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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나라’ 와 ‘제사장’ 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1

조직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4. 8. 2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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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나라’ 와 ‘제사장’ 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1
정승원 교수(총신대신학대학원)
 
김순정 기사입력  2014/08/26 [15:01]

정승원 박사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고 있다.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를 졸업하고(B.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였으며(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박사(Th.M., Ph.D.)를 받았다. 이 논문은 2014년에 개혁신학회에서 정승원 박사가 발표한 논문으로 요약하여 소개한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나라’와 ‘제사장’의 개념에 대해서 개혁신학적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고찰해본 내용이다.


1 서론

요한계시록은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2절에 요한이 본 것, 즉 환상(vision)을 기록했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 환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말씀한다. 계시록은 요한이 본 환상, 즉 계시로 받은 환상을 글로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통하여 시간표(time-table) 상의 미래의 일을 예측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구속 사역이 교회와 인간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장차 어떻게 그 결과가 펼쳐질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계시록에는 미래에 관한 기록들이 있지만 그 미래는 불확실한 징조나 심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완성으로 인하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여주신 것이다(계 1:1).

본 논문은 성경의 구속사적 일체성을 근거로 계시록을 좀 더 잘 이해하고자 계시록의 세 구절에서 병행적으로(juxtapositionally) 언급된 ‘나라’(kingdom)[혹은 ‘왕’(king)]와 ‘제사장’(priest)을 성경신학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세 구절은 1장 6절, 15장 10절, 그리고 20장 6절이다. 이 세 구절은 ‘나라’와 ‘제사장’을 병행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물론 계시록 7:15처럼 나라(왕)와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유출할 수 있는 구절들도 있다. 아무튼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두 단어는 성경 전체 흐름을 볼 때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구속사적으로 두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심장하다.

본 논문을 통해 이 두 단어가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 흐름에서의 두 단어가 계시록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면 계시록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특히 계시록 20:6에 나타난 제사장과 왕 노릇의 의미를 좀 잘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도 계시록 20:6에 언급된 천년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 천년은 ‘나라’와 ‘제사장’의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천년을 미래에 발생할 어떤 가시적 기간으로 볼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2 성도가 누리는 특권과 축복으로서의 “나라”와 “제사장”

계시록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basileia, n)와 제사장(i`erei/j)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에서 우리를 나라(왕국 혹은 왕)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구약에서 특정한 왕이나 제사장을 기름 부어 세운 것과 같은 예식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백성이 얻게 되는 일반적인 특권과 축복을 의미한다. 특별히 왕과 제사장을 따로 함께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두 가지 직책과 연결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나라와 제사장의 두 단어가 병행적으로 쓰인 구약의 첫 사례는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이다. 여기 “제사장 나라”(말레케드 코페님)라는 병행된 두 명사를 대체적으로 ‘제사장들의 나라’(a kingdom of priests)로 번역한다. 한편 이 두 단어를 70인경에는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basileion ierateuma)로 번역했다. 즉 ‘나라’(왕)를 형용사로 채택하여 “왕 같은 제사장들”(royal priests)이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흥미롭게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라는 표현이 베드로전서 2:9(“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에 나온다. 또한 출애굽기 19:6에서 “제사장 나라”라는 문구 후에 바로 이어지는 “거룩한 백성”(고이 카도쉬)을 70인경에는 “에드노스 하기온”(eqnoj agion)으로 번역했는데 역시 베드로전서 2:9에 “왕같은 제사장”에 이어서 “거룩한 나라”(eqnoj agion)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 베드로가 출애굽기 19:6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대두되는 문제는 ‘제사장들의 나라’와 ‘왕같은 제사장들’은 서로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이다. 70인경 번역자들이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보이는 히브리어 명사를 ‘바실레이온’이라는 헬라어 형용사로 바꾼 것에 대해 리차드 넬슨(Richard D. Nelson)은 주장하기를 70인경의 출애굽기 19:6, ‘바실레이온’은 당시 독자들에게 단순히 형용사인 ‘왕 같은’(royal)으로 이해됐던 것이 아니라 명사인 왕국 혹은 나라로 이해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필로(Philo)는 이 형용사 단어를 “왕적 거주지”(royal residency)로 이해했으며 이것은 마치 누가복음 7:25에 형용사 “바실레이오스”를 “왕궁”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고 잠언 18:19의 ‘왕궁’을 70인경에는 형용사 “바실레이온”으로 번역한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19:6의 히브리 성경과 70인경은 “나라(왕국)”와 “제사장들” 두 단어를 병행적으로 열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제사장들의 나라”나 “왕같은 제사장들”이 의미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라”와 “제사장”이 병행적으로 함께 쓰이는 관용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나라”와 “제사장”이 형용사로 이어지거나 명사로 나란히 열거된다고 해도 두 단어가 합쳐질 때는 ‘제사장들의 공동체’(제사장들의 나라) 혹은 ‘제사장들의 다스림’(왕 같은 제사장)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계시록 1:6에 “나라, 제사장”(basileia, n ie` reij/ )이라는 표현과 계시록 5:10에 “나라와 제사장”(basileia, n kai . iev reij/ )로 표시된 문구는 출애굽기 19:6과 베드로전서 2:9에 기록된 “왕 같은 제사장” 혹은 “제사장들의 나라”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계시록 20:6에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한다”는 것도 앞 구절들과 같은 의미의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레고리 빌(Gregory K. Beale)은 계시록 1:6에 “나라(와), 제사장”은 출애굽기 19:6에 근거한 것이라며 출애굽기 19:6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표현하든지 “제사장 나라”라고 하든지 그 차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다 왕적 요소와 제사장적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세 구절(1:6; 5:10; 20:6)은 출애굽기 19:6과 베드로전서 2:9와 연계해서 이해해야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19:6에 “나라”와 “제사장”이 되기 위한 조건을 5절에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으로 말씀한다. 그리고 4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음을 말씀한다. 베드로전서 2:8에는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는 말씀 후에 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말씀한다. 즉 우리는 말씀을 순종함으로 이러한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9절에 이어서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며 “애굽”대신 “어두운 데”를 말씀한다. 출애굽기 19:4처럼 여기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과 연계시킨 것이다. 계시록 1:5에도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말씀하신 후에 6절에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한다. 또한 계시록 5:9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이 후 10절에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말씀한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구약에 특정한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고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얻게 되는 축복과 특권이라 하겠다. 구원 받은 일반적 백성들을 제사장을 삼으신 것은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한다(사 61:6; 66:21; 롬 12:1; 히 10:19-20; 13:15; 벧전 2:5). 특별히 계시록 1:6에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epoih, sen)는 것은 과거형이다. 미래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계시록 1:6을 주해한다: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바실라이안 히에라이스(basilei,an i`erei/j)인데, 그 뜻은 “제사장들의 나라”이다. 무질서한 혹은 개인주의의 제사장들의 군중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모시고 질서 있고 평화로운 단체로서의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땅 위의 교회는 이렇게 질서와 평화를 생명 같이 지니어야 한다. 이는, 출애굽기 19:6의 예언의 궁극적 성취인 것이다(계 5:10; 7:15; 20:6; 21:3). 롬 12:1; 히 13:15; 벧전 2:5 참조. 모든 신자들은 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니, 그들의 왕(그리스도)의 말씀(선지와 사도들의 증언ㅡ성경)을 엄수하여 영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

박윤선은 흥미롭게도 역사적 전천년설을 따르면서 여기 계시록 1:6을 무천년설 입장에서 주해하고 있다. 즉 현재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강조하며, 출애굽기 19:6의 예언의 궁극적 성취라고 강조하며, 또한 이것을 뒷받침 하는 구절로 계시록 5:10과 천년왕국을 암시하는 계시록 20:6을 제시한다. 또한 히에라이스(ie` reij/ )를 형용사로 이해하면서 “나라”와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들의 나라”라고 해석한다. 출애굽기 19:6의 성취라는 것이다. 물론 “나라”와 “제사장” 사이에 접속사가 있다고 해도 출애굽기 19:6의 “제사장들의 나라”와 그 의미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편 박윤선은 이어서 벡코위드(Isbon T. Beckwith)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여기[계 1:6] 이른 바 ‘나라와 제사장’이란 문구는, 신자들이 내세에서 왕됨과 겸하여 제사장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즉 전천년설 입장에서 미래적 의미로 해석한다. 로버트 토마스(Robert L. Thomas)는 “비록 신자들은 현재 왕 같은 제사장으로 보이지만(벧전 2:5, 9; 출 19:6 참조), 이것은 그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행할 충만한 모습에 예비적(preliminary)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벡코위드가 나라와 제사장이 되는 것을 동사 시제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내세에 되어 질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고 토마스처럼 현재형이지만 미래의 천년왕국의 “예비적”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을 예비적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이며 초점을 십자가와 부활에 두지 않고 미래의 지상적 천년왕국에 두는 것이다. 천년왕국을 중심으로 계시록 1:6을 예비적 모습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속 완성을 중심으로 계시록 20:6의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하는 것을 계시록 1:6의 나라와 제사장 됨의 성취와 확증으로 보는 것이 구속사적 흐름과 일치할 것이다.

출애굽기 19:6의 미래적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지 구속의 완성 이후, 어떤 특정한 미래에 성취되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사실 사본에 따라 여러 다른 동사형이 가능하기 때문에 계시록 1:6의 과거형의 동사를 현재형으로 혹은 미래형으로 보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 빌은 요한의 종말론에 관하여 “시간적 및 공간적” 판단을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는 미니어(P. S. Minear)의 경고를 전하기도 한다. 다양하게 동사를 선택해서 베크위드의 주장처럼 계시록 1:6의 내용이 계시록 20:6과 일치하는 미래의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사본보다 더욱 확실한 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구속사적 맥락이다. 이 맥락으로 보았을 때 계시록 1:6; 5:10; 20:6에 나타난 나라와 제사장의 특권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과거 혹은 현재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나라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왕권과 연계되고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과 연계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왕권과 구속의 은총을 단지 미래의 아련한 시간으로 돌리는 것은 기독론적 입장에서 볼 때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박윤선은 또한 계시록 5:10의 “왕 노릇 하리로다”라는 동사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떤 사본들(A, Q)은 현재사로 씌여져 있으나, 모팟트(Moffatt)는 첫째 것을 택하였다. 우리가 계 20:4의 내용(성도들이 말일에 부활한 후에 왕이 됨)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에 현재사보다 미래사 바실류-수-신(왕 노릇하리로다)이 적당해 보인다. 촬스(R. H. Charles)는 이것이 현재사인 경우에도 20:4의 종말관적 군림(君臨)의 의미를 가리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계시록 20:4에 살아난 것도 과거형이요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도 과거형이다. 동사 시제에 따라 전체 내용을 확정짓는다고 하면 성도들의 부활 후의 천년 동안의 왕 노릇도 미래가 아니고 이미 발생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계시록 1:6절에서는 이미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하시고 이어서 계시록 1:7에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말씀한다. 이미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지만 이 사실이 미래에 나타날 주님의 재림과 동떨어진 특권과 축복이 아님을 이 구절에서 보여준다. 주님 재림 후에 계속될 특권과 축복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20:6에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할 것은 단지 미래의 재림 후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신자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었고 이러한 특권과 축복이 재림 후 계속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순교 당한 성도들이 이러한 특권과 축복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켜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시록 1:6과 5:10과 같이 계시록 20:6에 나오는 왕 노릇할 것과 제사장 됨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결과이지 독립된 어떤 상태나 기간의 통치나 자격이 아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미래의 상태를 논하고 추측할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을 논하며 그 효력의 영원함을 논해야 한다. 역사적 전천년설을 따르는 정성욱은 다음과 같이 아담의 언약과 계시록 20:6을 근거로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한다.

“계시록 20:6은 천년왕국에서 다스릴 사람들은 왕이면서 제사장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중략) 첫째 아담이 제사장-왕(a priestking) 이며 마지막 아담 역시 제사장-왕이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사람들도 제사장-왕들이다. 타락으로 인해 좌절되었던 첫째 아담의 제사장-왕적 활동은 천년왕국에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땅에서의 에덴 왕국의 회복이며 성취이다.”

정성욱의 주장대로 아담에게 제사장-왕의 역할이 주어졌고 그리스도 역시 제사장-왕이셨다. 그러나 둘째 사람이면서 마지막 아담(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첫째 아담의 왕국을 회복하고 성취하는 사역이 왜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으로 말미암는지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계시록 20:6에는 첫째 부활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 중심이다.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는 말씀을 하지만 이 구절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 얻게 될 특권과 축복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이면서 마지막 아담이시다. 그가 둘째이면서 마지막 아담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첫째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하는 그리스도의 역할에 참여할 수가 없다. 단지 그리스도가 이루신 것을 참여하는 것이다. 즉 천년왕국이 아담과의 언약의 성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를 둘째 사람 및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아담과의 언약을 성취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러한 주장에서 정성욱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에 천년왕국이라는 제3의 나라가 보태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구속은 마치 미완성인 것처럼 말한다.

정성욱은 또한 히6:18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언약을 지키시고 성취하신다면서 아담에게 주셨던 축복과 특권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둘째 아담을 통해 회복되고 성취되는 것 역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땅에 세워질 천년 왕국이 그래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성경신학이 아니다. 아담이 이 땅에 이루었어야 할 것을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 단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이 다른 구절들과 언약적-구속사적 일체성 이루고 있음을 억지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면 삼하7:16, “네 집 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다윗에게 허락한 언약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좌를 계속 이 땅에서 계속 이으셔야 하는가?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15:16)라는 선지자의 글은 바로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됨으로 성취되었다고 말씀한다(행15:17). 다윗의 언약의 성취를 문자적으로 왕위를 잇는 것으로 볼 필요 없는 것처럼 아담의 언약을 문자적으로 땅에서 성취하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 이후에 아담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천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정성욱은 아담의 제사장-왕 됨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왕 되심을 잘 파악했고 이 사실을 계시록 20:6에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 한다는 사실과 잘 연계시켰다. 그러나 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온 후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계 21:3),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을 섬기며(계 22:3),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임을(계 22:5) 다시 말씀한다. 즉 제사장-왕으로서의 역할이 다시 나온다. 그렇다면 이것은 20:6의 제사장-왕으로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정성욱은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 사이의 주된 연속성은 둘 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제사장-왕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후 천년왕국은 현 상황에서 왕국의 약속/축복의 버금-궁극적(pen-ultimate) 실현이고 새 예루살렘은 영원히 변화될 우주의 상황에서 왕국의 약속/축복의 궁극적(ultimate)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이것 또한 섣부른 주장이다. 새 예루살렘을 궁극적 실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새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왕국이 천년동안 이 땅에 세워질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 계시록 1:6의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제사장-왕으로 삼으신 것과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 사이 중간에 계시록 20:6의 천년왕국과 같은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 이 전, 즉 예수의 재림 이전의 상황에는 어떤 버금의 단계가 있을 수 없다. 십자가와 부활의 완성이 새 예루살렘으로 바로 직결되며 성취되는 것이지 중간에 어떤 버금의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 1:6, 5:10 그리고 20:6에 나오는 제사장-왕은 다 같은 의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과 축복이다.

반면에 정훈택은 예수님 당시 혹은 사도 요한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근거를 계시록 1:6에서 찾는다. 천년 통치의 주체인 제사장은 이미 요한의 시대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요한의 실제상황(1세기 말)과 계시록 20장의 천년의 상황이 같다는 것은 요한이 이 ‘천년’을 역사의 종말에 시작될 천년왕국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지울 수 없는 증거이다”라고 한다. 리차드 보쿰은 계시록 1:6에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 삼으셨다는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이나 유대주의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20:6의 배경이 된다고 한다. 계시록 1:6은 요한이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리고 계시록 5:10은 4장부터 기록한 하늘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말씀한 내용이며(계 4:1; 5:1 참조), 계시록 20:6 역시 환상으로 목격한 하늘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다. 세 구절 중, 뒤의 두 구절을 미래로 놓고 첫 구절을 현재 혹은 과거로 해석할 수는 있어도 20:6의 내용이 미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 두 구절도 미래라고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세 구절이 같은 맥락에서 살아 있는 성도들과 이미 순교한 성도들이 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맥락에 따라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 하는 것을 미래로 본다고 해도 나라와 제사장이 되는 특권과 축복은 미래에서 되고 과거에 되지 않는다고 볼 필요는 없다.

알베르 바누아(Albert Cardinal Vanhoye)에 따르면 계시록 1:6이 일곱 교회에 보내진 지상의 성도들에 관한 기록이라면 5:10의 배경으로서의 4장-5장은 하늘의 성소 혹은 하늘나라에 관한 환상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맥락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데 5:10은 미래에 될 일을 의미하기보다는 1:6의 사실이 하늘에서도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특히 연속이라고 하면 이미 죽은 순교자들과 성도들도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환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계시록은 가시적(visible) 환상(vision)을 목격하고 묘사한 계시이므로 계시록 5:10처럼 과거에 나라(왕)가 되어 미래에 왕 노릇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계시록 20:4처럼 과거에 살아서 과거에 천년동안 왕 노릇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계시록 20:6처럼 미래에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미래에 왕 노릇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또한 1:6은 당시 일곱 교회 성도들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현재적 혹은 과거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세 구절 모두에서 언급하는 나라(혹은 왕 노릇)와 제사장 됨이 과거적 혹은 현재적 의미로그리스도의 구속과 직접적으로 연계가 된다면 계시록 1:6과 5:10은 물론이고 20:6 말씀도 단지 미래에 발생하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20:6에 언급하는 천년 동안의 왕 노릇도 단지 미래에 이 땅에서 발생할 어떤 유토피아적인 제 3의 나라의 모습으로 볼 필요도 없다. 분명 나라(왕)와 제사장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특권과 축복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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