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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리, 성경과 설교

존 머레이

by 김경호 진실 2014. 3. 2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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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리, 성경과 설교
 
김순정 기사입력  2014/03/03 [23:37]



존 머리는 1898년 스코틀랜드 서더랜드 지방에서 태어났고 글래스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 에든버러에서 계속 공부하던 중 프린스턴의 조직신학 교수인 카스파르 위스타 하지(Caspar Wistar Hodge)의 초청을 받았다. 당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은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투쟁으로 갈등의 본산지가 되었고, 그 결과 머리 교수는 1930년 그레샴 메이첸, O.T. 엘리스, R.D. 윌슨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설립하였다. 여기서 그는 1966년에 은퇴할 때까지 후진들에게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이 글은 그의 저서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에 실린 글을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의 전계획

복음전도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전계획이다. 이 평범한 말은 너무도 자주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받아들여지더라도 제대로 평가되거나 시행되지 않는다. 길 잃은 자들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는 복음의 중심적 요소들, 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구속, 믿음과 회개의 요구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너무 팽배해 있는 가정에 의해 복음 전도의 대의는 크게 부당한 취급을 받았고 방해받았다.

복음 전도는 항상 복음의 중심적이고 기본적 원리들을 그 메시지의 최전면에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성경의 패턴은 복음의 중심적 메시지가 복음 전도 메시지의 유일한 내용이라는 것을 뒷받침하지 않을 것이다.

2. 중심적 메시지 자체는 하나님의 전계획과의 관계에서 제시되지 않으면 적절하게 제시되거나 이해할 수 없다.

 

메시지에 특히 필요한 것들

1. 죄의 자각

모든 세대, 특히 우리 세대에 있어서 강화된 효과적인 복음 전도에 가장 큰 장애물은 자기만족과 자기 의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는 것은 주님의 증거였다. 복음 전도자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율법과 복음의 요구들이 사람들의 양심에 영향을 미쳐 그들로 그들이 종속되어 있는 정죄의 현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현실, 구속하는 은혜의 복음과 동떨어진 영원한 파멸의 확실성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현대 많은 복음 전도의 가장 소름끼치는 결점 중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 공의, 권세에 대한 지속적이고 일관된 강조의 부재이다. 이 결점은 십계명에 요약된 하나님의 율법의 구속력있는 권위와 제재를 선포하고 적용하지 못하는데서 매우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이 계명들이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 영향을 줄 때 사도 바울에 의해 언급된 효력이 발생한다. 롬 7:9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조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롬 7:7). 이 자각은 하나님의 법의 구속력 있는 주장과 제재의 신실한 선포의 변함없는 결과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그 희생물로 만들고 있는 현대 철학의 궤변이 율법에 의해 죄를 알게 된다는 하나님의 정하신 준칙을 폐기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계명의 날카로운 화살들만이 왕의 원수들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고 이것들만이 인간적 교만의 자기만족을 낮출 수 있다.

지옥은 입에 감기도 싫은 실재이고 복음 전도가 밀어닥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죄의 적절한 대가로서의 지옥의 형벌을 인식한 정죄감을 생겨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복음이 목마른 영혼에게 냉수가 되고 먼 곳에서 온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알고 괴로워하는 양심의 번민, 정죄감으로 인한 번민 가운데서이다.

 

2. 복음의 값없는 초청

이 주제에서 피할 두 가지 악이 있다. 첫째, 알미니우스적인 성격 또는 토대를 갖는 복음의 제시이다. 지난 두 세기를 제외하고라도 수십 년 동안 수행되어 온 복음 전도의 아주 상당한 부분은 알미니우스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부류의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거나 적어도 모든 사람의 구원을 예비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가정 모든 사람은 자연적 보유나 은혜로운 회복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위에 진행된다.

따라서 복음에서 은혜의 초청은 하나님이 구원의 문제에 자신의 최선을 다하셨으며 이제 남은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는 자율적 의지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제시된다. 구원의 문제에 진실로 결정적 요소,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사람들에게 값없이 제시된다는 것이 사람들 편의 자율적인 결단과 행위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복음과 사람의 책임과 기호성의 이러한 구성은 설득력이 있고 그럴 듯한 많은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것에 유리하게끔 그것은 강력한 결과들을 낳아 왔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그리스도의 주장과 믿음을 위한 호소를 제시하는 유일하게 적절한 방법처럼 보인다.

개혁주의자들은 많은 부분에서 복음 전도의 지배적인 형태로서 이러한 부류의 복음 전도 경향에 쉽게 빠져왔다. 흔히 이러한 메시지와 이 메시지에 대한 응답의 관념에 수반해서 복음 설교의 특징이 되어야 할 절제와 위엄과 양립할 수 없고, 구주와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행사에 적절한 사려 갚음과 지성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형태의 고압적인 호소와 감정적 흥분을 조장해 온 것이다.

두 번째 악은 극단적 칼빈주의이다. 알미니우스주의적 인간론과 구원론의 잘못을 철저히 확신한 사람들은 아주 적절하게도 그것의 특징적 표현인 복음 전도의 형태로부터 반작용을 해왔다. 그러나 구원의 계획에 있어 특징인 구원론에 대한 깊은 확신, 그리고 알미니우스주의적인 복음 전도로부터의 반동은 복음 전도 전체의 포기, 또는 적어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충만하고 값없는 초청을 부인하는 계기가 되어 왔다. 이 반작용이 이론적으로 복음의 값없는 초청을 부인하는데까지 이르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복음의 값없는 초청의 설교에서 눈에 띄게 자발성의 부족과 소극성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전적 무능력과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의 확신과 아울러 알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과 방법의 오류로부터 반작용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사람의 무능력과 구원의 계획에 있어 일관된 제한 구원론이 길 잃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충만하고 값없고 속박 받지 않는 초청과 완전히 조화된다는 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게 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또 사람의 무능력과 하나님의 예정이 믿음과 회개의 행사를 위해 가장 긴급하고 열성 있는 호소의 필요성과 조화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었다.

진정한 복음전도를 위한 유일하고 적절한 길은 이 두 극단 사이에 놓여 있는 길이다. 선택과 구원의 전과정의 특징인 은혜론은 복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값없는 초청에 어떤 장벽도 쌓지 않는다는 것을 복음 전도는 이해해야 한다. 또 인간의 무능과 효과적인 은혜의 필요성은 어떤 점에 있어서도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값없고 충만한 구원의 초청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리고 복음의 외적 부르심에 직면한 길 잃은 사람들의 책임과 특권과 기회는 효과적 은혜가 구원적인 책임의 행사, 특권과 기회의 구원적 행사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사실에 의해 조금도 삭감되지 않는다.

 

3. 인간의 필요와 책임

복음 전도의 메시지에 관한 이 보고서의 처음 부분에서는 지성적 복음 전도의 필요성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또한 열성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복음 전도의 열심은 죄와 그 결과의 중대성을 인식하는데서 기인한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거스르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결과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권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어둠의 흑암과 영원한 멸망이다.

이런 사실들은 복음 전도의 사명에 저항할 수 없는 긴급성을 부여하고 긴급한 요구가 메시지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복음 전도의 메시지가 경험의 증거에 의해 좋고 유용한 것으로 입증된 합리적인 가설 또는 가능성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을 무릅쓰지 않는 한 거절되어서는 안되는 유일한 대안, 절대적인 진리로 제시되어야 한다.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 외에 우리를 구원할 만한 다른 어떤 이름도 주신 적이 없다는 불가피한 궁극성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과 회개는 좋고 유용한 의지일 뿐만 아니라 명령적인 요구와 의무로서 사람들에게 촉구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복음의 주장과 초청을 받을 때 사람들의 책임은 그들의 필요의 중대성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예비의 영광과 완전으로부터 생겨난다. 복음 전도는 그 대상인 사람들에게 그러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거절하는 죄의 가증성을 인식시켜야 한다.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최고의 계시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토록 엄청난 책임을 지우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분의 인격과 사역에 최고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주장이다(요 3:19).

 

4.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복음 전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가 그 메시지의 절정과 요지가 되도록 항상 유의해야 한다. 바울의 모범은 이 점에 있어 확정적이고 결정적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리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 1:22-2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기록은 기독교의 증언에서 적절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열매인 체험의 기록은 흔히 불경건한 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강하게 미쳐 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삶이 복음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증거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 전도를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증거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할 때 이것은 사탄의 교활함에 의해 함정에 빠져왔다. 아주 그럴듯하게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외관을 띠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이해관계와 강조는 너무도 자주 통탄스러울 정도로 복음 전도의 진정한 증거를 왜곡시켜 왔다. 우리는 항상 바울의 말씀의 의미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는 걸림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설교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십자가에 내재하는 이런 걸림돌은 복음 전도의 성공을 위태롭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유혹, 적어도 시초에 은혜의 복음의 바로 핵심을 유보하려는 유혹을 복음 전도에 열어 놓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치명적인 불명예이며 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성공적으로 우리가 설교하는 복음이 복음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은혜의 최고 계시를 구현하는 것은 승귀된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하나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다른 어떤 것을 설교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라고 증언한 후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8, 10)고 말한 정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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