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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머리 맥체인과 그의 친교

로버트 맥체인

by 김경호 진실 2014. 1. 24.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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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머리 맥체인과 그의 친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참호 속에서 맺은 우정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고된 전투에서, 주검의 악취가 진동하는 가운데 두 전우가 한 영혼으로 녹아 결합되면, 이상한 생명력의 기운이 전장으로부터 피어 오른다. 오직 전쟁만이 이러한 결합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실제로 전쟁터의 전우들이 평생동안 그들의 우정을 지켜가는 것을 볼 때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이것이 영적인 전쟁의 경우에 생겨난 인연일 경우 더욱 더 그러하다. 이러한 ‘싸움'에 대해서 바울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이다.(엡 6:12)"라고 하였다. 만약 이 전쟁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이에 속한 우정 역시 각별하지 않겠는가?
진정으로 여러 세기동안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들의 특별한 유대관계에 나타난 속성들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유대관계를 가리켜 스코틀랜드에서는 '동료(common ilk)'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영적인 결속을 다졌던 한 놀라운 예 - '로버트 머리 맥체인과 그의 동료들 - 를 지켜보았던 스코틀랜드에서는 더욱 각별하다.
 
첫 만남( The First Bonds )

19세기의 첫 반세기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은 그들의 영혼에 새로운 은혜의 사역이 번져 나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땅의 종교적 생명력은 날로 쇠락해 갔으며, 영적 각성에 대한 필요성이 매우 시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로써 한명이 아닌 여러 무리들을 택하사 어두움을 밝힐 그의 병기로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일단의 사람들을 모집하셔서_ 먼저 그들을 회심토록 하시고 그 후 그들을 목회사역으로 부르셨다. 이 사람들은 그의 섭리아래 에딘버러(Edinburgh)에 있는 신학의 전당(Divinity Hall)으로 물이 고이듯 모여 들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특별한 도구인 토마스 찰머스(Thomas Qialmeis)를 택하셔서 그들의 삶을 다듬도록 하셨는데, 그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대한 정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하였을 뿐 아니라, 유형의 교회와 무형의 교회가 실제적으로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계획들을 가르쳤다. 학기 중에는 학생들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서 공부하기도 했는데, 이 중 무엇보다도 그 멤버들의 유명도에서 ‘성경연구회'의 모임이 가장 두드러졌다.
한 연구회 멤버는 그의 소감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러한 종류의 어떠한 모임도 성경연구의 목적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과 유용성을 주지 못했다. 우리는 신학수업 학기 증 매주 토요일 아침 6시 30분에 모였으며, 성경 비평에 대한 공부뿐 아니라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빛을 던져 주는 것이라면 우리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모임들은 네 학기 동안 정기적으로 꾸준히 유지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미래가 이 성경연구회에 달려 있었다. 이 모임의 멤버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전우애로 뭉쳐 일어났으며, 그 중 상당수는 영적으로 각성되는 축복을 누림으로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하였다.
 
이 모임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의 이름을 유심히 주시해 볼 때, 그 당시 유력한 복음적 지도자들의 명단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앤드류 보나르(Andrew A. Bonar),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 M Cheyne), 알렉산더 섬머빌(Alexander Somerville) 등 -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셨다.
멤버 증 한명인 앤드류 보나르는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형제들을 찾으려 애썼다. 그는 후에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하나님 한 분만이 나의 상담자이시며 선생님이셨습니다...나는 이에 대해 아무런 불평이 없었어야 했지만, 때때로 나는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가졌습니다." 진실한 친구를 만나기를 소원했던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머리 맥체인을 보내주셨을 때 응답을 얻게 되었다.
보나르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때가 아마 그의 신학의 전당(Divinity Hall)에 입학한 첫 해였을 것입니다. 나는 그를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방학 동안에 - 우리는 이 시간을 구제(redeem)하기 위해.,. 우리 중 몇은 매주 한 번씩 오전에 모여 조직신학의 몇 부분을 탐구하기도 했고, 서로 개인적 독서의 진전과 결과에 대해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우리를 하나로 모이게 하였으며, 어떤 여름방학 때는 미완성의 예언에 대한 연구를 위해 우리 중 몇은 매주 이른 아침에 회합하였다.”
맥체인은 그의 연륜을 뛰어넘는 경건함의 은총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보나르는 이토록 풍성히 그리스도를 드러내었던 맥체인과 가까이 지냈으며, 이 둘은 다른 학생들과도 폭넓은 교제를 나누며,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그들이 학과에서 배운 귀중한 진리를 나누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날카롭게 하는 숫돌과 같이 사용하였다. 마치 "쇠가 쇠를 날카롭게 하며, 사람이 그 친구를 빛이 나게 다듬느니라.(역자주 – 개역성경과 해석을 조금 달리하였음. As iron sharpens iron,so one man sharpens another)"(잠 27:17)의 말씀과 같았으며, 앤드류는 주로 로버트에 의해 깊게 다듬어졌다. 앤드류는 후에 맥체인의 탁월성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내게 남아 있는 대부분의 인상은, 그 모임 중에 특별하게 거룩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언변보다는 그의 풍채와 경건한 태도에서 그를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얘기하는 듯하였습니다. 다른 누구는 그가 기도할 때 마치 이미 천국에 다다른 사람이 숨을 내쉬는 것 같이 들렸다고 합니다.”
이 부대에 합류한 또 하나의 사람은 알렉산더 섬머빌이었다. 로버트와 비슷한 시기에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다다랐으며, 이 동류에 합하여 증심적 인물이 되었다.
알렉산더 역시 앤드류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이 세명의 청년은 서로를 은혜의 끈으로 엮어 나갔다. 맥체인과 섬머빌의 관계는 곧 보나르와 서로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앤드류는 회상한다. " 알렉산더 섬머빌은 맥체인의 허물없는 지우였으며.., 그들의 어울림은 정말 너무도 아름다운 청년시절의 광경이었습니다...다가 올 세상의 능력들을 맛보았으며, 그들은 서로의 행복을 위해 힘을 합쳤습니다. 그들은 성경 연구모임올 위해 함께 만났으며, 70인역 성경과 히브리어 원어성경의 학습을 위해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종종 기도를 위해 모였으며, 엄숙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연구를 위해 한마음으로 임했으며, 서로가 동료의 한발 자국이 천국의 협착한 길 가운데 있는지 주시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은 함께 그리스도를 찾았으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해 서로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기에 힘썼으며, 또한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향로 앞에 놓인 구체적 일올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나날들은 대부분 보나르가 기억하는 이러한 경우였습니다. "토요일, 30일, 오늘 오후에는 더딩스톤 록(Duddiligston Loch) 주변을 로버트 머리 맥체인, 알렉산더 섬머빌과 함께 걷는 동안, 주님의 섭리(Providence)로 인도하심과 미래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고, 함께 쓰러진 떡갈나무에 나란히 앉아 시편의 한 부분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들의 우애를 특정 짓는 서로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공통의 관심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한없는 자유로움이 찬송가운데 흘러나왔다. 이러한 하나님 증심적인 특징 때문에, 그들은 다름 아닌 진정으로 영적인 우애를 소유하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우애의 질적 특성은 앞에 말한 세 사람에 국한되지 아니하였다.
실은 적어도 7명(하지만 10에서 12명 정도일 가능성도 있다.)의 동료들이 이러한 교제의 즐거움을 서로 만끽하였으며, 이러한 종류의 산책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세우는 일이 매우 잦았다. 이 무리들은 서로의 정화를 위한 주님의 도구였으며, 놀랍게도 이렇게 많은 쓸모있는 도구들이 스코틀랜드 지역에 모였으며, 같은 시기에 서로를 깊게 갈아내고 있었다.
 
격려를 위한 은혜의 수단이 되었던 우정
영적인 성숙과 젊은 목회자들의 점진적인 성화를 위해, 이러한 관계성의 증요한 예가 섬머빌과 보나르의 경우에 잘 드러나 있다. 앤드류는 예드버로우(Jedburgh)에 그의 사촌 남편, 퍼브스(Mr. Purves)씨를 도와 목회사역을 보조하기 위해 파송되었다.
이것이 첫 사역지였으므로 이곳에서의 시간은 앤드류에게 있어 그의 목회관을 형성하는 곳이 되었다. 홍미롭게도 알렉산더 섬머빌은 근처의 에저스톤(Edgeiston)에 교사로 오게 되었는데, 보나르는 "섭리로서 이곳으로 인도하심"이라 기록하고 있다. 분명 이 초보자들은 서로 가까이에서 가족같은 영혼의 배려가 필요하였다. 보나르는 그에 대한 감사함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알렉산더 섬머빌은 내게 매우 유익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그는 이곳에 머무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께 그가 더 머물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섬머빌과 보나르가 느꼈던 영적인 활력은 맥체인과 함께한 때에 비교될 수 있다. 보나르는 회상하기를 "한 월요일 저녁 나는 섬머빌과 에저스톤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노래를 불렀으며, 가는 길에 시편을 반복하여 찬송하였는데, 방에 돌아와 함께 기도회를
가졌을 때, 이전에 맛보지 못한 놀라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화( Refinement)
알렉산더 섬머빌을 앤드류 보나르와 매우 가까운, 에저스톤으로 인도하였던 뜻 깊은 주님의 섭리는 이제 동일하게 섬머빌을 그곳에서 먼 곳으로 인도하셨는데, 이 역시 두 사람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동일한 마음의 영혼이 영적인 격려의 원천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친구가 없을 때도 거룩한 정화 과정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앤드류 보나르가 그의 지우를 떠나보낸 후 새롭게 되었던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아무하고도 그의 마음을 나눌 수 없었기 때문에, 앤드류는 다시금 죄인들의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처음 대학생활을 시작하였을 때와 같았다. 모든 은총 가운데, 보나르는 점차 그가 섬머빌과의 흡족한 친교를 나누었던 시간을 인정하게 되었다. 보나르는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까지 깨달아 온 바로 이 중대한 교훈은, 아무도 나를 동정해줄 친구가 없는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내 영혼의 기쁨이요 몫이란 점입니다."
 
후에 보나르의 일기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휘하고 계셨는지 알 수 있다. 아직 미성숙할 때는 그의 친구들에 대한 애착이 그를 보다 달콤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이끌어 주었으나, 나중에는 그의 죄가 그의 친구들을 주님과 경쟁하는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의 친구들과의 평안을 빼앗겼을 때, 보나르는 이렇게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요즘은 대체적으로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떤 면에서 죽음이라면 내 친구들과 헤어짐을 느끼게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종종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우리가 함께 모일 것이라는 소망에. 매우 기뻐한다.”
모든 좋은 일들이 죄에 의해 더럽혀 졌을 때, 그의 눈을 그리스도로부터 돌리게 하는 것처럼, 보나르의 마음속에서 계속 진행된 사건들은 그에게 젖을 떼는 것이 필요함을 알렸다. 이 일들은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을 그의 아들의 형상에 순복하게 하는 약속처럼 확실하게 이루어 졌다. 보나르가 내린 겸손한 결론 속에는 많은 한숨과 애통함이 말 사이에 숨어 있었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 며칠 동안은 마치 일종의 달려오는 죽음 속을 통과한 것같이 생각됩니다...만일 주님이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다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준비 하셨을텐데 말입니다. 나는 이 땅에서 멀어진 느낌이며, 주님의 나타나심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보나르가 이 시험 속에서 깊이 깨우친 교훈은 그의 생애동안 오직 그리스도만을 성실히 좇는 믿음의 반석이 되었을 것이다.
 
도전(For Challenge)
히브리 11장의 성도들은 거대한 증인들의 무리로 일컬어지는데, 이들로부터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 대한 용기를 얻으며, 초점을 예수께 맞추게 된다.(히 12:1) 같은 방법으로 경건한 친구들은 그와 함께 있는 자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이러한 능력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게 쓰였다. 그의 출중한 거룩성과 유능함은 병고 속에서 그를 더욱 눈에 띄게 만들었다. 앤드류 보나르는 맥체인과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자신의 삶 속에 결핍된 그의 거룩함올 보면서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가는 데 있어 큰 도전을 받았다. 분명 맥체인의 생애-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으나-가운데 잠재해 있던 가능성이 보나르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매우 깊은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었다. 목회 사역을 이제 막 시작할 즈음, 새해 첫날 일기에서 보나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36년 1월 1일, 오늘 아침을 묵상과 기도로 보냈습니다. 무엇인가 무척이나 이상한 섭리가 나를 이곳으로 이끄심을 알았습니다. 알렉산더 섬머빌도 부르셨으며, 이 어두운 구석에서 존 퍼브스의 손을 강하게 붙드십니다. 맥체인의 병 소식을 들은 낮이 밝을 때가 되서야 우리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폐병으로 위협 받고 있었으며,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건강의 축복을 허락하셨는데, 최근 몇 년간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으며, 또한 내게 이렇게 빨리 누구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유용한 사역지를 허락하셨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오, 올 한해가 생명의 샘에서 계속하여 은혜를 퍼 올리는 데 쓰여 질 수 있기를...”
 
맥체인이 살았던 삶은 보나르에게 있어 가시적인 도전이었으며, 보나르를 훈계하여 주를 바라보게 하였다. 이러한 비교는 매우 긍정적이며 절실하게 느껴졌다. 보나르는 맥체인이 가진 영혼의 투명함(Transparency)을 보았는데, 그 투명함은 그리스도에 대해 한없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보나르는 자신의 불투명한(opaque) 영혼을 비춰볼 수 있었다. 보통 비교라는 것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자아 중심적으로 만들지만, 이러한 종류의 비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에 더욱 젖어들 수 있도록 도전을 주기위한 것이다. 보나르는 이 비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보다 주님의 사역에 훨씬 완벽하게 헌신되어 있는 맥체인을 제쳐두신 것에 대해 생각할 때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틀림없이 내가 이곳에 이러한 건강과 능력으로 보냄을 받은 것이,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로서 주시는 은혜와 특별한 선하심 때문이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결코 내가 가진 은사와 재능의 덕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맥체인에 대한 긍정적인 비교는 보나르에게 그의 남은 생애동안 삶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질 책 (For Rebuke)
영적인 교제가 모든 죄인들의 사귐과 비교할 때 특별히 발견되는 차이는 진실한 안식처가 된다는 점이다. 아담과 이브가 동산 안에서 숨어 살 때부터 인간은 진실을 숨기고 싶어 했으며, 어찌 되었건 진실을 피하려 했다.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제 가운데에서만 진실이 솔직히 드러날 수 있다. 맥체인과 그의 동료들이 나누었던 진솔함은 죄로 물든 인간성에 무엇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와 구속 안에 거하며, 죄에 맞서고 죄악된 행실을 꾸짖는 삶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영적인 교제에 있어서 정직함(Honesty)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자주 기억하기를, “무엇이든 친구들에게 해가 될 것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친구들을 경고했었는가! 그것이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덫이 되었건, 게으름,냉담, 자만 등이었건 간에, 맥체인은 그의 친구들과 동료 사역자들을 사량했으나 그들 맘대로 방종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맥체인은 이웃을 돌보는 데 있어서 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바에 대해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을 충고하는데 전념하게 하였다.
진정한 영적 교제(Friendship)를 통해 맥체인은 하나님의 요동치 않는 언약적 사랑을 그대로 보여 주었으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친구들에게 가장 극진한 사랑으로 질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불굴의 사람은 맥체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도 같은
사랑을 실천하였으며, 앤드류 보나르의 경우 신참내기 번즈(W.C-Bums)의 설교관에 대해 충고를 한 적이 있다. 번즈는 그 당시 생각하기를 “예수에 대해 너무 많이 언급하고 자주 말하는 것은 해롭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나르가 지적하였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난후, 보나르는 "나는 번즈가 저토록 자유롭고 은혜로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감탄하게 되었다. 이는 아마도 보나르의 세심한 충고와 주의 깊은 질책이 그의 친구의 마음에 인상을 남겨 그로 하여금 샛길로 빠지지 않게 한 것이다.
질책은 종종 외과 수술처럼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대립은 모든 치명적인 죄악의 위협 중에서 가장 고상한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질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진정한 영적 교제가 존재한다는 적절한 표증이 될 것이다.

영적 교제의 특징(The Characteristics of Spiritual Friendship)
하나됨은 개인들(individuals)과 동료들(comrades)을 구분한다. 사랑으로 엮어진 사람(골 2:2)들은 단순히 공통적인 요소만을 함께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겹의 요소(multiple layer)가 서로 엮이어 결코 나뉘거나 분리될 수 없다. 하나됨의 각 실가닥은 서로 엮이어 구성원들을 튼튼하게 떠받쳐 줄 탄력있는 그물을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잘 짜여진 마음들은, 시편 기자의 말처럼(시편 133:1), 그들을 축복된 하나됨 안에 살 수 있도록 서로를 잡아주는 사랑을 갖고 있다. 맥체인과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유형의 복됨(blessedness)과 연합(unitedness), 일치된 마음( like-mindedness)의 전형적인 예였다. 은혜의 방편이 되었던 영적인 교제들의 예로서, 이러한 사람들의 우애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중심이었다.
 
마음의 일치는 그들의 세대를 규정지었고, 그 당시 폭넓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영적인 활동의 증거로 남아있다. 맥체인과 동료들 간의 사귐을 이해하려면, 하나된 마음의 개별적 성분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비록 그들은 다수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증 특히 세 가지의 동질성 -동일한 헌신(like devotion), 동일한 신학(like theology), 동일한 사명(like burden) - 을 분석함으로서 전체의 흐름을 볼 수 있다.
 
1) 동일한 헌신 (Like Devotion)
19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 같은 경건의 대변혁이 수많은 스코틀랜드 젊은 목회자들 가운데 널리 일어났다. 그들의 헌신은 일관되게 같은 양상을 띠었는데, 말하자면, 점진적으로 부활하신 구세주에게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아마도 이 세대의 후반기를 대표할 수 있는 사로잡힘의 모델이 될 것이다. 그의 경건은 많은 친구들에 의해 기억되어 풍부하게 전해진다. <아! 영원한 나라를 향한 그토록 온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인간을 찬양함이 공허함과, 이기적인 삶의 죄악성과 헛된 영광을 충고하며, 믿음의 반석(Tried Stone)이라 불리워진 그리스도의 소중함에 대해 가르친 사람이여! > 맥체인의 그리스도와 연합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소망은 그를 구별되게 하였다. 앤드류 보나르는 맥체인의 사역을 통해 감화를 받은 한 여인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 맥체인의 경건함(holiness)에는 무엇인가 독특하게 사람을 끄는 면이 있어요.... 저를 감동시킨 것은 그의 어떤 말이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 그 자체였습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저는 그와 같이 되기만 한다면 어떠한 희생도 치룰 수 있을 것이라 느꼈습니다. 하지만 늘 죄 가운데 거한답니다.> 보나르 자신도 맥체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오, 어느 누구보다도 로버트 머리 맥체인에 대해 놀라운 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그 자신도 그것으로써 먹고 살고자 하는 그의 단순한 소망입니다.> 맥체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의 달콤한 교제(Communion)가 절박히 필요함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아! 나는 내 영혼에 성령이 살아 역동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내 영혼의 은신처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너무 바쁘고 바깥 일에 분주하여, 마음 속에서 성령이 은밀하게 역사케 할 수가 없습니다.> 맥체인의 신념은, 개인의 경건(holiness)이 부흥의 도구가 되고자 하는 목회자들의 선결적인 요건이며, 그것이 없다면 혼란뿐이라고 한다. 그의 "회고록과 유고집들(Memoirs and Reniams)”이 증명하듯이, 이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준 [그리스도에 취함(Christ-besottedness)] 은 정말로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친구들 역시 같은 성격의 헌신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앤드류 보나르의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열심히 좇은 사람이었다. 존 머리(John Munay)목사의 말을 빌자면, <보나르는 그리스도의 피로 장막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훈련이라고 여겼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Christ and Him Crucified)가 그의 모든 생각과 설교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나 경건에 대해서나 어떠한 지름길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지식과 그 은혜 안에서 자라는 유일한 길은 거룩한 아버지와 그 독생자 안에서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교제를 갖는 것밖에 없음을 알았다.> 보나르는 긴 여정의 삶을 살면서, 그의 먼저 떠나간 친구, 맥체인의 단명했던 생애를 대표하는 거룩함을 증거하기 위한 봉화불이 되었다.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람 가운데, 거룩함을 쫓은 영감있는 사람은 월리암 번즈(William
Bums) 목사이다. 맥체인을 대신하여 성 베드로 교회를 이끌었던 젊은 설교자로서 거룩하신 한 분 그리스도의 생동감 있는 목전 앞에 서는 풍요로움을 알았다. 번즈의 경험들은 다음의 기록들과 대부분 비슷한 내용들이다. <에딘버러(Edinburgh, 11월 1일 - 나는 오전 내내, 12시 반까지 주님과 은밀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존전 앞에서 내 영혼은 한없이 겸허해지고 고양되어 그 이전 어느 때도 맛보지 못한 시간들을 가졌다.> (오! 일주일에 하루씩이라도 그 분과 은밀한 만남을 온 종일 누릴 수 있다면!) 번즈의 헌신적 태도는 그 기록을 읽어 보면, 마치 맥체인이 그것올 기록한 듯 하다. 이러한 일도 있었다. < 오, 내 자연적 본성 안에서 거주하는 저 용(dragon,역자주-사단)이 끊임없이 내뿜는 불신의 연기와 구름들을 치워주시오, 속죄함을 받은 내 영혼에 당신의 거룩한 빛과 사랑과 기쁨을 홍수같이 부어주소서. 그 광채 속에서 모든 죄는 사라지고, 성령의 모든 은혜가 꽃필 것이며, 그 향기를 토해낼 것입니다!>
 
번즈의 경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는 보나르도 있는데, 다음과 같이 희상한다. < 오직 하나에 대한 추구, 강렬한 열정, 하지만 차분한 모습의 월리암 번즈 목사는 때때로 내 마음 속에 형언할 수 없는 힘으로 감동을 줍니다.>
놀랍게도, 번즈목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맥체인이나 보나르, 섬머빌과 그 당시 다수의 목회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증언올 쉽게 할 수 있다. 마치 다음과 같이 얘기할 것이다. <그 사람과 단둘이 아주 잠시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길을 가는 도중 우연히 그를 만났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진정한 본질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to live was Christ)'라는 것을 의심치 못할 것입니다.>
 
2) 동일한 신학 ( Like Theology )
이 거룩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헌신의 뿌리는 같은 믿음과 동일한 신학의 바탕 위에 있었다. 그들의 신학은 특별히 하나님 중심의 초점을 갖고 있었으며, 은혜를 통해 나타난 주님의 왕국을 볼 수 있었다. 소위 칼빈주의(Calvinism)라 불리우는 신학적 관점을 통해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였으며, 같은 믿음을 가진 다른 이들에게는 종종 결핍되기 쉬운 활발함과 따듯함이 있었다. 이러한 칼빈주의는 청교도적인 매우 실제적인(experimental) 것이었으며, 많은 교구들에게서 나타나는 죽은 정통이 아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적과 특별한 구속을 붙들면서, 복음의 값없이 주어짐을 강조하였다. 이 사람들에게 일관되게 영향을 주며 그들의 하나님 증심적인 목적들을 세워준 단 하나의 이름이 있다. - 죠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가 바로 그 사람이다.
맥체인이 죠나단 에드워즈를 소개받은 때는 1832년 3월, 그가 아직 신학의 전당에 있을 때였다. 그는 죠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후에 그의 전집을 구입했다. 에드워즈가 맥체인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심오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후자의 설교와 사상적 기반이 전자의 신앙적 정수를 본뜬 것이었기 때문이다. 맥체인은 에드워즈의 가르침을 자신의 신앙적 일상에 연합시켰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고하여 파야할 광산이다. 파기만 하면 그 수고에 대한 대가가 분명 주어졌다.> 스코틀랜드의 설교자들은 종종 그 당시 여러 교구를 휩쓸었던 부흥에 대해 평가할 때, 에드워즈를 권위적으로 언급한다. 이 뿐 아니라 '에드워즈의 결심'과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종종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에 대한 열정과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데 매우 유용하였다.
앤드류 보나르는 에드워즈의 작품 속에서, 친구 맥체인과 같이 성령의 열매들을 맛보았다. 보나르는 에드워즈풍의 신학이 주는 감흥에 대해 이렇게 요약한다. <윗필드(Whitefield), 에드워즈(Edwards), 네슬레톤(Nettleton)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놀라운 진리들로부터 숨기워진 바가 없을 뿐아니라 이러한 진리들만 언급하였고, 이를 통해 성장했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이러한 칼빈주의적 교리들이 우리의 시야를 하나님께로 열리게 하지 않는가 말이다.> 월리암 번즈도 에드워즈를 숙독하였다. 그 이유는 이 젊은 사역자가 부흥에 크게 쓰여 졌기 때문이다. 그는 맥체인과 보나르가 대각성을 한참 일으킬 즈음, 뉴 잉글랜드를 영적으로 인도하는 데, 목자로서 일하였다. 혹자는 아마도 어떻게 에드워즈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의문이 생길 것이다. 분명히 그 근원은 그 세대들의 소중한 스승인 토마스 찰머스임이 분명하다. 찰머스는 자신의 삶 속에서 에드워즈의 저술들을 통해 감흥을 받았으며, 이 불을 그의 강단에서 함께 나누기를 원하였다. 이 하나님 중심의 신학은 찰머스를 세속적인 온건파(Moderate) 속에서 거듭난 복음주의자로 바꿔 놓았으며, 젊고 경건한 목회자들의 무리들을 각성시킨 것도 바로 같은 신학이었다.
 
3) 동일한 사명 ( Like Burden )
한 목적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한 열정으로 연합케하였다. - 이 목적이란 바로 죄인들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동일한 의무의 짐을 지고서, 이 환희의 군사들은 많은 군중들이 죽임당한 어린양을 경배하러 모여 드는 것을 보기 원하였다.
아직 신학의 전당에서 공부할 때, 이러한 학생들은 에딘버러의 빈민가를 방문하여 길을 잃어 버린 양들에 대한 가슴 아픈 연민을 느꼈으며, 토마스 찰머스는 이 방문에 앞서 기도회를 주관하여 그리스도 없이 사는 자들을 섬겨야 할 것을 어린 사역자들에게 주지시켰다. 맥체인은 후에 그의 교구와 그의 말 많은 기계공들과 정치에 관심 많은 직조공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이 황폐한 굴뚝 위를 녹색의 아름다운 주님의 축복된 정원으로 가꾸어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국에서의 선교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이전 세대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열심에 감동을 받았다. 월리암 번즈는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부흥을 목격하지만, 후에 영국 장로교의 최초 선교사로서 중국으로 떠난다.
이 모임의 열심 있던 한사람인 존 밀레(John Milne)는 번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 나는 그가 그토록 가깝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잦고 성실한 기도, 그의 습관이 되어버린 그 진지함, 그가 어디를 가든지 그의 존재에서 우러나는 그 엄숙함, 그리고 자신과 대화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관점아래, 진지하고 실제적이며, 마음을 살펴 그들의 상태를 파악케 하는 데 어김없이 성공하였다. 대중적으로 그의 사역은 주로 자연적인 본성을 각성케 하는 일과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였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고민이 컸다. 한 평범한 여종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려고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29세의 적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짐을 진 자들은 모두,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오도록 애타게 기도하였으며, 설교로 그들을 간청하여 그리스도의 보이는 왕국의 확장에 크게 쓰였다.
 
결론 ( CONCLUSION)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를 특별한 방법으로, 이 스코틀랜드인들의 입 – 로버트 머리 맥체인과 그의 협력자들의 입-을 통해 나타내셨다. 한마음과 한정신의 설교자 군대가 사랑의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영적인 전장으로 진격하였다. 한가지의 사명과 믿음과 한 주님으로 뭉쳤기에, 이러한 귀중한 친구들을 서로 사랑 안에서 은혜 가운데 연합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소망하게 하였다. 이러한 친밀한 영혼들은 함께 모여 울부짖었으며, 함께 설교하였으며, 함께 세상과 육과 사단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평생 함께 더불어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
 
끝으로, 이러한 동지의 정을 나눈 사람들은 좀처럼 모이지 않는다. 전쟁터의 생존자들처럼, 전사들은 자신보다 먼저 떠난 전우들에 대한 추억을 늘 지니고 산다. 이 귀중한 추억은 남은 자들로 하여금 더욱 잘 살도록 재촉하였다. 먼저 쓰러진 자는 그 동료들에게 친구로서 유용하였을 뿐 아니라 은혜의 방편이었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앤드류 보나르는 1843년 3월 25일, 맥체인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 몰려오는 강렬한 감정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결코, 결코 내 생전에 이렇게 슬픈 일은 없었다. 이것은 나뿐 아니라 이 민족과 스코틀랜드 교회에 큰 충격이구나. 오, 주여, 당신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일어나옵소서! 주여, 이 거룩한 자가 멈추었고, 이 신실한 자가 쓰러졌습니다,...영혼을 구하고 싶다는 소망을 제외하면, 이제 삶은 그 절반의 기쁨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사랑했던 친구도 없었습니다...나는 이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찾은 것을 나도 찾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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