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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8. 14.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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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인생 동안 겪는 많은 일들이 있다. 평생에 인상적인 사건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쉬운 일이든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릴 땐 내일을 기약하며 살지만 나이가 들면 어제를 바라보며 만족해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제자들이 하는 말, “교수님은 그대론 것 같아요! 목사님은 여전하시네요.” 30년 전, 20년 전이나 변한 게 없다고 한다. 내가 그런가? 착각하기도 하지만 나는 변했다. 어릴 땐 자신만 변하고 주위는 변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나이가 들면 자신이 변하기를 바란다. 어차피 세상은 이 모습대로 존속했고 존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어머니는 크게 보였다. 고사리 같은 손을 잡는 어머니의 손은 컸다. 매를 들고 종아리를 때릴 땐 힘찼다. 무엇이든 숨이 차더라도 뛰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젠 일어나기조차 힘들다고 하신다. 그분의 모습은 변해간다. 어릴 때 보았던 모친의 20대 사진을 보았다. 아름다웠다. 지금의 모습은 흔적을 간직했을 뿐 믿기질 않는다. 그 흔적은 어디로 갔을까? 나에게 남아 있다. 그래서 자녀들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이다. 자신의 흔적은 자녀들에게 찾는다. 자녀들은 나의 흔적이다. 내 속에 부모의 흔적이 있다. 아름다운 유산이다.
부모의 삶과 더불어 지냈던 2~30년 세월이 우리로 하여금 그 흔적을 갖게 했다. 음식, 옷, 언어, 성격 등등. 그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만 없앨 수 없다. 인정하지 않고 독립적이라고 주장해도 벗어날 수 없다. 그 흔적을 나도 여전히 자녀에게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분의 십자가의 흔적이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목적, 외로워하셨던 목적, 슬피 우시면서 밤새 기도하시던 목적, 죽음의 슬픔을 만나 애통하는 모습을 보시며 우시던 목적, 제자들과 생사고락 하시던 목적, 끝내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던 목적 등은 우리에게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떤 이는 그 흔적을 위해 귀중한 생명까지 드리는 자들이 있다. 다른 이들은 흔적을 가시적으로 남기려고 헛된 노력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 흔적은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자신의 신성을 사용치 않으시고 인성을 취하신 흔적이다. 하나님의 본체를 지니신 분이 인간의 본체를 입으신 것이다. 우리를 체휼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의 기도와 삶은 우리에게 대단히 인상적인 흔적이다. 무엇보다도 그 흔적은 강하게 남아 있어 우리 역시 주위 사람들에게 이 흔적을 남기려고 힘쓴다. 그들이 하는 말, “정말 변했어요! 예수 믿더니만 달라졌어요!”라는 흔적을 남겼으면 한다. 그 흔적을 얼마나 가지고 사느냐는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은 순종의 삶이었기에 이 지상에서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자신에게 그분의 많은 흔적을 남기는 삶이다. 그분 앞에서 그분이 남긴 흔적을 손과 옆구리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서 무슨 흔적을 발견하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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