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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은성목사--중세로 치닫는 한국교회 위한 제언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4. 1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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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학자들만 아니라 현장 목회자들도, 신학교 강단에서도, 또는 여러 책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한국교회의 불안에 대해 염려한다. 물량주의, 성장지상주의, 또는 맹신주의 등등 여러 사조들이 한국의 문화와 세계 문화의 유입과 영향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허덕이고 있다. 나름대로 해결책을 여러 분들이 지혜로운 방법들과 방도들을 제시한다.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물량주의를 염려하시는 분들은 주님의 위대한 계명, 즉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자선을 일삼아야만 한다고 외친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 살고 있는 분들을 위한 교회 예산을 마련해야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일선에서 팔을 걷어 제치고 노무자들, 빈곤한 자들, 노숙자들, 병든 자들 등 여러 분들을 위해 수고한다. 교회당을 크게 짓는 데서 벗어나서 학교를 렌트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는 교회들도 생겨나고 있다. 교회를 짓고자하는 데서 벗어나 사회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지 않게 하려고 매우 노력하고 있다. 
성장지상주의를 염려하시는 분들은 작은 교회를 주장한다. 작은 교회가 대형교회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여겨 작은 공동체를 통해 성도들의 실제적인 교제와 교육에 힘쓴다. 담임목사님과 일 년에 한 번도 대면하거나 개인 면담하지도 못하는 교회보다는 항상 말씀 속에 위로받고 권면 받는 아름다운 공동체 교회를 이끌고자 노력한다. 
맹신주의를 염려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 공부에 힘쓴다. 말씀 공부만이 맹신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한국민은 어떻게 보면, 너무 착하다. 예를 들면, 물건 구입에 많이들 속는다. 그리고 단순하다.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일단 신뢰하고 물건을 구입하거나 구두적 약속을 신뢰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들을 겪는 분들을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도 맹신적이기도 하다. 어려운 상황에 있다 보니 의심하고 따지는 것보다 무엇인가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단순하게 믿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다. 이런 것을 이용하는 일부 부흥사들이나 이단의 교주들도 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말씀에 따른 신앙을 세워야한다고 수고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해나가는데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만 하고, 반드시 유의해야만 하는 일들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위와 같은 문제점들은 작금에만 한국교회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있었다. 2,000년 교회사에서 수없이 반복되며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교회사에서의 시행착오를 우리는 범치 말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중세적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무턱대로 달려간다. 매우 안타깝다. 예를 들면, 물량주의를 염려하는 것을 위해 교회사에서는 항상 가난과 자선을 그 답을 찾았다. 그 대표적인 것은 바로 수도원 운동이었다. 또 성장지상주의를 염려하여 교회는 항상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했다. 이것 역시 수도원 운동이었다. 그리고 맹신주의를 염려하여 교회는 항상 기도에 힘쓰도록 했다. 이것 역시 수도원 운동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교회사에서 개혁 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과연 그랬는지 그들이 행하는 방법을 그대로 답습해도 괜찮을는지 . . . 
어떻게 행하느냐는 무엇을 믿느냐에서 비롯된다. 바로 믿으면, 바로 행하게 된다. 주님의 사랑하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우리는 지키지 못한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 단호히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줄 모른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게 된다. 결코 이 순서를 바꿔서는 안된다.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아 그분을 사랑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이것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이다. 
이러한 논쟁은 4세기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에서 이미 결론이 내려졌다. 타락하는 교회를 바라보며, 인간 스스로 행할 수 있고 행해야만 하는 펠라기우스, 이것을 논박하면서 인간 스스로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어거스틴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시급하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삶을 강조하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낳고 만다. 다시 말씀드리면, 삶을 통해 바른 기독교인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명제의 순서가 아니라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을 본다고 해야 한다. 올바른 기독교인이 되면 기독교적 바른 삶을 살아간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여러 철학적, 사회적, 편의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여러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가시적 효과를 보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심리학적 상담 원리를 이용, 마케팅적 교회 성장원리를 이용, 또는 인터리어고 유희적인 사회적 문화 방법을 이용하는 것 등이다.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심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한국교회 상황을 지속시킬 뿐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살 수는 없다. 세상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세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도 세상 속에 동화하며 살아가서는 안된다. 그들의 원리를 이용할 수는 있어도 늘 신학적 점검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문제를 낳고 말 것이다. 
또 조금 배운 분들은 기독교 고전을 통해 초대교회의 예배, 교리, 삶, 또는 원리들을 찾아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각에 맞는 것만을 선택하여 적용에 관심을 갖고 행한다. 연구는 짧게, 적용은 오래 하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어떤 신학 어떤 배경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하여 사용한다. 그 결과는 예상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문맥에서 그들의 삶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점검을 받고 행해야만 한다. 연구는 길게, 적용은 신속하게 해야 한다.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연구소를 운영해야만 한다.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할 때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의뢰하여 연구토록하고 그 결과를 갖고 적용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교회 자체가 가질 수 없다면 몇 교회가 합하여 연구소와 같은 database를 만들어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모임을 교회가 물질적으로 후원하여 충분한 연구를 통해야만 한다. 그래야 양질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답변, 즉 경험적으로 얻어진 답변은 짧은 연구와 기나 긴 적용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피상적인 해결책만 찾게 되어 겉으로 드러나는 중세적인 답변 해석 밖에 찾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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