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주차. 깨달았도다
본문: 행10:34-48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이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서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33-43)~”
1. 편견의 벽
지난 시간에도 우리는 한 사람의 죄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인간은 이 편견으로 인해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간의 편견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능력에 의존하려는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 이성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부합니다. 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율과 자유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는 신앙은 ‘이성으로부터의 탈피’라고 정의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교회의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일러 ‘토마스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이 신학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타락하지 않고 인간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울적 인간에 대한 관심과 주장들이 난무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가 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이런 주장들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자율적인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천명했습니다. 오직 자율적인 존재는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하나님 이외 모든 존재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자율적인 노력이나 공로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신학은 구원을 얻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을 자격, 자시 말해 선행의 업적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주장들로 인해 신앙은 퇴색되고 변질되었습니다. 이성이 신앙을 저울질하고 이성으로 성경을 판단하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이성은 자신의 거대한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 장벽 안에 수많은 현대인들을 가두어 놓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모든 일을 거부합니다. 지독한 하나님에 대한 편견, 진리에 대한 오해와 왜곡된 관념에 스스로 빠져 있습니다. 이성은 이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이성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철저히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입니다. 이성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성에겐 순종이 없습니다. 이성에겐 오직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요 모든 결정권의 소유자가 됩니다. 자기 생각이 진리가 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계시하셨음에도 여전히 그 이유를 몰라 의문을 가졌습니다. 베드로의 이 의문은 고넬료 집을 방문하는 자리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28절 하반부입니다. “무슨 일로 날 불렀느냐?”
2. 깨달음의 순간
이에 고넬료는 베드로의 질문에 성실히 자초지종을 다 말합니다(30-33절). 순간 베드로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앞이 환히 밝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전율이었습니다. 자신이 본 환상과 고넬료가 본 환상이 어쩌면 이렇게도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선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편견의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듯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옵니다. 목욕탕 안에서 수학적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가 즉시 알몸으로 뛰쳐나가 ‘유레카’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을 때의 깨달음과 하나님의 진리의 듯을 깨달았을 때의 깨달음이 다릅니다. 전자는 이성적인 깨달음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전자는 깨달음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의 습득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진리에 대한 것입니다. 진리는 빛이기에 이 깨달음은 마치 어둠에 비추인 빛과 같습니다. 또 지식의 습득은 궁금증에 대한 해결이지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불순종에 대한 순종으로의 깨달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고 모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즉시 순종합니다. 즉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34-35절에 보니, 베드로는 지금까지 사람을 어느 정도 외모로 판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아니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다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유대인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정통 유대인입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몸에 배인 전통이 있고 율법이 있었고 민족정신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유대인은 이방인과 접촉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집을 찾아가 그와 더불어 대화를 하고 식사를 하고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리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고넬료라는 이방인, 그것도 유대인을 압제하는 로마인의 집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기적같은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모든 것을 감내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을 유대인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조롱과 비아냥과 비난은 물론이고 심지어 돌팔매질까지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일을 결심한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순종함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그런 믿음은 자기 보기에 좋을 것에만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것만 굴종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하는 선택적인 순종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 말씀이 떨어지자 즉시로 배와 부친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자, 이런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깨달음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깨닫다’는 히브리어로 ‘비나흐’입니다. 이 단어는 이사야 1장 3절과 4절에서 ‘네아차’라는 단어와 대칭적으로 쓰였습니다. 네아차는 ‘비웃다’ ‘경멸하다’라는 뜻인데 즉, 깨닫지 못한 사람은 소나 나귀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비웃는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호4:14).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깨달아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롬3:11). 그만큼 인간은 타락하여 깨닫지 못하는 짐승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하였습니다.(전3:18) 이 말씀을 통해 타락한 인간에게 깨닫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고서야 가능할만큼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3. 깨달은 자의 설교
자, 이제 36절부터 베드로가 입을 열어 고넬료와 그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첫 말씀은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서너 차레에 걸친 베드로의 설교와는 전혀 다른 기법입니다. 지금까지의 베드로 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 죄값을 치루기 위해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구주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라 부릅니다. 만유라 함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우주만물을 지칭합니다. 창조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만 된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잇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베드로가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미침을 깨닫자 그의 눈이 확 열려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유대인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만유의 주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 예수가 무엇을 전했다고 하였습니까? 36절에 ‘화평의 복음’이라 했습니다. 왜 화평의 복음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페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도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가까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8)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은 율법이라는 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절연하며 살앗습니다. 그런데 이 담을 에수님이 허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둘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둘의 화평입니다. 원수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선 서로 화해하고 평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자진하여 이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이 오셔서 죽음으로 값을 치루신 끝에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평화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 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WCC가 말하는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평화가 아닙니다. 종교다원주의에선 예수님이 오히려 평화의 걸림돌이 됩니다. 타종교와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목제물이 아니어야 가능합니다. 베드로는 깨들음을 얻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더욱 깊은 지식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이 화평의 복음이 먼저 누구에게 주신 것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36절 말미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즉 복음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37절 이후부터 보니, 그 복음이 먼저 세례 요한을 통해 반포된 이후 예수님에 의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되었고 성령이 기름 붓듯 역사하여 선한 일과 귀신을 좇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9절에 보니,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바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42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이 증인들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하셨습니까? 첫째,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증인은 전도가 사명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새삼 전도의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전도는 유대인 뿐 아니라 열방의 모든 백성들을 향한 것임을 지금 깨달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을 거론합니다. 재판장이라 함은 심판을 주관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심판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을 전하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복음전도의 핵심을 확연히 깨닫고 처음으로 고넬료와 사람들을 향해 새로운 복음전도의 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오늘의 베드로의 설교는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구원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다면 역사의 끝에서는 심판주로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된 것을 무너뜨리고 이 땅에 주님의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이 평화는 오직 주 안에서 심겨지고 키워지고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사도로 부름 받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도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7~19)
4. 결론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44) 정말로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안수를 한 것도 세례를 베푼 것도 아니지만 성령의 부으심과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46) 베드로는 이 일을 후에 예루살렘에게 돌아가서 형제들 앞에서 고넬료 사건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다“(11:15)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환상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선포하셨던 것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은 것을 성령께서 현장에서 확증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즉시로 세례를 명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직접 세례를 거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의 의아함을 가집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지금은 세례권이 오직 목사에게만 주어져 잇지만 당시엔 세례를 주는 자가 특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던 대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권이 사도들에게만 잇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도된 자가 물세례를 줄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세례권이 상황에 맞게 주어진 것임을 나타냅니다. 당시 상황에는 세례보다 복음 전하는 일이 더욱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고전1:17)
오늘의 사건을 통해 지금가지의 모든 유대적인 사고와 틀이 깨어지고 이제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고 모두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큰 감동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그 감동이 어떻게 표현됩니까? 48절에서 그들은 한사코 베드로와 그 일행들을 더 오래 붙잡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만나기에 부담스럽고 귀찮은 존재가 아니가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그런 인격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하고 화평을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37주차. 깨달았도다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39주차. 예수쟁이들 (0) | 2014.10.08 |
---|---|
38주차. 힐난에 맞서다 (0) | 2014.09.27 |
36주차. 유대를 넘다 (0) | 2014.09.15 |
오늘의 神學동향 -개혁주의신학⑥ (0) | 2014.09.10 |
오늘의 神學동향 -개혁주의신학⑤ (0) | 2014.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