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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안이숙 사모님 소개

안이숙사모

by 김경호 진실 2010. 10. 2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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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숙 사모님 소개 
 
강 호 
 
새누리 교회개척의 정지작업을 하신 안이숙사모님의 소천 4 주기를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사모님을 소개하는 글을 올립니다.


故 安利淑 사모님 소개


“살아있는 순교자”로 알려진 安利淑은 1908년 平安北道 博川에서 부호 安重浩의 4째 딸로써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라난 안이숙은 아들이 없어 가문의 代를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험하며 자라게 된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난 사모님은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한 후에 그 당시 보통 사람들로는 더더욱 女子의 몸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며 일본 경도여전과 귀족학교인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졸업하였다. 그래서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 사모님의 사역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국 후 대구여고보와 선천 보성여고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하던 중 일제말엽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곧곧하게 하나님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시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신의주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신의주 근교로 피신하던 중“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에 가게 된다. 거기서 평남 개천읍 십자의원의 의사인 박관준 장로를 만나 하나님의 대사로써 귀신의 땅 일본에 건너가서 위정자를 위시한 장관들을 만나 일본의 망국행동을 경고하고 한국기독교 박해에 항의하였으며 제 74회 일본제국 회의 때 의사당에서“유황불로 일본은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되어(일본 국회의사당 수위가 쓴 기록에서 이날 사건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음)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옥고 6년을 치르었다.


사모님이 세상에 알려진 연유는 바로 옥중 생활에서 주님의 참 사랑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주님은 사모님을 통해 각색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키셨던 놀라운 사건들이“죽으면 죽으리라”에 실려 있다.

이러한 사모님의 곧곧한 신앙은 일찍이 미국 선교사로부터 말씀공부를 배운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나와 있듯이 사모님 어머니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하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평양형무소의 추위는 사모님의 눈을 얼게 할 정도로 혹독했다. 눈에서는 고름이 나오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失明의 위기를 맞게 된다. 군의관의 배려로 일시 출감하여 치료할 수 있었는데 이때 면회온 사모님 어머님의 말씀은 너무 우리 가슴을 감동케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 참조).


그 당시 함께 사모님과 함께 옥중생활을 하였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이광록 집사, 박관준 장로, 박신근 집사, 이인재 전도사, 조수옥 女집사, 최덕지 선생 등등과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최봉석 목사(최권능 목사),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 주기철 목사이다(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를 사모님은 옥중시 알았음).


“아! 용사여! 신앙의 용사들이여! 참 장하고 존귀하여라!”

1945년 사형집행 몇시간을 앞두고 사모님은 8.15.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하였으며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사모님의 미국행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사모님이 감옥에 있는 동안, 日本人들은 선교사들을 모두 美國으로 쫓아 보내게 된다. 9 個月 동안 일본 감옥에서 보내고 출옥한 美國의 Byrum 선교사가 만주에 의료선교사로 가있으면서 사모님의 이야기를 영어로 쓴 것이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 「If I Perish, I Perish」이다. 이 소책자는 사모님께서 日本정부에 경고하고 現在 감옥에 갇혀 있다는 內容으로 美國 전역에 뿌리게 된다.

Geogia 州, Adens에 있는 부자 C.A. Rowland라는 사람이 이 소책자를 수십만권 출판해서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 뿌려 日本의 Christian 박해에 관해 알려졌다고 한다.

Oregon 동북부 소도시에 사는 Coe 부인은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자기가 살던 집을 팔아 모두 선교비로 헌금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소천한다.

어느 날 Coe 부인은 교회에서 해외 선교사로부터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죽으면 죽으리라”의 책자를 접하게 되면서 Coe 부인은 어머니 유언 집행으로 안사모님을 염두해 두기 시작한다. 마침 Coe 부인의 딸 Philys가 군에 入隊하여 韓國에 올 수 있게 되자 딸 편에 안 사모님 미국 여비로 1000불을 지원하게 된다. 그리고 사모님은 1948년 미국을 향해 출발하게 된다. 이 당시 사모님은 金 목사님과 아는사이로 서로 渡美 준비를 하고 있었다(죽으면 죽으리라 532쪽 참조).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님 밑에서 19세에 집사가 되고 22세에 장로가 된 尹愿三 장로(조만식의 친구)의 사모님이 안사모님 출국때 예언하기를

“20년 후에야 돌아옵니다. 우리는 다 천국에서 기다리고요. 마중나가는 이들은 우리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입니다. 비둘기 같이 의좋은 한쌍이 돌아와요”그의 예언대로 사모님은 金목사님과 함께 20年후 1968年에 돌아와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하게 된다.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가신 후 金東明 목사님과 결혼했고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서북대학에서 영어와 음악공부를 마친 후, 텍사스 서남 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학교에서 교회음악을 연구했다. 1957년 미국 남침례교 국내선교부에서는 김동명 목사를 미국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며 김 목사님은 Berendo Street Baptist Church를 계척하게 되며 이때 하신 설교가 그 유명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교회 개척이후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이 많은데 이는 "죽으면 살리라"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20년만인 1968년에 귀국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하였을 때 한국교회 안팎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장기 베스트셀러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976년에 그 후편 "죽으면 살리라"를 출간하였으며, 1989년에는 또다시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죽어요"를 출간해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후 "그럴수도 있지", "낫고 싶어요", "솔직한 노래", "자랑이 되는 자랑", "信情", "지나가는 순례자", "온세상 내세상"등 총 10편을 저술하셨다.


사모님은 1993년 봄  하나님의 사랑을 책으로 엮은 "지나가는 순례자"와 "信情"을 쓰시겠다며 저희들이 사는 연구단지내 대림 두레아파트로 이사를 오시게 된다. 그후 두권의 책을 탈고하였고 수많은 초청 간증 증거의 일로 인해 너무 과로한 탓으로 1994년 10월 뇌졸증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사모님의 간병차 金東明목사님이 귀국하게 되었으며 결국 우리 주님은 안이숙사모님과 김 목사님을 쓰셔서 약 50년전에 계획한 대덕연구단지에 교회개척의 사명을 주시게 된다. 김 목사님은 1995년 3월, 14가정과의 성경공부를 마친 후 교회개척을 발표하시고 1995년 11월 2일에 귀국하셔서 현재의 새누리 교회를 세우게 된다. 새누리교회의 탄생은 실로 우리 주님께서 김동명 목사님과 안이숙 사모님 두 분을 사용하셔서 계획한 대작품이다. 1995년 개척과 함께 사모님은 LA교회의 어느 집사를 돕기위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그 후 소천시까지 건강악화로 새누리교회를 방문치 못하였으니 새누리가족이 사모님뵙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1998. 10. 18 새누리 교회 용서받은 탕자 강 호 올림
 
 
출처: 기독교 한국침례회 새누리교회

 

http://www.seonjija.net/seon/?mid=sub3_17&page=3&document_srl=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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