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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으리라 - 안이숙 이야기

안이숙사모

by 김경호 진실 2013. 9. 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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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숙은 1908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무역상을 경영했던 부호 안중호의 넷째 딸로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라난 그녀는 아들이 없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험하며 자라게 된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난 안이숙은 박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한 후에 그 당시 보통 사람들로는,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 경도여전과 귀족학교인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졸업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 안이숙의 사역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이숙이 21세가 되던 1929년에 귀국하여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했고, 1937년에는 평북 선천 사립보성여학교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일제 말엽인 1939년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꼿꼿하게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신의주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신의주 근교로 피신하던 중 “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에 가게 된다. 거기서 평남 개천읍 십자의원의 의사인 박관준 장로를 만나 1940년 2월, 귀신의 땅 일본에 건너가서 위정자를 위시한 장관들을 만나 그들의 한국 기독교 박해에 항의했다.


또한 제74회 일본제국회의 때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되어(일본 국회의사당 수위가 쓴 기록에서 이날 사건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음)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이숙이 세상에 알려진 연유는 바로 옥중생활에서 착한 양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참사랑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주님은 안이숙을 통해 각색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키셨던 놀라운 사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에 실려 있다. 이러한 안이숙의 꼿꼿한 신앙은 일찍이 미국 선교사로부터 말씀공부를 배운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나와 있듯이 안이숙 어머니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그 당시 안이숙과 함께 옥중생활을 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이광록 집사, 박관준 장로, 박신근 집사, 이인재 전도사, 조수옥 여집사, 최덕지 선생 등등과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최봉석 목사(최권능 목사),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 주기철 목사이다. 1945년 사형집행 몇 시간을 앞두고 안이숙은 8.15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했으며,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안이숙의 미국행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안이숙이 감옥에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선교사들을 모두 미국으로 쫓아 보내게 된다.


9개월 동안 일본 감옥에서 보내고 출옥한 미국의 Byrum 선교사가 만주에 의료선교사로 가 있으면서 안이숙의 이야기를 영어로 쓴 것이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If I Perish, I Perish)》이다. 이 소책자는 안이숙이 일본 정부에 경고하고 현재 감옥에 갇혀 있다는 내용으로 미국 전역에 뿌려지게 된다. Geogia주, Adens에 있는 부자 C. A. Rowland라는 사람이 이 소책자를 수십만 권 출판해서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 뿌려 일본의 크리스천 박해에 관한 사실이 알려졌다고 한다. Oregon 동북부 소도시에 사는 Coe 부인은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자기가 살던 집을 팔아 모두 선교비로 헌금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한다.


어느 날 Coe 부인은 교회에서 해외 선교사로부터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죽으면 죽으리라》의 책자를 접하게 되어 어머니 유언 집행으로 안이숙을 염두해 두기 시작한다. 마침 Coe 부인의 딸 Philys가 군에 입대하여 한국에 올 수 있게 되자 딸 편에 안이숙의 미국 여비로 1,000불을 지원하게 된다. 그리고 안이숙은 1948년 미국을 향해 출발하게 된다. 이 당시 그녀는 김 목사님과 아는 사이로 서로 도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이숙은 20년 후 1968년에 돌아와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김동명 목사님과 결혼했고,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서북대학에서 영어와 음악공부를 마친 후, 텍사스 서남 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학교에서 교회음악을 연구했다.


1957년 미국 남침례교 국내선교부에서는 김동명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김 목사님은 Berendo Street Baptist Church를 개척하게 된다.  안이숙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20년 만인 1968년에 귀국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했을 때 한국 교회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장기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976년에 그 후편 《죽으면 살리라》를 출간했으며, 1989년에는 또다시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를 출간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1990년 《그럴 수도 있지》, 《낫고 싶어요》, 《솔직한 노래》, 《자랑이 되는 자랑》, 1993년 《信情》, 《지나가는 순례자》, 1995년 《온 세상 내 세상》 등 총 10편을 저술했다.


1994년 10월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안 사모님은 “대덕연구단지 내에 김동명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그 당시 73세이신 김 목사님이 주님의 음성에 선뜻 순종하여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었다. 일 주일 후 안 사모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위급하게 되고 병원에 입원하자 안 사모님의 간병차 김동명 목사님이 귀국하게 된다. 결국 우리 주님은 안이숙 사모님과 김 목사님을 쓰셔서 약 40년 전에 계획한 대덕연구단지에 교회개척의 사명을 주시게 된다. 김 목사님은 1995년 3월, 열네 가정과의 성경공부를 마친 후 교회개척을 발표하시고, 1995년 11월 2일에 귀국하여 현재의 새누리 교회를 세우게 된다.


1995년 11월 교회 개척과 함께 사모님은 LA교회의 어느 집사를 돕기 위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사모님은 실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김 목사님의 교회개척을 평탄케 준비하신 것이다. 그 후 건강 악화로 새누리교회를 방문치 못하다가 1997년 10월 18일 미국 나성의 선한사마리아병원에서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사모님께서 보여 주신 착한 양, 착한 목자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LA 한인침례교회, 북가주침례교회, 대전 새누리교회가 힘을 모아 ‘안이숙 장학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모아진 장학기금은 사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 꾸준히 사역해 오신 선교사 지원, 가난한 신학생 등록금 지원, 농어촌교회 교역자자녀 교육비 등으로 귀하게 쓰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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