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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교회역사에서 본 이단과 종말론 1

종말론

by 김경호 진실 2014. 8. 2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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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교회역사에서 본 이단과 종말론 1
한국 교회 이단과 종말론의 조명을 위하여
 
김순정 기사입력  2014/08/20 [10:25]

김영재 교수는 전 합동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리스톨에 있는 클리프톤 신학교(Clifton Theological College)와 독일 부퍼탈 신학교(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에서 공부했으며, 총회신학교(지금의 총신대 신학대학원) 편목 과정 이수 후 다시 독일로 건너가 마르부르크 필립 대학교(Philpps Universitat 켜 Marburg)에서 “한국 개신교와 칼빈주의 전통”이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Dr. Theol) 학위를 받았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수많은 이단 사설로 혼란스러운 한국교회에 이 글은 무엇이 이단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소유하게 해 주는 이점이 있어 요약 소개한다. 이 논문은 2014년 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김영재 박사가 발표한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선교를 받은 지 130년이 되었다. 그간에 한국 교회는 현재 세계 선교를 위하여 2만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교회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위상과는 달리 유감스럽게도 여러 부정적인 문제들을 안게 되었다. 부정적인 문제들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교회의 끊임없는 분열과 분열된 교회와 교단들의 틈새에서 준동하며 발호하는 이단들이다. 1920년대에는 한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다같이 이단들의 운동을 정죄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오늘에는 그러한 교회의 권위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이단들도 교단을 형성하여 분열된 전통적인 교회나 교단들과 대등한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비운에 처한 나라에 태동한 한국 교회는 내세 지향적 신앙과 민족의 자주와 구원을 바라는 대망에서 일찍부터 역사적 종말론에 관심을 가졌었다. 이를테면, 요한계시록은 길선주 목사의 경우 부흥사경회의 텍스트였다. 한국 교회에 종말론적 이단들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중엽부터이다. 예수가 자기에게 강림했다고 하며 마치 자신이 예수인 양 처신한 유명화, 신비적이며 신지적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백남주와 한준명, 이에 동조한 이용도 등이 그 장본인들이다.

자신이 육신을 입은 예수라고 사칭하며 성적인 교접을 통하여 ‘피 가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황국주는 문선명과 박태선 이단들의 원조이다. 오늘에 준동하고 있는 일부 이단들이 이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이단들의 주장과 처신도 이들과 유사하다.

교회 역사에서 이런 유의 이단들이 사도 시대부터 있어 왔다. 2세기 중엽에 소아시아의 미시아와 프리기아 접경 지방에서 종말론적 이단 운동을 주도한 몬타누스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가 자기 자신에게 임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가리켜 “천사도 사자使者도 아니고, 주 하나님 아버지인 내가 왔노라.” 혹은 “나는 사람들에게 온 전능한 주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보혜사”라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보혜사 성령이라고 믿었다. 그의 두 아내 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은 선지자로 자처하였다.

‘이단’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왜곡하거나 잘못 가르치는 자나 그를 추종하는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와 삼위일체 교리를 왜곡하거나 부인하는 자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계몽사조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가 하면 예수의 역사성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합리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 안에서 큰 흐름을 형성하면서부터는 이단에 대한 정의가 수정되다시피 하였다.

한국에서는 삼위일체를 잘못 설명하는 양태론이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대다수의 교회에도 만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사상과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조차도 ‘이단’이라는 말로는 정죄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교회는 ‘이단’이란 말을 잘못된 신론과 기독론을 말하는 자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거나 종말론적 그리스도임을 사칭하는 자에 한하여 ‘이단’이라는 말로 정죄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윤리적인 기독교를 지향하는 신학적 자유주의를 따르는 교회들이 기독교 내에 주류 main stream를 형성하여 윤리성과 사회성을 유지하며 문화에 적응하는 반면에, 잘못된 종말론을 말하거나 재림한 그리스도라고 사칭하는 교주들과 광신적인 그들의 추종자들은 흔히 비윤리적이며 반문화적인 반사회적 집단을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학술대회의 주제를 따라 필자에게 주어진 “교회 역사에서 보는 이단과 종말론”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2 기독교 종말론과 천년왕국 신앙

종말론은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한 종교적인 교리이다. 기독교 신학은 종말론을 두고 개인적 종말론과 역사적 종말론을 말한다. 개인적 종말론에서는 인간의 죽음,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의미, 부활, 영생 불사 등을 다루며, 역사적 종말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최후의 심판, 의인이 누릴 복된 상태와 악인이 견디어야 할 상태에 관하여 논한다.

기독교 종말론의 특이성은 기독교 역사관과 결부된 역사적 종말론이다. 그것은 창조의 목적의 성취를 내다보는 논리적 결론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에서 그리스도를 보다 역사적이며 역동적으로 인식한다. 그리스도는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창조에서부터 존재하신 계시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으로 인식하며, 인간의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내용의 최종 성취로 인식하며 바란다.

교회 역사에서 종말 신앙은 시대적 배경이나 신앙의 유형 혹은 신학적 견해에 따라 개인적 종말론과 역사적 종말론 그 어느 편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역사의 종말에 있을 사건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천년기, 즉 천년왕국Chiliasm, Millenium의 여부에 관하여는 신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천년왕국에 대한 고백과 진술은 교회 역사에서 역사적 종말론의 한 쟁점이 되어 왔다.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 혹은 견해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무천년설Amillennialism로 분류된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전에 있다는 견해이고,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후에 있다는 견해이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휴거, 공중 잔치, 유대인들의 회복,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건설과 통치를 믿는다.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 교회가 왕성하여 황금기를 누린다는 견해이다. 전천년설이 곧 전통적 천년왕국 신앙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후천년설도 천년왕국 신앙의 특색을 지닌다. 무천년설은 천년기를 교회 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가 신자들의 마음속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본다.

개혁주의 교회의 종말 신앙의 전통은 루터교회의 것과 마찬가지로 무천년설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는 세대주의적 색채를 띤 전천년설이 한국에 온 초대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수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 성결교회 부흥사들을 통하여 그러한 신앙이 더 일반화되었다. 보수적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두 신학자 박형룡 교수와 박윤선 교수가 초대 부흥사 길선주 목사의 전통을 이어 전천년설을 고수하며 교수하였다.


3 초대 교회의 종말 사상

사도 시대 이후의 기독신자들의 종말 신앙은 그들이 기대했던 임박한 파루시아가 지연되자 다소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임박한 파루시아 대신에 갑작스런 재림에 대하여 말하는 한편, 교회 조직 등 실제 생활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고 말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바울의 선교 목적이 교회의 설립에 있었음이 사도행전(예, 행 14:23)이나 목회 서신들뿐 아니라 그의 다른 서신들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그 서신들이 다루는 주제 역시 다양함을 간과한다. 사도 시대 이후에 유대교의 영향으로 많은 위경들과 묵시록들이 나왔으며, 성경에서 경계하는 바와 같이 잘못된 광신적 종말론 신자들도 있었으나 그런 신자들이 주류에 속하지는 않았다.

초대 교회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묵시록들은 상징적 언어로 되어 있고 또 그것이 함축하는 신학적 사상으로 보아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 속한 것이었다. 도덕적인 권면과 세상의 심판과 구원을 말하고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몰락할 날이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과 유사하다. 기독교적 묵시록들은 유대교의 묵시록들처럼 성경적 신앙의 소망만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혹은 종교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백성들이 겪는 좌절과 불안정을 반영하고 있다.

에스라 4서, 이사야의 승천Ascention of Isaiah, 시빌의 예언서Sibylline Oracles 등은 본래 유대교적 문서인데,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아 다시 쓴 것이다. 시빌Sibyl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무당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문서에는 시한부 종말론도 눈에 띈다. ‘사도들의 편지’Epistola Apostolorum는 예수 부활 이후 150년 말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며, 시빌의 예언서는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147~161)의 통치 마지막 해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말한다. 임박한 종말의 징조에 관해서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한다. 즉, 불화, 부패, 공동체 내의 거짓 교리, 가정의 분란, 여러 나라들의 전쟁, 질병의 만연, 흉년, 기근, 인구 감소 등을 말한다.

후기 유대교의 묵시록인 바룩서Baruch는 최종이며 또한 최악의 제국인 로마 제국 시대, 즉 고난과 부정不正이 극에 달하는 때에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한다. 권능 있는 전사戰士인 메시아는 로마의 지도자를 포로로 만들어 시온에 가두었다가 죽이고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한다. 그 왕국은 세상 끝 날까지 존속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나라들은 칼에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선민에게 항복한다. 그러면 축복의 시대가 열린다. 고통, 질병, 갑작스런 죽음, 폭력과 분쟁이 없고, 궁핍과 기근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며, 땅도 그 열매를 만 배나 더 생산한다. 이 지상 낙원은 영원히 혹은 수백 년간 계속된다고 한다.

에스라 4서는 메시아를 주로 인자人子로 지칭하면서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먼 이국으로부터 불러 모아 팔레스타인에 왕국을 건설한다고 하며, 재연합된 이스라엘은 평화와 영광 중에 번영한다고 한다.

로마의 점령 아래 총독들의 압제가 더 가중되자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상에 사로잡혔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메시아의 임박한 출현을 믿는 믿음에서 유대인들은 자살적인 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 주전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다.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Cochba의 독립 전쟁(132~135)도 그러한 전쟁이었다.

주전 132년에 유대인들은 시몬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하여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려고 도발했다가 로마군에게 가차 없이 진압을 당하였다. 그 후 수백 년간 유대인의 여러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메시아로 자칭하는 자들이 일어났으나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약속하는 정도였고 종말적인 세계적 왕국 건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유럽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서는 무력 봉기가 거의 없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제는 유대인이 아니고 기독신자들이었다.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은 대다수의 속사도 교부들과 많은 초대 교부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교부들, 특히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의 글에서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이 더 현저함을 발견한다. 그 밖에도 바나바서Barnabas, 파피아스Papias, 클레멘트의 첫 편지, 이그나티우스 등을 비롯하여 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한 때 몬타누스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터툴리안, 히폴리투스Hipolytus 등, 여러 교부들이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을 말하였다.

천년왕국 신앙은 요한계시록의 말씀(20:1~21:5)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갖는 신앙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이 있게 된 다음에 있게 될 천년의 기간 동안 성도들은 지상에서 낙원의 복된 삶을 누릴 것이며, 사탄은 마침내 패배를 당하고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바나바서는 창세기 2:2에 나타나는 안식일의 제정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면서 이 세상의 역사가 6천년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제7일에 해당하는 천년 동안에 안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교부들이 받아들인 이 견해는 종교개혁자 멜란히톤과 아르마Armagh의 대주교 어셔James Ussher(~1656) 등이 따랐던 것이며, 기독교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시대 구분과 천년왕국 사상은 이미 2세기 초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리겐은 천년기를 풍유적으로 혹은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 최초의 사람이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영적인 해석을 받아들여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교회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그의 성찬에 대한 해석과도 일관성을 지닌다. 대다수의 초대 교부들이 “이것은 나의 몸이니…”하는 주님의 성찬 제정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다시 말하면, 실재론적으로 해석했으나, 오리겐은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즉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때까지 동방의 그리스 신학은 오리겐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든 비판하는 사람이든 전통적 종말론을 영적으로 재해석하는 오리겐의 종말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의 제자 그레고리Gregory를 비롯하여 메토디우스Methodius 등 많은 신학자들이 스승인 오리겐과는 다른 천년왕국 사상을 피력하였다.

서방에서는 3세기 말과 4세기 초(303~313)에 있었던 혹독한 박해 아래 사람들은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에 대하여 새롭게 관심을 가졌다. 빅토리누스Victorinus, 락탄티우스Lactantius 등은 천년왕국에 대한 희망을 강열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박해의 시대가 지나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380년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가 제도화되고 힘 있고 번창하는 기관으로 발전하면서부터 서로 다른 종말론적 신앙을 갖는 데서 오는 긴장 관계를 지양하고자 천년왕국 신앙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종말론 신앙을 단순화하였다. 로마 교회가 이러한 과정을 취하도록 영향을 미친 이는 어거스틴이었다.

오리겐 이후의 동방 교회와 터툴리안 이후의 서방 교회의 신학을 종합한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자기 나름의 종말론을 개진하였다. 어거스틴의 종말론을 이해하는 데는 그의 신플라톤주의적 시간 이해가 관건이 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영원은 오리겐이 말하는 ‘애온’ aeons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고, 연속 혹은 연장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이며, 영원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속하는 전적으로 단순하며 불변하는 현재이다. 시간과 영원을 구별하는 선은 피조물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전적인 형체의 변화 transformation, 즉 우리의 물질적 실재의 변형이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변형이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순간에 이 변형을 가능하게 하신다. 어거스틴에게 종말은 현세의 끝임과 동시에 새 시대의 시작일 뿐 아니라, 역사자체의 종말이며 영원한 안식의 시작이다. 안식이 시작되면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쉬신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요한계시록 20:1~6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지상에 이루어지는 왕국의 천년은 온 기독교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교회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도성은 한편 미래적인 것이어서 교회와 국가가 다 같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며, 구속받은 개개인들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도성 자체는 아니고 하나님의 도성을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은 역사적인 가톨릭교회의 가견적 형상을 바로 이 하나님의 도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말하는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로마의 역사적인 교회를 동일시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세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림으로 보듯 좀 더 생생하게 고대하게 해 주는 천년왕국 신앙은 소위 무천년설로 대치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정통적인 교리로 받아들여,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는 천년왕국 신앙을 미신적인 탈선이라고 정죄하였다.


4 중세 종말 사상과 천년왕국 운동

어거스틴이 중세의 종말론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교리는 연옥설이다. 연옥설은 어거스틴이 시안으로 제시하였으며, 그레고리 1세가 그 기초를 설정하였다. 어거스틴은 정화하는 불이 존재하는지 혹은 이생 후에 회개를 통하여, 특히 구제를 통하여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멸망할 것들을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 더 천천히 혹은 더 신속히 연옥의 불을 통과하는지, 혹은 몇몇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은 의문으로 남겨두었다.

톨레도Toledo의 율리안Julian은 연옥설이 교부들의 글들과 마태복음 12:32,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어떤 죄는 이 세상에서 사함을 받으나 다른 죄는 저 세상에서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며, 고린도전서의 말씀에서 불에 타지 않는 금, 은, 보석을 보다 크고 완악한 죄로, 나무, 풀, 짚을 작고 미미한 죄로 해석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은 연옥의 불을 통과함으로써 마침내 작은 죄로부터 정결함을 받는다고 한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전혀 문맥과도 어울리지 않게 억지 해석을 하면서 그것을 연옥설의 성경적 근거로 든 사실은 희한한 일이다.

그로부터 최후 심판 이전의 성도들의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상세한 부분까지 사변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과업의 하나가 되었다. 이를테면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완전한 영혼들이 최후 심판 이전에 천국에 영접을 받은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사변하였다. 이러한 연옥의 교리는 발전하여 신곡을 쓴 단테에 이르자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세 교회의 신학자들이 현세와 내세를 대조하는 한편 연옥을 사변함으로써 낙관적 종말론을 말하고 있을 때, 431년의 에베소 회의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공적으로 억제를 당하게 된 천년왕국 신앙은 신학자들의 세계에서 잠적하여 ‘시빌의 예언서,’ ‘은자隱者의소책자,’ ‘아스클레피우스’ Asclepius 등, 비기독교적인 묵시록과 함께 일반 민간 사이에 유포되고 전수되면서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다가 중세에 이르러 사회적인 상황이 극도로 불안하게 되자 메시아를 사칭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천년왕국 신앙이 민간에 확산되었다.

초대 교회 시대의 교부들이 천년왕국 신앙을 말할 때, 그것은 신앙인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양자택일 할 수 있는 무해한 종말론 신앙의 하나일 뿐이었으나, 기근과 가난, 질병과 역병에 시달리는 중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기적적으로 벗어나 곧 실현될 이상 사회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신앙이요 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년왕국 건설을 빙자하여 메시아를 사칭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천년왕국 신앙은 배타적이며 무력을 행사하고 소요를 동반하는 천년왕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2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동반한 민간의 천년왕국 운동이 잇따라 일어났다. 천년왕국을 신앙하는 이들은 철장을 가지고 원수를 제압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일을 대행한다는 명분으로 유대인을 학살하고 성직자와 수도사를 응징하는 일을 자행하였다. 1110년경의 탄쉘름 Tanshelm 운동, 1140년경의 유드 드 레토아(Eude de l'Etoile) 운동, 수차에 걸친 광신적 비정규군의 십자군 운동 등, 거짓 메시아 운동 혹은 적그리스도 운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런 운동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악마적이었는지 그 예를 보기로 한다.

탄쉘름은 예언자로 자처하여 추종자들을 얻었다. 탄쉘름은 성직자를 매도하며 교회를 공격하였다. 그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비난하는 한편, 수도사처럼 검소하게 옷을 입고 야외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탄쉘름은 처음에 금욕적인 자세로 시작하였으나 추종자들이 많아지자 그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설교하러 나가면서 주교처럼 찬란한 옷을 입고 금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십자가 대신에 칼과 깃발을 들고 호위병에 둘러싸여 군중 앞으로 나아갔다. 탄쉘름은 마침내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을 정도로 성령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처럼 자기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는 자신이 목욕한 물을 맹목적인 추종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성찬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20세기 한국에서 박태선이가 자신이 목욕한 물을 생수라고 나눈 이야기를 연상하게 해 준다. 그는 또한 성모 마리아 상을 가져오게 한 다음 회중이 보는 앞에서 엄숙하게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마리아 상의 양편에 상자를 갖다 놓고 남녀 추종자들에게 결혼 선물로 채우라고 명하였다. 상자는 순식간에 넘치도록 가득 찼다.

탄쉘름은 추종자의 핵심 조직을 사도의 것을 모방하여 12인과 한 여자로 구성하였다. 측근들은 그들의 교주와 매일 향연을 벌이면서 이를 천국의 잔치라고 하였다. 그들은 대량 학살을 자행하다가 1115년 탄쉘름은 한 사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안트베르프에서는 그가 죽고 난 후에도 그 추종자들의 행패가 10년이나 계속되었다.

30년 후에 다시금 비슷한 운동이 일어났다. 유드 드 레토아는 브리타니Brittany의 귀족 출신으로 품위 있고 매력적인 인물로서 많은 사람을 추종자로 끌어들였다. 그 역시 1148년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에 대한 충성을 완강히 고집하던 나머지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운동들은 제도적 교회가 종교 재판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이단을 정죄하고 처형하였던 일과 대비가 된다.

종교 재판은 루키우스 3세Lucius III(1181~1185)가 1184년에 실시한 이단에 대한 재판에 근거하여 그레고리 9세(1227~1241)가 1231년 시행하기 시작한 제도인데, 교회 당국은 종교 재판으로 사람들을 산 채로 화형에 처할 뿐 아니라 시체를 파내어 불사르기도 했으며, 영원한 지옥으로 보낸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이러한 처사와 발상은 스스로 심판하는 천사의 일을 대행한다던 천년왕국 운동자들의 처사나 발상과 별 다름이 없었다. 양자의 차이는 하나는 제도적 교회 안에서 시행된 반면에, 다른 하나는 제도적 교회 밖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13세기 이후의 종말론과 천년왕국 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피오르Fiore의 요아킴Joachim이다. 그는 역사를 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 성령의 시대로 구분하면서,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제3의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하고서, 1260년을 그 해라고 하는 한편, 새로운 예언서를 내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사건들과 서술들을, 오늘의 많은 요한계시록 해석자들이 시도하듯이,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 및 사건과 맞추어 일일이 설명하려고 하였다.

요아킴은 자신의 묵시록을 ‘영원한 복음’ evangelium aeternum이라고 불렀다. 그가 죽고 난 이후 반세기 만에 메시아 운동은 ‘영원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번져 나갔다. 이 메시아 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메시아적인 황제를 대망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출중한 군주가 나타나면 메시아로 여겼다. 특히 독일에서는 사람들이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를 메시아로 생각하였고 그가 죽고 난 후에도 부활하여 다시 올 것이라는 황당한 기대도 가졌었다. 이상적인 정치를 펴서 가난한 자들에게 부와 희망을 나누어 주고 성직자들을 벌할 것이라는 프리드리히의 부활 신앙은 1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13세기에 일어난 ‘플레절런트’Flagellants 운동은 요아킴의 묵시록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또 하나의 천년왕국 운동이다. ‘플레절런트’란 매질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 그룹 가운데 경미하게라도 죄를 범한 사람은 무리에게 둘러싸여 매를 맞아야 했다. 매를 맞는 사람은 고행하는 성자로 또는 순교자로 인정받았다. 처음에 자학하는 고행주의로 일관하던 플레절런트 운동은 점점 혁명적이며 폭행을 동반한 독선적 운동으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1348/49년 사제들을 살해하고 유대인들을 죽이는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15세기 보헤미아는 타보르Tabor에서 일어난 사회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천년왕국 운동Egalitarian Chiliasm으로 인하여 참화를 입게 되었다. 이 운동은 먼저 프라하에서 요한 후스의 노선을 따르는 과격파에 의하여 일어났다. 1420년 2월 10일에서 14일 사이에 모든 도시와 마을이 불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14일을 무사히 넘기자 타보르인들은 기적에 의한 불신자들의 멸망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세상을 정화한다고 나섰다.

타보르인들의 설교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외쳤다. 그들은 먼저 죄인들을 없애고 땅이 정결해져야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하며, 그때 신자들은 휴거하여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시금 타보르인들의 여러 근거지가 있는 지역의 거룩한 산속에서 메시아적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고 믿었다. 또한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처럼 한다면서 재산을 공유하는 일도 했으나, 모두 일하지 않고 소비만 하다가 궁핍해지자 다른 이웃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무리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광신적이며 전투적인 천년왕국 집단들이 대환난 심판의 대행자로 나서면서 제일 먼저 처치하는 대상은 언제 어디서든 교직자와 수도사들이었다. 특히 당시 보헤미아의 경우, 국토의 절반이 교회 소유였다고 하니 그 이유를 알 만하다.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사회평등주의의 천년왕국 운동은 인접국인 독일로 침투해 들어갔다. 1502년 슈파이어Speyer에서 농부인 요스 프리츠Joss Fritz가 ‘분트슈’ Bundschuh로 알려진, 천년왕국 신앙으로 무장한 혁명적인 농민 운동을 일으켰다. 관아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모든 세금 제도를 철폐하며, 교회 재산을 주민들에게 분배하고 삼림과 수자원과 목장을 공동 소유로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독일 여러 지역에서 농민들의 소요가 일어났다. 모두 다 천년왕국 신앙과 결부된 것은 아니었으나 천년왕국 신앙이 두터운 고장 튜링엔Thuringen에서는 소요가 농민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평등주의 천년왕국 사상은 재세례파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재세례파 운동은 30개에 이르는 여러 그룹들로 출발된 운동이다. 공통점은 재세례의 시행과 자기들만 선민으로 생각하는 배타적인 성향과 천년왕국 신앙이었다. 다수의 재세례파 사람들은 평화적이었으나, 전투적인 천년왕국 신봉자들은 중세기에 같은 신앙을 가졌던 종파들이 저지른 일을 재현하였다.

튜링엔 출신인 재세례파 설교자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 (1488/9~1525)는 천년왕국 건설의 꿈을 실현하려면 성령을 받은 선민들이 무력으로 천년왕국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악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일반 민중들로 구성된 선민들이 귀족들을 포함한 불신자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뮌처는 설교자로서 농민 봉기의 이념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1525년 농민 전쟁에 가담하여 농민들의 지도자로 역할 하였다.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은 환난과 이적과 기사가 있은 후, 즉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1500년이 되는 해인 1533년에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추종자들이 슈트라스부르크로 모여들었으나 호프만이 투옥되자 그의 재세례파 추종자들은 뮌스터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호프만과 함께 지도자 노릇을 한 복클손Bockelson은 1534년 2월 8일 거리를 달리며 회개를 외치자, 마지막 날이 임박한 것이라고 생각한 여자들은 흥분한 나머지 울며 땅에 엎드려 입에 거품을 내기도 하였다. 추종자들은 무기를 들고 봉기하여 시청과 시장市場을 점령하고 새 예루살렘 건설을 추진한다고 하였다. 복클손은 예루살렘의 왕으로 즉위하여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는 한편, 신정 정치를 시행한다고 하였다. 1535년 6월 25일에 성이 함락되자 소요는 평정되었다. 재세례파의 뮌스터 소요가 평정되자 십자군 시대부터 수세기에 걸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무력행사를 불사하던 광신적 천년왕국 운동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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