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차. 유대를 넘다
본문: 행10:1-33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자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1-8절)
1.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차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서 구약과 신약시대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구원은 오직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율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범죄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최소한의 조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제장하신 율법을 지키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의인이 없었습니다. 율법의 울타리를 허물고 밖으로 도망친 이스라엘인은 구원을 잃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물을 바침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구원의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일러 ‘복음의 시대’라 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었지만 복음은 이제 이스라엘을 넘어, 유대 땅을 넘어 열방과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펼쳐집니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랍인이나 아프리카인이나 로마인이나 구별이 없고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이라는 막힌 담을 허무시고 복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다시 화평으로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로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복음이 율법의 담을 허문 이야기입니다. 율법에 싸여 있었던 유대지역을 벗어나 최초로 한 이방인에게 복음이 미친 이야기입니다. 교회사적으로는 최초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하여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분류하고 정리합니다. 원래 고넬료 이야기를 하려면 10장 전체를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1-33절과 34-48절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강해설교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1-33절은 다시 4부분으로 나눕니다. 먼저 1-8절까지는 고넬료의 환상을 말하고, 9-16절은 베드로의 환상이 등장합니다. 이어 17-23절에서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빙하기 위해 보낸 사람들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24-33절에선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2. 이방인의 구원계획
먼저 고넬료는 어떤 사람인가 알아봅니다. ‘뿔’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Cornelius'(코넬리우스)입니다. 유명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변증신학자였던 코넬리우스 반틸의 이름에도 이 이름이 있습니다. 1절에 보니 그는 먼저 정통 로마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탈리아군대는 로마출신으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이달리아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어느 정도인가를 설명하려면 당시 로마군대 편제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 로마군대는 가장 큰 규모가 사단병력이었는데 이를 ‘레기온’(legion)이라 불렀습니다. 1 레기온에는 대략 6,000명으로 구성했는데, 이를 10분의 1로 나눈 것이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대’(cohors)입니다. 오늘날의 대대라고 보면 됩니다. 이 대대급 안에는 다시 100명의 군사를 책임지는 백부장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중대장급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레기온의 우두머리인 사단장은 자기 수하에 600명씩을 거느리는 대대장 10명과 1 대대마다 6명의 백부장을 합한 총 60명의 백부장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권세를 가진 장군입니다. 당시 이 사단병력이 한 번 움직였다는 것은 국가적인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2절에 보니 백부장 중에 매우 한 사람인 고넬료가 로마인이면서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고 한 집안의 훌륭한 가장이며 이웃을 구제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만하면 최상급의 신자입니다. 아주 모범된 신자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정으로 보면 고넬료는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대체적으로 경멸했습니다. 칼빈은 사도행전 주석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군 복무에 참여한 이태리인들은 굶주린 늑대들 마냥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기에 바빳으며 야수나 다를 바 없이 전반적으로 종교심이 없었다. 이태리인들은 지독하게 남들을 깔보고 뻐기는 편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에게 천박하고 증오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바로 그들 때문에 순수한 종교가 불신을, 아니 거의 지긋지긋하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낼료라는 로마인이 어떻게 해서 유대교 신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무튼 성경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가족 뿐 아니라 식솔들 모두를 하나님을 경외토록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 뿐 아니라 가솔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인격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록 그는 아직 복음을 받지 못했지만 인격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손색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혹은 궁극적인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넬료는 정말 열심있 는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아직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여전히 그는 율법에 속한 자였습니다. 율법을 귀히 여기고 율법대로 살고자 노력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에게 구원이 성취되기 위해선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쌍방향으로 동시에 작업을 하십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은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이 이야기의 사실성부터 따지고 드는 버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이적이나 현현을 통해 반드시 믿고 개달아야 할 것은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의도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환상이 아니라 천지를 열두 번도 더 쪼개고 뒤바뀌게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명령하면 모든 피조물은 복종합니다. 감히 하나님에게 맞설 존재는 하나도 존재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당신의 일을 시작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목적이 있고 구원계획이 있고 섭리방식이 있습니다. 지금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환상이 아니라 그런 방식을 통해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보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3. 편견
그런데 문제는 같은 환상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오히려 같은 환상을 두고 고넬료보다 베드로가 더 문제입니다. 1절부터 16절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고넬료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즉시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경우엔 좀 다릅니다. 여전히 베드로는 유대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베드로는 하나님이 일어나 먹으라고 함에도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베드로는 지금 성경에 있는 대로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규례를 지킵니다. 그중 돼지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음식입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이런 것입니다.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레11:3)
베드로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음식을 이번에는 먹으라고 하시자 즉시 하나님께 거부 의사를 표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늘 자신의 상식과 지식과 이성의 판단에 미루어 이해되지 않으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성이 순종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이에 하나님의 준엄하신 판결이 떨어집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신앙은 이성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일단 복종하고 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모든 이해를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성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내가 겪은 경험적으로, 나의 지식과 지혜로 이해되지 않으면 반대하고 저항합니다. 이런 이성들이 모이고 쌓여 하나의 거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의 산을 이룹니다. 한 사람의 의식 안에 얼마나 크고 놀라운 편견의 산이 쌓여 있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이 거대한 산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너지고 거꾸러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은 이방지역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게십니다. 그런데 현재베드로의 수준, 베드로의 고정관념, 베드로의 편견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베드로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편견들을 버리는 일이 먼저입니다. 편견을 다른 말로 ‘편향’(bias)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잘못된 편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편향을 가지고 사람과 사물을 잘못 진단하는 오류를 ‘후광효과’(hallo effect)라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편견과 편향으로 인해 엄청난 과오와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랜 시간과 함께 하나의 인습과 전통이 되어 인간사회를 옭아매고 억압해 왔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양반과 상놈문화가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았습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인간을 네 계급으로 나누고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천히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민족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난 사람이지만 여전히 유대인이었습니다. 복음으로 새로워진 사람이지만 여전히 유대인의 사고방식과 습관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베드로의 이 부분을 깨트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난 환상이라는 방식이었습니다.
4. 변화
자, 드디어 배드로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의 단호한 판결문을 전해 듣고서 베드로가 생각을 바꿉니다. 깨닫게 되자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무엇입니까? 가이사랴에서 손님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서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깨달아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전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고집을 부렸으면 오던 손님도 다시 돌아갔을 것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사람들을 따라 가게 됩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고넬료가 온 가족과 친지들, 친우들을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했습니다. 33절을 보세요.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두 가지의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복음을 자발적으로 듣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찾아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고넬료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다음으로 고넬료의 인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넬료가 로마군인으로서 상당한 권세를 가진 자임을 다 압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그런 자기 지위와 권세를 이용해 사람들을 모았다고 성경은 증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넬료를 존경하고 신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기초적이고 중심적인 인격의 요소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자임하는 자들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빛처럼 깨끗하고 투명하고 밝은 삶을 살아야 하고 소금처럼 맛을 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5. 결론
오늘의 이야기를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이방인을 향한 교회의 공식적인 첫 복음의 시작을 알립니다. 지금까지 빌립 집사 등 개인적인 사역으로 에디오피아 내시 등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있었지만 오늘의 방문은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한 베드로 사도의 공식 방문이라는 점에서 다른 차원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복음 전도가 중요시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전도의 결실을 맺기 위해 교회의 공식적인 승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승인으로 교회가 설립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지금 각 전도자가 기반을 다져 놓은 곳을 재방문하고 그곳에 교회를 설립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설교와 세례 이후 고넬료 가정은 하나의 가정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기적적인 방식을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고넬료가 의인이요 경건한 자요, 구제로 선행을 하는 자라 할지라도 자의적으로 베드로를 초청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또 베드로 역시 자발적으로 고넬료 가정을 방문할 리 없습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편견에 사로잡힌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로마군대의 권세 있는 장교입니다. 그는 지금 점령군의 지휘관으로 유대인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쉽게 로마인들이 깔보던 유대인을 초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입니다. 상식적으로는 고넬료 같은 원수를 찾아갈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은 이적적인 방식을 통해 일하십니다. 두 사람에게 동일한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즘에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실까요? 이것은 계시의 완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당시에는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경이라는 계시의 완성품을 선물 받고 신앙생활 하는 특별한 은총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성도라 해도 우리보다 더 큰 은혜를 받고 사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로지 성경 공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성경에 다 이루어졌음에도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적을 바라고 비상한 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좋은 승용차를 창고에 들여 놓고 구르마 타고 가겠다고 우기는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이방인의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훗날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이방인 선교를 공식적으로 결정하는 중요한 경험과 잣대가 됩니다. 과연 이들 앞에 서서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요?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아멘.
[출처] 36주차. 유대를 넘다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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