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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나라’ 와 ‘제사장’ 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2

조직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4. 8. 2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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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나라’ 와 ‘제사장’ 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2
정승원 교수(총신대신학대학원)
 
김순정 기사입력  2014/08/26 [15:06]

3 “나라(왕)”와 “제사장”의 역할과 의미

그러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이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데 왜 그들 이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하는가? 그 제사장직은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한 왕 노릇한다는 의미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천년의 기간만큼이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왕 노릇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천년이라는 기간은 오직 계시록 20장에만 나오지만 제사장-왕에 대한 기록은 계시록 안에서만 세 군데 이상이 나오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출애굽기 19:6과 베드로전서 2:9에도 나온다. 더욱이 일반 성도들이 제사장이 된다는 구절은 여러 군데 나온다. 우리가 성경의 일체성을 확신한다면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사장-왕, 혹은 제사장직과 왕직에 관한 내용들은 반드시 계시록 20:6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계시록 20장에만 나오는 천년에 너무 많은 독립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제사장-왕의 역할과 의미 혹은 나라와 제사장의 역할과 의미를 파악하고 그 파악한 의미를 계시록 20:6 해석에 적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리라 본다.

리챠드 보쿰은 계시록에는 예배적 이미지와 정치적 이미지가 동시에 강조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24장로들ㅡ예배적인 용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용어이다ㅡ은 천상적인 회의를 구성한다(참조 사 24:23; 단7:9; 에녹2서 4:1; 레위의 유언서 3:8). 그들의 보좌들과 면류관들이 말해 주듯이(4:4) 그들은 통치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천상적 세계를 통치한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기는 하나 의미심장하게도 그들은 복종의 행위를 통해 예배한다.” 보쿰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왜 요한이 계시록 시록 1:6, 5:10 그리고 20:6에 제사장과 왕을 결합하여 제사장-왕의 연합된 직무를 언급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은 계시록 시록에서 성도들, 특히 죽임 당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또한 통치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특권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로마 제국이나 유대교 권력자들이 가진 특권과는 다르게 하늘에 속한 것이며 하늘 보좌로부터 시작되는 특권임을 보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땅 위에서 악의 권세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신적인 위상을 주장하면서 마치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권세인양 가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실체의 영역은 (땅이 아닌) 하늘이다. 하늘에서의 진정한 것은 땅에서도 진정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요한이 하늘 안으로 올리워진 것은 하나님의 보좌야말로 모든 지상적인 현상들 뒤에 놓여 있는 궁극적인 실체라는 사실을 보기 위함이다.

이러한 하늘의 권세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제사장-왕의 특권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감사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레고리 빌은 계시록 21:1의 “새 하늘과 새 땅”을 2절의 새 예루살렘 성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 성은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이다(계 21:16). 이것은 바로 지성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왕상6:20 참조). 또한 성 안에는 성전이 없으니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 되심이라고 계시록 21:22에 말씀한다. 성 자체가 지성소이기 때문에 옛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듯이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 온 자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빌에 따르면 제사장의 주요한 역할이 바로 성전을 지키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지키는” 직무를 주셨다(창2:15).27 이런 지키는 직무는 레18:3에 “레위인은 성전의 직무를 지키려니와” 구절과 삼상2:9에 “그[사무엘]가 거룩한 자들의 밭을 지킬 것이며” 구절에도 나타나고 특히 계시록 21:8, 27; 22:15에 흉악한 자, 우상 숭배자, 속된 것, 개들, 점술가들, 음행하는 자 등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마치 구약 성전에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성막이나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과 연계된다고 한다(민19:13, 20; 대하23:19, 29:16). 빌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새 예루살렘 성)은 성전과 같은 곳이라는 말이다. 빌의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한다는 계시록 20:6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제사장이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성도들이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성전 모양이기 때문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양하는 성도들의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9에 성도들을 이미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거룩한 나라로 삼으셨다는 말씀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후 성도들이 누릴 천국 백성의 모습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한 성도들이 1000년 동안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미 누리게 된 특권을 재확인하는 것이며 이러한 특권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계속된다고 하겠다. 소위 1000년 왕국은 베드로전서 2:9에서 말씀하는 특권(혹은 계 1:6과 5:10에서 말씀하는 특권)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특권 사이에 주어질 제 3의 특권으로가 아니라 단일체(unit)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만약 계시록 20:6의 특권이 불신자들 위에서 군림하는 왕권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1000년이 지난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계시록 22:5에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이미 불신자들이 다 불못에 들어간 뒤인데 계시록 20:6과 같은 의미의 왕 노릇이 어떻게 영원토록 계속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계시록 20:6의 왕 노릇은 불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왕 노릇이 아닌 것이다.30 또한 왕 노릇을 위해 불신자들을 1000년 동안 살려 둘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이미 부활한 신자들이 시공을 초월하는데 아직 부활하지 못하고 시공에 매이는 불신자들과 어떤 식으로 주종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지 의문이며 이런 관계 설정에서 왜 신자들이 제사장이 되는지 문자적 지상의 천년왕국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제사장 됨은 왕 노릇과 함께 가는 것이다. 제사장-왕의 역할과 의미는 가시적으로 땅에서 불신자들 위에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특별히 죽임 당한 성도들에게 부여되는 특권이다. 레온 모리스의 말처럼 제사장을 삼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자신을 제물로 삼는 것”(롬12:1)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계시록 22:5 말씀처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것이다. 제사장이 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특권이다. 계시록 21:3에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백성들을 제사장으로 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성소에 관한 겔 37:27-28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계시록 21:3 말씀은 이미 계시록 7:15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구절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여기 장막을 치시는 것은 성도들로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과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계시록 7:16-17에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말씀한다. 이것은 계시록 21:3 뒤에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는 구절과 반복적인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계시록이 어떤 시간적 순서의 틀에서 기록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보쿰은 다음과 같이 제사장-왕의 개념을 가지고 계시록 1:6, 5:10과 계시록 23장을 다음과 같이 유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새 예루살렘의 전체 이야기 중 그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22:3b-5)은 어린양이 그의 기독교 추종자들을 위해 이룩해 놓으신 것인 바(5:9; 1:5) 곧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는 것(5:10; 참조 1:6)의 종국을 묘사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제사장들로서(22:3b-4) 하나님을 그 분의 직접적인 임재 가운데에 경배하며, 왕으로서 그들은 그 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22:5). 그 어린양의 보좌 주변을 묘사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22:3b-5) 우리는 요한 계시록 전체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4-5장에서 먼저 나타난 제의적인 이미지와 통치적인 이미지의 조화로서의 신적인 보좌. 우리는 한 가지 대조적인 모습을 주목하게 된다. 4-5장에서 하늘에는 생물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가운데에서 제사장들의 중심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보좌들의 중심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22장에서는 땅위에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들이며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는 왕들이다.

이렇게 계시록 1장부터 22장을 아우르는 보쿰의 구속사적 주해에는 가시적인 지상의 천년왕국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1000년 왕국에서 발생할 일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히10:14절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말씀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로 거룩한 나라가 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물론 우리는 몸의 부활 후에 죄와 상관없이 영원히 온전케 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미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죄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4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서 ‘나라’와 ‘제사장’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기 전 그리스도가 먼저 왕과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 계시록은 성도들, 특히 죽임 당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똑같은 길을 걸었음을 재차 강조한다. 먼저 계시록 1:9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말씀한다. 여기 “예수의”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앞의 “예수의”는 “예수 안에”(env Iv hsou)/ 라는 말이다. 그 환난과 나라와 참음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이 겪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요한이, 성도들이 그리고 순교자들이 동참할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이 처음 자기를 소개하면서 서신 서두에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계시록 3:21에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말씀하신다.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 왕적 직위는 그리스도를 닮아 그처럼 이겨야 주어진다고 말씀한다. 계시록 12:11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마귀]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말씀한다. 어린 양의 피로 이겼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순교했음을 의미한다. 죽기까지 자기생명을 아끼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처럼 마귀를 이긴 것이다. 이것은 계시록 20:4에 보좌에 앉은 자들, 즉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한다는 말씀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 “그리스도와 더불어”라는 문구는 제사장과 왕 노릇의 특권을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기신 것처럼(계 5:5-6) 순교한 성도들도 같은 특권을 누린다. 계시록 20:4-6의 핵심은 천년왕국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누가 이긴 자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를 증언함과 그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을 죽음으로 지킨 자들이 이긴 자이다. 이 이긴 자들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이 이 구절들의 핵심이다. 보쿰은 순교자들의 죽음의 가치는 예수의 증거를 이어 받는 것에 달려 있다면서 순교자들의 이김은 개인 신앙으로 말미암지 않고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의 죽음이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사단을 물리친 어린양의 승리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성도들, 특히 순교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개인적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승리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빌(Gregory K. Beale)은 계시록 1:5에 먼저 나시고(first born) 그리고 6절에 성도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고 계시록 5:9에 일찍 죽임을 당하시고 10절에 성도들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신 것과 비슷하게 계시록 20:6에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제사장과 왕 노릇하게 되었다고 주해한다. 그렇다면 세 구절에 언급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음에 이르고 부활한 자들이며 왕-제사장이라는 특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부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히12:22-24에 성도들이 이른 곳을 여럿 언급하면서 “하늘의 예루살렘”과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first born)의 모임”과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를 말씀한다. 성도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미 하늘에 기록된 “먼저 난 자들”(first born)이다.

계시록 14:4에 “이 사람들(144,000명)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말씀한다. 순결함은 제사장직의 필수적 요소이다. 보쿰은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는 말씀은 군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즉 거룩한 전쟁에 임하는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고대의 정결의식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신 23:9-14; 삼상21:5; 삼하 11:9-13). 그렇다면 계시록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말씀에서의 거룩함도 전쟁의 승리를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하는 것”을 거룩함을 통해 승리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역시 점도 흠도 없는 어린 양으로 바쳐졌고(히 9:14; 베드로전서 1:19) 승리하셨다.

또한 144,000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말씀한다. 순교자들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말씀을 지키며 어린양을 따라 간 자들이다. 또한 어린양의 피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씀한다. 처음 익은 열매는 부활의 열매를 내포하고 있다(고전15:20 참조). 단순히 자기 자신의 신앙으로 어린양을 따라 간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피로 속량을 받아 어린 양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이 말씀은 어린 양과 연합되어 어린 양의 제사장-왕 직분을 닮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계시록 18:23-24에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 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말씀한다. 여기 등불 빛이 다시 바벨론 성안 안에서 비치지 아니한다고 말씀한다. 그 이유는 순교자들의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바벨론 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에는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계 21:23; 22:5).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 뿐이라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안에는 성전이 없는 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계시록 11:1에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하는 자들을 척량하되”라고 말씀한다.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을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어린 양도 성전과 동일시되고 성도들도 성전과 동일시된다. 예루살렘 성안에서 성도들은 어린 양과 연합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계시록 22:3에 보좌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기는 제사장직과 계시록 22:5에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왕직은 새 예루살렘 성에서 행해지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적 관점에서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계시록 19:7-8에 나오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성도들과 어린 양의 연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연합을 연상케 한다. 계시록에 성도들이 흰 옷을 입는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3:4-5, 18; 4:4; 6:11; 7:9, 13, 14; 19:14). 계시록 7:14 하반절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말씀한다.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었다는 것은 순교를 의미한다. 7:15절에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즉 왕-제사장 직무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말씀은 순교의 옳은 행실로 말미암아 입게 된 옷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계시록 19:13에 백마를 탄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말씀한다.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도 피 뿌린 옷을 입으신 것처럼 어린 양의 피로 씻은 옷을 순교자들이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이 순교의 운명을 같이 했음을 보여준다. 일종의 연합적 차원의 운명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세마포를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의 운명을 공포하며 확증하는 예식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19:14절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말씀에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제사장을 의미한다. 계시록 15:6에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빛난 세마포를 입은 것은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단10:5; 12:6; 겔9:2 참조). 그리스도 역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성전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제사장의 모습을 갖고 계신다(계 1:13).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함에 있어서(계 20:6) 그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같은 성격의 직무로 봐야 한다. 또한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백마를 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습은 왕 노릇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14에 부활한 성도들이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는 것은 제사장-왕의 직무를 의미하고 성도들이 백마를 타고 역시 백마를 타신 충신과 진실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차원에서 하늘에서 공동의 삶을 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와 성도들이 함께 제사장-왕의 직무를 한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빌은 계시록 7:14-15 말씀과 계시록 22:14과 연계하며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들이 두루마기를 빠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두 구절들[계 7:14-15과 계 22:14]은 공동의(corporate) 교회의 옷들은 많은 교인들이 견인(perseverance)의 과정을 마치기 전까지는 하얗게 될 수 없다. 계시록 19:7-8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있을 최후의 만찬을 의미한다.” 이렇듯이 20장에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의 어떤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은 요한이 7장에서 이미 흰옷 입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묘사했고 또한 22장의 두루마기를 빠는 성도들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19장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20장에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것은 순서적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7장과 19장에 이미 나타난 단일체적(unitary) 환상적(visionary) 계시 사건으로 또한 새 예루살렘에서 계속되며 확정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계시록 11장 3절에 두 증인이 언급된다. 이 두 증인은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씀한다(11:4). 이 둘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다(11:7). 그들의 시체가 영적 의미의 소돔과 애굽에 놓이는데 이 곳은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고 말씀한다(11:8).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 따라 간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삼일 반 후에 살아나서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11:11-12). 역시 어린양이 가신 길을 그대로 갔다.

그런데 두 증인을 묘사하기 전, 계시록 11:1-2에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말씀하신다. 성전 모티브가 나타난다.44 11:15에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신다”고 말씀한다. 이와 같이 제사장-왕의 모티브가 여기에도 나타난다. 또한 촛대는 교회를 의미한다(계 1:20). 계시록 11:3에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를 동의어로 말씀하기 때문에 감람나무 역시 교회를 의미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특별히 계시록에서 요한이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묘사한 것은 스가랴 4:3의 “등대(촛대) 곁의 두 감람나무”를 염두에 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앞에 서 있는 자니라”(슥4:14) 말씀한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하면 제사장, 왕 그리고 선지자를 의미한다. 또한 여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라는 말씀은 계시록 11:4에 두 증인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자”라는 말씀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다. 데니스 존슨(Dennis E. Johnson)은 계시록 11장의 두 감람나무를 스가랴에 언급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과 연계시킨다. 스가랴 3:1-5의 여호수아는 제사장이며 스가랴 4:6-10의 스룹바벨은 왕을 의미하며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들과 왕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근거 없이 계시록과 스가랴서에 언급되는 두 감람나무라는 단어를 인위적으로 연결시켜 내놓은 것이 아니라 스가랴의 전반적 맥락과 계시록 11장의 맥락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도출시킬 수 있는 주장이다. 이 두 증인은 교회라고 할 수 있으며 특별히 죽었다가 부활한 순교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순교는 패망이 아니라 승리이다. 어린 양이 자신을 드려 제사장의 직무를 했던 것처럼 순교자들은 자신을 드려 제사장의 직무를 다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제사장적 희생은 바로 승리의 왕적 다스림으로 직결된다. 두 증인은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했다(계 11:3). 그리고 증언했다(계 11:7). 두 증인은 증언의 말씀으로 승리한 것이다. 계시록 12:11,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참소하던 자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말씀한다. 죽음이 승리로 이어진 것은 바로 그들이 지킨 증언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쿰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이르도록 그리고 죽음으로써 충성되게 참 하나님을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짐승을 이기며 이 증거를 계속해 나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그들의 충성된 증거는 역시 죽기까지 충성되게 증거하심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권세에 참여한다”며 성도들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함께 가는 것이며 그 승리로 인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5 결론

계시록의 세 구절에서 병행적으로 언급된 “나라와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누리게 된 특권과 축복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했던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이 되었고 그와 연합된 성도들이 누리게 되었다. 생명을 버리기까지 증언의 말씀을 지켰던 자들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닮아 왕-제사장의 특권과 축복을 누리게 된다. 이안 복스올(Ian Boxall)은 주장하기를 “계시록이 어떻게 미래 종말적 구원을 그리든지 간에 계시록에 흐르고 있는 강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의 연속을 부정할 수 없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왕국을 누리고 있고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을 중보하는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나라(왕)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계시록 전체를 연결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계시록 20:6에 제사장으로 왕 노릇하는 것은 계시록 1:6과 5:10에 나라와 제사장이 된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와 연결된다. 이것은 출애굽기 19:6이나 이사야 61: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지 독립된 왕국에서 따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땅에서 불신자들 위해 군림하는 가시적 통치가 천년 이어질 것이라면 굳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밤낮 섬기는 제사장 그리고 어린 양의 피로 자신의 옷을 희게 씻는 제사장, 이런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한다고 계시록 20:6에 말씀할 필요가 없다. 불신자들이 영원한 불못에 이를 때까지 그들 위에서 군림하면 되는 것이다.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담대히 휘장 안으로 들어가게 된 성도들의 특권이며 계시록 22:3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을 섬기는 특권이다(계 21:3 비교). 제사장이 되는 것은 미래 지상에서 세워질 천년 왕국에서 불신자들 위에 군림할 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특히 계시록 20:4,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자들이 앉은 보좌는 이 땅의 보좌가 아니라 하늘의 보좌이다. 또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성전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계시록 20:4-6을 어떻게 해석하며 이 구절을 근거로 어떤 천년왕국을 주장하든지간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나라(왕)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구속사적 주제이며 오직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승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승리가 계시록의 주제임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로 말미암는 결과가 최종적으로 그의 재림 후 세워질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성도들이 영원토록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계 21:3; 22: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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