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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지각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

변종길목사(천안)

by 김경호 진실 2014. 12. 9.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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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지각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I. 한국 교회와 성령

 

한국 교회 성도들은 성령하면 대개 불이나 바람과 같은 능력을 많이 생각한다. 그래서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의 능력이 나타나야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은사(恩賜)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등의 가시적인 은사만을 은사로 생각하며 지혜나 지식, 믿음과 같은 불가시적이고 내적인 은사는 은사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서 한국 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지식은 서로 상반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믿음이란 원래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믿는 것이며, 따라서 자꾸만 이성적(理性的)으로 따지고 들면 은혜가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 생각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성령과 지식 사이에 항상 그러한 상반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때 그것은 성령의 역사에 대적하는 것이 되며 잘못된 것이 된다. 그러나 이성(理性)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봉사한다면 이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된 것이며, 이성은 성령의 훌륭한 도구가 된다. 종교개혁가 루터가 이성, 너 창녀야!”(vernunft, du hoer!)라고 외친 것은 이성 그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성이 도리어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거룩한 것을 원래의 목적에 맞지 않게 잘못 사용할 때 창녀가 되듯이, 인간의 이성도 원래 목적을 벗어나 잘못 사용될 때 창녀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 또는 지성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상반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잘못된 사용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령의 역사를 거스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II. 두 극단

 

성령의 역사와 지성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주로 지성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입장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지성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전자는 주지주의(主知主義)적 입장이며, 후자는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 또는 신비주의(神秘主義)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1. 주지주의

 

주지주의적 입장의 대표적인 예로는 고대 교회의 오리겐(Origen)을 들 수 있다. 그는 믿음보다도 지식(Gnosis)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약 시대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 또는 은혜는 무엇보다도 육적 이해를 초월하며’(superare intellectum corporeum), 율법 또는 선지서에서 영적인 것’(spiritale)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생각하였다. 구약 시대에는 이러한 영적인 이해의 은혜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으나 이제 신약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구약 시대의 할례와 안식일의 안식에 대해 더 이상 육적(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De princ. II,7,2). 이처럼 오리겐은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실 때 주로 성도들의 지각(知覺)을 열어서 성경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을 허락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자라가는 것은 곧 이러한 영적 지식을 많이 소유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그 당시 헬라로마 세계를 풍미하던 영지주의적 경향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 신비주의 또는 반지성주의

 

이에 정반대 되는 극단에 신비주의 또는 반지성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신비주의란 객관적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수단을 거부하고 성령을 통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모든 종교적 노력을 말한다. 이 합일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기도와 묵상, 그리고 여러 가지 금욕적이고 율법적인 규칙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을 불필요하게 여기거나 방해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지성의 사용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비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살아 왔다. 이것은 전통 종교인 샤머니즘(Shamanism)의 영향이 워낙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은 원래부터 경전(經典)이 없는 종교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지성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그 후에 들어온 불교와 유교가 경전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샤머니즘적인 토양이 워낙 강한 한국에서는 일반 대중의 지성을 계발하는 데 별로 기여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 세워진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반()지성주의 내지는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구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리를 아는 것으로 족하며, 그 이상 따지는 것은 신앙 생활에 필요하지도 않고 도움되지도 않으며 도리어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만연하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한국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지적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식 합리주의 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이 성경이나 교리에 대해 따지고 들 때 교회에서는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교회는 성령 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사모하는 현상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의 신비주의적 정서에 잘 맞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지성 사용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환영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령의 역사는 성도의 지성과는 관계없거나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게 되었으며, 심지어 성경 공부를 많이 하면 은혜가 없어지니까 성경 공부는 그만 두고 오로지 기도를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회들도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III.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

 

그러면 성경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역사를 말하고 있다. 성령은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양한 은혜와 은사를 주신다. 단지 병 고치고 예언하고 방언하는 것만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 더 풍성히 주신다. 우리의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우리의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이것은 특별히 요한복음에 많이 강조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6:13). 여기서 진리란 수학적이거나 기계적인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셨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전하였다(2).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행한 설교의 내용은 성경에 대한 지식과 지혜로 가득차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탁월한 논리로 증거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그 말씀19979월호에 게재된 필자의 베드로의 설교 연구 I” 참조하라).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인간적인 지혜라기보다도 성령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편지에 대해서도 그 받은 지혜대로이같이 썼다고 한다(벧후 3:15). 이 부분의 원문을 정확하게 직역하면 그에게 주어진 지혜대로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나타내었던 그 지혜는 바울 자신의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에게 주신 신적인 지혜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실 때 사람의 지혜나 지식을 무시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는 이를 위해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뛰어난 학문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바울을 사용하셨으며, 타락한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인문 교육을 철저히 받은 루터와 칼빈을 들어 사용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정작 사용하실 때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인간적 지혜를 뛰어넘는 특별한 지혜와 통찰력을 주신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사상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비범한 지혜와 재능으로 성경의 진리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평범한 사도들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곧 그들의 단순하고 평범한 글 가운데서 우리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지혜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IV. 내적 선생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물론 질적인 차이는 있지만, 단지 몇몇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다 해당된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요일 2:27) 여기서 너희란 앞절들의 문맥에서 볼 때 이단들에 대비되는 말로서, (소아시아)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의 기름 부음이란 것은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받은 성령의 능력이나 체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다 받은 성령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성령 받은 성도들에겐 목사나 교사나 어느 누구의 가르침도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사도 요한의 편지 자체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무엇 때문에 사도 요한은 편지를 써서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려고 한단 말인가? 따라서 요한의 이 말은 성령 받은 자에게는 사람의 가르침이 전혀 소용없다는 의미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그 당시 소아시아에서 미혹하고 있던 이단들(케린투스주의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더 나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가르치려고했던 상황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성령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근본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누가 우리에게 무슨 새로운 것을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우리는 그저 이미 배운 바대로 주 안에 거하면 된다는 말씀이다.

교부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밖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애쓸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깨우칠 수가 없다. 정말로 그러하다. 아무리 사람이 가르치려고 애쓰고 힘쓸지라도 안에 있는 성령께서 그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깨닫게 해 주지 않으시면, 그 모든 외적 선생의 노력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만다. “우리의 말들의 소리는 귀를 스치지만, 선생은 안에 계신다.”(요한일서 설교III,13)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깨우치려면 우리 안에 있는 성령, 내적 선생이 가르쳐 주고 깨우쳐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공부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진리를 깨우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수학이나 일반적인 지식은 공부를 통해 신자나 불신자나 구별 없이 알 수 있지만(성령의 일반적인 역사),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진리를 알기를 원하면 공부에 임하기에 앞서 진지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틴 루터는 열심히 기도했으면 반은 공부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V. 균형 잡힌 신앙 성장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올바른 지식을 가지는 것은 성도의 신앙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한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는 은혜지식에 있어서 균형 잡힌 성장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은혜만 추구한다든지 또는 지식만 추구한다든지 하면 그 신앙은 균형을 잃고 이상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특히 우리 나라 성도들은 은혜와 성령은 사모하면서도 지식은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지식은 은혜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라고 말한다(3:10).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단지 감정이나 의지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이다. 여기서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중생 시의 단회적인 새로워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 진행되는 과정을 말한다(현재 시상). 즉 우리 성도들은 처음에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은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며 하나님을 알아 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죽는 날까지 배우기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로 끝나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새롭게 배우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예배에 임할 때마다 설교를 통해 무언가 새롭게 배울 것을 기대하면서 임해야 한다. 이렇게 새롭게 배우는 것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축 쳐져서 피곤하고 생기가 없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은 죽는 그날까지 항상 진리를 배우며 새로운 것을 알아 가는 기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속사람은 늙지 아니하며 성령 안에서 늘 신선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성도들이 또한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자라 가도록 기도하였다.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그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하였다(1:17,18). 여기서 정신이라고 번역된 말은 으로 번역해야 옳다. 이는 곧 성령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계시를 주는 역사를 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는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1:9,10)라고 기도하고 있다. ‘사랑이 풍성한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바울은 그 위에 지식모든 총명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분별이 없으면 쉽사리 이단의 가르침이나 미혹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은혜와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또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미혹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1:9 참조).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가리켜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자라고 책망하고 있다(5:12). 젖을 먹는 자들은 어린아이들로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장성한 자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分辨)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14). 따라서 지각을 사용함으로 훈련된 분별력을 가지는 것은 신앙 성장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각의 훈련이 필요한데,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공부와 논리 훈련을 거쳐서 참과 거짓,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게 된다.

따라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성령 충만을 받는다고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공부와 교육이 필요하며 많은 독서와 사고 훈련이 요구된다. 특히 한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겐 이 부분이 상당히 약하다. 그래서 뜨거운 신앙과 열심은 있지만 지식과 분별력이 부족하여, 잘못된 신학과 사조가 들어와도 분별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거나 함께 휩쓸려 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신앙의 토대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의 지각과 논리를 사용함으로써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균형 잡힌 신앙 성장이며 지속적인 교회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된다.

VI. 성령의 역사와 지성의 변화

 

그러면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지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 구체적인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먼저 중생 시에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신다. 전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가운데 살면서 날마다 그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누리고 살았건만 그 하나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며 경배하지도 아니하였다. 도리어 우리의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어리석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죽은 조상에게 감사하거나 썩어질 짐승이나 버러지 우상을 섬기는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1:18-23, 고후 4:4). 그러나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실 때 우리의 어두운 눈이 열리고 밝아져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고백하게 된다. 또한 그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닫고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지각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이며,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각의 변화는 중생 시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중생 후에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을 알아 가며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배우게 된다. 매주일 듣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날마다 성경을 읽음으로 성경에 기록된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기뻐하게 된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 만사를 뜻대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 죄를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 그리고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놀라운 사랑, 날마다 성령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의 소망 등, 여러 귀한 진리들을 날마다 새롭게 깨우쳐 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이러한 성장은 구원의 도리의 초보를 이해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에게서 2년여 동안 날마다 성경을 배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서도 여전히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알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3:18,19). 여기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는 말은 재미있는 표현이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한 지식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또한 그 사랑을 알아야 함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이 지식은 단순히 세상적 지식이나 기계적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감격하며, 그 결과 생활의 변화로 나타나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은 단순히 주지주의적인 지식이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생활로 나타나는 산 지식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단지 성경을 잘 이해하고 진리를 잘 깨우치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그와 동시에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욱 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을 잘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시중 드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VII. 구체적인 방안

 

그러나 한국 교회는 구원의 도리의 초보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교회가 지나치게 지식을 추구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교만해진 데 문제가 있다면, 한국의 교회는 너무나 초보적인 지식에 머물며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건전한 분별력을 상실하여 온갖 이단과 잘못된 주장들이 판을 치는데도 그냥 방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 유행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다. 도무지 원리도 없고 신학도 없으며, 무엇이 잘 된다고 하면 앞다투어 받아들여 주님의 교회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장로들과 평신도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시류에 끌려가는 것이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결국, 어쨌든 교회가 부흥하면 그것이 진리의 기준이 되고 만다. 그래서 말로는 성경 중심이니 개혁주의니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경이 아니라 현실이 진리의 기준이 되고 큰 교회가 가치 척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틀을 새롭게 짤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구체적 방안을 몇 가지 제안해 본다.

 

1. 성경 공부의 활성화

 

첫째는 성경 공부의 활성화이다. 설교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교만으로는 성경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를 하기 힘들다. 설교가 성경에 대한 간단한 풀이와 함께 성도의 마음과 생활의 변화를 촉구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라면, 성경 공부는 성경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배움을 목표로 한다. 우리 한국 교회는 설교가 많은 대신에 성경 공부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물론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성경 공부가 시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모든 장년들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수년을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들도, 특히 장년이나 노년의 경우에는 더욱 심한데, 매우 기초적인 교리나 성경 지식도 없이 그저 예배 시간만 떼우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은 그저 예배 시간에 몇 명이 출석했는가 하는 숫자에만 신경 쓰지 말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로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도리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도 성경 외의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메꿀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쉽게 풀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설교 내용의 반 이상은 성경 해설로 채워질 때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성경을 배우고 진리를 알아 갈 수 있는 것이다.

 

2. 교리 교육의 시행

 

둘째는 교리 교육의 시행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리를 우습게 여기고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인 교리 교육은 성도의 신앙을 견고케 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물론 너무 복잡하거나 논란되는 것들을 가르치는 것은 득이 되지 않지만, 성도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본 교리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꼭 가르쳐야 한다. 이런 것들은 설교 시간에 체계적으로 다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고 교리 공부반을 조직해서 모든 성도들이 이 과정을 이수하게 하는 것이 좋다. 교육 내용으로는 장로교가 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좋으며 그 중에서도 소요리문답이 간편하고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다.

한국 교회가 전에는 이것을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요즈음은 발견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요즈음 중고등부 학생들은 신앙의 깊이도 없고, 자라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많으며, 교회에 남는다 하더라도 평생 동안 교리의 기준이 없어 사소한 일에도 쉬 흔들리고 분별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중고등 학생들에게는 교리를 꼭 가르쳐야 하며 장년들에게도 교리 과정을 한 번씩은 다 이수하게 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함에 있어서 교리 공부가 너무 딱딱하지 않도록, 성경 구절들을 중심으로 문답식으로 재미있게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교재의 선택 또는 개발이 요청된다.

 

3. 독서의 생활화

 

다음으로는 모든 성도들에게 좋은 신앙 서적과 간단한 신학 서적을 읽도록 장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 성도의 가정을 방문해 보면 가정마다 경건한 평신도용 주석 전질과 각종 신앙, 신학 서적들이 거실에 꽂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읽다가도 의문이 나면 주석을 찾아보고, 또 저녁 시간이 되면 훌륭한 목사나 신학자들의 책을 들고 읽으면서 가족끼리 오손도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요즈음은 텔레비전 때문에 이런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과거에 개혁 교회가 왕성했던 때에는 거의 모든 개혁 교회 성도의 가정에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책을 읽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도 책을 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목사들도 돌아다니며 이야기하고 활동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독서는 별로 하지 않는다. 이래 가지고는 신앙에 깊이가 있을 수 없으며, 교회가 바로 될 수 없다. 온 교회가 독서를 함으로 깊이 있고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은지 지도해 주고, 또 읽은 것을 발표하고 서로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통해 설교나 성경 공부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신앙의 성숙을 도모할 수 있으며, 신앙 생활 하는 즐거움을 더하게 된다.

 

4. 평신도 신학 교육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평신도 신학 교육이다. 이것은 물론 모든 성도들에게 다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특별히 더 배우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오늘날 평신도들 중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좀더 체계적으로 성경과 신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 중에는 이러한 욕구를 분수에 지나친 것으로 매도하거나 성가신 것으로 여기고 억압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이러한 배움의 욕구를 전향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대개 교회에 나온 지 몇 년이 지나면 자연히 성경의 진리를 좀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를 올바르게 채워 줄 때 그 성도는 더욱 믿음이 자라며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개교회가 이러한 평신도 신학 교육을 다 감당하기 힘들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몇 개 교회가 연합하든지 또는 노회별로 실시하는 것이 좋으며, 신학교 교수들과 재능 있는 목회자를 강사로 초빙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교과 내용은 복잡한 신학 과목은 피하고 성경 과목과 기초적인 신학 과목을 개설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 개개인과 한국 교회 전체가 좀더 균형 잡힌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견고한 터 위에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날로 심해지는 이단의 미혹과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대항할 수 있는 저항력을 기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한국 교회는 은혜와 지식의 균형 있는 성장이 시급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한 베드로의 권면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권면이다. 우리 민족은 너무 감정과 체험에 치우쳐 있으며 지성과 논리에는 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은 주지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잘못된 신비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성령의 역사를 균형 있게 강조해야 한다. 올바른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직접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며 잘못된 길로 치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를 추구해야 하며, ‘기도와 더불어 또한 말씀을 강조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 또는 말씀과 기도, 이 둘의 균형적인 강조와 실천은 올바른 신앙의 핵심이며 건전한 신학의 초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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