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조직신학이 필요한가? (합신, 김병훈 조직신학)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적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진단은,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세속화의 경향성에 대한 깊은 우려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세속화의 양상은 신학의 보수성이나 진보성에 관계없이 교회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세속화는 기복신앙을 내용으로 하는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의 행태 속에서, 그리고 초월적 은사를 추구하며 감정적 호소에 치중하는 종교양식 가운데에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행복과 화평을 중심가치로 내세우면서 성경의 계시적 권위와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유일성을 부정해가는 종교다원주의의 주장들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가까운 미래에 직면하게 될 최대의 이슈는 세속화 문제일 것”으로 보는 한국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관찰은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세속화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다방면에 걸쳐서 이루어질 수 있겠으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를 통한 노력일 것이다. 교회의 교회다움, 곧 교회의 영적, 신학적 정체성은 교회의 설교를 통하여 회중에게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불경건과 거짓된 교훈에 맞서서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양육해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이다. 설교는 성례와 더불어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지표로 고백된다.
교회는 하늘의 교리(the heavenly doctrine)를 설교하는 외적인 방편을 통하여 성도를 복음의 진리 안에서 온전케 하는 사역을 감당한다. 칼빈(John Calvin)이 풀이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하늘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설교라는 외적인 방편을 자신의 도구로 삼으셔서 말씀하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패커(J.I. Packer)는 설교란 “대변인을 통하여 청중들에게 자신의 교훈과 지시를 성경에 근거하며,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삶에 영향을 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건”인 것으로 풀이를 한다. 설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가 교회다움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설교라는 외적인 방편을 충실히 그리고 바르게 실행하는 데에 있음을 분명히 하여 준다. 포사이스(P.T. Forsyth)가 말한 바대로, “설교란 복음의 선언이기 때문에, 설교와 더불어 기독교는 서든지 무너지든지 한다.”
설교가 세속화의 현상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되는 것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설교의 기능적 측면 때문만이 아니라, 설교를 통하여 전달될 것으로 기대되는 복음의 내용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설교의 내용은 설교의 성격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다.
즉 설교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의 외적인 방편이라 할 때에 설교는 설교자가 임의대로 말하여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설교의 기능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과 표준(the prescription and standard of God's Word)에 일치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덧입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자는 한 개인으로서 성경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주관성을 피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덧입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 설교이든지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과 표준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인정을 받기 위하여서는, 그 설교가 설교자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신학에 의하여 객관적인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해석과 신앙이 주관성을 극복하고 설교로서의 정당한 권위를 갖기 위하여서는, ‘고립된 자아’(isolated ego)로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individual in community)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객관적인 교리의 진술과 유기적 상관성을 유지하여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와 신학의 역사는 단지 성경 자체만을 오늘의 교회 공동체에 신앙의 규범으로 물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생활에 대한 교리와 교훈을 함께 물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 자체의 권위와 이에 대한 공동체의 해석에 기초한 신학은 서로 유기적이며 순환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러한 신앙의 교리와 삶을 전달할 때에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적 기능과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은 설교자에게 임의로 행사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자유란, 본문 해석과 교리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임의성의 자유가 아니라, 단지 적용에 있어서의 융통성과 다양성의 자유인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일선 목회자들 가운데 신학은 상아탑에 있는 신학자들의 영역일 뿐, 목회 실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적어도 설교에 있어서 성경과 신학의 유기적 상관성을 도외시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교회 공동체의 신조가 성경의 권위를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는 없다. 신조는 성경의 말씀에 의하여 수정되고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은 설교자의 주관성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수정에 동의하는 공동체의 형성과 함께 이루어져 감으로써 객관적 검증을 받는 것이다.
신학 또는 좀더 구체적으로 교리가 갖는 설교와의 유기적 상관성은 신학의 역할이 단지 교리를 형성하고 보전하며 수정, 보완하여 나아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도 확인이 된다. 소위 “교의학(dogmatics)”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신학은 복음을 해설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며,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설교를 통해 실행한다고 할 때, 신학의 도움을 받지 않거나 신학적 교리의 결과를 반영하지 않는 설교가 설교로서의 제 기능을 감당치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실천적 측면에서의 역사적 사례를 살펴볼 때 이러한 사실은 더욱 뚜렷이 확인이 된다. 신학이란 단지 교육기관의 상아탑 안에 있는 교수들의 책임영역일 뿐이며, 목회자들의 실천적 교회의 영역과는 상관성을 갖지 못한다는 평판이나 전제들은 교회사에 비추어 볼 때 매우 근대적인 현상일 뿐이다. 어거스틴 혹은 갑바도시안 교부들과 같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이나 안셈,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중세의 신학자들은 복음을 설교하는 일과 교회의 조직과 행정을 돌보는 등의 일들에 항상 관계하면서 신학과 설교, 그리고 생활의 경건을 서로 분리하거나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적어도 종교개혁과 그 후기에 있어서 정통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신학의 학문과 설교의 목회 활동은 함께 하는 일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었다. 교회사에 나타난 대부분의 주요 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 사상뿐만 아니라 설교에 신학을 반영하는 능력의 탁월성으로도 뛰어난 자들이었던 것은 이들의 생각에 설교에 신학을 담지 않은 결과로 회중들이 신학의 이해가 결핍되게 되면 연약한 교회를 낳게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생각에 경건의 삶과 신앙의 양육을 위하여 건전한 교리의 이해를 설교를 통해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설교자의 영역과 신학자의 영역을 구별하는 근대 이후의 흐름은 설교나 신학의 본질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위 성경과 신학을 혹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분리하는 이해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성을 부정하는 계몽주의의 영향에 따라 근대 신학의 흐름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감정의 신학이나 혹은 그 이후의 릿츨의 윤리신학의 형태로 변화를 모색하여 갔으며, 교리의 기반이 되는 조직신학은 역사주의적 관점 안에서 진리로서의 위치를 박탈당하고 교리는 해체되는 위기를 겪었다.
단지 ‘믿는 행위로서의 신앙’(fides qua creditur)만이 강조될 뿐이며, ‘믿음의 내용으로서의 신앙’(fides quae creditur)은 거부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합리적 역사주의에 기초한 관점에서 성경을 역사의 산물로서 이해할 것을 주장하며 성경신학을 교의신학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을 역설한 18세기 후반의 가블러(Johann P. Gabler) 이후 소위 자유주의 성경신학은 성경을 역사의 산물로 접근할 뿐이며 하나님께서 영감하여 주신 객관적 계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아울러 성경이 계시를 담고 있음을 인정하는 성경신학자들 가운데서도 라이트(G.E. Wright) 같은 이들은 성경의 계시가 어떠한 명제의 형태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 안에서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들은 성경은 특정한 역사의 사건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을 고백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전달하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며, 이러한 역사의 사건을 통해 해석되는 어떠한 교리도 역사의 산물이며, 종교심리학적 또는 종교철학적 결과인 것으로 이해를 한다.
이러한 교리신학의 해체 과정은 이미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하르낙(Adolf Harnack)과 트뢸취(Ernst Troeltsch)에 의하여 심화된 것으로 이들 이후에 역사주의에 따른 성경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단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일 뿐이며, 교리의 이해는 하나님의 부성애와 사람들의 형제애를 강조하는 것 으로 단순화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신학적 영향 아래에 놓인 설교는 자연스레 성경 안에서 복음의 교리를 명제의 형태로 제시하는 일에서 떠나 신앙의 감정과 행위를 감정신학과 윤리신학의 형태로 제시하는 경향을 따르게 되었다.
성경의 계시가 역사적 상황 안에서 주어졌음을 인정하면서도 바르트(Karl Barth)를 중심으로 한 신정통주의(Neo-Orthodoxy)처럼 성경을 계시사건에 대한 증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계시 그 자체로 생각하는 성경신학에 따르면, 교리신학 혹은 조직신학은 성경신학과 분리되거나 단절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린스턴 신학교의 성경신학 교수이었던 보스(Gerhardus Vos)에 따르면,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은 모두가 성경만을 유일한 신학의 자료가 되기 때문에 성경신학만이 ‘성경적’이라는 의미로 성경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한다.
성경신학이 조직신학과 다른 점은 성경신학이 ‘성경적’이라는 데에 있거나, 혹은 성경신학이 성경의 진리에 보다 더 충실하다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이 서로 다른 것은 성경을 자료로 삼아 신학을 함에 있어서의 방법론의 차이 때문일 뿐이다.
보스는 이 점에 대하여 이르기를, “조직신학은 성경을 하나의 완성된 일체로 여기며 성경의 가르침들을 질서적인 순서에 따른 체계적인 형태로(in an orderly, systematic form) 제시하려고 하는 반면에, 성경신학은 자료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며 에덴에서 주어진 원초적인, 구속사건 이전의 특별계시(the primitive preredemptive Speical Revelation)로부터 신약성경의 정경이 완성이 되는 때에 이르기까지의 특별계시의 진리들의 유기체적 성장과 발전을 제시하려고 모색을 한다.”라고 쓰고 있다.
보스의 이러한 이해는 한 편으로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기초적 이해에 만족하며 실천적 삶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자들의 조직신학에 대한 배척이 잘못임을 말하여 주며, 다른 한 편으로 성경으로부터 떠나 합리주의적인 사변에 기초한 신학으로서의 조직신학의 방법론 또한 잘못임을 잘 드러내 준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이 방법론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둘 다 동일한 성경의 계시를 신학의 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성경신학에 의한 성경의 이해와 조직신학에 의한 교리의 진술은 상호 유기적인 연결을 갖는다는 이해에 기초하여, 클루스터(Fred H. Klooster)는 조직신학의 교리 진술이란 구속사의 맥락을 따라 주어진 성경의 계시의 내용을 역사적 형식으로부터 논리적 형식으로 전환하여 다시 기술한 것이라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곧 성경은]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이라는 역사적 주제의 맥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시한다.
내가 믿기로 개혁주의 조직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핵심이 되는, 성경에 계시된 교리 체계를 다시 진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한 신학의 체계는 합리주의적 추론이 아니라, 이미 역사적으로 발전되어가는 형식 안에서 주어져 온 계시 전체의 내용을 재 진술하는 것이다.” 클루스터의 이러한 주장이 밝히고 있는 성경 계시 이해에 있어서의 신학의 역할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를 쓰면서 독자들에게 밝힌 그 책의 저술 목적에서도 확인이 되는 사실이다.
... [이 책을 쓰는] 이러한 노력은 거룩한 신학을 공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켜서, 이들이 성경에 쉽게 접근하도 록 하며 또한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이 진보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 냐하면 나는 이 책의 각 부분에다가 기독교의 내용을 요약하여 놓았으며, 그것을 그와 같은 순서로 정리하여 놓았던 까닭에, 누구라도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기만 한 다면 성경에서 특별히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무엇이며, 또 그 내용들을 어떻게 연 결하여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 다.
즉 이러한 도로가 일단 포장이 되고 나면, 성경의 어떤 해석들을 출판하여 내 더라도, 긴 교리 토론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해석들을 간결하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경건한 독자가 이 책의 지식을 절대 필요한 도구로 무장을 한 채 성경을 접근한다면, 그는 번거로움과 지루함을 상당히 덜 수가 있을 것이 다.
칼빈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은 성경의 해석과 복음의 전달이라는 것이 신학의 결과로서의 교리의 이해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의 글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그의 성경 주석을 읽기 위한 필수적인 기독교 진리의 요약의 제시였으며, 성경의 주석은 그 요약된 진리를 포괄적인 형태로 담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것임을 말하여 준다. 예를 들어, 칼빈의 창세기 3장 4-6절의 강해설교는 ‘사탄의 미혹,’ ‘죄의 본질,’ ‘죄의 결과,’ ‘심령의 부패와 하나님의 지식의 왜곡,’ ‘원죄의 의미와 결과의 범위,’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조명,’ 그리고 ‘타락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한계’ 등에 대한 다양하며 포괄적인 교리들의 진술을 담고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설교의 전달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기독교 강요’의 1권 1-4장, 15장, 2권의 1-6장, 3권의 1-3장, 13-18장, 더 나아가 4권 1-3장의 교리에 대해 균형이 있는 학습이 절대적으로 요구됨을 알 수 있다.
즉 칼빈은 그의 설교를 전달함에 있어서, 성경의 본문을 충실히 강해하는 과정 가운데, 마치 교리설교를 전달하고 있는 듯이 폭이 넓고 깊이 있는 교리들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이 설교를 통해 성경의 본문을 강해하는 동안, 관련된 교리를 적절히 언급하고 본문을 기초로 잘못된 교리에 대한 비판과 바른 교리의 교훈을 주는 일에 대한 관찰은 그의 거의 모든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예레미야 17장 11-14절의 설교에서 칼빈은 1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러면 내가 낫겠고,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이는 당신은 나의 찬송이시기 때문입니다”를 강해하면서 교황파들의 펠라기우스적인 인간의 자기 신뢰를 비판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전적인 구원의 은혜를 강조함을 본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성경에 대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이해가 상호 보충적이며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계시의 말씀을 드러낸다고 할 때, 복음의 선언으로서의 설교의 사역이 신학의 결과로서의 교리를 반영하지 않거나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설교의 접근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최근에 들어 설교에 교리를 담아 전달하는 일을 성경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비판을 하면서, 성경의 문학 형식의 상당수가 나레티브적임을 의식하고 나레티브 형식을 취하는 이른 바 나레티브 설교(Narrative preaching)를 강조하는 경향이 많이 눈에 띈다.
이러한 형식이 전달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교의 문제점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 나래티브를 해석할 이해의 열쇠인 교리가 배제되는 결과를 낳기 쉽다는 것이다. 단순한 기본 교리의 이해만을 전제로 하고, 그러한 틀 안에서 복음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나레티브 형식 안에서 제시하는 데에 머무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나래티브 형식의 계시는 이것을 해석하는 논리적이며 조직적인 이해의 체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레티브 설교에는 그 나레티브를 해설하는 교리의 전달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리의 설명을 통해서 나레티브가 해설될 때에라야, 해설의 열쇠였던 교리가 오히려 자신을 통해 풀어진 나레티브를 통하여 더욱 깊이 확장되는 전달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강조하는 설교는 급기에 “영화”를 설교의 자료로 사용하는 양태를 낳기에 까지 이르고 있다. 영화가 예화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은 인정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예화의 경우도 그렇듯이 그 영화를 성경 말씀과 이를 토대로 한 교리적 접근과 해설이 없다면, 그것은 일반은총의 도덕 강론이나 인생의 담론을 펼치는 것에 그치고 말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위 교리를 풀어주는 설교를 비판하며 나레티브 설교 혹은 영화 설교까지 등장하고 있지만, 어느 나레티브 설교도 교리의 해설에 의해서 설명이 되어지지 않거나 교리의 이해를 심화시키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설교이지 않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즉 나레티브 설교도 그것이 설교이기 위하여서는 교리의 근거한 신학적 설명의 도움과 함께 가야 한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과 신앙의 기본 교리의 이해에 대해서 너무나도 불분명하다는 탄식의 소리가 높다. 블랙우드(Andrew W. Blackwood)는 회중의 열 가운데 아홉은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희미하고 그들이 듣고 있는 복음의 원리에 대한 신학적 개념 또한 거의 무지한 상태에 있다는 한 일반 성도의 탄식과 아울러, 오늘날 교회가 신뢰를 잃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를 신학적으로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다른 한 성도의 불만을 전하여 준다.
칼(William J. Carl)은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체성이 혼탁해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며, 그것의 이유는 점차 종교다원사회의 세속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장년주일학교의 출석은 심각할 정도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는 드물게 전하여지는 반면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법,” 또는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자신감을 갖는 법” 등과 같은 심리치료적 설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요컨대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더 이상 믿음의 기본 교리들의 이해를 도우며 신앙을 양육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만큼 교리를 강해하는 설교이든지, 혹은 성경을 강해하며 교리를 풀어주는 설교이든지, 교리와 관련한 설교는 흥미를 주지 못하며 이해가 어려운 설교로 기피되고 있는 상황이다.
웰스는 이처럼 현대의 설교가 전통적인 신앙고백적 정통신학(confessional orthodoxy)에서 이탈하여 심리치료의 경향성을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을 더욱 개인화시켜 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현대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의 위기를 진단한다. 현대설교에서 신앙고백은 실종이 된 채, 성경에 대한 성찰도 오직 개개인에 대한 관심에로만 초점이 모아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웰스는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보는 이러한 현상은 전혀 종교 개혁의 사상과 실천에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도들의 초대 교회의 설교와 신앙에도 일치하지 않는 매우 불건전한 것이라고 비판을 한다. 그에 따르면, 사도들의 교회들은 예외없이 신앙고백적이었다. 사도들은 이러한 신앙고백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설교하였으며,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그의 뜻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사도들은 기독교 신앙의 틀을 교리적 언어로 짰을 뿐만 아니라 교리의 형태로 그 신앙을 보존하고 보호하였다.
웰스는 이르기를 “‘바른 교훈(sound doctrine)’(딤전 1:10; 딛 1:9), ‘바른 말(sound instruction)’(딤전 6:3), 또는 ‘바른 말(pattern of sound teaching)’(딤후 1:13-14)이 없는 기독교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경건의 실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사도들의 교회가 단순하며 빈약한 몇 가지 교리만을 고백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바른 교훈을 심화하는 가운데 경건의 실천을 도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한다. 웰스가 보는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의 문제는 한 마디로 “신학의 실종”으로 요약이 된다. 그는 복음주의 신학은 다시 하나님의 거룩성과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고 이러한 신학의 중요 교리를 신학의 중심의 자리에 다시 놓을 때에라야 신앙과 경건의 실천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웰스의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을 향한 외침은 그대로 설교의 문제에 적용이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성, 인간의 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그리고 거룩한 삶에로의 부르심 등과 같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교리를 바르게 회복하고 가르치는 설교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세속화는 불가피할 것이며 교회는 미래는 밝지 못할 것이다. 흔히들 교리를 담은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리설교란 지루하며 생동감이 없고 영적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서의 교리와 관련한 문제는 교리 자체의 내용 때문이라기보다는 설교를 통해 교리를 전달하는 설교자들이 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부족한 이해로 인하여 전달의 방법에 있어서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가 지적하고 있듯이 교리의 설명에만 치중하여 교리를 성경의 맥락에서 이탈시키거나, 회중의 신앙과의 상관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비롯되기도 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어느 한 편의 설교도 전체의 교리와 결코 떨어진 것이 아니므로 조직신학에 비추어 통제를 받아야 함을 역설한다. 강해설교자로 널리 알려진 로이드 존스는 강해설교란 말씀이 전달하고자 하는 원리들을 또는 교리들을 드러내어 제시하는 것이며, 진정한 강해설교란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경계하며 염려하는 사람들이 내리고 있는 한국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진단이 옳다면, 이에 대한 처방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교에 있다. 설교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도록 교회를 세우는 설교이려면 조직신학에 의해 성경의 강해가 교리 전체의 구조 아래서 짜임새를 얻는 설교이어야 하며 신앙고백과 교리를 담아 전달하는 설교이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설교사에 관련한 한 책은 한국교회의 설교를 평가하면서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보다는 목회의 방향을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평을 한다. 한국교회의 설교는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량적이며” “상업적이며” “세속주의와 유물주의, 자율주의 사상의 늪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계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바로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한국교회의 방향은 결정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의 평가에 동의를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설교가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설교는 성경의 계시의 실체인 교리를 담아 전달하여야 한다. 이러한 설교 개혁의 실천을 위하여 한국교회(장로교회라면)가 신조로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충실한 교리 설교를 성경 강해의 틀 안에서 성경의 흐름을 따라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제언한다.
http://hpchurch.or.kr/words#신학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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