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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예배찬송과 시편 / 송영찬목사

찬송

by 김경호 진실 2014. 4. 1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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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예배찬송과 시편
교회의 예배 찬송과 ‘시편’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작금 한국교회에서 예배 찬송으로 사용되는 찬송가들에서 전통적인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와 선포의 내용이 빠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개혁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여 왔던 시편 찬송가를 배제하고 신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찬송가들을 무분별하게 도입해 예배 찬송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최상의 예배를 드려야 할 교회들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초기 시절에 어쩔 수 없이 외국 찬송가를 번역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우주적인 교회, 보편적인 교회의 한 지체로서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 내용을 답습해야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신학이 변질되고 신앙고백의 내용이 변질된 외국의 찬송가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예배 찬송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일이 아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역사가 120년이 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바른 의식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예배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찬송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가 새롭게 언약 공동체인 새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고 그 안에서 존재한다는 의식이 높아진 만큼 예배 찬송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해야 할 때이다.
이 글에서는 예배 찬송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그에 따른 찬송의 본질적 속성들을 살펴본 후 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의 내용과 성격을 점검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 마땅히 드려야 하는 예배 찬송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1. 찬송의 신학적 주제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공동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핵심적 신학 주제는 당연히 ‘창조’와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창조는 우주의 생성과 본질을 밝혀주었으며 하나님과 역사 그리고 개인에 대한 세상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으로 결코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었다.
창조 결과로 조성된 이 세상은 역사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였으며 역사의 전개는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피조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권을 전제하며 동시에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역사의 진행을 통제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역사의 전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런 점에서 언약은 이스라엘 공동체 신앙의 핵심이었다. 여기에서 언약의 주체는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의 주관자로서 친히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순종을 필요로 하지만 비록 인간 편에서 불충실한 면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약의 시행자이며 동시에 성취자가 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 나타나는 인자하심(세드)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아래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개개인은 성전 제의로 표해지는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친히 참여되었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예배 행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배려하심으로 진행될 수 있었고 그들의 예배를 친히 받아주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특히 예배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행하시는 계시의 한 일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은 예배 행위를 통해 그 백성을 만나주신다는 사실을 밝히셨고 그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통해 합당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구속의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넌 후 하나님께 드린 이스라엘의 찬송을 들 수 있다(출 15장).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통해 구원을 경험했으며,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함으로써 구속의 사실을 재현해 내었던 것이다. 시편 기자가 “너희 의인들아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로다”(시 33:1)라고 선포한 내용에는 이러한 구속의 사실과 경험을 전제로 한다.

2. 찬송의 대상

구속의 역사가 과거의 경험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의 특이한 시각은 구속의 사건이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괄한다는 점에 있다. 시편 기자는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새 노래’라고 규정하고 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시 33:3). 여기에서 ‘새 노래’는 새로 창작된 찬송곡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역사 속에서 늘 새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찬송은 하나님의 구속에 근거하여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현재 시제로 볼 때 날마다 새롭게 진행되는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구속 사역이 전개될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늘 새롭게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9-11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함으로써 새 이스라엘이 되었다. 새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받은 백성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도록 선택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구원을 성취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라고 하는 교회 공동체인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시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주의 백성을 통해 여전히 전개될 것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찬송은 역사 속에서 교회 공동체가 경험하고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의미이다.

3. 예배 찬송의 정의

역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다윗은 성전 건축을 앞두고 전국에서 30세 이상의 레위인 남자를 계수한 결과 그 수는 38,00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다시 재능에 따라 구별하여 24,000명은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제반 사무를 관할하도록 했고 6,000명은 유사와 재판을 관장하도록 했다. 나머지 8,000명은 4,000명씩 나누어 문지기와 찬양대를 담당하게 하였다
성전 봉사를 위해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의 족속을 따라 24반차를 나누고(대상 23장), 성전 제의를 위해 아론의 반열에 따라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계열 역시 24반차로 나누어 제사장 직무를 정비하였으며(대상 24장), 찬송을 위해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가문에서 24반차를 나누어 4,000명의 찬양대 조직을 정비하였다(대상 25장).
4,000명의 찬양대는 24반차로 정비하여 다윗이 임명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 등 3대 악사(대상 6:32-48)의 지도를 받도록 하였다. 이 3대 악사들은 신령한 노래를 하는 자들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하는 대표자들이었다(대상 25:1).
그런데 여기에서 ‘신령한 노래를 하다’로 번역된 ‘나바’(אבנ)라는 말은 일종의 예언적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예언에 관련된 직책(םיאיבנ), 즉 선지자의 기능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예언의 은사와 관련된 선지자의 직능을 수행하는 선지자, 예언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 곡을 붙여서 찬송하는 일에 봉사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선지자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성전 예배 찬송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영광 및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그 주제로 하는 찬송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 찬송의 내용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찬양대는 엄격하게 선별, 조직되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구현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불려지는 음악과는 달라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 3대 악사들에게는 24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아삽의 4 아들, 여두둔의 6 아들, 헤만의 14 아들) 이들을 중심으로 24반차를 조직하고 각 반차마다 12명씩 총 288명의 교사를 세웠다(대상 25:6-7).
이들 교사는 노래에 익숙한 자들로 나머지 생도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찬양대의 조직은 철저한 위계 질서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찬송이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윗 이전의 성막 제의에서 음악이나 찬송이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음악이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회에서 음악은 노동과 예배와 잔치와 군사적인 활동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창 31:27; 출 32:17-18; 민 27:17; 삿 11:34-35; 사 16:10; 렘 48:33).
출애굽 과정에서 홍해의 대승을 찬송한 미리암의 노래(출 15장)는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음을 유추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리암의 노래에 맞춰 애굽 군대를 무찌르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러한 집단적인 찬송이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결코 음악과 무관하지 않았었음을 알려 준다.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여리고 성 점령을 앞두고 나팔 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소리를 울리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는 기사(수 6:4-20)를 볼 때에도 그 나름대로 집단적인 음악 행위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행하여졌다는 점에서 찬송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이 성막 제의를 행하는 도중에 조직적인 찬송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성막 제의에서 찬송의 요소를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소의 구조에 잘 나타나 있다. 성소 내부 벽에는 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있었다. 이것은 천상의 궁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천사들의 역할을 묘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성전 건축을 앞두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정비하고 각각의 재능에 따라 찬양대를 조직했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성소를 볼 때 하늘 궁전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을 옹위하고 그 영광을 찬송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전에서 조직적인 찬송을 한다는 것은 마치 천상의 궁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미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는 사건을 하나님의 보좌가 예루살렘에 임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보좌를 중심으로 찬양대가 옹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과 더불어 찬양대가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을 갖추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윗은 제사장과 레위인 반차와 같이 찬양대를 24반차로 조직하였다.
특히 찬양대의 찬송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찬송을 가리켜 ‘신령한 노래’(대상 25:1), 즉 ‘예언’이라 한 것은 성전의 기능과 매우 부합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해야 한다. 성전이 비록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며 그곳으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궁정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예루살렘에 건축된 성전은 그 성전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예표하기 위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찬양대의 찬송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임하실 것과 그 나라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주로 담고 있었다. 이러한 찬송의 주제는 선지자들의 예언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대한 예언을 바탕으로 항상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나라를 소망하였다.

4. 구약의 예배 찬송과 시편

성전 예배의 찬송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 주제로 하는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배 찬송이 하나님의 계시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시편의 저작 과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에서 확인된다.
시편은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이자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그의 백성들의 신앙적 응답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 시편은 창조주이며 언약의 시행자이며 그의 백성들의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아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또 유지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확증해 주고 있다.
시편의 또 다른 특성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의 삶과 사역에 대한 예표적 혹은 예언적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이 예언적 내용들은 다양한 저자들과 다양한 형태의 저술 방식과 다양한 시대의 저술 등을 통해 구약성서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인 메시아 사상을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시편은 시가서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각각의 시편들의 배경에는 역사적 사실들을 나름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성격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한 개인의 경험에 기초해 저작된 시편은 단순히 자신의 신앙고백적 특성을 떠나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경영하는 역사의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각의 시편들은 구속사적 특성을 규명해 주고 있다.

1)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 의식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의 드라마 속에서 ‘하나님과의 동반자 관계’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해의 근거에는 출애굽 사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불러내어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출 19:4-6)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전신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존재 의의는 ‘언약에 근거하는 신앙 안에서의 생존’에 가장 큰 목적을 두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하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일으켜 왕을 삼고 지금까지 이스라엘 공동체가 보았던 것보다 더 큰 지평을 열어 보임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를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다고 선포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능동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이라고 하는 가장 큰 재앙의 사건조차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그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해 세상의 모든 민족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결과로 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관은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현현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세속의 역사를 함께 보았던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동반자로서 역사 속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언제나 이스라엘 공동체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것들은 구약 성경에서 언제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더불어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때마다 역사적인 저작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행사를 회상하였으며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진언(眞言)을 올렸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시편 찬송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가장 훌륭한 예를 시편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편은 다윗 시대로부터 구약 시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함께 한 이스라엘 역사의 전체 드라마를 집약한 기사(記事)라고도 할 수 있다.

2)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 의식
시편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임재에 대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응답이었으며 경배와 감사와 고백과 탄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정서가 감격에 벅차 기쁘거나 때로는 애곡과 고통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이 찬송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노래들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찬송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고 확신했다(시 22:3). 이것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통해 자신들을 결속시키는 일차적인 끈으로 삼았다는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로부터 받아들여졌다.
가나안 정복 이후 12지파는 언약 갱신을 축하하는 형태로 공동체 의식을 확립했었으며, 그 구심점은 성막이었다. 성막 제의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제의적 행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확인하였다. 다윗 시대에는 예루살렘이 국가 예배 중심지가 되었으며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함으로써 성막 제의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 결과 시온으로 불려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신앙 중심지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시온으로 모여야 한다는 열망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심지어 통일왕국이 분열되고 북 이스라엘 왕국이 설립된 후에도 그 행렬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성전 재건은 바로 시온의 회복을 상징했다. 이러한 열망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사회적 변화와 흥망성쇠의 와중에서도 그들의 근본적인 실체가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것은 성전 중심 예배의 신앙이 이스라엘 공동체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3) 시편과 예배하는 공동체 의식
시편의 많은 찬송들이 구체적인 삶의 정황들로부터 시작된 개인적인 찬송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개인들의 사사로운 묵상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시편들은 성전 제의나 축하 잔치에서의 낭송을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기원을 가진 시편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가 예배하는 공동체의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편 23편에서 ‘나’ 또는 ‘나의’라는 대명사가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이것은 그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공동체 전체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시편에서는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께 향한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언약 신앙에 따르면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한 개인을 만나신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지정된 장소와 약속된 시간에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성막 제의 이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통해 교제하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집단적인 교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과 언제나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 개인은 오로지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일원으로서만 언약의 약속들과 축복들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기존의 은혜의 수단으로부터 끊어져 고립된 개인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으로부터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는 가장 혹독한 형벌이었다(삼상 26:19).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에 의하면 성일이나 절기 중에 회중이 함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들의 찬송 중에 거하시며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배하는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더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 시편들은 문학적 양식과 예전적 기능에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위엄과 신실하심을 송축하는 찬송시편(hyum), 하나님의 주권이 일시적으로 감추어진 문제의 상황을 전제로 하는 탄원시편(lament), 탄원시와 찬송시와 중복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찬송을 표현하는 감사시편(thanksgiving) 등으로 나누어지지만 이 시편들은 성전 제의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예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양한 형태의 장르로 구별되는 시편들이라 할지라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이자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그의 백성들의 신앙적 응답이라고 하는 시편을 예배 찬송으로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것은 하나님 계시의 내용이 곧 찬송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예배 찬송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신약 교회의 예배와 찬송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내용이 곧 찬송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구약의 예배 찬송 개념은 신약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신약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미와 창조와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berakah)은 고린도후서 1장 3-11절이나 베드로전서 1장 3-9절, 에베소서 1장 3-14절에 그 정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교회의 찬송은 전통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그 내용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내용들을 통해 마땅히 신약 교회의 찬송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베라카’는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말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고후 1:3; 벧전 1:3; 롬 15:6; 골 1:3)이며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그의 대리자인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 가운데 에베소서의 ‘베라카’를 통해 교회가 드리는 찬송의 진면목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에베소서의 ‘베라카’는 세 부분으로 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구조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는 후렴구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교회에 대한 삼위 하나님의 계획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은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으며(엡 1:4) 그들을 아들 삼으시고(엡 1:5) 하나님께 오는 것을 용납하시며(엡 1:6)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엡 1:8-9).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를 통일되게 하심에 성도들을 참여하게 하시며(엡 1:10)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시며(엡 1:11) 영광이 되게 하신다(엡 1:12). 이때 성자 하나님은 성도들을 구속하시며(엡 1:7)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신다(엡 1:10).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의 보장(엡 1:13)과 영원한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엡 1:14).
이로써 바울은 삼위일체적 형식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세 가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① 사랑으로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엡 1:3-5)과 ② 자신의 대속적 죽음으로 구속자가 되시며 교회를 택하신 아들 그리스도(엡 1:7)와 ③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의 백성에게 적용되어 그것으로 인간 경험 속에서 삼위의 영원한 목적을 실현하시는 성령님(엡 1:13-14)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훗날에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의 신조로 확립되었다.
‘베라카’의 주제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에서 제시된다. 이 구절은 상반절인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세 개의 엔(εν, -안에) 구문, 즉 ① ‘모든 신령한 복으로’ ② ‘하늘에 속한’ ③ ‘그리스도 안에서’로 구성된 하반절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하반절에 등장하는 이 내용들은 나머지 찬송에서 보다 깊이 다루어지고 있다.
바울은 먼저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함으로써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찬송하리로다’(eulogetos)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미할 때만 사용되는 특별한 단어이다(막 14:61; 눅 1:68; 롬 1:25; 9:5; 고후 1:3; 11:31; 벧전 1:3). 하나님만이 홀로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며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외를 나타내게 된다.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의 유익을 얻도록 하셨으며 성도들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도들에게 복을 주셨다. 이 복을 가리켜 바울은 ‘모든 신령한 복’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모든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구성하고 있으며 신적인 복의 충만함을 ‘신령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이 ‘복’이 한 인간의 내적이고 감추어진 삶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시한다. 여기에서 ‘신령한’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임재와 일하심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 베라카의 마지막 두 구절(엡 1:13-14)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업의 복’을 지금 성도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령 안에 참여함으로써 발생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신령한’은 이 복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며 하늘의 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은 신령한 복을 주시는 영역이 이 땅이 아닌 하늘의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해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하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과 같은 장소적 의미를 가지며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관련되어 있다. 하늘은 땅과 마찬가지로 종말의 때에 심판을 받아 없어질 곳이다(사 51:6; 학 2:6). 하지만 묵시적 의미에서 하늘의 영역은 오는 세대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된다. 하늘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자신의 우편에 앉히심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복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늘의 영역과 연결시키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복은 본래 하늘의 영역에 있지만 미래를 위해 비축된 보물이 아니라 지금 신자들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이 복을 성도들에게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셨다. 그 결과 지금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복은 장차 누리게 될 하늘의 실재를 이 땅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더불어 이러한 경험은 오는 세대의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이미 승리한 싸움의 결과로 말미암아 영적인 복이 성도들에게 약속되고 주어진 영역으로 하늘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성도들의 복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사실과 그곳에는 지금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영적인 복들의 근원인 성령의 은사를 성도들에게 주시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엡 4:8).
바울은 성도들이 하늘로부터 이 신령한 복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창세 전의 선택(엡 1:4-5, 과거)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원(엡 1:7-12, 현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침과 유업의 상속자가 되는(엡 1:13-14, 미래) 신령한 복을 받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대표로 높이 올리우신 그리스도, 즉 스스로 하늘의 영역에 계신 그리스도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영역에 있는 복을 경험한다는 사실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나아가서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선택되었다기보다는 그들이 창세 전에 선재하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베라카’를 통해 바울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그 목적은 피조물의 진정한 주인이며 인간과 우주 역사의 완성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통일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참된 삶(real life in God)의 실체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교회’로 이 땅에서 구현된다. 이때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이 나아가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며 모든 피조물의 삶을 주관하는 주인으로 찬송을 받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의 신비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침돌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신약성서의 핵심 내용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회원으로서 가장 고귀한 도덕적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도덕적 책임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택함받았다는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에 의한 최종적 구원은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된 성도들을 충만하고도 완전한 소유로 취하셨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의 백성을 소유로 취하여 구속을 완성시키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찬미되어야 한다(고전 6:19-20). 또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전망은 이제 그 구속을 받은 모든 교회로 하여금 찬송으로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교회는 기꺼이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는 요구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 한다. 이 요구에 따라 전통적으로 개혁교회에서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치는 말

교회 공동체로 선택받은 우리는 날마다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 차원에서 마땅히 하나님께 새 노래로 찬송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개혁교회 공동체가 역사적인 신앙고백이 담긴 찬송으로 시편 찬송을 선택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645년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는 ‘공적 금식’과 관련해 “회중이 모이기 전에 각 가정과 개인은 그 엄숙한 일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저희의 마음을 예비하고 모이는 시간에 일찍 가도록 할 것이다. 그 날은 할 수 있는 대로 종일을 회중이 그 의무에 맞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말씀을 읽고 설교하고 시편 찬송을 하는 데 보낼 것이다”고 제시하고 있다.
또한 ‘공적 감사일’과 관련해 “시편 찬송이 무엇보다도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규칙이므로 해당하는 시편이나 시편 여러 장을 그 목적을 위하여 부르되, 당면한 문제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후에 할 것이다”고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시편 찬송에 대하여’ 항목에서는 “하나님을 공적으로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회중에서 함께, 또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이다. 시편을 찬송하는 데 있어서 목소리는 곡조에 맞게 엄숙하게 낼 것이다. 그러나 제일 조심할 것은 이해를 가지고 마음에 은혜를 가지고 주님께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온 회중이 다 함께 불러야 하므로 읽을 수 있는 자는 다 시편 책을 가질 것이요 다른 사람들도 나이나 다른 조건으로 불능이 되지 않는 한 읽는 법을 배우라고 권면할 것이다”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을 찬송함에 있어 예배 찬송으로 시편 찬송을 드린다는 것은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과 같은 연속선상에 서 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처럼 명확한 교회의 찬송으로 시편 찬송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근거를 알 수 없는 외국곡을 번역해 예배 찬송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로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른 시편 찬송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시편 찬송을 제네바 교회에 도입했던 칼빈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조명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예배 찬송에 합당한 시편 찬송가 도입에 따른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예배 찬송의 개혁이 없는 개혁은 미완의 개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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