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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마 5:4-6)|

by 김경호 진실 2014. 6. 3. 23:19

본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본문: 5:4-6

요절: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가? 보통은 천국가기 위해서 한다라고 말한다. 말은 좋은 대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이라고 수는 없다. 천국이 없다면, 혹은 천국에 없다면 신앙생활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사실은 천국이란 지금 우리가 살아서 들어가는 곳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죽어서는 없다. 지난주에 복있다 하심의 번째를 다루었는데,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이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재형이다. ,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천국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신자가 생각하듯, 죽어서만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오해하는 것은 대단히 오류이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죄를 깨달아 마음이 상하고 비통해진 자라고 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없으며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서 세리와 같이 머리도 들지 못하고 주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자들이다. 이렇게 우리는 세리처럼 매일은 아닐지라도 자주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 있는 자가 된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한다. , 내가 지금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 겸손해지고, 마음이 가난해져서 항상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부자 보다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훨씬 좋다. 부자가 되면 유혹이 많아서 마음이 가난하게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의 유혹과 죄를 버리고 하나님만 찾는 자가 때에 그는 하나님 지배를 받는 것이며, 그가 죽으면 완전히 하나님의 지배 안에 있게 된다. 여러분이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가지 복을 배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죽어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복을 현세에도 맛보고 있다. 가지 복을 받으려면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오늘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내가 조건을 채우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말씀도 역시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인용하신 것이다. 이사야서의 말세 설교와 시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소망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와서 성취된 것이다. 이사야 61:2에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는(61:2) 것이 메시아의 임무라고 한다. 이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셔서 이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고 계신다.

 

또한 126:5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약속의 말씀이 있다.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기쁨으로 열매를 얻는다. 이렇게 시편은 많은 부분이 잠언과는 달리 메시아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제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많은 약속들이 그분 자신과 함께(mit seiner Person) 성취되고 있다.

 

그런데, 구절의 애통하는 어떤 사람인가? 세상에서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가? 우리는 일차적으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61:2 126:5 약속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말씀하셨다면, 이들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다니엘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내리게 하셨사오니“( 9:5,14).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구약 말씀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면 예수님 말씀 속에 숨어있는 긴장뿐만 아니라 뜻밖의 것도 발견할 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제공된 여호와의 은혜의 “, 은혜를 베푸시는 말하고 있다( 61:2). 하나님의 벌을 받아 애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 삶의 자리가 있다. 너희는 위로하라. 백성을 위로하라 40:1 말씀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현실이 되었다. 세례자 요한에게 이스라엘에서 가장 경건한 자들이 독사의 자식으로 보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회심을 요구된 것처럼( 3:7-8), 예수님은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는 약속을 주실 있는 분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백성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말할 수도 없이 죄이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뿐만 아니라 속죄의 은혜도 거부한 셈이다.

 

예수님의 초대는 간단하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므로그들은 있는 자이다. 그들이 예수님과 교제하면 하나님의 위로는 지금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미래에는 위로가 완성된 형태로 찾아올 것이다. 여기 미래에 약속의 중심 있다.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위로를 받고 것을 지금 믿는 사람은 진정으로 있는 자이다. 그의 소망이 분명히 성취된다는 것은, 그가 지금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며 살고 있다는 데에서 확증된다.

 

비록 번째 있다 하심 먼저 이스라엘 예수님의 이스라엘 사람 제자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이것은 새로운 언약백성인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 심판을 깨닫고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려고 한다면 우리도 요한복음에서 묘사된 대로( 14:16 이하; 16:7 이하) 위로자이신 성령님의 형태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이방인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1). 그리고 14:17 말씀도 여기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번째 있다 하심 자신의 죄를 괴로워하는 멸망 받을 죄인에 대한 초대이기도 하다.

 

오늘날 누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죽도록 애통하는가? 이러한 애통함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을 없다! 강단에서는 당신들은 구원받았습니다!“라는 거짓 설교가 난무하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함이 없는 신자, 또한 애통함을 잃어버린 신자는 결코 구원이라는 위로를 받을 없다.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제는 37:11 구절 이해의 열쇠가 된다. 70 역에는 구절이 5:5 같이 온유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불쌍한 자는 땅을 상속하며 평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리스 번역본인 70 역에는 온유한 번역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37장은 하나님의 사람이 불신자들을 통해 불의를 당하지만, 의인은 저항하지 않고 다음과 말하기 때문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37:7). ,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해 온유한 마음을 가지며 참고 견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핍박하는 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므로 동시에 가련한 자들이다. 따라서 불쌍한 자나 온유한 자나 이곳에서는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온유함과 불쌍함의 예로서 이삭을 있는데, 그는 자기가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번이나 빼앗기고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온유함을 끝까지 유지했다( 26:15 이하). 그러므로 불쌍한 온유한 복이 있다고 해서는 되고, 거기에다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이로써 천성적으로 온유한 자가 아니라 믿음이 원인이 되어 그가 당하는 불의를 참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들은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말씀을 읽으면, 토마스 뮌쩌와 기독교적혁명가들이 머리에 떠오를 있는데, 이들은 땅을 차지한다는 성경 구절을 빙자해서 폭력을 사용한 자들이다. 그들은, 언약 백성이 말세에 무기를 들고 하나님 이름으로 모든 불신자를 죽인 후에 땅을 차지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벌써 37:11에서 땅을 차지한다는 약속에다가 그들은 평화를 좋아한다라는 말을 추가했다. 이로써 불신자들을 심판하는 것과 평화롭게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강하게 미래적 요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지배가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을 , 온유한 자에게 땅을 유산으로 주신다. 우리는 번째 있다 하심 21 22장에 연결해야 한다. 온유한 자가 불신자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고 있는 곳은 새로운 땅이라는 것이 틀림없다. 신약에서 상속받다“, 혹은 상속이라는 말은 항상 종말론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사실이 이론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땅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현세에 받는 축복으로 해석해서는 된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의 권리도 때에 따라서는 포기할 있어야 한다. 법치국가에서는 교회나 신자가 법의 보호를 받으므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에는 법에 호소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느 정도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있다 하심 내용을 생각해보면, 앞의 개의 있다 하심 비교해 , 공통점이 있다. 공통점은 3-5절에 나오는 개의 있다 하심에는 (부담) 지고 있는 사람들 대상으로 것이다: 죄의 , 심판의 부담, 불신자의 핍박을 통한 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초대하는 자들은 패자(Verlorene, loser)들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임을 깨달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겸손해져서 하나님의 도움을 믿는 자들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패자가 아니라 죽어있는 자들이며, 또한 영원히 죽게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패자가 되어야 한다.

 

악한 자에게 온유로 대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죄로 말미암아 부담을 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 잘못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에도 고난을 받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온유하게 사람들은 땅에서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부활한 후에 유산을 주심으로 이러한 신뢰를 풍성하게 보상하실 것이다. 분명히 해야 점은, 이러한 보상은 종교적인 공적을 보상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자의 희망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서 다시 표현하자면, 잠시 받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고난에 비해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요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고후 4:17).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대부분 누군가가 하나님 눈에 비추어 (Schuld) 없다 의미로 사용한다. 여기에서 죄가 없다는 말은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묻지 않으신다, 죄책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는 1:17 번역할 원문의 하나님의 원문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유명한 표현인 하나님 앞에서 유효한 “(die Gerechtigkeit, die vor Gott gilt) 번역했다. 이러한 라는 의미가 종교개혁 핵심 구절인 3:28 매우 인상 깊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우리가 인정하노라.“

 

성경은 라는 말을 하나님과 연관하여 생각한다는 것이 벌써 119:123 나타나 있다: „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은혜로 찾아오실 , 구원과 의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산상수훈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6:33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번째 있다 하심은, 하나님 앞에서 없이 되려는 사람 대해 말하고 있음을 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단순히 의롭게 되기를 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주리고 목마른 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갈급한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끔 회개하고 경건한 소원을 갖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있다. 5:6 이것을 훨씬 넘어서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없는 삶을 갈망하는 사람 나타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러한 진지한 갈망과 강한 감정을 혼동해서는 된다. 은혜를 받은 것처럼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그의 은혜받은 감정은 쉽게 사라질 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린다는 것은 예를 들면, 내가 지금까지 그대로 살아서는 된다는 깨달음을 항상 새롭게 갖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조용히 시간을 가지고 반추해야 얻을 있는 인식이다. 감정이 앞서든 이성이 앞서든 관계없이, 결정적인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데에는 의지가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감정보다 깊은 층에 자리 잡고 있다.

 

성경에서 예를 찾아본다면, 18:9 이하 비유에서 나오는,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은 멀리서 기도하는 세리보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마음이 적다고 있다. 혹은 19:1 이하에 등장하는 삭게오가, 19:16 이하에 나오는 감동을 주는 부자 청년보다는, 5:6 부합된다고 있다. 비록 부자 청년은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매우 핵심적인 질문을 반면에, 삭게오는 단순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려했다고 누가는 묘사하지만, 삭게오가 부자 청년보다 의에 주리고 있었다고 있다.

 

그런데 의롭다, 혹은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는 말은 한국사람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말이다. 한국사람이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죄의 개념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죄는 구체적으로 하나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자기가 죄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짓과 욕심, 음란과 질투 등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같아도 의롭지 않으며 사함이 없다.

 

우리 한국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감추고 또한 남의 죄도 덮어주는 것에 습관이 되었으므로, 혹은 문화가 죄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므로, 신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좀처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모른다. 자신의 죄를 깨달아 문제의 해결을 놓고 영적 싸움이 시작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된다.

 

이러한 자에게 예수님은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기쁜 소식을 주신다. , 그들이 원하는 (참고: 10:10) 가득히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갈망을 완전하게 채워 주신다. 이곳에서도 예수님은 다시 미래 시제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이러한 만족한 상태가 세상이 지나가야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죄를 약간사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목록이 도말된다“( 2:14) 확신을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롭게 자는 눈으로 드러나야 의라는 말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지만, 우리는 이것을 의심 없이 객관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의 교회를 티나 주름잡힌 없게 하신다( 5:27; 1:22) 말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는 이상,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없이는 결코 우리는 배부름이 없다. 우리는 자신의 불의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덧입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곁에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는 더이상 갈망이 없다. 온전히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을 소망하며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 의를 갈망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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