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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

이승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4. 4. 29.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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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⑶ “복음의 능력”-로마서 1장 16~17절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6~17절)

 

 

요즈음 각 직장마다 신우회가 조직되고 열심히 성경공부와 기도회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직장 신우회에서 일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직장 동료들 가운데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이 자신들이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을 숨긴다고 합니다.

저는 그러한 말을 들을 때 목사로서 어떻게 하면 그분들에게 ‘자신들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에 대해 긍지를 갖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곤 합니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면, 예수 믿는 일이 자랑스럽게만 느껴지면 자신이 교인이라는 사실도 역시 자랑스럽게 생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일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려면 먼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능력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자신들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에 대해 그렇게 긍지를 갖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자기 자신의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가 받은 복음 자체에 부끄러움을 느낄만한 요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저도 떄로는 무의식적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던가, 또는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 될 수 있는대로 그들의 이성에 걸림돌이 되는 복음의 내용은 은폐하고 말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곤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에는 그가 부끄러워할 요인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에는 부끄러워할 요인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부끄러워할 내용의 것이지만 바울 자신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이 이 세상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되는지? 그리고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 부끄러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이 두 가지 문제는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서 해답을 분명히 얻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늘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늘 자신을 갖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움추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 그 모습이 안스럽기도하고 불쌍한 생각마저도 들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떳떳한 모습으로 생활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질까요?

 

마가복음 8장 38절에 주께서는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주님을 부인하는 의미도 됩니다.

 

첫째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복음은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우리의 상식과 경험과는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자신의 경험과 일치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고, 심한 거부감마저 갖습니다. 우리가 상식이란 말을 흔히 사용합니다. 상식을 벗어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뜻은 경험을 벗어나지 말라는 의미도 됩니다.

우리가 거의 절대시하는 경험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태어날 때에는 반드시 남, 녀의 육체적 결합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이미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값비싼 것일수록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거의 절대적 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복음은 우리의 절대적인 경험에 한 가지도 일치되는 것이 없습니다. 복음에는 처녀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고 하고, 죽었던 인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생은 단순히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비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복음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게 됩니다. 자신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부끄러움입니다. 지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복음으로 인한 콤플렉스가 강합니다.

 

바울 역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경우 우리보다 복음을 더 부끄러워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헬라문화의 시대였습니다. 헬라문화의 특색은 철학입니다. 헬라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복음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 가문에서 태어나 최고 학부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한 히브리의 최고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복음은 매우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의 주인공인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 전에 바리새인으로서 알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새롭게 이해한 하나님은 절대 타자로서 인간 역사를 초월해서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무감각하고 경직된 분으로서의 하나님도 아니었습니다. 또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하는 편협된 하나님도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윤리와 도덕만을 따지는 도덕가와 같은 분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만난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한 나라의 운명과 개인의 삶에 깊은 관심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며,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며, 그들에게 대화를 건네 오시는 분이시며 그들의 생활과 운명에 실감 있게 간섭해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뵙게 되었을 때, 그렇게도 어리석고 거리끼는 것이 되었던 복음은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하나님은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셔서 문밖에 서서 인간을 기다리고 계시며 인간과 사귐을 갖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될 때 복음이 비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이란 콤플렉스는 다 없어집니다. 오묘한 것은 그 순간 오히려 복음이 자랑스럽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은 조금도 변질되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복음은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 시대에 와서 복음이 자꾸 변질되어 갑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특별히 현대신학은 사회과학적인 분석력과 특정한 사고의 틀은 형성시켜 주지만 복음이 복음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고통스러워하는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무런 답변을 주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올바르게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오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복음 대신 복음이 아닌 다른 방법(대용품)을 사용해서 인간 문제와 역사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어리석음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오만함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겉으로는 굉장히 유식해 보이고 능력있는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세상 것에 두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다 두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역설적인 삶의 진리를 터득해 가게 됩니다.

역설적 진리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 같으나 가장 강한 자로, 가장 비천한 자 같으나 가장 부유한 자로, 버림 받은 자 같으나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처럼 가난하게, 고난을 당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약한 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살아간 사람이며,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능력 있게 살아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면 언제나 생의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쉽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리고 쉽게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 주실 것”(롬 8:28)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복음이 목표하는 바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성숙되지 않은 교인들은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들 스스로 인간적인 성공자요, 스스로 인격자로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겉으로는 확연하게 들어나지 않지만 내심에는 이러한 것들이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은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 죄나 구원, 회개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신들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는 용서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고 복잡한 생각을 떠나 머리나 좀 식히고 좋은 음악이나 감상하러 나와 주는 VIP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자신은 저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자랑하는 말은 어느 교회는, 어느 목사의 설교는 자신의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자기를 더욱 존중해 준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기분 좋게 해준다는 데 대한 만족감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해주는 내용은 그러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것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자기 수양으로, 세상에서 많이 배운 지식으로도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복음은 그 누구도 칭찬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산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비록 목사, 장로, 집사, 권사라 해도 복음은 그들을 위대하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사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해도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부치기 때문에 그리고 자랑할 것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진 경험을 가진 사람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신의 모습을 항상 자랑스럽게 제시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열린교회 성도님들께서는 이 음란한 시대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이 음란한 시대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뚜렷하게 계시하던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의 위대성과 구원의 고귀함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진정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http://www.opench.kr/xe/index.php?document_srl=1956&mid=sermons&category=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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