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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교회역사에서 본 이단과 종말론 2

종말론

by 김경호 진실 2014. 9. 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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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교회역사에서 본 이단과 종말론 2
한국 교회 이단과 종말론의 조명을 위하여
 
김순정 기사입력  2014/08/20 [10:29]

5 종교개혁의 종말 사상

‘말씀으로’만 신앙의 척도를 삼아야 한다고 주창한 루터와 칼빈은, 그들의 종말론에서 중세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연옥설을 거부하였다. 연옥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교리일 뿐 아니라 공로사상, 사자를 위한 기도, 면죄부의 관행과 연계된 교리였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과 견해를 달리했으나 천년왕국 신앙을 배격한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초대 교회 신앙을 본받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으나, 천년왕국 신앙이 모든 초대 교부들이 지지한 전통은 아닐뿐더러, 중세에는 천년왕국 신앙에 이교적 종말론이 뒤섞여 있는데다가 그러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가공할 일들이 연출되었기 때문에, 천년왕국 신앙에 대하여 더 한층 부정적으로 말했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루터는 성경에서 유래한 묵시록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등 말세의 징조를 들어 말했다. 그러나 천년왕국 신앙은 배격한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 이전에 거룩한 자들과 경건한 자들만(자들만이) 세상적인 나라를 향유하면서 불신자들을 멸절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역사가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사역은 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고난 가운데 살며, 그리스도의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활의 실제 세계를 현재로는 다만 믿음과 소망으로만 도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의 특징이 십자가이므로 역사 안에 있는 왕국에서 세상적인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거부하였다. 1530년 루터교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천년왕국설을 유대인의 견해라고 하여 배격한다.

칼빈은 천년왕국 신앙을 “광신자들의 겁주는 말”이라 간주하고 거부하였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이 천년으로 한정될 수는 없다고 하며, 루터가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영광 가운데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시면, 이 세상은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다시금 현세의 연장을 바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초대 교부들 가운데 다수가 천년왕국 신앙을 가졌다는 점을 가지고 호소한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 교부들의 성경 이해가 성경의 진리에는 미치지 못함을 교리사 연구를 통해서 안다.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교의화(敎義化)하기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다. 초대 교부들에게서 바울 신학에서 볼 수 있는 칭의 교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한계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의 종말론에는 마지막 심판 날에 있을 상벌을 말하면서 현세의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데 반하여 ‘칭의 교리’를 재발견하여 강조한 종교개혁자들은 은혜 교리를 말한 어거스틴처럼, 천년왕국 신앙을 부정적으로 말한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어거스틴의 신학적 전통을 재발굴하여 계승한 것이라고 하는데, 종말론을 두고도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중세 교회가 칭의 교리와는 먼 율법주의적 공로 사상에 더 깊이 빠지면서, 즉 기독교를 일반 종교와 구별하게 해 주는 가장 기본적 특성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교회에는 이교적 관행이 범람하여 부패하게 되었으며, 가난과 무지 속에 사는 백성들은 미신적이며 광신적 신앙에 방치되었다. 종교개혁의 교회가 무천년설을 교회의 공적인 신앙으로 지지해 온 것이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6 종교개혁 이후의 종말론

종교개혁 이후 100년 동안은 유럽에서 정통주의가 지배한 시대였다. 개신교 신학은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교리를 더 확고히 하고 체계화한 시대였다. 종말론이 정통주의 교리의 핵심은 아니었으나, 정통주의 신학은 그런 대로 종말론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고전적이며 조화의 미를 추구한 바로크 시대 사람들은 세상을 좋아했으며, 세상에 애착을 두다 보니까 세상의 덧없음에 대한 불안감에서 그만큼 종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신학은 세속의 생활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순례자의 생활 목표라고 가르쳤다.

후기 스콜라주의 시대라고도 일컫는 정통주의 시대의 종말론은 중세 스콜라주의의 경우처럼 역사적 종말보다는 개인의 종말에 있었다. 죽음은 곧 몸과 영혼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죄의 결과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신학은 죽음 이후에 영혼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사변하였다. 대부분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사람이 죽을 때 몸만 죽고 영혼은 불멸하므로 계속 산다고 믿었다. 루터는 최후의 날이 임박하다고 말했는데, 루터교회는 이러한 견해를 오랫동안 견지하였다.

17세기의 사람들도 같은 생각으로 종말이 언제냐를 두고 사변하였다. 이성적인 종교를 추구한 계몽 사상가들은 과거를 퇴보적인 것이라고 보는 한편 추상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즉, 인간은 점점 더 차원이 높은 계몽의 상태로 나아가고, 보다 이상적인 인간성을 지향하여 끝없는 발전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계몽신학자들은 도덕적인 종말론을 개진하였다. 그들은 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이 미래의 이상 사회, 지상에 있는 완전한 윤리적 공동체인 이상국에 살도록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은 자연을 따라 도덕적인 인간으로 완성에 이르며, 본래적인 종말에 도달한다는 것이었다.

계몽사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사상이요, 운동이지만 세상 끝 날이 언제 올 것이냐 하는 사변은 그대로 물려받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경건주의자들은 대체로 현세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 중생 그리고 현재를 기독교 신앙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힘쓰는 일에 관심을 두었으나 종말론을 두고는 정통주의나 계몽주의와는 달리 개인적 종말보다는 역사적 종말에 더 관심을 보였으며, 천년왕국 신앙을 견지하였다.

경건주의의 탄생에 기초를 놓은 요한 아른트Johann Arndt(1555~1621)는 경건은 영원 속에서 장차 이루어질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여 현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뷔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의 선구자 안드레Johann Valentin Andreae(1586~1654)는 아른트의 종말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람을 새롭게 하는 천국의 현재성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 기독교 사회 건설을 말하면서 그러한 준비는 인간의 실제적 변화를 통하여 먼저 역사 안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경건주의의 창시자 슈페너는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으면서 생동성이 있고 실천적 신앙을 가지려는 열심에서, 그리고 교회 생활을 개선하려는 열망에서 천년왕국 신앙도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역사 속에 영광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현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성경학자 벵겔Johann Albrecht Bengel(1687~1752)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죽는 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죄를 벗어나 은혜를 입는 일과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대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 말하고, 기독교를 ‘죽음의 예술’로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면서 관심을 역사적 종말론에 다 돌렸다.

벵겔은 특히 천년왕국을 강조하였다. 벵겔은 정통주의 신학의 영감설을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책’이라고 하고, 성경에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므로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벵겔은 요한계시록에는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계시록을 통하여 전체 역사와 세계의 설계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의 비밀을 알려고 애쓰면서 성경의 다른 책에서 보는 숫자와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요한계시록 20:2에 말씀하고 있는 천년왕국의 시작은 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며, 약간 불확실한 대로 1836년 6월 18일에 시작된다고 추정하였다. 이러한 종말 사상과 역사의 상세한 부분까지 계시록에서 읽을 수 있다는 벵겔의 사상은 부흥 운동, 즉 각성 운동을 거쳐 오늘의 한국 신자들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벵겔의 천년왕국 신앙은 18세기와 19세기에 일어난 부흥주의 신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성경을 일반 문서로 보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사상에 반하여 부흥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나머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성경 문자주의Biblicism에 빠져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에 관한 문자적으로 해석을 더 신빙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경건주의 신학은 중생과 새 사람이 되는 일과 성령으로 충만한 새 생활을 역설하며, 역사적 종말론을 강조하는 등,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나, 열정적이면서도 주관적 신앙을 가지는 것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라든지 천년왕국 신앙을 강조하는 점 등을 보면 재세례파처럼 신령주의Spiritualism 전통을 계승한 운동이다.

17세기에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가졌던 또 다른 종말론 신앙은 소위 후천년설의 신앙이다. 계약신학자로 알려진 코케이우스Coccejus, 알팅Alting, 브라켈Brakel 등이 후천년설을 말하였다. 역사의 종말과 교회의 과업을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본 후천년설의 종말론은 사회 개혁과 칼빈주의 문화 건설을 주창한 19세기 화란의 소위 신칼빈주의 사상 운동을 자라게 한 토양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언덕 위의 도시’ 건설을 지향한 코튼John Cotten을 위시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도 후천년설의 종말 사상을 피력하였다. 코튼이 뉴잉글랜드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바로 그곳이라고 믿은 일이라든지, 매사추세츠의 법이 천년왕국을 위한 적절한 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점이나, 교회 회원의 자격 요건으로 회심의 체험을 강조한 점 등은 종교 개혁 당시에 사회개혁과 천년왕국 건설을 꿈꾸었던 재세례파들의 천년왕국 신앙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재세례파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생존을 위하여 그들을 반대하는 로마가톨릭과 종교 개혁 교회의 세력이나 이들을 옹호하는 정치권력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반사회적이거나 혁명적인 그룹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신대륙의 황무지에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신념을 펴며 그 신념을 따라 천년왕국 건설을 위하여 매진할 수 있었고,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신령주의적인 재세례파의 일부 그룹들이 메시아 운동에 빠진 데 반하여,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들이 비교적 건전한 교회 운동을 한 점은 물론 동일하지 않다.

계몽주의의 전통을 따라 역사적 비평으로 성경을 비판하는 합리주의 신학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의심하므로 그들의 종말론은 일반적인 개인의 종말론에 머물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혹은 성육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에게서 재림에 대한 신앙은 기대 할 수 없는 법이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이를 극복하려던 20세기의 소위 현대신학자들도 종말론을 다루면서 기독교를 종말론적 종교라고 정의하지만, 역사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전통적인 이해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역사적 종말에 대한 그들의 이해도 전통적인 이해와 다르며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개념도 다르다. 그들의 종말 개념은 실재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이다.


7 맺는 말

기독교 교리를 왜곡하거나 잘못된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단들의 행태이다. 교회는 마땅히 이단을 가려내고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밝혀내는 한편 전통적인 정통교리를 보수하고 변증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마 13:24-30)의 말씀에서 보듯이 이단들이 서식하는 것을 미리 막거나 제거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교회는 성도들이 이단들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고 선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자들이 이단을 추종함으로 말미암아 이단 종파가 형성되며 이단운동이 있게 된다. 이단들이 발호하는 데는 사회와 시대적 환경과 종교적 배경이 중요한 여건으로 작용한다. 한국에는 불운한 국가와 사회적 환경 때문에 많은 신흥 종교와 이단들이 일어났으며 많은 추종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와 시대적 환경과 배경뿐 아니라 교회 또한 본의 아니게 이단들에게 그들이 서식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거나 신자들을 공략할 수 있는 틈을 주고 있다면 그러한 여건들에 대한 반성과 개선이 이단에 대한 비판과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냉랭한 예배 분위기, 이와는 다른 극단으로 열렬함을 넘어서 열광적임을 추구하는 집회의 성향, 예배 신학의 빈곤, 지나친 문자적 성경 해석, 영해임을 빙자하는 주관적인 풍유적 성경 해석과 설교, 본문과는 동떨어진 설교, 전통적인 올바른 신앙 교육을 위한 요리문답을 방치해 온 성경 공부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상징적 언어로 가득한 요한계시록과 다른 묵시록에 대한 풍유적 해석이나 암호 풀이 식 해석은 다양한 주관적 해석과 함께 이단적 해석을 유발하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임의의 해석에 익숙하게 하여 분별력을 잃게 만든다.

이런 여건들은 교육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여건은 빛과 맛을 잃어 가는 한국 교회의 정체성이다. 무분별한 교회 분열, 교주를 방불케 하는 많은 목회자들의 의식과 자세, 성경의 가르침을 떠난 교회 경영, 많은 교회들의 비윤리적인 성향 등은 한국 교회를 허약하게 만드는 치유 난망의 고질병이다. 한국 교회를 있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신 성삼위 하나님께서 주님의 몸인 교회에, 즉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각성과 개혁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3335§ion=sc9§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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