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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개혁교회의 역사

변종길목사(천안)

by 김경호 진실 2015. 3. 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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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개혁교회의 역사

 

 

이처럼 깜뻔에는 1 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두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그 이유는 1944년에 화란개혁교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란개혁교회1892년에 생겨난 허리포르미르더 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를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 되어서 생겨난 교단인데,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헤르포름더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교단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2년에 형성된 허리포르미르더 교단1944년에 또다시 분열되었는데, 이 분열은 클라스 스킬더 교수와 관련되어 있다. 스킬더는 전부터 카이퍼 신학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특히 주간 신학지인 드 레포르마찌(De Reformatie)의 편집장을 맡아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언약론 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스킬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당시 화란은 독일 나치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 때 스킬더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이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화란의 일반 국민들에게 스킬더는 용기 있는 애국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자 독일의 나치는 스킬더를 구금했다가 풀어 주면서 출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숨어 지내면서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총회 개회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의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어 갔다. 성경에 충실한 일부 목사들은 전부터 카이퍼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카이퍼의 언약론 때문에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의 신앙 생활이 나태해지고 교회출석이 해이해지는 등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전히 카이퍼를 추종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1920년에 죽고 난 후에도 카이퍼 추종자들(소위 카이퍼리안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대학은 188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대학인데, ‘화란개혁교회교단이 생기기 이전에 카이퍼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세운 사립대학이다. 카이퍼의 원대한 이상을 따라 신학과와 철학과와 다른 모든 학과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이상적인 종합대학을 만들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립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학 안에 신학과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일반대학을 설립하고 거기에 신학과를 개설했으니, 몇 년이 지나면 신학생이 배출될 것이 아닌가? 그러자 기존의 헤르포름더교단에서는 이 신학생을 목사로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지역의 교회가 자유대학 신학과 출신 졸업생을 목회자로 청빙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 여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이 있던 차에 이것이 교회 분열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카이퍼는 원래 헤르포름더 교단의 소속 목사로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헤르포름더 교회는 부패했다고 주장하면서 1886년에 다수의 목사들을 규합해서 헤르포름더 교단을 탈퇴했다. 이 때 약 200여 교회가 동조해서 탈퇴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슬퍼하는 자들또는 탄식하는 자들(Dolerenden)’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1886년의 교회 이탈을 돌레안씨(Doleantie, 애통, 탄식)’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6년 후인 1892년에 이 돌레안씨교단과 다른 교단이 합동하게 되었다. 이 다른 교단이란 이미 오래 전에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해서 분리해 나왔던 교회였다. 처음에 분리된 사건은 1834년에 있었는데, 이 때의 사건을 분리(Afscheiding)’라고 부른다. 물론 그 때 분리되어 나온 교회는 몇 개 안 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계속 탈퇴를 해서 2년 후에는 120여 교회가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분리자들(Afgescheidenen)’이라 불리웠으며, 이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나온 사람들이라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나중에 기독분리개혁교회(Christelijke Afgescheidene Gereformeerde Kerk)’라는 교단을 이루고, 앞에서 말한 대로 1854년에 깜뻔에 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 또 다시 헤르포름더 교회가 부패했다고 분리하여 나오게 되니까, 이 두 그룹의 성격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래서 1834년의 분리1886년의 탄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결과 탄식자들분리자들의 다수가 1892년에 합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겨난 교단 이름을 그들은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불렀다. 그래서 1892년의 합동 이후 화란개혁교회는 암스테르담과 깜뻔에 두 개의 신학교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1920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죽고 나서도 그를 따르는 카이퍼리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들 카이퍼(H. H. Kuyper, 교회사), 헤르만 리덜보스의 아버지 리덜보스(J. Ridderbos, 구약학), 그리고 교의학자 벌까우어(G. C. Berkouwer)와 헤프(V. Hepp) 등이 있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 안에는 카이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성경 사용 방법, 일반은총론, 은혜언약과 중생에 대한 견해 등에 대해 비판의 소리들이 있었는데, 클라스 스킬더가 그 주된 비판자였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스킬더는 결국 194483일 우트레흐트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자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총회가 교권으로 쫓아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항의하는 교회들이 약 200여 개 생겨났다. 그들은 총회가 스킬더를 해임하고 교수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불법이며 교회헌법(Kerkorde)31조에 의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31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다수의 표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단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조항인데,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는 사상을 교회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회(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무조건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면 교권정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중교회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양자 사이에 균형을 취하여 총회의 결정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 정상적인 경우에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만일 총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개개의 교회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200여 개의 교회들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1944년 총회의 이 결정은 구속력이 없다고 하면서 스킬더 교수로 하여금 계속 강의하도록 요청했다. 그 때 깜뻔의 브루더베흐에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던 큰 집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그 건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새롭게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미 은퇴했던 흐레이다너스가 와서 강의를 돕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는데 1,2년 사이에 너댓 명의 교수진이 구성되어 진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출발하게 된 교단이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인데, 별칭으로 프레이허막트(Vrijgemaakt)’라고 부른다. 이것은 총회의 잘못된 권위 즉 교권정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영어로 표기할 때는 리버레이티드(Liberated)’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자유 교단또는 해방 교단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자유 교단은 한국의 고신 교단1967년에 자매관계를 맺었는데, 지금까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진리 운동을 한 고신 교단이 진리를 위해 싸운 자기들과 신앙이 같다고 해서 그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전에 부산 송도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건물도 이 화란개혁교회에서 상당 부분을 헌금해 주어서 지었으며, 초기에 학교 운영이 어려울 때에는 학교 재정의 일부를 그 쪽에서 보조해 주기도 했다. 그 후로는 주로 고신 교단의 신학생을 받아서 교육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구 3만여 명의 도시인 깜뻔에 신학교가 두 개 생겨나게 되고, ‘화란개혁교회도 두 개가 되었다. 교세를 보면, 아브라함 카이퍼가 중심이 되어서 출발한 교단(통상 신오달로 부르는데 총회측이란 뜻임)80년대 후반 기준으로 교인이 약 80만 명쯤 되는데, 교인들의 교회 출석이 충실하지 않다. 교회에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가는 교인, 또는 1 년에 몇 차례 절기 때만 가는 교인도 많이 있다. 한편, 화란개혁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유 교단(프레이허막트)’은 교인 수가 약 십일만 명 정도 되는데(1990년 기준. 2000년말에는 약 12만 명 정도), 여기서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 최소한 필자가 그곳에 머물던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러했다. 거의 모든 교인이 주일 날 두 번씩 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기 자녀들을 자기의 신앙과 같은 선생 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교인이 별도로 기부금을 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과 신학에 입각한 견해를 진흥시키기 위해 일간지(Nederlands Dagblad)를 발행하고 있는데, 기사의 질이 좋아서 다른 교단 사람들도 많이 구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정당(Gereformeerd Politiek Verbond, ‘개혁정치동맹이란 뜻)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전체 150명 국회의원 중에서 의원 두 명을 배출하고 있다. 두 명을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화란에서는 정당마다 발언권을 주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중계된다. 따라서 이 정당 대표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옳은 소리요 양심적인 소리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에 오랫동안 네덜란드 수상을 지냈던 가톨릭 출신의 루버르스(R. Lubbers) 수상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이 정당 당수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듣곤 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따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옳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 정당의 당수(그 당시 G. J. Schutte)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은 작지만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 교단사람들은 교인 수가 십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결집력이 강하고 헌신도가 높아서 규모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교단은 그 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참 교회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견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다른 한편, ‘신오달교단은 1944년의 분열 이후 점차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멀어져 갔다. 1979년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해 관용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80년에는 성경 비평을 받아들이는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그 후로는 성경 비평과 동성 연애가 그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신앙 있는 성도들은 이 교단의 몰락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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