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증표(1): 복음의 선포 - 갈라디아서 1장 6-10절
오늘은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냐면 종려나무라는 나무가 있어요. 예수께서 따져보면 오늘에 해당하는 날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 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적이 많죠.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많이 들어가요. 그러나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께서 의미를 부여하시고 거기에 참여를 하시기 위해서 들어 가십니다. 어떤 식으로 들어 가시는가 하면 어린 나귀를 하나 준비해라. 제자들한테 어린 나귀를 하나 끌로 끌고 오라고 하고 예수께서 그 나귀에 앉으셔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하십니다. 아주 독특하단 말이죠. 제자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스가랴서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 하나님께서 왕으로 우리한테 오실 때는 그는 아주 겸손하셔서 나귀에 타셨음이니라. 그런 예언이 있는데 그 예언을 이뤄주시기 위해서 이 나귀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입성했다고 합니다. 그럴때 아까 그 종려나무가 왜 나오는가 하면,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이 이 나무를 흔들면서 아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 라고 하면서 환영한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인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하는 말은 이제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구원하실 분을 보내신다 그런 것을 구약 성경에서 배운 사람들이 아 ! 예수님이 그런 분으로 오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호산나 하는 말은 우리를 이제 구원해 주옵소서 하는 겁니다. 이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이제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말하는 백성들의 마음하고 예수님의 마음하고 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제 예수님이 왕으로 입하시면 정말 영광의 왕으로 임하셔서 이스라엘의 크다란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모든 로마의 압제를 재배해 버리고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오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줄 알았어요. 그래서 환영한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혁명을 일으켜서 왕으로 옥립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시거든요. 이제 이번주 금요일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밖혀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마지막 한 주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백성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무슨 왕이 이르느냐, 무슨 메시야가 그러느냐, 나중에 이 사람들의 기대가 변해가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말한 사람들의 말이 변해가지고서 목요일쯤 되어서는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그런단 말이예요. 그 민중들이 돌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합니다. 왜 자기들의 기대하고 예수가 안 맞거든요.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 오면 이것을 도와 주겠지. 그런데 예수님은 내 기도에 맞게 안해주거든요. 그러면 내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게 아주 커다란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내 기대에 맞게 바꿔놓는일이 있을 수 있어요. 그 때는 예수님이 기대에 안 맞으면 예수님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 기대에 안 맞으면 예수님을 자기 기대에 맞게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에게 아주 맞는 예수님을 만들어 버려요. 우리에게 좋은 예수님, 한국교회에서는 그런 일들이 많아요. 우리한테 좋은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바꿔 버립니다. 아 ! 용서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야. 그래 하나님의 일이야. 그렇게 바꿔 버리는 거예요. 그것도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네 안 맞는다고 해서 예수님으로 부터 도망 가서도 안 되겠고, 마음에 안 맞는다고 예수님을 바꿔 놓을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을 우리가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고난을 받으신 주간이라는 말이죠. 목요일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금요일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십니다. 그리고서 금요일날 무덤속에 있어셨어요. 토요일날 무덤속에 있었고, 토요일은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안식후 첫 날 그러니까 주일날이죠. 그러니까 다음주일날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세요. 그래서 그것을 부활주일, 우리가 다음 주일을 부활주일로 기쁨의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주일의 기쁨의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나가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이 없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잘 보여 주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대게 이번주간을 잘 거룩하게 지켜 볼려고 너력합니다. 좋은 노력입니다. 이번주에는 우리가 평소에 안하던 성경도 열심히 보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그것은 나쁜게 아니고 좋은 거예요. 그래서 이번 주간에 고난주간 특별 기도회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때 새벽기도회에 못나오신 분들 이런때는 이런 때는 나와 보시는게 좋죠. 특별히 목요일날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하신날. 금요일날, 토요일날, 예수님이 무덤속에 있으신날 잘 생각을 하시고 열심히 주님 앞에서 성실히 살아가야 되겠다. 이번주간만은 내가 정말 금식이라도 하면서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는게 좋아요. 그런데 그것이 가끔 가다가 사람들을 타락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이다. 우리가 이번주간을 잘 지켜야 되겠다. 하는 것이 사람들을 타락 시킵니다. 어떻게 타락 시키느냐, 사람들의 심리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면, 정상적인 경우에는 이번주간에 잘하고 그런 마음을 계속해서 평생을 그렇게 살 마음을 가져야 되잖아요. 주님이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나 그러면 그러면 내가 이제 나의 삶을 어떻게 고난을 받으면 살 것인가, 주님을 위해 살것인가, 그렇게 되잖아요. 그걸 위해서 주님께서 교회력을 설정하시고 그렇게 생각하겠끔 하는거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했느냐면, 고난주간만 열심히 삽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말짱 도루묵이고 헛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주간을 잘 지내야 합니다. 아주 특별한 주간이예요. 우리 경우에는 결국 3주가 그럴텐데요. 원래는 다음주일날 우리가 성찬을 해야 되는데, 다음주일날 안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주일날 이 광길 목사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하실텐데 성찬을 해버리면 말씀하실 시간이 줄어드니까 성찬을 그 다음, 다음 주간쯤 할까 합니다. 그러니까 성찬에 참여하려면 우리가 보통 마음의 준비를 잘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몇주간을 성실히 지내야 하는데 그 몇주간을 주님 앞에서 정말 주님의 말씀을 잘 받을 마음으로 지낸다고 할 때 바지지 말아야 할 유혹이 뭐냐면 이 주간만 내가 신실하게 지내겠다. 그런거예요. 그 다음에는 내 마음대로 산다. 이게 아주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언제냐면 교회가 아주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 금요일 그 때를 기점으로 해서 세기를 며칠을 센느냐 하면 거꾸로 뒤로 40일 셌어요. 옛날 교회가 그 40일 동안, 1년 중에서 그 40일은 주님 앞에서 아주 열심히 살아보자.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좀 생각하면서 살아보자. 그렇게 했어요. 우리가 정말 열심히 살아보자 하는 의도는 그 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때도 그렇게 살자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마음이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그 때만 열심히 살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교회는 그 때는 고기도 안 먹습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았는데 내가 고기 먹으면서 음식 좋은 것 차려 먹으면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사순절 전에는 다른 다른 사람 생각하지 않고 떵떵 거리면서 산단 말이예요. 그러면 그 의미가 있겠어요. 없어요 그래서 마음속에 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이 이 한 주간 동안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물론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그 전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왜 그래요 예수님은 우리처럼 이렇게 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세요. 그 분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산다는 자체가 고난입니다. 여러분 사람과 사람이 살아갈때 제일 어땠을 때 고난스럽습니까? 신체적으로 고난스러운 것은 견딜 수 있어요. 제일 고난스러운 것은 저 사람이 도무지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할때, 고난스럽죠?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해서 그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는 의도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이 셰상에 예수님이 살아갈때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얼마나 고난스럽겠어요. 그것이 영혼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 평생을 그렇게 고난스럽게 사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이예요. 그래서 이번 주일을 고난주간이라 했을 때 우리가 이번 주간만 거룩하게 지내려고 하는 환상에서 깨십시요. 그런데 이번 주간을 거룩하게 지내는 일로 부터 시작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다른지는 아시겠지요. 여태까지는 못했으니까 이번 주간을 거룩하게 지내는 일로 부터 시작하셔서 주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에 무엇이 중요한가 하면 여러분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교인된 의무를 다해 나가는 것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까? 그래서 구원 얻는 것 아닙니다. 한가지 이야기해 드릴께요. 제가 국민학교 때 들은 애기가 있어요. 여러번 한 이야기입니다만은 어떤 사람이 죽었어요. 죽은 사람이 요단강을 건너간다고 그러죠. 어떤 친구가 가는데 징검다리가 있어요. 징검다리를 밟고 가는데 징검다리 하나가 없어요. 뜰만 하거든요 그래서 뛰어갔어요. 또 가는데 이번에는 징검다리가 한 수십개가 없어요. 한 다섯개쯤 없다고 합시다. 도무지 뛰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아서 막 웁니다. 울고 있는데 저쪽에 천사가 나타났어요. 아니 여기는 없어가지고 왜 나를 못가게 합니까? 천사가 물어봅니다. “너 이 징검다리가 뭔줄아냐? 이 징검다리가 네가 주일날 예배당에 참석한 회수이다” 한 번은 가다가 빠졌어요. 그것은 뛰어갈 수가 있어요. 다섯주일 빠졌어요. 못간단 말이예요. 그 이야기가 애들한테 아! 내가 주일날 빠지지 않고 가야되겠다는 마음을 줄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아주 나쁜 이야기입니다. 왜 나쁜 이야기냐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되는 것이, 내가 노력하므로써 하나님나라 백성되요? 여러분이 주일날 이렇게 참석했기 때문에 “너 착하다 그래서 내가 너 하나님나라 백성 삼아줄께”그럽니까? 그게 아니예요. 복음은 그게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가 뭘 해서 구원 얻는게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은 어떤 상황가운데 있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잘못한 다음부터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가운데 있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못한다는게 아니고 뭘 하면 하는데 하는 것이 전부다 하나님께 반대되는 일만 한다는 거예요. 그렇죠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만 해 나가죠. 우리 스스로만 일을 하게 되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뭘 해도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노력해 가지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가르쳐주고 그 율법을 지키라고 해도 그 율법을 하나님이 요구하는 철두철미한 수준에서 다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세상에서 성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옛날 교회들이 어떻게 했느냐면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잘 안 될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자.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우리의 원죄가 없어진다. 그렇게 해보자. 그것은 옳은 생각은 아닙니다. 옛날 교회가 그렇게 잘못 생각한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누구의 책임이예요. 거기까지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줬다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내 책임이라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하느냐.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을 만한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예요. 그렇게 가르치면 여러분이 좀 열심히 살 것 같죠. 그런데 그게 두 가지 문제점이 있어요. 하나는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요. 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수준에 못 가는 거예요. 우리 것으로 가지고서는 성경이 뭐라고 하냐면 우리가 행하는 의는 다 떨어진 누더기 같아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핸하는 나쁜것 말고 다른 사람에게 선하고 좋게 해주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표준에 비춰보면 다 떨어진 누더기 같다고 합니다. 그것 가지고 구원 얻겠어요? 그것가지고 아무리 쌓아봤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거예요.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절망해야 합니다. 안되는 거예요. 물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야겠지요.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안되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한 번 읽어서 구원을 얻습니까? 아니예요. 성경 읽어서 구원얻는 것 아니예요. 주일날 예배 참석해서 구원 얻는 거예요? 아니예요. 주일날 예배참석 한다고, 예배당에 가서 헌금 한다고 구원 얻는 것 아니예요. 인간이 행하는 어떤것으로서는 구원얻는 것이 한가지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여기에서 철두철미 해야 합니다. 그럴때에 복음이 들어오는 거예요. 예수께서 너 할 수 없지 내가 다 해줬다. 이제 낭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그게 복음으로 들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복음으로 들릴리가 없어요. 예수님이 뭔데 그렇게 된단 말이예요.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해서 다 이뤄줬다. 그 말씀하심을 붙밪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거예요. 물속에 빠진 사람이 뭐라도 붙잡고 싶겠죠. 그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다 이루어주었다. 그러면 그것을 붙잡아야 되잖아요. 복음은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어줬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못하는데 인간으로써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구원은 하나님이 혼자 하는 겁니다. 내가 그 일에 협동한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단독적으로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에 하나님 !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 들이는 것이지요. 붙잡는 그 자체가 의롭습니까? 그것 의로운 것 아니예요. 그것은 마치 뭐 같으냐면 예수님이 나는 안되니까 그냥 날 받아 주십시요.그리고 나를 예수님한테 던져 넣는 거예요. 예수님께 기대는 거예요. 그게 믿음입니다.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는 전혀 안되니까 예수님이 알아서 해 주시뵤시요. 예수님이 해 주시면 내가 믿습니다. 예수님이 책임지십시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믿는 것이고 복음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오늘 마씀드리는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교회가 진짜 교회인가 아닌가를 판결하는 구분이 뭔가 하는 것이 종교개혁시대 때 그것이 심각한 문제였어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복음을 진짜로 선포해 주는가, 아니면 이 복은을 가리우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진짜 교회인가 아닌가가 판가름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계속 사시면 호산교회 교인이셔야 하지만 혹시 이사를 한다면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 곳에 가서 교인이 됩니까? 아니예요 진짜 교회의 교인이 되어야지요. 그럼 진짜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중에 하나를 배워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그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가 아닌가 그런데 복음의 내용은 뭐예요.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만 하신다. 그렇죠 그것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게 아주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인간이 뭔가 좀 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굉장하긴 하죠.
그런데 인간도 뭔가 뭔가 되고 뭐좀 해야지. 아무것도 안했는데 하나님이 구원해 주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게 우리들이란 말이예요. 그런데 기독교회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거예요. 내가 그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믿고 가느냐 그거예요. 이제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면 그냥 예수님께 기대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께 나는 안되니까 예수님이 알아서 해 주십시요.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겠어요. 예수님이 다 해줬다고 그러는데, 만일에 그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곤란 합니다. “예수님이 다 해줬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나는 마음대로 살면 되겠네요. 내 멋대로 살면 되겠네요” 그런 반응이 나오겠끔 되어 있어요. 사람들의 심리가 바울이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네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네가 율법 지켜서 구원 얻는것 아니란다.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이루어주셨다. 그것만 믿어라”고 했더니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요 그럼 나는 아무것도 손씻고 가만 있어면 되겠네요. 나는 내 멋대로 살면 되겠네요”그렇게 이야기한 사람도 있어요. “은혜가 더하게 하려고 우리가 죄에 거하겠느냐” 바울은 말하기를 “그럴 수 없느니라” 그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아예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주셨다. 그 이야기가 들려 오는데 그럼 나느 내 마음대로 살겠네요. 그렇게 해서 마음이 오겠습니까? 정상작인 마음이 어떻게 와야돼요. 그래요 내가 여태까지 노력했는데 그것으로 안되는데 하나님 !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해서 살겠지요 그래서 감사하기 때문에 예수님 ! 예수님은 날 그렇게 구원해 주셨는데 예수님은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데요. 그래서 그것을 찾아 보려고 성경 열심히 보는거예요. 성경 백 번 읽는다고 구원어어요? 아니예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백 번 일고 천 번 읽기를 원해요. 예수님의 뜻을 알고 싶으니까 그게 좋은 거예요. 그 사람한테... 그게 우리에게 있어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이것 읽는다고 해서 구원 얻는 것 아니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읽게끔 되어있단 말이예요. 여러분이 주일날 예배 참석한다고 해서 구원얻는 것 아닙니다. 그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주일날 참석 안한다고 징검다리 하나가 비는 것 아니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러면 아 ! 주일날 예배 다 빠져도 되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감사한 사람은 오지 말라고 해도 오게 돼요. 그래야 그게 예수님 믿는 사람의 마음이예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셨다/ 그 사실이 생각할수록 정말 놀라운거예요. 나는 애써도 안되는데 하나님이 다 해주셨다. 그게 너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떻게 살게 되겠어요. 하나님 ! 감사합니다. 감사하니까 뭘 좀 해야 될까요. 우리가 사람한테 조그만 은혜를 받아도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이렇게 하게 되잖아요.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내가 한 것은 손톱만큼도 없는데, 내가 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것 밖에 없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을때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행동이 가만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것을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안에서 사는 삶을 살아야돼요. 그렇게 가는 겁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워야 돼요. 억지로 예수믿는 사람의 의무는 이겁니다. 이겁니다. 이겁니다해서 그게 되는게 아니고 내 마음속에서 아 !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셨군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러면서 그게 되어야돼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사는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게 우리 속에서 되어질 것인가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되게끔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좀 더 깨닫고 또 우리가 그럼 예수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나요. 하나님 앞에서 그 뜻을 좀 더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모임을 자주 갖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알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렇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은 정말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그것을 주님께서 해 주신 것입니다.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바울이 여기 갈라디아에서 뭐라고 하냐면 그 이야기를 가리우거나 아니 그래도 네가 뭐 좀 해야돼. 네가 아무것도 안하고 어떻게 구원을 얻어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내가 해서 얻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아 ! 하나님이 다 해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서 사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 그것을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붙잡고 가는 거예요. 그것(복음)을 다르게 가르치면 그 사람에게 저주가 있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가 좋은 말만 해야 될 사람이 저주가 있을지어다라고 한 것은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이 복음의 복음된 것을 가리우는 일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하게끔 하는 것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내가 감사하니까 하는 거예요. 내가 해서 구원 받아요? 내가 주인날 예베 참석해서 구원 받아요? 아니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안할 수 없어서하는 거예요. 바라기는 우리가 이 복음을 변질시키지 않도록, 우리가 이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아서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그 은혜속에서 감사해서 사는 삶을 우리가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증표(2): 세례의 시행 - 로마서 6장 1-11절
우리가 지난주에 교회가 교회인 표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어져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교회에 참석했는데 그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복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선포되어 집니다. 하나는 말로써 선포되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이야기했던 그 복음의 내용이 말로 선포되어진 복음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복음을 이제 눈에 보이게 선포할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례 “거룩한 예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례도 교회가 교회의 표인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복음의 선포와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니 복음의 선포를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재현해 보이는 것이 성례이기 때문입니다.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가 오늘 우리가 행하려고 하는 세례와 또 하나는 세례후에 행하는 성찬입니다. 그 중에 오늘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세례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왜 우리는 세례를 받는 것인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뭐하러 세례를 받는가? 오늘의 본문에 보면, 세례에서 어떠한 것들이 바깥으로 나타내지는 것인가 하는 것들이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일들 그것이 크게는 두 가지인데 그와같은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 입니다. 하는 것을 바깥으로 나타내 보이는 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와 인호다 그런 말을 씁니다. 인호라고 하는 것은 도장을 찍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일이 일어 났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도장 찍는것입니다. 어떻게 표를 하고 무엇을 도장찍는 것인가? 두 가지 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무엇이냐면 오늘 본문3절에 보면, 무릇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무엇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줄 알지 못하느뇨 그럽니까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줄 알지 못하느뇨. 세례에서는 무엇이 바깥으로 나타내 보여지는가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여기 살아 있는데 왜 나 보고 죽었다고 하는 것인가”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삶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닐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닐 것이고,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니 이것을 6절에서 우리한테 잘 말해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합니다. 여기서 이상한 소리가 하나가 나타납니다. 어, 십자가에서는 2000년전에 예수님만 못박힌 줄 알았는데, 그 십자가에서 또한 우리도 못 박혔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떤 사람이요? 옛 사람.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부패한 인간성 전체를 포함하는 인간성을 말합니다. 우리 전체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 포함해서 하나님과 관련 없었던 나의 존재 전체, 그것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나는 죽었다는 것을 표현해 내는 겁니다. 나의 옛 사람 지금까지 나를 주관해 왔고 내 생활을 영위해 왔던 것이 이제는 죽었습니다. 죽었으니까 이 사람은 더 이상 옛 사람에 따라서 생호라해서는 안되지요. 이 삶이 죽었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원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원리적으로 세례때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이예요. 죽은 사람은 좀 더 심각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4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어떻게 되었나니 하면 장사되었나니” 여러분들 이제 큰일났습니다. 장사지낸 사람들입니다. 장례식 다 치룬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원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 본문은 분명히 우리가 장례식을 다 치뤘다고 했는데 에수님께서 무덤속에 묻히셨을때 우리도 같이 묻혔다는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죽은거란 말이죠. 그래서 장사지낸바 되었다는 말이죠. 자 ! 그런 사람이 이제 자기가 살아가지고서 막 움직이겠어요. 그것이 안돤다는 말이죠. 자기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원리적으로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에 주의하십시요.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되어져야 하면 날마다 날마다 그 옛 사람을 죽여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무슨 일을 하다가 남들이 나에게 조금만 이상한 소리를해요. 그러면 그것이 화나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죠. 그러면 그것은 벌써 뭘 의미해줘요. 옛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까 끓어오르죠 죽었어봐요 끓어오르겠어요? 시체를 여러분이 꼬집어보세요. 반응합니까? 안한단 말이예요. 왜? 죽었으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 그것은 선한 일을 행한 것이든지 악한 일을 행한 것이든지 우리 존재 전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때 우리도 같이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례는 그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나도 또한 거기서 같이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어을 이야기해 주는가 하면, 이제까지 나의 삶 전체를 규정짓는 한 가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반해하는 입장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는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죄에 대해서 내가 죽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었으니까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죄가 우리를 사로잡고서 너 이렇게 하라고 할 수 있겠어요?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세례에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겁니다. 우리가 물론 세례를 주죠. 왜 이렇게 세례를 줍니까? 물론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다고 하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세례때에 되어지는 일을 크게 이야기한다면 내가 예수와 합하여져서 나도 죽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그 말은 곧 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제 씻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씻어주셨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본문 가운데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8절에 보십시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산 줄을 믿노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죽은 사람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되냐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납니다.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한 그 주님께서 우리가 지난 주일날 주님께 감사예배 드린대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살나나셨으면 우리도 또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 ! 내가 그것을 믿습니다. 나중에 에수님이 다시 올때 우리가 다시 부활할 줄을 내가 믿습니다. 그정도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죠.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안믿으면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 이상으로 이야기합니다. 5절을 한 번 보십시요.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같이 죽었으면”하는 이야기죠.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또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은 어떻게 된 사람인가? 4절의 뒷부분을 보면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나라” 살리심과 같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세례의 두번째 의미입니다. 세례의 첫 번째 의미는 죽는거라 했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은 이제 죽은 사람으로서 그냥 있느냐? 아닙니다.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살아납니다. 나중에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살아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되죠.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하는 것을 온 교회 앞에서 인치는 예식이 세례식인 것입니다. 나에게 이미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예수께서 사는 것입니다. 바을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내가 사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활하실 때 공부하시는 것, 열심히 선한일 이루는 것, 교회에 열심히 일하는 것, 그모두가 그리스도의 살아계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부활한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그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생명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보여줄 수 있는 귀한 이야기는 주님이 내안에서 사시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서 열심히 귀한 일을 이뤄놓았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잘 세워 나갔습니다. 그래놓고서는 아 ! 이것 내가 행한 것이다. 내가 참 잘했다고 자기 머리를 쓰다듬을까요? 아니지요. 왜 누가행한 것이라고요?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한 것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세례의 의미에 충실한 삶을 사는가, 아닌가는 여기서 판가름 나는것입니다.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제 이러한 삶,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났다고 하는 삶이 내 삶 가운데서 잘 드러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나에게 맡겨진 일을 여심히 했다. 내가 학교 선생님으로서 열심히 살았다. 내가 참 잘했다. 내가 잘한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하셨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죠. 혹시 내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내가 옛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원리적으로는 내 옛 사람이 완전히 죽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이 살아난 그것이 우리 가운데서 정말 약동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특히 바라기는 우리가 이런 세례의 의미에 충실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유아세례의 의미- 창세기 17장 1-14절
우리는 요즘에 교회가 교회인 표징, 어떤 형태가 있어야, 어떤 것들이 있어야 교회가 교회인가? 하는 것들을 성경을 통해서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교회에서는 참된 복음이 선포되어져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렇게 말로 선포되어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도 나타나야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세례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 중에는 어른들에게 자기의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해서 자기가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세례도 있지만 어린이에게 베푸는 세례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보셨고 지난주에도 목격을 하셨습니다. 자, 우리는 어린 아니들에게 왜 세례를 베푸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아, 어린아이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거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니, 세례가 뭔데, 다 거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니, 세례가 뭔데, 세례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밖으로 내보이는 표인데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세례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있다고 하는게 우리에게 좋은 도전이 되어집니다. 그것은 왜 도전이 되어지느냐면 아, 세례는 왜 하는가? 아,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은 어린이들에게도 하던데요 그러니까 우리들도 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데서 우리로 하여금 벗어나게끔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전통 때문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전통이 우리 가운데서 지켜 질려면 왜 우리가 그것을 행해야 하는가? 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서 행해야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물을려고 하는 질문은 왜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일까? 어린아이들 에게 세례를 베푸는 그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런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너희들이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어라,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편에서는 저 사람들이 어린아이에게는 세례를 베풀지 말아야 된다, 라고 말하는게 옳은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하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백성으로 삼으셨다 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으면 어린아이에게 세례 준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그저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렇게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합니다.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해서 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세요 여기 아름다운 꽃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우리 교회도 꽃이 많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꽃이 있습니다. 이런 꽃들을 보면서 아, 꽃들이 아름답구나, 주님께 드리는게 아름답구나 그러니까 사람들 가운데서 더 순수한 어린 아이들을 주님께 그리면 어떻겠는가? 그냥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듯이 꽃을 드리는 것처럼 어린 아이를 드리는 것처럼 드린다 그것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받아 주시지도 않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한다, 특별히 성례로 무엇을 행한다고 하였을 때는 성경 가운데에서 분명한 어떤 근거, 하나님께서 이것을 세우셨다 하고 하는 근거가 있어야지 만 행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은 것을 사람들이 만들어 내서 하는 것은 아주 못된 일이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그런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는 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속에서 아,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성을 다한 것으로 해서만 다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에서 규정해 놓으신 대로 하나님께 섬겨 드려야만 그것이 의미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월이 지나면서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깨쳐 나가고 아,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무엇하기를 원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세례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것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약속을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약속을 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셔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식으로 약속을 해 주셨느냐 하면 자, 내가 너희들에게 너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제공해 줄거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 사실을 그냥 믿어라, 그 약속을 해 수신 거란 말이죠. 이 약속이 여러 가지 형태로 이제 변형되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가장 처음에 나타나는 형태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옛날에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을 부르셔서 그 사람하고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을 하셨을 적에 그 약속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 에게 뭐 잘해 주겠다, 그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이제 온 세상의 만민들을 구원할 수 있는 그 작업을 이제 시작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는데 너는 그저 이 사실을 믿고 너 자신을 이 사실 속에 던져 넣어라, 그것이 약속이 체결되어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 약속의 의리를 이야기해 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을 해 주시는데 이것은 결국은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란다, 그런데 이 약속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아직 그 시기적으로 어린 상태이므로 두 가지 현세적으로 보이는 모습들을 제공해 줍니다. 현세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에게 자손을 줄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손을 줄 것이다 그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 시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손을 줄 뿐만 아니라 자손들이 많아지기만 하면 안되고 그 사람들이 들어가 살 곳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 어떤 땅을 내가 너희에게 허락해 수리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온 세상 백성들을 하나님이 구원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이 사실에 있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맨 처음에는 자식을 기다리게 합니다. 자녀를 기다리게 한다는 말이죠.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가 오늘의 본문의 17장 1잘에 보시면 99세 였다고 그랬습니다. 99어때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아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이야기하시느냐 하면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이것이 약속이란 말이죠 그 약속이 결국은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한 대로 이루어집니다. 100세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 이 하나님은 참 믿음직한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참 든든한 하나님, 내가 그분에게 기댈 수 있는 하나님이구나, 그것을 깨닫게끔 하기 위해서 그로 하여금 이 생각을 하게끔 한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자손을 얻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얻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성경 속에 있어서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경험을 해 나갑니다.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과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 이야기 속에 같이 들어가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시는 과정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야, 이 하나님은 정말 믿을 만한 하나님이구나, 내가 굳건히 믿을 수 있겠다 그 생각을 했을 때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 믿을 만한 하나님이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면서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를 들어서 2절- 자식이 자녀들이 많아진다고 그랬죠 그래서 언약이라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면서 세우신 언약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은혜의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사람의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시는 겁니다. 사람은 그냥 그 언약을 기대기만 하면 된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4절에서도 보면 다시 한번 언약 이야기가 나옵니다. 4절-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될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이름에 대해서 개명 식을 하십니다. 이름을 바꿔주는 일을 한다는 말이죠. 여태까지는 “아브람” 그랬습니다. 이제부터 아브람이, 아브라함, 많은 무리의 아비다, 그런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제 아브라함에게서 많은 무리, 많은 민족이 날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배워야 할 것은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맺은 언약을 지켜 나가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셔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 관계를 가지고 계시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면 그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7절에 그 이야기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7절-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말의 함의에 따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언약은 그저 하나님 앞에 언약을 맺고 있는 당사자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까지 들어간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저 한 사람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날 사람들이 다 언약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의도를 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 아느냐 하면 선생님들이 뭘 하다가 잘 안되면 칠판에 그림을 그리잖아요? 그죠? 그러면 이것을 학생들이 좀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이유가 뭡니까? 또, 그것도 안되면 학생들하고 가서 직접 뭘 한다는 말이 예요 그냥 말로만 하면 사람들이 다 졸아 버리죠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처럼 다 졸아 버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안될려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느냐면 제가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하면 이게 잘 되는데 그렇게 하면 걸려 넘어질 분들이 있어서 그렇게는 못하고 그런데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그 심정을 아셔야 되요. 하나님께서 이것을 정말 중요한 것이 다고 하신 것을 알기 위해서 어떤 석으로 하시기를 원하셨느냐 하면 실물 교육을 시키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시청각 교육이 아니고 실물 교육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도록 하시기 위해서 언약의 표를 너희 몸에 가져야 되겠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남자들로 하여금 하례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일종의 이것이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포경 수술입니다. 남자아이들은 언제나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도록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언약의 표를 자기 안에 갖는다는 말이 예요. 아, 그러면 여자들은 언약 속에 못 참석하는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는 사회가 어떤 사회냐 하면 남자들이 중심인 사회였기 때문에 남자들을 대표로 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성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표로써 할례를 행하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몸에 아, 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라고 하는 표를 가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걸 마음속에 딱 생각 하면서, 내몸에 이 상처가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아브라함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식일 없는 난지 8일이 된 아이에게 다 행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다 할례를 행합니다. 누가 행하느냐? 그 사람들의 랍비들이, 선생님들이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목사님들이 할례를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백성들이다,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언약 관계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관계는 오늘 우리와 맺으신 언약 관계와 나주 동일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언약 가운데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장차 하나님께서 누군가 우리를 위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이다, 하는 것을 믿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들어갔다는 말이죠.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아, 아브라함이 그렇게 바라 왔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렇게도 바라 왔던 그 기다리던 그분, 메시야가 우리 가운데 오셨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우리도 어느 언약 속에 들어갑니까?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맺은 은혜 언약 가운데에 우리도 들어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은혜언약, 하나님께서 이 일을 전적으로 다하실 것이다. 하나님 혼자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언약 가운데 들어간다는 말이에요. 여기 우리가 행하는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바깥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 보이는 예식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그것이 세례 의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나는 같이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을 때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가지고 같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이야기를 해도 이것이 그냥 말로만 있을 수가 있어요 사람들이 정말 마음속에 예수의 부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을 때 뭐하자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가끔가다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뿐만 아니라 모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이기도 합니다. 부활절을 기념하고 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예수의 부활 생명이 살아서 약동하는 그것이 있는가? 그것참 생각을 해보면 여러분이 요즘에 들에 나가 보시면 그 파란 움이 솟는 모습들이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도 아침에 차를 타고 오면서 보니까 파란 움들이 솟아나는 그것들이 아주 아름답게 보여요. 한 가지 새롭게 발견한 것은 나뭇잎이 파랗게 되는 그 모습이 밑에 있는 가치에 있는 잎일 수록 더 파래지더라는 거예요 그에 아마 밑에서 수분은 빨아올리고 하는 거기에 먼저 가니까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을는지 모릅니다. 이 따가 그 이야기를 잠깐 하죠. 하여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력이 자연에 있어서는 그렇게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고 부활절날 이야기해 놓고서는 우리는 뭐 하는 것인지, 내 속에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있다고는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있는지 우리가 한번 반성을 해봐야 합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이게 그저 우리 가운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정말 나로 하여금 기쁘게 하고 내 생활 가운데서 내가 예수와 함께 살아간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루 은혜스러운 것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을 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우하셔서 내가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가게 괴면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그렇게 괴면 예수님을 믿는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아주 은혜로우셔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와 언약을 맺는다, 그런데 그 언약이 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너의 후손에게도 적용되리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도 무엇을 행했다고 했습니까? 아까 할례를 행했던 것이죠. 이제 신약에 있어서는 그 언약의 표가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 다 할례를 행하는 것 아니잖아요 우리가 유대인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 다시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할례를 안 행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표, 세례를 행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가운데 세례를 안 받은 사람들은 아, 하루빨리 내가 그 표를 바깥으로 내보이는 의식을 행해야 되겠다, 그런 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준비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 할례를 행한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게 하셨듯이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세례를 베풀도록 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약속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녀를 주시면 그 자녀는 그저 보통 자녀가 아니라 벌써 하나님과 언약 가운데서 주신 언약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들입니다. 조건은 있는데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을 경우에 하나님을 내가 믿고 있을 때 우리들의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가득한 축복 가운데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란 말이지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마음으로 이 아이를 우리에게 언약의 자녀로 허락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표현해 내는 의식으로써 세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세례를 행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든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행했다고 해서 그 아이가 그때 중생된 것도 아니도 세례를 행했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이 다 보장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아이에게 세례를 행하여서 그 다음에는 정말 이 세례의 의미가 그 아이의 생애 가운데에서 잘 드러날 수 있게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노력합니까?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아이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늘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아, 그것은 부모님이 알아서 하는 거겠죠 물론 그렇습니다. 일차적으로 책임이 부모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주간에 세례, 유아세례의식을 가질 때 부모님들만 세례의식을 행한 것이 아니고 온 교회의 회중이 다같이 주 앞에서 서약을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하나로 만드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그저 핵가족 식으로 움직이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취급하십니다. 우리를 한 교회의 회원으로 묶어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 쟤는 딴 집 아이인데 난 책임 없어 그런 식으로 사유하게끔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끔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 부모님과 거의 비슷한 책임을 우리가 같이 져 나가게끔 해 주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 가운데 이렇게 주의 언약의 자녀로 드려지는 아이가 있을 때 온 회중이 정말 기뻐해야 합니다. 아, 주님께서 이 언약을 분명히 해 주심을 참 감사드립니다. 하는 의식을 가져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또 우리에게 굉장한 책임을 부여해 나갈 것입니다. 유아 세례를 행하는 교회는 반드시 기독교적인 교육을 교회 전체에 해야 할 필연성을 가자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해 놓고는 기독교 교육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일차적인 책임을 가집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주 앞에서 잘 양육할 것인가? 그래서 그 아이가 성년이 되어서 자기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러고 나서는 정말 내가 언약의 백성이 되었음을 내가 인정합니다 고 고백할 때 우리가 그것을 입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아이들이 14세, 15세, 16세 어느 정도 의식이 성장해 가지고는 자기가 분명히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 그 존귀한 자리로 내가 정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다 그런 표현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우리가 부지런히 그 아이에게 신앙을 잘 양육시켜 가지고서는 그 아이가 신앙을 고백하게끔 우리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자라 나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과 함께 우리가 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아, 유아세례를 옛날에 받았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부모님의 그런 신앙에 근거해서 옛날에 내가 세례를 받았었구나, 그런데 내가 지금 내 입으로 그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분명한 의식이 없으면 문제일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세월이 지나가면서 이 우리 마음 가운데에 모든 사람들이 큰 사람이거나 작은 사람이거나 나이 드신 분이거나 젊은 사람이거나 우리가 모두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에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있기를 원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그런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에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있기를 원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그런 언약의 백성들이다 하는 것을 인정하고 생활을 해 나갈 때 언약의 백성답게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왜?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완전의 표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매일매일 노력을 해서 그것이 우리 가운데에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여지지 않으면 내가 정말 언약 백성의 원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물어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대개 여기에 나오신 분들은 다 하나님의 언약 관계 가운데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아, 하나님이 나와 언약 관계를 맺으셨구나 잘 모르겠는데요, 아브라함하고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언약 관계를 맺으셨지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언약도 안 맺으셨는데 언약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우리가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이 모든 조건을 다 제공해 놓으시고서는 너는 이 사실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내가 여기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주어지는 언약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언제 이 언약 가운데 들어갔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서는 순간 우리는 언약 관계 가운데 들어온 백성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이 매일 매일의 삶을 사시면서 이 의식을 갖는게 중요합니다. 주일날 아침에 이렇게 예배 드릴 때에만 아, 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그것도 해야죠, 그것 안하면 참 문제인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그 의식도 없이, 그러나, 여러분들이 다른 교회에 갈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이니까 예배에 참석을 하십니다 그죠? 우리가 동일한 언약 백성입니다, 하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지요 이것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이것 안하고 있다, 참 문제죠 이왕 할거면 우리가 분명히 하자고 그랬습니다. 그죠? 5분뒤에 오시지 마시고 최소한 5분전에는 오세요 어떤 분은 제가 5분 그러니까, 왜 5분이죠, 최소한 15분전에 오라고 그러지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의도를 아셔야죠. 최소한 그렇게 라도 와야 예배가 제대로 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뭐냐면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다 드린다고 해서 언약 백성의 의리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언약 백성들은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에서 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이 의식을 여러분들이 심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자녀가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그런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것을 심어 주어야 할 사람들인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의식이 없이 내가 하나님과 거룩한 약속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의식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이겠는가? 내 속에 그런 것이 없는데 어린아이들의 마음속에 그 의식이 심어질 수 있습니까? 내 속에 분명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에서 이루실려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내가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 의식이 있어서 매일 매일의 생활을 그렇게 해 나가셔야지, 그것이 어린아이들 에게도 전달되어지고 가르쳐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그런 언약 백성으로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증표(3): 성찬의 바른 시행- 고린도전서 11장 17-43절
오늘 아침에 우리가 읽은 성경교독에서도 같은 사상이 표현되어 있었는데 오늘 성가대의 찬양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집에 거하기를 원한다, 그런 이야기가 이제 나왔습니다. 오늘 성경교독을 보면 우리가 할 때 주님의 집에 있는 하루가 다른 곳에 있는 천 날보다 나으니라, 천날을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주의 집에 하루 있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쉽게 오해랄 수가 있습니다. 아, 예배당에 나오는 하루가 다른 데의 천날보다 낫다는 말인가? 그런 함의가 있는가, 그러나 거기서 우리가 벌써 벗어나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했었냐면 예배당이 주님의 법이 아니라고 그랬었죠. 우리는 그렇게 일고 있는데, 우리가 여태까지 무엇을 했습니까? 주의 집, 성전 그런 것은 다 교회를 가르친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교회는 무엇이라고 그랬죠? 우리 자신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이 건물이 주님의 집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우리가 이야기한 것이 맨날 분명히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집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삶이, 그죠? 그럼 결국 뭐냐? 우리가 주의 집에 하루 있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주의 백성 노릇 해야죠.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가 우리 회원들의 그 모임이 사귐들이 정말 주님이 원하는 그런 모습을 드러내야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면 교회가 참 교회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지금 살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를 교회가 참 교회이려면, 즉, 지금이 우리의 공동체가 정말 주님이 내 교회다 인정하는 공동체이기 위해서는 첫번째 무엇이 있어져야 한다고 했어요? 바른 복음이 선포되어져야 한다고 그랬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복음이 선포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뭐 헌금도 하고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그랬었습니다.
먼저 그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그 교회와 관련해서 생활해 가면서 내가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복음의 인식이 생겨지는가, 내 속에서 생겨져야 선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정말 내가 즐거워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말로만 선포되면 말로만 하면 졸린다고 그랬잖아요. 그죠? 예수께서는 이것을 말로만 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끔 하기 위해서 무엇을 제정하셨다고 그랬습니까? 성례를 제정하셨다고 그랬습니다. 세례를 주고, 그래서 눈으로 보지 낳습니까? 아, 우리가 저처럼 예수와 함께 죽고, 살아났다고 하는 것을 눈에 보면서 나한테도 저런 일이 있었지, 그죠? 성찬을 하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고 구체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그러셨습니다. 그것도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성례를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가 그것이 교회의 제대로 된 표징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것과 연관이 되어서 대단히 중요한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는 이야기는 뭐냐? 우리가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는 것이죠. 문제는 이 말씀이 선포되어지면 그 말씀대로 우리가 사는 가 아닌가 하는 것을 서로 살피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서로 권면하고, 아닐 때 징계도 하고 하는 것이 권징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한국 교회는 권징을 거의 안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다 진짜 교회가 아니죠. 무시무시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이것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권징을 시행하라고 했는가? 이것이 성찬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대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도록 하기 위해 권징을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성찬에 제대로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끔 인도하는 방식이 권징이라는 것입니다. 왜 성찬 그것 그냥 하면 되지 어떤 사람은 하고 안하고를 생각해야 되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주의 떡이나 주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주의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7절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죠. 우리가 성찬을 할 때 떡을 떼면서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찢기신 주님의 살입니다, 주님의 몸입니다 그렇게 했고, 포도주 잔을 나누면서 이것이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피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이것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결국은 그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그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냥 교회 가면 하는 것인가 보다, 그냥 1년에 몇차례씩 이것을 하는 것인가 보다 라고 그 뜻을 별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거기에 들어가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적으로 왜 이것을 우리가 행하는가? 결국은 왜 행합니까? 우리가 여태까지 몇 주일 동안 생각해온대로 주님과 나와 그 생명 적인 관계를 말해 주기 위해서, 그죠? 나는 그냥 살지만 나는 그냥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 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된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살듯이 우리 영혼이 주님과의 관계성 가운데에서 그것이 내 영혼의 음식이고,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이고 내 영혼을 상쾌하게 해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몸이다 해서 한 떡에서 참여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것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 뜻이 드러나게끔 해 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행하면서 그 뜻을 별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행한다든지, 아니면, 뜻을 생각하면서 행하긴 행했었는데 그 다음에 우리의 공동체 모임 가운데에서 그것이 잘 드러날 것 같지 않으면 지금 한 몸이라고 해서 한 몸에 참여했는데 실제적으로 살아갈 때는 한 몸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그것은 결국 무엇이 되느냐면 주님의 몸과 살을 범하는 죄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느냐면 “너희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국민학교 학생들이나, 중고등부 학생들은 흔히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나오다가 저런 사람이 있으니까 안 나와야겠다, 흔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데, 결국 한 몸이라고 하는 성격이 안 드러난거쟎아요. 그걸 굉장히 의미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거 그래도 되는 것인가? 그러면 안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고린도교회에는 구체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성찬을 하는데, 우리와는 다른 한가지 양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다 대개 미리 준비해왔는데, 이 분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각자가 성찬에 사용할 것을 다 가져 왔었습니다. 옛날에 다 그렇게 했었습니다. 성찬을 할 때 가져올 것을 다 가져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가끔가다가 늦었는가 어쨌는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오니까 자, 그럼 우리가 먼저 시작하자, 그래서 자기가 싸온 것을 먹어요. 도시락 싸와 가지고 자기들이 먼저 먹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없어 늦게 오니까 못 먹고 어떤 사람들은 많이 가져와서 많이 먹으니까, 포도주도 많이 먹으니까 술취하고, 진짜로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한 번 보십시오. 21절 - 그러한 일이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한몸도 아니고 같은 먹을 수 있느냐 싸우고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칭찬할 수 없노라, 바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아,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요 비슷한 기준으로 바울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를 바라봤을 때 뭐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주의 만찬에 대해서, 즉 교회에서 행하는 이런 예식들에 대해서 별 의미 없이 임한다든지, 의미 있게 임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가 삶 가운데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결국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느냐 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를 나타냅니다. 무시무시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행하는 거냐면 우리에게 은혜를 나누어주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거든요. 은혜의 방편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사림들한테 무시무시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고 죄를 짓게끔 하는 결과를 결과적으로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린도교회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한번 보십시오. 30절-“잠자는 자”-예배 시간에 조는 자가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 가운데에서 잠자는 자, 그 이야기는 뭡니까? 죽은 자들,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사람들, 그러니까 함의가 뭐냐면 약하게 되고, 병들데 되고, 죽게 되는 일이 성찬을 잘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먹고 마셨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도 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또,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운데 병들고 약하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것 없습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고린도교회 상황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약하고 병들고 죽은 사람도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즉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느냐? 이것은 모든 병의 경우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주님께서 거룩하게 여기는 것을 정말 거룩하게 여기지 안을 때 주님은 거룩하다고 그랬는데, “아이 주님, 그게 뭐 거룩하겠습니까?” 말로는 그렇게 안하죠.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여기지 않을 때 결과적으로 이런 일이 발생했던 결과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주님은 하게 하셨는가? 주님의 중요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죠. 우리가 자녀들이 잘못하면 그냥 내버려두지 않죠. 징계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 말씀에 근거해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생자일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징계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 약하고 병들고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우리 사이에 약하고 병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 우리가 죄악의 구조 가운데에서 살기 때문에 온전하게 살아도, 그래도 죄악의 구조 가운데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우리 가운데 임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때 욥처럼 굳건하게 우리가 그것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간혹 가다가 이러한 일이 발생할 구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니까 경우가 다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하면 안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한테 와서 뭐라고 합니까? 야, 네가 죄를 범했으니까 이렇게 당하고 있지, 이 따위로 이야기하는 사림이 있죠. 친구들이 와서 위로한다고 하면서 이들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겠죠.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마다 경우가 다 다르기 때문에, 뭐 한꺼번에 다 몰아가 지고 이건 이래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러나 또 그런 경우는 아예 없다, 그것도 또 문제입니다. 그런 경우가 또 있는 것을 고린도교회의 경우를 통해서 봅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징계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 징계는 하나님이 매번 너 잘못하면 저 잘못했지, 매번 이래요? 우리들이 아이들을 야단칠 때 아이들이 잘못한 만큼 뭐하지 않죠? 하나님의 징계는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맨날 그대로 갚으시면요, 벌써 여기 있지 않았어요. 벌써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사실은 우리는 형벌을 안 받습니다. 예수님이 그 형벌을 다 받으셨죠. 내가 예수님을 믿는 한. 그런데 간혹 가다가 주님께서 우리가 잘못하면 그 우리가 잘못한 것에 비례해서가 아니라 조금씩, 거기에 비례하면 아무것도 아닌 징계를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서 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이런게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결국 이런 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그런 경우들을 통해서 우리의 실수를 살피게 됩니다. 아, 나 스스로의 삶을 살피고, 내가 그 교회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피고 하는 것을 통하여서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면 맨 마지막 순간에 죄 정함을 받지 않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32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32절- 죄 정함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죄 하시는 거예요. 그것을 언제하시냐면 최후의 주님의 심판의 날에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그렇죠?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받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미리 주님의 죄 정함을 받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안 할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펴 가면 됩니다. 그 판단하는 권리를 누구한테 주셨느냐 하면 우리 스스로에게 주셨다는 거지요. 그래서 성격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해 주는 말 가운데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무엇이냐 하면 “스스로 판단하라” 그런 말입니다. 너희 스스로를 살피라, 그리고 난 다음에 성찬에 참여하여라 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판단하는 기준을 찾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어디에 있느냐면 성경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혼자 읽을 때에도 이것이 우리에게 판단의 기준을 설정해 줍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한국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옛날에 서구 교회에서도 성경을 우리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거울 앞에 가면 여러분의 얼굴에 검뎅이가 묻어 있는지, 뭐가 잘못되어 있는지 그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처럼 우리가 우리의 스스로의 기준을 갖고 딱 생각하면 우리 잘못한 것 없죠, 내 기준을 가지고 했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뭐냐?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알려주는 것이 이 설교 시간에 하는 것이라든지, 교회에서 이렇게 말씀을 선포 해줄 때 그것이 기준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우리가 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 우리가 주님의 성찬에 은혜롭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원래 그렇게끔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하고 마지막 날에 최후의 심판에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왜? 우리는 매번 우리 스스로를 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에 혼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다 각자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자가 주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양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자가 주님 앞에 가서 갈 수가 있는 거란 말이지요. 여러분이 판단했을 때 잘못했다고 와서 교회의 목사님한테 와서 하나님 앞에 제가 이러이러한 것을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고하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냥 여러분 스스로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옛날 캐토릭 교회에서는 성찬을 하기 위해서는 목사님한테 가서 즉, 신부님한테 가서 내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만 해요. 그걸 해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놓았단 말이지요. 나쁜면이 있습니다. 왜? 우리 양심의 주인은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신부님들이 우리의 양심을 지켜 주는 그, 이 시대의 양심이 아니에요. 목사님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뿐 이십니다. 그러니까 각자가 스스로를 살펴서 주님 앞에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교회가 서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좀 살펴 가지고 이렇게 믿음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때 알아서 하십시오,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서로 돌아보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책임을 어디에서 주고 맡느냐 하면 당회에서 주로 맡습니다. 당회가 그것을 위해서 그래서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잘 안해나갈 때 그것에 대해서 하게 끔하고, 안할 때에는 벌이라도 가해서 하게끔 하는 것이죠. 옛날에 이 말씀에 충실할려고 하였을 때에는 요한 칼빈이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때 제네바에서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당회에다 갖다 좋고 막 야단을 치는 거에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우리가 다음 주에 이제 교회에 세운 일꾼들에 대해서 공부할텐데 그 중에서 장로님들은 뭘 하느냐면 주일날 선포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맨날 생활에 적용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것을 살펴보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심방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제네바 교회에서는 심방을 누가 했느냐 하면 장로님들이 주로했습니다. 장로님들이 하다가 아, 우리가 하다가 안되니까 말씀을 가르치는 분들이 좀같이 좀 해 주십시요. 그래가지고 서는 목사님도 같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장로님들이 심방을 했다는 말입니다. 심방을 하는 목적이 뭐예요? 사람들이 정말 이렇게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따라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살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 그 일이 왜 일어나지는 겁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복음이 말로 선포되고 그 다음에 그것이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선포되는 성찬을 행하고 하는데, 그 성찬을 행할 때 제대로 참여할 수 있도록 그것을 돌보는 일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말씀의 선포, 성찬, 또는 성례의 시행, 그리고 권징의 시행이 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 묶음입니다. 그래서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있는 교회는 참 교회라고 말씀하신다, 이거죠. 이것이 제대로 안 행할 때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 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게 어디냐면 구약의 사사기입니다. 그때는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것이 뭐냐 하면 각자가 판단해서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어지면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서 내 기준을 설정해서 하게 되면 그게 문제란 말이지요. 그래서 마음속에 이 생각을 하시면서 주의 교회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주의 교회 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목적이 뭡니까? 교회에 모이는 목적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것이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니까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 어떤 다른 일이 교회에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일인데, 경배는 왜 하는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경배한 자로서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삶에 그 경배의 모습들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게 우리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 가운데에서 한 몸이라는 것이 나타났으면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그것이 한 몸임이 드러나야 되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임이 구현되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바울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야기해 준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도 이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저 아, 교회 나가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보다, 그 정도로만 멈추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몇 주간에 걸쳐서 교회의 교회된 표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쳐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노력을 해 가지고서는 물론 우리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이것을 이루어 나가게끔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께서 그런 마음을 주실 때 그렇구나, 내가 이것을 이루어 나가야겠다, 하는 마음에서 이것을 이루어 나가야 교회로서 서는 것입니다.
성찬을 행할 때 사람들이 스스로를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왜 이렇게 하라고 하느냐면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선 내가 주님께로 한번 돌아섰잖아요 그런 다음에 사람들은 맨날 잊어버립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잊어버리는 거와 같습니다. 맨날 잊어 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꾸만 행하도록 했습니다. 성찬을 얼마나 자주 행해야 되는가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네바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보니까 워낙 초대 교회 때 매주일 행했으니까 매주일 행하게 되요 그래서 이 말씀에 따라서 제네바 교회에서 매주일 행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왜 반대하는가? 이것을 매주일 행할려면 자기 스스로를 매주일 살펴야 되잖아요 안 그러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신다는 무시무시한 일이니까 매주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도 반대하니까 이것을 좀 절충을 해 가지고서는 제네바 교회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잘 생각을 하셔야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기준이 어디서 찾아 나와야 되느냐? 우리의 전통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번 교회에 관한 것들을 어깨 너머로 배운단 말입니다. 교회에 가니까 이런 식으로 하더라, 그래서는 안되고 성경 가운데에서 뭐라고 하는지를 배워나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거에 따라서 우리가 규정을 해야 됩니다. 따라서 이 성찬을 얼마나 자주 행해야 할 것인가? 그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렇게 권장 하는 일들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것들도 우리는 성경 가운데에서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원리에 충실해서 장노님들이 당회에 모여서 아, 우리 교회는 1년에 몇 번을 성찬을 행합시다, 하는 것들이 결정이 되겠지요. 아, 우리가 매번 행한것이 있는데, 그것대로 하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생각을 하시고 주님의 뜻이 이것을 행하도록 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시면서 여러분들이 “ 참 답답한 사람들”, 그런 생각이 들죠. 아, 그 주님의 귀한 만찬을 먹으러 와 가지고서는 다 나뉘어지고 말이죠. 이것 뭐하는 것들인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에서 생각되어져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에 참여하고 난 다음에 정말, 아 주님께서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어떻게 부르신가? 어떻게 하도록 하신가? 이 인식이 딱 서 가지고 그 다음에 각자가 흩어져서 자기의 삶의 처소에서 정말 주의 백성답게 행하고 그리고서는 또 주일마다 모여서 주의 앞에서 이 축제를 벌이고, 이게 어떤 축제냐면 하나님의 나라가 극치에 임했을 때 임할 축제가 우리가 맨날 앞당겨 쓰는 것이란 말이죠. 앞당겨 축제를 벌이고, 또 그 말씀에 근거해서 또 주님 앞에서 열심히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 저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늘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야 된다는 말이죠. 고 원리대로----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원리들을 이제 교회에서 배워나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죠? 그런데 이 원리들을 배우기에는 시간들이 너무나 없어요, 사람들이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주로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해도 해도 안 나오니까 맨날 오십이요, 오십이요, 그러다가 시간 다 사죠. 그래서 하는 본래의 일은 다 제쳐놓고 딴 일을 하는 겁니다. 딴 일을 하는 건가? 일단 또 와야 배우니까 자꾸 오십이요, 그 이야기하다가 시간 다 가 버리고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고린도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 다 해산해 버리지,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도 이 답답한 사람들, 사실 여기 이 문제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에 아주 복잡한 문제가 많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도 뭐라고 하느냐면 “형제들아”, 그러니가 우리가 문제가 많아도 바울이 형제들아, 그럴 거예요, 그렇죠? 형제들아, 그 소리를 들었으면 그 다음에는 그 소리에 맞게끔해야 됩니다. 또, “주안에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성도들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그럴 거예요. 우리가 문제가 많지만, 주님이 원하는 대로 아직 우리가 구현해 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를 향하여서 성도들아, 그렇게 하시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우리가 그 일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 행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하시고 그 모습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디서 구현되느냐 하면 사실은 여러분들이 사신데 서 교회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시는 것만이 주님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요것은 반입니다. 반도 안될지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주일날마다 예배에 다 참석을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집에 있는 것의 반은 어디에서 행하는 것이냐?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참여하는 사람다웁게 구현해낼때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호산) 교회는 여러분이 퍼져나가면 퍼져나간만큼 이것이 (호산) 교회입니다. 그죠? 요 공간만이 호산교회가 아니라.
여러분이 가서 얼마나 하나님 백성다웁게 그 나라의 영향력을 드러내면서 사는가? 그래서 교회의 영향력이 있는 것이란 말이죠. 우리가 그것을 안 행할 때, 우리가 이렇게 모일 때는 좋은데, 교회로서의 영향력이 이 세상에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일하는 처소 가운데에서 정말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영향력이 드러나는가? 그리고는 앞으로는 우리가 정말, 이렇게 자연스럽게들 다 모이기 때문에 다 모여서 우리가 이제 구체적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런 것들을 또 잘 교훈을 받아 나가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고 그런 우리 교회의 모습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출처: http://cafe.daum.net/selck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1) - 이승구 목사 (0) | 2014.05.07 |
---|---|
복음의 능력 (0) | 2014.04.29 |
영화 <노아>를 보고서 / 이승구교수 (0) | 2014.04.17 |
"은혜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 - 이승구 교수 (0) | 2014.04.09 |
[스크랩] 성경은 신화인가 사실인가/이승구교수 (0) | 2014.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