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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마 5:7-9)|

by 김경호 진실 2014. 6. 3. 23:18

본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본문: 5:7-9

요절: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것임이요

 

 

지난주에 우리는 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죄가 없다는 의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서 없이 살려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가끔 회개하고 단순하게 경건한 소원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훨씬 넘어서서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없는 삶을 갈망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인간은 원래 약하다“, 혹은 인간은 죄인이니 한계가 있다 말로써 자기 죄를 변호하는 사람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기 죄와 연약함 때문에 슬피 울고 애통하며 진실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사함을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갈망하지 않는다. 중에 빠져서 제자리 걸음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교모하게 피해나간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 민감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자신의 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사함의 은혜를 받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난다. 일단 회심을 하면 영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아버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4:23).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만이 회심을 있고, 회심한 자만 적극 하나님의 의를 실천할 있음을 기억하자.

 

오늘은 개의 복있다 하심을 배우는데, 이것들은 앞에서 배운 개의 복있다 하심과 약간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부분에서는 하나님 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놓쳐버린 죄인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신 것이다. , 세리와 같이 경건한 소원이 있으므로 하나님께 나오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고개를 감히 들지 못하고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회심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혹은 믿음 안에서 살면서 믿음 때문에 불신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자들, 하나님을 갈망하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 자들을 위로하신 것이다.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 애통하는 , 온유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그런데 오늘의 가지 복있다 하심의 수혜자, , „긍휼히 여기는 “, „마음이 청결한 “, „화평케하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살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중요한 계명을 성취하고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 거듭난 자의 품성을 분명히 보이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격려하시면서 엄청나게 축복을 약속하신다. 오늘, 우리는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품성이 나타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다섯째의 있다 하심은 이전의 것과는 달리 구약에서 여기에 상응하는 어떤 특정한 구절을 찾을 없다.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라는 말은, 여러 가지 구약 말씀을 요약한 것이라고 있다. 말의 의미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사랑으로 도와주는 이다. 때때로 이것은 특정한 경우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6:2에서와 같은 구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로까지 확대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23:23 예에 속하는데, 이곳에서 예수님은 (공정함) (불쌍히 여기는 마음) (믿음)“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13:10 참조). 우리는 5:7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렇게 확대된 의미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고생하는 사람을 사랑스럽게 도와주는 사람 말하고 계시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예수님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강조점을 만나게 된다. 그분은 19:18 있는 하나님의 요구인 이웃 사랑하기를 몸과 같이 하라 시내 율법의 둘째 돌판에 있는 인간에게 해당하는 계명의 요약임을 보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데에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의 뿌리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제자들에게 매우 깊이 가르치셔서 이들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 13:10)이라고 했고,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2:13)라고 강조하게 되었다.

 

5:7 긍휼히 여기는 에서 의미가 단순히 불쌍한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된다. ,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성격이나 성품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결정적이다.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용서받는 것이 요점이 되고, 종의 비유에서는 자기가 사함( 탕감) 받았으므로 자신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6:12 이하; 18:21 이하). 그런데, „긍휼히 여기는 이들보다 적극적인 선행을 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있다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경건한 자나 종교적이기를 원하는 자의 깊은 상처를 건드리셨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사상(생각) 좋아하고, 많은 설교자들이 종교적인 깨달음 좋아하며, 놀랄만한 체험이 있다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만 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이다. 자비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표현하게 되고 해야 한다. 남의 허물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마음과 물질로 가난하고 없는 자를 도와야 한다. 가난한 자에게 눈을 감는 자나, 자신의 재물을 남에게 주기를 아까와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수많은 헌금을 받아서 이것의 부분을 사회에 반환하기를 아까워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불우 이웃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교인들에게 땅콩을 팔게 해서 돈으로 교회 건물을 짓는 사이비 집단도 있다. 이러한 불의한 일을 하는 단체임을 알고도 이러한 곳에 머물러있는 자는 하나님의 분노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받은 물질과 은사를 반드시 다른 사람(불신자 포함)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행위는 믿음이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우므로 믿음의 열매로 간주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또한 남에게도 긍휼을 베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심판과 창조가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맛볼 것이다.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것임이요

 

7절은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요약된 반면에, 8절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한 것이다. 7,8절의 구절이 연달아 등장함으로써 나중에 예수님이 22:34 이하에서 언급하실 가장 중요한 가지 계명이 이곳에 강조되어 나타난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가장 크고 가장 고상한 계명인 같이, 산상수훈은 7절의 이웃사랑 계명에서 8절의 하나님사랑의 계명으로 가면서 고조된다.

 

예수님은 말씀을 다시 구약의 말씀과 연관을 지으시는데, 24:3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자가 누구인가“. 4-5절은 여기에 대답한다: „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예수님은 시편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셔서 마음이 청결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있으며, 새로이 창조된 세상에 지어진 하나님의 도성에서 영원히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구약 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계명이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하는 계명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5). 계명에 완전히 일치하는 마음만 청결하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데에서 조금이라도 그림자가 있고 잡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와 거룩한 청결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다윗의 회개 기도는 입술로부터 다음과 같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을 새롭게 하소서“( 51:10). 다윗은 하나님만 청결한 마음을 만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많은 한국 교인들은 하나님을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계명을 완전히 곡해한다. 이들은 하나님 사랑 계명을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매우 열심히 섬긴다. 너무 교회를 열심히 섬겨서 가정을 등한히 하는 사람도 있고, 교회 모임에 절대적으로 참여한다고 젖먹이를 집에 눕혀두고 가서 아이가 죽은 경우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의 본질에서 너무 벗어났으므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또한 이들은 교회나 목사를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없이 한다. 심지어 땅콩을 팔아 자기 건물 세운 이단 단체와 같이 도둑질도 하고 폭력까지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들이 아무리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할지라도, 아무리 크게 외치면서 기도할지라도 이것은 우상숭배와 같다. 이들의 전도는 자기를 세우려는 욕심을 하나님을 위한 세계선교나 생명구원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더럽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도 없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다. 이것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에 비로소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이스라엘의 청결한 마음을 달라는 기도에 에스겔을 통해 대답을 주셨다: „나는 너희에게   마음을 것이다“( 36:26. 참고 31:3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결한 마음을 주셔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마음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부활한 다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심이 없어 전혀 정결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외치고 찬양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유행이 되었다. 죄가 밖으로 드러나서 보이는 데에도 회개는 하지 않고 예수의 외치는 사람들은 스스로 속고 속이는 자임이 틀림없다. 교회를 위해서라면, 혹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예수의 피를 말할 있을까? 거짓을 정당화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 사탄이 장악하고 있은 사단의 회이므로 그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절대적으로 정결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있겠는가? 우리는 살아서는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부활해야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우리가 이렇게 장차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 했다( 22:4; 참고: 요일 3:2).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평소 삶에서 우리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을 느낄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이 정결해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신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비록 임시적이지만 하나님을 있는 것이다.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일곱째 있다 하심은 다섯째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특정한 말씀을 들어서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자세한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말씀은 분명히 기질적으로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확한 번역은, „평화를 도모하는 이며, 야고보는 3:18에서 그렇게(„화평케 하는 “)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5,7절과 같이 본성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마음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말한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당시의 상황을 보시고 그것에 맞추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분이 탄생한 즈음부터 이스라엘은, 특히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는 로마에 대항한 계속된 반란과 게릴라 전을 겪고 있었다. 싸움은 젤롯 당원들의 종교적 확신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중되었는데,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전투를 통해서 도래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다음과 같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전쟁에 모든 것을 바쳐서 힘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왕국을 설립하신다.“ 바리새파와 에센파도 열심당원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그들 우두머리 , 명은 자신이 말세의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는데, 드다가 그랬으며( 5:36-37),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갈릴리의 유다와 애굽 사람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싸움을 부분적으로라도 매우 가까이서 체험하셨을 것이다. 이러한 싸움이 성숙해서 결국 66-73년의 유다-로마 전쟁이라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때에 예루살렘은 성전과 함께 멸망했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당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전투에 관련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게릴라 전에 갈릴리의 가난한 농부와 소작인들이 많이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해방운동과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서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분명한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라는 말은 성경에서 단지 여기에만 나타난다.

 

예수님은 세금 문제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심으로써 이러한 반란 운동을 분명하게 거부하셨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빌라도가 사람의 갈릴리 사람의 피를 그들의 제물과 섞은 이야기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13:1 이하. 참조: 22:15 이하). 성전파괴와 유대 땅의 훼파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예언하셨다( 23:38; 24:1 이하). 아랫사람이 지도자를 보호할 때에 하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방어하려고 했을 때에, 그분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가르치셨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26:52).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전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강제로 오도록 해야 한다는 일부 유대인의 생각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이렇게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오게 하시는 하나님(참고: 1:6-7) 신뢰하지 않는 자이며, „화평케 하는 온유한 비슷하게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뢰를 있다고 하신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에 대한 이러한 구속사적인 시간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들은 지금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뜻에 따라 싸우는 사람에게 속할 것인지 양자택일해야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결정을 잘못해서 이천 년간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아야 했다.

 

축복 선언은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도 지침을 준다. 이것은 자기 뜻대로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생각을 금지한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연고로 무기를 드는 곳에서는 악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십자군 전쟁, 위그노 전쟁, 삼십 전쟁 등이다. 이것은, 무력을 사용하여 해방운동을 펼치는 세력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지원하는 것에 대해, 명백하게 경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력을 사용하는 어떠한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국민의 의무인 국방의 의무는 감당해야 한다. 국가를 수호하고 가정을 지키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명백히 전쟁이 침략전쟁이라면 감옥에 갈지라도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일으킨 이락 침략전쟁에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가담한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화평하는 자는 복이 있다 말씀을 적용할 때에는 조심해야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들 사이에 불화를 가져올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화평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도 어렵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기도 어렵다. 특히 오늘날 성적인 문제, 종교 혼합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나 타락한 교회와 화평할 없다. 교회 내부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노골적으로 어기고도 이것을 정당하다고 하는 사람들과는 화평할 없다.

 

그러나 진리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문제에서는 우리는 사람들과 항상 화평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화평을 위해서라면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지나치게 싸우는 모습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온유한 에서 이미 다루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세가지 품성을 배웠다: 자비로운 , 마음이 청결한 , 화평케 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어려운 자를 도와주고 살아야 하며, 이웃과 화평을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므로 신자는 정당방위가 아니라면 무기를 잡아서는 된다. 또한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 말씀이 들리므로, 죄악된 생각, 이기적인 생각을 항상 부인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람은 죽은 후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항상 하나님 곁에서 살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지 은사를 누리면서 감격하고 살아야 하며, 또한 이것을 부지런하게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 전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선행을 통해서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되어 믿음에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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