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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

변종길목사(천안)

by 김경호 진실 2014. 12. 1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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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200212월호.

 

복음서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

 

 

변 종 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최근에 예수에 관한 일련의 책들이 기독교계를 소란하게 하고 있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오강남 박사가 쓴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는 책과 동아일보사에서 출간한 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 지음, 승영조 옮김, 2002)라는 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후자의 책은, 예수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메시야의 전기가 아니라 이교도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 하나의 신화(神話, myth)’라고 주장한다. 곧 고대의 영지주의자들이 믿고 있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유대식으로 각색하여 만들어 낸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란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허점은 수도 없이 많다. 1945년에 이집트의 나그 하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헌들은 대개 주후 2,3세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복음서보다 늦게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도 복음서가 이들 영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억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연약한 초신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혼란과 충격을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평소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불신자들에게는 마치 기독교를 공격할 수 있는 대단한 무기를 발견한 양 의기양양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낱 허황된 이야기를 좇은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상에 존재했으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를 느낀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역사 자료들을 살펴보고 나서, 신약 성경이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I.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

 

주후 1세기말과 2세기초의 중요한 로마의 역사가로는 타키투스(Tacitus, 주후 약 55년 경 출생)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주후 69-140)가 있었다. 광대한 로마 제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그들의 입장에 볼 때 팔레스타인은 동방의 한 조그만 지역에 불과했다. 더구나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조그만 분파로 이해되었을 뿐이며 로마 역사가의 주의를 끌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이 로마에서 문제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역사책에 언급되고 있다. 주후 49년경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주후 41-54년 통치)가 어떤 크레스토스(Chrestos)’라는 인물 때문에 일어난 소요로 인하여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추방하였는데(18:2 참조),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일어난 로마 거주 유대인들의 소요에 대한 벌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로마의 역사가였던 수에토니우스는 그리스도(Christos)’의 정확한 철자도 모를 정도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미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네로 황제(주후 54-68년 통치)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로마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네로가 64년의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자 이들은 로마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타키투스는 이 사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네로](그가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 책임을 이들에게로 돌렸다. 이들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이미 미움받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입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매우 심한 벌로 벌하였다. 그들의 이름의 창시자인 그리스도(Christus)는 티베리우스 황제 때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사악한 미신은 일순간 억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일어났다. 유대에서뿐만 아니라 이 도시[로마]에서도 일어났는데, 이곳에서 온갖 야만적이고 범죄적인 일들이 모든 방면에서 일어났으며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타키투스가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 기록은 몇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타키투스는 이것을 미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디오 빌라도가 그를 처형함으로써 그 신앙은 일순간 억압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시 살아났다. 따라서 후의 그 신앙은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팔레스타인에 있던 신앙이 다시 활성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역사와 그 후 교회의 신앙 사이에 구별을 두면서 기독교 신앙은 교회가 인간 나사렛 예수에 대해 후대의 신앙으로 착색하고 신격화한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며, 고대의 이방인 역사가의 기록에 의해서도 부인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생겨났으며 로마제국으로 퍼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핍박받고 미움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애굽이나 이란의 신화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대 땅에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예수는 실제로 살았던 인물이며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는 고난 당하지도, 피를 흘리지도, 죽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며,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실제로 죽임 당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애굽에서 발견된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를 인용하면서 예수를 가현적(假現的)인 존재로 보는 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

 

II. 유대인 역사가의 기록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로는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주후 37-95년경)가 있다. 그는 예수보다 한 세대 정도 늦게 살았던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지리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유대 역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은 유대 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란 책과 주후 66년에서 70년 사이에 있었던 유대인의 전쟁(Bellum judaicum)”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그가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기술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저술 중에서 예수에 대해 직접 기술하고 있는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 때에 예수가 등장하였는데 그는, 만일 우리가 그를 적어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현명한 사람(賢者)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한 사람이었으며,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많은 헬라인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빌라도는 우리들[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지도자들의 고소로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하지만 그를 이미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로써 그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것과 그에 대한 수많은 다른 놀라운 일들을 예언하였다.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우는 이 지파는 아직도 존재한다.”(Antiquitates XVIII,63-64)

 

예수에 대한 가장 오래된 비기독교인의 증언인 이 부분은 종종 플라비우스의 증언(Testimonium Flavianum)’이라고도 불리는데, 4세기의 기독교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해 인용되기도 했다. 유대인 요세푸스의 위 기록에서 우리는, 예수는 빌라도 총독 당시에 살았던 실제 인물이며, 십자가형에 처해 죽임 당한 자임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죽음에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활동에는 많은 이적들과 가르침이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진지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으며(요세푸스 자신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요세푸스의 증언은 복음서의 기록과 상치되지 않으며, 오히려 복음서의 기록이 참됨을 증거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에 대한 기록이 후대의 교회가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가 아니라,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에 의해 증거되고 있는 실제 역사임을 알 수 있다.

 

III. 유대 랍비들의 역사 왜곡

 

유대 랍비들의 기록은 주후 200년경에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기록보다는 100년 이상 후대의 것이다. 하지만 랍비들은 유대 땅에 살았던 예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예상외로 매우 적다. 15,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탈무드 기록 중 예수와 그리스도인 유대인에 대한 기록은 0.1%15 페이지밖에 안 된다. 이들 랍비들은, 예수는 판데라(Pandera)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으며 애굽에서 마술을 배워 돌아와서 마술을 행하고 백성을 미혹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을 대변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판데라(Pandera)’ 또는 판테라(Panthera)’라고 하는 이름은 실은 동정녀(Parthenos)’마리아(Maria)’라는 이름을 조합한 것으로써 기독교를 비방하는 유대인들의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랍비들의 주장은 복음서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정반대이지만, 그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의 주장과는 연속선상에 있다. 곧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귀신들렸다고 했으며,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던 것이다(3:20-30). 따라서 후대 랍비들의 주장은 복음서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반응이 정확한 기록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IV. 현대 신학자들의 예수상

 

예수에 대한 이러한 비방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과 비방은 낙원에서 시작된 이래 역사상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이것은 특히 18세기의 계몽주의 이후 더욱 본격화되고 체계화되었다. 이 시대에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을 신화로 이해하려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대표자로는 Johann Gottfried Eichhorn(1752-1827), Johann Philipp Gabler(1753-1826), Georg Lorenz Bauer(1755-1806), Wilhelm Martin Leberecht de Wette(1780-1849) 등이 있었다. 이들 신화학파의 유산을 이어받아 예수 연구에 체계적으로 적용한 대표적인 학자는 18세기 독일의 D. F.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이론을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슈트라우스는 1835년과 36년에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라는 두 권의 두꺼운 책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신화학파의 주장을 이어받아,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예수 숭배가 신화(Mythos)’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복음서의 많은 사건들을 신화로 본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을 신화로 이해하면서, 초대 교회가 예수를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임을 나타내기 위해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메시야적인 존엄성을 나타내기 위해 하늘의 음성으로 확정하였다고 한다. , 슈트라우스에 의하면 이 변화산 사건은 역사(Geschichte)’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이상(理想, Idee)’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쉽게 말하자면, 이 사건은 초대 교회의 예수 숭배가 만들어 낸 신화라는 것이다. 복음서는 이처럼 초대 교회가 예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 곧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숭배하는 신앙과 신격화가 투사(投射)된 기록이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객관적인 역사는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의 생애는 쓰여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러한 슈트라우스의 사상은 신화학파와 헤겔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헤겔 철학은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던 생각(Idee)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곧 복음서 기록들을 초대 교회의 가상적 창작물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에 의하면 복음서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이 사라지며 기독교 신앙의 근본 토대가 무너지고 만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은 아무리 잘 믿어 봐야 그 모든 것은 허사이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의 지도교수였던 판 브루헌(J. van Bruugen) 교수는 역사 없이 신앙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 신학자들은 역사 없이도 신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것은 억지요 불합리의 극치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결국 이들 신학자들의 출발점은 불신앙(不信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적(異蹟)과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적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신화로 보았던 것이다.

 

V. 이신론의 영향

 

이러한 신화주의적 해석은 그 당시에 편만해 있던 이신론(理神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은 역사(歷史)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신뢰할만한 경험에 의하면 절대 원인(소위 ’)은 제약된 원인들의 연쇄사슬 속에 있는 개별적인 행동들에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곧 이들이 이해한 역사(history)’는 초자연적인 손이 이 세상에 결코 개입하지 않는, 모든 원인이 세계 내에 있는 닫힌 역사였다. 곧 이들의 세계관은 닫힌 세계관(closed world view)’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요소와 이적들은 사전에(a priori)’ 배제되고 말며,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제외되고 만다. , 복음서에 있는 이적들과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해 역사성이 없는 신화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그들의 전제에 의해신화로 배척된 것이다. 그들의 전제란 곧 이적과 초자연적인 사건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그들의 이신론적 역사관닫힌 세계관이며,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를 부인하는 불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의 기록들이 신화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은 학적인 연구의 결과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불신앙을 밖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7:45)고 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신론적 세계관은 그 당시의 자연 과학의 영향을 받았다. 슈트라우스에 의하면 신화들은 우주의 법들과 조화될 수 없는 자료들과 모순되는 보고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자연 법칙들과 분명히 모순되는 사건들의 경우는 없다고 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무엇인가? :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포함하여 근대 과학의 최근 개념들을 신봉한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 과학은 곧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물리학에 기초한 자연과학을 말한다. 뉴턴 자신은 물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대해 많이 말했지만, 그 후의 사람들은 그의 물리학을 하나님 없는 우주관으로 이해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플라스(Pierre Laplace, 1749-1827)결정론적 우주관(determinism)’이다. 그는 어느 시점의 우주의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 수 있다면 그 후의 우주의 모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론적 우주관은 20세기초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상대성 이론(theory of relativity, 1905, 1915)’1926년에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the uncertainty principle)’와 그 후에 발전된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에 의해 극복된 지 이미 오래이다. 결국 슈트라우스와 그를 따르는 현대 신학자들은 오늘날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볼 때에는 지극히 초보적인 당대의 자연과학을 절대적인 진리로 신봉하고 이에 근거해서 이적들을 배척하였으니, 이들은 결국 당대의 자연과학적 우주관의 희생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만연해 있는 비평 신학은 근본적으로 18세기의 계몽주의에 기초해 있으며, 이는 근본적으로 라플라스의 결정론적 우주관과 뉴턴의 물리학에 기초해 있다. 현대의 자연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해 가고 있는데 오래 전에 극복된 낡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는 그들의 신학은 어느 때에나 자신의 고루함을 깨달을 것인가? 결국 하나님과 그의 살아 있는 손길을 부인하는 자들이 과학과 학문의 이름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 사실은 오래 전에 극복된 잘못된 전제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IV.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

 

따라서 우리의 출발점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모습이 진정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이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반영임은 복음서 자체가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1:1-4, 20:30,31, 21:24 ), 사도들의 진실한 삶을 통하여 증거되었다. 사도들의 삶 중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는 그들이 모두 다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만일 슈트라우스나 신화학파의 주장처럼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이 후대 교회의 생각들이 반영된 것이었다면, 사도들이 어떻게 그런 거짓과 허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한 두 사람도 아닌 열 두 사도 모두가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겠는가? 사기꾼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온갖 거짓을 행하고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결코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지는 않는다.

사도들의 순교와 초대 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를 설명하는 가장 타당한 설명은, 그들은 진실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들은 이 믿음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벧후 1:16,17) 즉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능력을 직접 보고 체험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변화산 사건도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임을 강조한다. 만일 이것이 공교히 지어낸 이야기였다면, 베드로는 그런 거짓된 이야기를 위하여 그렇게 고난 당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도 요한도 또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로고스 =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예수의 부활에 대해, 그것은 초대 교회의 신앙의 투영이거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실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이처럼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하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어떤 이론을 만들어 낸 신학자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어떠한가? 곧 복음서가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바이겠기에 길게 설명하지 않고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1) 그리스도

 

먼저 복음서는 예수에 대해 그리스도라고 증거한다(16:16, 8:29, 1:41 ). ‘그리스도(Christos)’란 말은 헬라어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인데, 히브리어 메시야’(원래 발음은 마쉬아흐’)’의 헬라어 번역이다. 구약 시대에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울 때에 기름을 부었다. 이 단어는 후에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음 받은 자하나님께서 보내실 한 특별한 선지자와 통치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할 구원자요 통치자로서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리스도란 고백은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음 받은 자이며, 구약에 예언된 구원자(메시야)란 뜻이다.

 

2)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예수의 신적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이적과 능력을 통해 증거해 주셨다. 예수는 사람들이 고치지 못하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으며 귀신들을 쫓아내셨다(4:23, 8:16 ). 귀신들도 예수 앞에 나아와 무릎 꿇으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표하였다(1:23-28). 또 예수는 바다의 바람을 그치게 하시고 파도를 잔잔케 하셨다(4:35-41). 뿐만 아니라 바다 위로 걸어오기도 하셨다(14:22-33). 이를 통해 예수는 자연을 지배하며 소위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죽은 자들도 살리셨다. 장례를 지내기 위해 들려 가고 있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으며(7:11-17), 죽은 야이로의 딸도 살려 주셨다(8:40-56). 또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도 살려 주셨다(11:17-44).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 주신 결정적인 증거는 그 자신이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였다.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만방에 분명히 드러내셨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1:4)고 말한다. 여기서 인정되었다는 말의 원어는 세움받았다, 확정되었다는 뜻이다. 의심 많던 합리주의자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3) 구주

 

예수는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전하였다(2:11). ‘구주(救主)’란 구원자 곧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는 자란 의미이다. 이것은 곧 모든 사람은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이렇게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단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며, 한결같이 우리와 같이 된 분이로되 죄는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4:15).

구원의 구체적인 방법은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신 것이었다. 대속(代贖)’의 방식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하셨으며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고 하셨다. 같은 맥락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어떤 우주적 진리나 철학적 진리를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을 받았다. 옛날 헬라 로마 시대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부인하고 조롱하며 무슨 심오한 진리를 깨우치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있지만, 분명히 알 것은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4)

 

성경은 또한 예수를 ()’라고 부르고 있다. ‘라는 말의 헬라어 퀴리오스(kyrios)’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원래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 곧 상전, 주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될 때에는 단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주관자가 되시고 다스리는 자가 되시는 분, 곧 우리의 주재자, 주님 되심을 나타낸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시고 나아가서 만물의 주재자가 되시지만, 특별히 그를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신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은 예수의 주되심을 깨닫고 인정하며 고백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특히 그의 부활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내고 만방에 선포하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증거하고 난 후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고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9-11)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라고 말할 때에는 또한 우리가 그의 (doulos)’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종이란 주인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뜻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자기 주장을 펴지 아니하며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곧 종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시키는 일을 다하고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종의 올바른 태도이다. 이는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좇아 행하며 온전히 그의 지도를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맺는 말

 

그 외에도 복음서는 예수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적을 행하는 자,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다 다루기에는 지면상의 제한도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위에서 살펴본 것만으로도 족한 줄로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복음서는 우리에게 참된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제시된 이 예수를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의 모든 죄가 사함 받고 구원받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고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폄하하고 자기 스스로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하게 말하는 자들은 이 은혜의 선물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도 예수에 대해 미쳤다고 하거나 귀신 들렸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도 이 복음은 교묘히 만든 이야기라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예수를 비방하며 복음서의 내용을 신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집트의 나그 하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헌들이 인간 스스로 진리를 깨우쳐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다가 결국은 뱀이 구원자라고 하면서 뱀 숭배로 흐르고 마는 것을 볼 때,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곧 그들 배후에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가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12:9). 낙원에서 교묘한 말로 하와를 꾀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하고 죄에 빠지게 하였던 옛 뱀 마귀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온갖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며 비방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비방이 계속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새로운 것도 아니다. 정교한 이론과 학문의 탈을 쓰고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예수를 부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온갖 거짓과 미혹이 역사하는 말세를 만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악의 세력의 정체를 바로 알고서 깨어 있어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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