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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최대의 적 샤머니즘

샤머니즘

by 김경호 진실 2013. 12. 1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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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최대의 적 샤머니즘

 

< 성희경 목사 · 동해초원교회 >

 

 

“성경의 바른 진리로 무장된 진리의 투사를 필요해”

 

요즘 나는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고, 큰 슬픔을 느낀다. 한 때 나는 내가 목사라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긍지가 사라지고 있으며, 어느 때는 부끄럽기도 하다. 이는 한국 교회가 내뿜는 악취가 전국을 진동시키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한국 교회의 목회자의 한 사람이기에 비판을 하면서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었을까?

 

최근 한기총이 보여준 추한 모습들, 목사들의 갖가지 추문들, 타종교와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하는 기독 청년들의 이상한 행동들, 타종교인과 비교하여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기독교인들의 윤리 의식이나 도덕적 수준, 은사 집회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각종 부흥집회에서 보여주는 기독교인들의 광신도 같은 모습들, 내노라하는 스타급 강사 목사들이 인기에 편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한낱 우스개 이야기꺼리로 전락시키는 가벼운 행동들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이 땅을 떠나가는 기독교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듯 하여 목회자로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무엇이 한국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장 치명적이고 근원적인 요인으로 한국의 샤머니즘을 지적하고 싶다.

 

1. 샤머니즘의 본성적 생리

 

우리나라의 전통 종교가 무엇이냐고 말할 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은 이 땅에 외래 종교인 불교나 유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었다.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샤머니즘의 기원을 문헌 사료 이전의 시대인 선사시대부터 존재했었다고 본다. 그만큼 한국의 샤머니즘은 뿌리가 깊은 것이다. 이 땅에는 아직도 수십만 명의 무당이 존재하며, 최근에는 길거리에 타로점이라는 신종 점집들이 유행할 정도로 이 땅의 백성들은 샤머니즘에 깊이 물들어 있다.

 

기독교는 처음에 온갖 미신과 우상 숭배에 빠진 우리 민족을 구원하고, 이 땅에서 샤머니즘을 몰아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처럼 보였다.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서구의 학문과 과학 문명이 유입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합리적 사고가 보편화되었고 그 결과 무당의 수는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사람들은 미신을 믿는 것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샤머니즘은 교묘하게도 자신의 요란한 겉모습을 숨긴 채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내면화하면서 오히려 기독교를 정교하게 무너뜨리고 있다.

 

과거에도 샤머니즘은 외래 종교인 불교를 변질시키고, 유교마저도 자신의 체질로 변질시켰다. 신라와 고려 시대 때 행해지던 국가적 행사였던 팔관회도 겉으로는 불교 행사였으나 실제적으로는 토속신에게 제사하는 샤머니즘이었다.

 

왜 우리나라는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에서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유독 한국에서만이 조상 제사를 그렇게 유별나게 강조하고 받드는가? 이는 샤머니즘의 조상 숭배 사상이 유교의 탈을 쓰고 유교 속으로 내재하여 들어왔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은 외래 종교와 충돌할 때는 과감하게 자신의 겉모습을 버리는 대신 타 종교 속으로 내재하여 들어가 그 종교의 탈을 쓰고 생존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빙의 현상과도 비슷하다. 이것이 샤머니즘의 본성적 생리이다.

 

2. 기독교 안에 들어 온 샤머니즘의 체험주의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자. 많은 목사들에게서 나타나는 권위주의적 태도나 행동들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재앙을 운운하며 신도들을 겁주는 무당에 가깝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 받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실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고 열변을 토하는 목사들의 설교는 결코 기독교적인 설교가 아니다.

 

성경에 어떤 사도가 현세적 복을 힘주어 강조하였던가? 또 어떤 사도가 오늘날 한국의 목사들처럼 복을 그렇게 남발하였던가? 사도 바울인가? 아니면 사도 베드로인가? “아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가르치며, 오히려 핍박과 고난의 현실 앞에서 천국의 소망을 가질 것을 강조하였다(롬 8:18).

 

그들의 최후는 한결 같이 인간적으로는 비참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비극적 생을 마쳤다. 바울 사도는 참수형을 당했으며,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형을 당하였다.

 

사도 중 누구도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육신의 것을 추구하는 자들을 향하여 배를 섬기는 자들이요(롬 16:18),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요(빌 3:19),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딤전 6:5).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현세적 복 강조는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샤머니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요 본질이라는 점이다. 요즘 들어 부쩍 극성인 은사 집회도 마찬가지다. 샤머니즘은 교리나 경전도 없을 뿐더러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는다.

 

샤머니즘에서 중요한 것은 신적 체험이다. 신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오고, 그 증거로 시퍼렇게 날 선 작두를 맨발로 타고, 감춰진 무구를 신통하게 찾아내고, 말문이 터져 신의 말을 전하는 체험을 해야 진짜 무당이다.

 

이런 샤머니즘의 체험주의는 오늘날 기독교 속으로 교묘히 들어와 바른 성경적 교리는 외면한 채 방언, 입신, 진동 등 신비한 영적 체험을 강조하며 이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호도하거나 예언 기도, 신유 기도 등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한 채 기독교를 근원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다.

 

3. 역사적 개혁주의로 돌아서야 할 한국교회

 

우리 목회자들은 이런 이상한 기독교에 속아서는 안 된다. 표적의 시대는 성경이 66권으로 완성되면서 종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할 필요가 없으시며, 최종적인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결적 표적인 것이다. 또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 역시도 그것이 진리임을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다.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이 행한 표적으로 충분한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전혀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설령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사도들이 행한 표적과 견줄 수 없을뿐더러 오순절 계통에서 주장하듯이 오늘날도 사도 시대의 표적이 계속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도 표적의 계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서 구속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경륜상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왜 지금은 구약적 선지자가 없는가? 구속사적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왜 지금은 동물 희생 제사를 더 이상 드리지 않는가? 역시 구속사적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표적도 마찬가지다. 왜 지금은 교회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기도할 때 성령의 불이 각 사람 머리에 임하지 않는가? 구속사적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할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안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실 필요성이 없으시기 때문에 멈추신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래라 저래라 할 자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따라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쉽게 표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섭리적 이적일 뿐이요,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해야 한다.

 

때문에 나는 샤머니즘에 오염된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를 가장한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일 뿐이다.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표현하였다(골 3: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우상숭배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 교회가 샤머니즘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결탁한다면 교인 수는 잠시 늘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교회의 탈기독교 현상으로 종국에는 참된 기독교는 샤머니즘의 늪에 빠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마치는 말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속화하고 타락으로 침몰하는 까닭은 우리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느 나라보다 설교가 넘쳐나는 곳이 한국 교회이다. 이는 한국 교회가 바른 역사적 개혁신학을 버리고 샤머니즘과 결합함으로 종교혼합주의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대형 집회를 열어 기도한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 기도 없이 쓰러져 가는 한국 교회를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국 교회는 성경의 바른 진리로 무장된 진리의 투사를 필요로 한다. 이제야말로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철저히 신봉하는 목사들의 참 기독교 운동이 필요한 시대이다.

 

수가 많지 않아도 좋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300 용사를 찾으시는 분이시다. 예배당 건물이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아도 좋다. 하나님께서는 웅장한 헤롯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뜨리신 분이시다. 무속적 기복 신앙이 아닌 복음의 말씀으로 진정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

 

샤머니즘의 징그럽고 더러운 때를 온전히 벗겨내고 바른 신학 사상으로 무장된 개혁주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침몰해 가는 한국 교회를 살리는 유일한 답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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