 교훈을 편견 없이 섞어 놓음으로써 평형을 잘 이루게 합니다. 자기부정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왜곡됨이 없이 이해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파멸로 이끌거나 파멸의 명부에 올려놓는 자유라는 배를 파멸하지 않게 지켜줍니다. 자기부정에 대한 바울의 호소는 본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자기부정은 기독교 윤리를 공격하는 두 가지 악한 영향을 바로잡아 줍니다. 한 가지 경향은 마음의 내적 상태보다 외적 기준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입니다. 또 하나의 경향은 남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은 두 마리의 용이 그 머리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땅에 나타낼 때 자기부정의 검으로 어떻게 베어 버릴 수 있는가를 여러분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동일한 회중 가운데 두 부류의 신자들을 발견합니다. 한 부류는 채식주의자들이고, 다른 부류는 고기를 먹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성령께서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관용을 지닐 것을 요청합니다. 여러분은 상반된 관행을 지닌 사람들을 방종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을 지니고 양심적으로 행동한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6-9절은 이 점에 대하여 크게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대수롭지 않은 것을 행하는 행위의 외적 기준이 아니라 내적인 동기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형제는 그의 관행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고기를 먹는 사람이 채식주의자를 비웃지 않도록 막아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채식주의자들이 비판하기를 좋아하여 고기 먹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을 세속적이라고 선언하지 못하도록 막아 줍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이와 같은 결론이 여러분의 형제에 대하여 참되다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그의 동기를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는 음식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위하여 먹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의 모든 행동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가정하게 됩니다. 그는 자아나 욕정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네 사회에서 음란하게 차려 입은 여인에게 음욕을 품지 않으려고 해변에 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파도와 모래를 즐길 권리를 스스로 부인합니다. 만일 그가 바다를 사랑한다면 자기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오른쪽 눈(바다)을 뽑아버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을 모두 가늠해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는 한 형제가 음탕한 생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해변에 간다고 의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대중이 모여드는 해변에 가선 안 된다는 법을 만들려는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효과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형제의 오른쪽 눈을 뽑을 권리가 없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라고 배웠지 여러분의 형제를 부인하라는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그의 마음은 순수하지만 다만 내 눈으로 보기에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리스도에 드리는 경건 때문에 해변에서 떨어져 있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주님을 위하여 해변에 가는구나. 나는 내가 할 수 없지만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한 부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라고 결론을 지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관용으로 그리스도인 형제가 순수한 동기에서 행동한다고 단정하는 동안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이 정직하다고 단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관용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을 사용하는 것은 모두 중요한 문제이므로 여러분은 동료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근접할 수 없으며 주님에 대한 그의 내적인 헌신을 시험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조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행동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동기와 목적을 탐색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을 이 점으로 인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없도다.’ 모든 것이 ‘주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를 만족케 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마음껏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하기를 소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고 자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즐기고 사용할 자유를 누릴 수는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눈은 여러분이 먹거나 마시거나 그것이 그분만을 위한 것인지를 탐색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향해야만 합니다! 비관적인 눈은 여러분의 형제의 행동에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탐색을 강화하는 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탐색은 외면적인 기준이 아니라 내면적인 동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실상 행위를 결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정확하게 반대 방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눈을 자아에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돌립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가 휴식을 위하여 낚시질을 갑니다. 초신자가 그를 보고 장로가 낚시질을 가니 낚시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마음의 만족을 위하여 낚시질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아에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마음의 동기는 완전히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다른 장로가 볼링을 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집사는 여행을 합니다. 영적으로 노숙한 어느 성도는 골동품을 수집합니다. 그도 역시 이러한 모든 추구들을 뒤좇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의 생활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것을 따르느라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말라죽게 됩니다. 합당한 휴식은 해면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는 열심히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행동 어떤 것으로도 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는 영혼에서부터 조금씩 이탈하여 왔습니다. 그러면 그 초신자는 전혀 자기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그렇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하여,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
이 설명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부가될 때 한 사람의 영혼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가 악하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한 사람의 삶을 하나님을 가장 잘 영화롭게 하는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즉 온전히 합당한 쾌락은 단절될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것의 쾌락은 자아에 대하여 부인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주님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온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에게 찬양과 감사와 함께 환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 교회에는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기준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는 유치하고 율법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모든 생활이 자기부정과 자유의 실천이라는 틀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할 때 무언가 고장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6에서 바울은 그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였던 합당한 것들을 열거하였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소유할 권리를 주장하였지만 주를 위하여 그는 자기 육신을 꼭 죄었습니다. 아내, 급료, 특정한 음식과 포도주를 주님을 위하여 포기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결혼과 월급과 포도주를 금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부인하였던 합당한 쾌락을 여러분은 열거하실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 없다면 아마 여러분은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자유가 육신을 만족케 하기 위하여 사용됐는지 왕이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사용됐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치스러운 간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동일한 육체에 오락의 삶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16에서 우리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는 교훈을 적절하게 받습니다. 자유는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일 수도 있고 육체의 비열한 만족을 가리우기 위하여 사용되는 휘장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자기 진단함으로써 자유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유의 사용은 제한되어야만 합니다. 영혼에서 하나님과 자아의 상대적인 자리보다 더 많은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자유를 실천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순수한 동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복지는 자기 유익보다 우선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그것을 로마서 15:1-3에서 가장 강력하게 진술합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자아는 마땅히 부인되어야 합니다만 만일 사람이 주님을 닮으려 한다면 그는 마땅히 형제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청하는 것보다 더 부드러운 양심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 ‘연약한 자’입니다. 성경적인 교훈이 아니라 개인적인 견해 때문에 그들은 고기(2절)와 포도주(21절)를 삼가야 한다는 강요를 느끼고 종교적으로 특정한 날(5절)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엄격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종교적인 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죄가 된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는 양심을 지녔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강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절기들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가르침을 잘 받은 양심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보다 더 강한 종이라고 제시하지 않습니다. ‘강한 자’나 ‘약한 자’라는 지칭은 기독교 윤리에서 특별한 문제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보다 그의 전체 생활에서 더 많이 영적일 수도 있습니다. 특정한 문제들에서 유일한 것은 지나치게 세심한 것입니다.
‘강한’ 판단의 소유자는 대단히 잔인한 영의 소유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약한 자 앞에서 자기의 자유를 사용하는 것은 그의 형제로 하여금 연약한 양심을 거슬러서 자신의 관행을 따르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무감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의 자유를 아무 생각 없이 실행하는 것은 ‘부딪힐 것’(stumbling block, 걸림돌)이나 ‘거칠 것’을 놓아두는 것이 될 것입니다(13절). 거칠 것은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이 연약한 양심을 지녔으므로 먹지 않아야만 하겠다는 것 때문입니다(14,23절). 만일 그가 그것을 죄라고 판단하고 믿음으로 먹을 수 없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여러분 형제의 양심을 생각해야만 합니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의 형제를 위한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형제를 먼저 생각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15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자신을 부인한 다음 여러분은 동료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14:19).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5:2).
형제를 기쁘게 하는 것은 희생시키고 자아를 먼저 기쁘게 해서는 안 됩니다(15:1).
그것은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사도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얼마나 자주 제한합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을 사용하도록 용납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묻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내 동료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울 것인가?”라고 질문하여야만 합니다.
죤 브라운(John Brown)은 그의 베드로전서 주석에서 “어떤 생각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유를 한 순간이라도 포기하도록 설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각들이 실제적인 주장을 앞서가게 하거나 우리의 자유를 과시하도록 우리를 유인 한다”고 지혜롭게 서술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를 위한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채우고 자아를 낮출 때 대수롭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남용한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결코 극단으로 흐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아는 부인될 것이며 모든 것을 사용하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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