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말씀이 육신이 되어 (로버트 맥체인)

로버트 맥체인

by 김경호 진실 2014. 2. 17. 23:44

본문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행 8:5,8). 또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에서 여러분의 영혼에 평안을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뿐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 사실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들은 큰 실책을 범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은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찾아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여러분은 자신이 피조물에게서 안식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피조물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음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도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두려움과 떨림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본문을 택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헛되지 않음로 밝히기 위함입니다. 확신하거니와, 만일 여러분이 평안을 얻었다면 그것은 바로그분의 영광을 볼 때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볼 때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밝히 드러나는 으뜸가는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겸손입니다. 이 점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

(2)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

 

1. 하나님의 아들의 겸손은 “그분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저는 그분이 “말씀”으로 불리시는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말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시기 위해 말씀으로 계시되셨습니다.

그분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그분이 영혼이 없이 육체만 취하셨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을 때,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 - 곧 사랑하시는 인간의 영혼 - 도 함께 지니신 상태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영어성경에는 ‘영혼’이라 되어 있음 - 편집자 주)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요 12:27).

형제들이여, 나는 “마음”이라는 말보다는 “무슨 말하리요”라는 말에 더 강조점을 두고자 합니다. 이것은 인간 영혼의 연약성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외경스러운 마음으로 말하는데, 그분의 마음 속에 거룩한 고뇌가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영성성경에는 ‘영혼’이라 되어 있음 -편집자 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또한 이어지는 구절에 그분이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지니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한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러한 구절들로 미루어보건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신성이 영혼을 배재한 채 인간의 육체와만 결합되었음을 의미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은 그 육신이 죄악된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육신”이라는 말은 종종 이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컨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갈 5:17)라는 내용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이런 뜻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 36:26에서는,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는 약속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탄생 시에 천사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또한 그분은 인성에 있어서도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셨습니다(히 7:26). 그분은 다른 인생들과 확연히 구별시켜주는 한 가지 사실인즉 그분께는 죄가 없으셨다는 점입니다(히 4:15). 그분은 죽으심을 통해,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히 9:14). 그가 하나님께 드리신 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자기 영혼과 몸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성이 거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상고할 때가 되었습니다. 신성에 있어 제2위격이신 분이 거룩한 인간의 영혼과 더불어, 그리고 갈증과 고통과 눈물과 피곤과 수난 따위를 당하기 마련인 연약한 육신과 더불어 하나가 되셨습니다. “육신”이라는 말 속에는 이러한 연약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의 유약함을 언급한 내용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경건의 비밀은 참으로 지대합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이 왜 육신을 통해 계시되었을까 하고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2) 죽음을 당하시기 위함 - 즉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히 2:14).

이 두 구절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이 죽음을 당하기 위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만일 그분이 아버지의 품에 계셨다면 고난을 당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은 고난당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죽음을 당하기 위해 육신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분이 육체를 입으신 것은 저주를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저주를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3)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

형제들이여, 우리와 같은 심정을 지녀본 자들이 우리를 가장 긍휼이 여길 수 있는 법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나그네를 친절하게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출 23:9).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너는 인생의 마음을 잘 아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이 육신이 되신 또 다른 이유입니다. 고난당하는 신자들은, 자신과 같은 시련에 처한 친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겸손은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마치 천막 속에 거하듯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신학자들은 광야에서의 성막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성막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듯이, 그리스도는 죄인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분이 이리저리 다니셨음을 암시합니다. 성막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의 한 부분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낮은 상태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고난을 성결케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나는 교회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없다”고 합니다. 형제들이여, 그리스도께서는 머리 둘 곳도 얻지 못하셨음을 모릅니까? 그분이 마치 천막 속에 거하듯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입을 만한 옷이 없어 교회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 변명일랑 버리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궁전을 택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을 통해 풍성히 드러나는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혹자는, 그분이 육신이 되셨을 때 하나님 되심을 중단하셨습니까?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온전히 감추셨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분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들도 그분의 영광을 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천사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았을 때, 즉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 별이 나타났으며 육신적인 사람들도 육안으로 그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이 성전에 앉아 박사들과 논쟁하셨을 때,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습니다 - 온 세상이 그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때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셨고 - 사람들은 육신적인 눈으로도 그것을 불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모든 이적들이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것은 모든 영광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의 영광이요, 하나님이 지혜와 사랑의 영광이었습니다.

 

(1) 하나님의 지혜의 영광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영안이 열린 자들 외에 누가 그 영광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은 매사에 많은 사람들의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은 이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성육신 하신 말씀을 통해 비추인 영광입니다. 그것은 단지 별이나, 성전에서 보여주신 지혜, 혹은 이적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속의 계획 - 곧 그분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완수하신 바로 그 계획 - 이었습니다. 그분의 지혜를 통해 바로 그분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2) 아버지의 독생자의 사랑이 거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분이 베들레헴의 어느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사실 자체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그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요한은 이르기를,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 죄인이 처음으로 평안을 얻게 되는 때는, 신성을 지니신 분이 자기를 대신하여 죄의 저주를 짊어지셨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 때 그 영혼은 “내가 여기서 안식하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영광은 여러분의 눈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야 볼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영광스러우시다면, 나는 감히 그분께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아버지의 모든 완전성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나는 그분께 나아갈 수 없다 - 내가 어찌 감히 그분께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이 말의 뜻을 보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분이 은혜로 충만하심 - 그분은 진노를 받아 마땅히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 을 뜻합니다. 한번은 그분이 레위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 어떻게 그들이 그분의 곁에 앉을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분이 은혜로 충만하셨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그분보다 더 적합한 구주를 상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진리로 충만하십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율법은 그림자였고, 그리스도는 본체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그분이 베푸시는 용서는 참된 용서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평안은 참된 평안입니다. 형제들이여, 그분께 나아가지 않으렵니까?

이제 나는 무거운 죄 짐을 진 모든 이들을 그분께 나오도록 초청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주께 나아가야하는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분이 은혜로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분이 진리로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신성을 지니신 구주를 필요로 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은 은혜로 충만하신 구주를 필요로 하십니다. 형제들이여, 만일 그리스도께서 구주로서 적합하지 않다면, 다른 어떤 구주를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만일 여러분이 나오지 않으면, 그분이 여러분에게로 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박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닫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잠 8:4)고 말씀하신 분은 참으로 은혜로 충만하신 분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오랫동안 그분 없이 살며, 그분의 보혈을 무시하고, 또한 그분의 초청을 경멸하였지만 그분은 줄곧 기다려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써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를 깨달은 후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으로 충만하시지만, 또한 은혜로 충만하십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구원하시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힘든 일입니까? 그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의롭게 만드시도록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토록 은혜로우신 구주를 거부한다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이 여긴다면 그 보응을 어찌 피하리요”(히 2:3)? 그리스도의 보혈을 멸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곁길로 나아가는 자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우리는, 그토록 자애로우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크신 구원을 지니신 구주를 멸시하는 죄악이 얼마나 중하고 위험한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http://thevine21.hompee.com/v2.0.asp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