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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 전 금란교회에서 세계 감리교 대회(WMC)가 개최되었다. 세계 감리교 협의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세계 연맹의 주요 인사들이 이 대회에서 에큐메니칼 예배로 모여, 언론의 플래시와 참석자들의 환호 가운데서 「칭의론에 관한 공동 선언문」(Joint Declaration of Doctrine of Justification, JDDJ)에 서명하였다 한다. 이 공동 선언문은 거슬러 1999년에 루터교 세계 연맹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1986년부터 10여 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합의에 도달한 문서인데, 이번에 세계 감리교 협의회가 거기에 가담한 셈이다. 국내 언론이 대체로 긍정적인 논평을 발표하는 가운데, 이 대회에 참석한 듀크 신학 대학의 웨인라이트 박사는 신구교 사이에 대화와 의견 일치를 통해 “화해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자평하기도 하였다.
이 문서는 칭의론의 성경적 근거, 역사적 이해, 합의된 내용과 해설 등의 주제로 꽤 상당한 분량으로 되어 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본격적인 비평이 나온 바 있지만, 동 대회에 참석차 내한한 로마 가톨릭교회 카스퍼 추기경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느낀 소감을 전하고자 한다.
카스퍼 추기경은 ‘구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이며 그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은 확실한 교리”라면서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닌 양심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하느님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개인의 양심적 선택으로 하느님의 의지와 부합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건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이라고 본다”면서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기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1)
카스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말하면서 양심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 선언문의 핵심인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오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을 할 힘을 주시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는 진술처럼,2) ‘이것도 저것도’ 다 취해 보려는 이른바 변증법적 지양(止揚)의 재주를 부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세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믿든 믿지 않든 자연인의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선행을 행할 수 있고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카스퍼의 말은 다원주의에 젖은 이 세상에서야 환영받을 만한 말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없는 거짓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선언하며,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선포한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15문은, 우리 죄의 깊이와 하나님의 진노의 엄중함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겸손히 인간의 전적인 무능함을 시인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웅변하고 있다.
참으로, 루터 선생이 철저히 경험한 영적 시련(Anfechtung)의 도가니를 통과해 보지 아니한 “인간의 행위는 항상 매력적이고 선한 듯이 보여도, 그것들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같을 뿐이다”(하이델베르크 제3논제).3) 추기경을 비롯하여 내한한 주요 기독교 인사들이 한반도의 통일을 염려하고 종교적 대화를 통한 평화를 말할 때, 대중의 인기를 끌고 현대인의 다원주의적인 귀에 ‘기쁜 소식’처럼 들려도, 그리스도 없는 통일과 평화는 결국 루터 선생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죄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두려워할 때에 비로소 사죄받을 길이 그에게 열리는 것이며(제12논제),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완전히 절망해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할 수 있다(제18논제).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선을 악이라 부르고 악을 선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 아래서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현실이 있는 그대로 우리 눈앞에 밝히 드러난다(제19-21논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성신을 의지하는 태도에서만 나온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1문의 교훈대로,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만을 선행이라 하며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계명에 근거한 것은 선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을 발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창조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찬란히 드러나고, 그리스도를 믿어 그와 연합되어 성신과 말씀으로 주시는 그의 생명을 받아 온전한 사랑과 거룩한 일치를 이루는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 곧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 목적을 성취한다(요일 4:12). 성신 안에서 거룩한 사랑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성부와 성자께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다만 성신으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친백성을 창조하기를 기뻐하시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는 것이나 불법을 행하는 자는 거두어내시고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는 거룩한 사회에 속한 신자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분을 반대하는 자요 그분과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거짓 목자일 뿐이다.
믿음의 비밀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있음을 담대히 고백한다. 믿음의 비밀은 내 안에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며 이제 우리가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자 되었음을 영광스럽게 인정한다. 믿음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한 일로 여기고 내 몸에서 다만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겸손히 소원한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던 주님의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복음의 말씀이 제시하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신과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고상한 인격과 거룩한 품성을 발휘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전히 이루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의 마땅히 행할 바가 아닐 수 없다. 하늘의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하감하시사 이 배도의 시대를 이기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앙망한다.
------------------------------------------------------------------ 1) 한겨레, 2006년 7월 18일 “믿음이냐 선행이냐 ‘구원의 조건’ 길을 찾다.”
2) 앞의 신문 기사. 이 진술은 얼른 보면 믿음과 선행에 관한 개혁교회의 교리와 흡사해 보이지만, 기실 루터교회의 이신칭의론에다가 가톨릭교회가 트렌트 회의에서 확인하고 지금까지 고수하는 칭의론을 가미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특히 후반부의 표현은 가톨릭교회의 칭의론의 골자를 담은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칭의론에 따르면, 유아세례를 받을 때 은혜가 주입되는데(infused grace) 인간은 이 은혜와 협력하여 선을 행할 수 있고 이 ‘선’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도록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문답서 제1987-2016 항목 참조; 가브리엘 비엘의 설교 “주님의 할례” 참조).
3) 루터 선생은 1517년 95개조 논제를 발표하고 가톨릭교회 당국으로부터 큰 반대에 직면한다. 교황 레오 10세는 추기경을 통하여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누스회에 루터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신의 신학의 요지를 28개의 신학 논제와 12개의 철학 논제를 통하여 발표한다. 이를 일러 「하이델베르크 논제」라 한다.
http://www.sybook.org/sub5_newslet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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