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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언약; 그리스도인 결혼의 전제조건

가정

by 김경호 진실 2015. 4. 12. 21:22

본문

2015년 4월 12일 한길교회 주일오후예배 설교문

 

십계명(59) - 제7계명(4)

결혼과 언약; 그리스도인 결혼의 전제조건


 

설교본문낭독: 창세기 2장 18-25절; 고린도후서 6장 14-18절

신조 낭독: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4장 3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39문답


 

서론

 

 

언약으로서의 십계명

 

 

     십계명 강해를 시작한 지 제법 되었습니다만, 십계명을 처음 배울 때에 십계명의 개론적인 내용을 배우면서 십계명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성격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때 말씀드리기를 십계명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명령’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되고 여러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십계명은 명령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십계명을 주실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신명기 5:2-3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해당구절을 찾아보시면, “(2)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라고 해서 ‘언약’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을 받을 때의 상황에 대하여서 좀 더 자세하게 반복해서 설명하는 부분인데, ‘언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6절 이하에서 십계명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신명기 9:9을 보시면,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라고 해서 십계명을 가리켜서 ‘언약의 돌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신명기 9:11에도 보면 “....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라고 해서 십계명을 가리켜서 ‘언약의 두 돌판’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십계명은 사실 ‘언약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십계명’이라고 부릅니다만, 사실 이 표현은 원어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한글성경과 영어성경 같은 번역 성경의 출애굽기 34:28,1) 신명기 4:13; 10:4에 나오는 말들은 모두 다 의역(意譯)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그냥 ‘말씀’ 혹은 ‘10가지 말씀’과 같은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십계명’이라는 표현 대신에 “언약의 10가지 말씀”(the ten words of the covenant)이라고 표현했습니다(cf. 출 34:28). 그 이유는 ‘십계명’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고, 오히려 ‘10가지 말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10가지 말씀’은 ‘언약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라 우리교회의 오전예배 순서를 보시면 ‘십계명’이라는 말 대신 ‘언약의 10가지 말씀’이라고 표현해 두었습니다.

     십계명이 언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주셨느냐를 통해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의 1차적인 대상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맺은 자들입니다. 이 사실이 십계명의 서문인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라는 말씀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언약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십계명

 

     중요한 사실은 십계명은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언약에 기초한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함에 있어서 항상 ‘언약’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계명의 풍부한 내용을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명령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십계명의 언약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십계명을 어기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영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약으로서의 제7계명

 

     10개의 모든 계명을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만, 그 중에서 특별히 계속해서 우리가 살피고 있는 제7계명은 더더욱 ‘언약’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7계명의 의미를 더욱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결혼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부부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인데, 그것은 곧 ‘부부관계로 말미암아 형성된 언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결혼식’을 가리켜 ‘언약식’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부는 언약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결혼을 통해 언약을 맺습니다. ‘결혼’(結婚)2)이라는 한자어 속에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결혼’(結婚)이라는 말은 맺을 결(結)과 혼인할 혼(婚)이 합쳐진 것으로 “혼약을 맺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결혼을 하면 ‘반지’를 주고 받습니다. ‘결혼증명서’를 주고 받습니다. 일종의 언약의 증표인 것입니다. 이 언약을 깨뜨리면 안된다는 표시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결혼을 생각할 때에 ‘언약’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로 성경도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창세기 2:18-25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본문에는 결혼이 언약이라는 증거가 명시적이고도 단언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이 본문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에 신학적 접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장로교회가 오랫동안 고백해 온 ‘은혜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3) 언약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언약입니다.4) 언약으로 생명을 가진 분이 아담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곧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5)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인간 간의 언약이 맺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창세기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과 아담 간에 언약이 맺어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 6:7“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으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은 거꾸로 하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것은 곧 언약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아담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역시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도 하와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각 언약을 맺은 아담과 하와를 서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창세기 2: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합’하는 것은 곧 아담과 하와가 각각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동일한 성질로 연합한 것으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언약을 맺고, 하나님이 여자와 언약을 맺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합하게 하심으로 각 사람에게 맺은 언약을 두 사람에게도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결혼이란 언약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남자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여자가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결혼입니다.


그리스도인 결혼의 전제 조건; 언약을 맺은 자와의 결혼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설교의 제목을 빌어서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누구와 결혼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결혼의 전제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언약을 맺은 자’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자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와 결혼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합당한 결혼이 되는 것입니다. 제7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배우자의 대상은 누구든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든지 아니면 조건에 맞는 사람과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 조건의 기준이 집안의 생활수준이든, 집안의 학력이든, 배우자의 직업이든, 배우자의 성격이든, 배우자의 외모이든 그것은 누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절대기준이나 명확한 지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자기의 기준에 맞는 사람하고 하면 됩니다. 자신의 기준이 외모에 있다면 외모에 따라 해도 됩니다. 자신의 기준이 능력에 있다면 능력에 따라 해도 됩니다. 자신의 기준이 가치관에 있다면 가치관에 따라 해도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10가지 말씀인 십계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오직 언약 안에서 결혼해야 합니다. 신자는 신자와만 결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7계명은 단순히 세상적 관점에서의 ‘간음’ 수준이 아니라 한차원 더 높은 범위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합당한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것 그것도 역시 간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의 증거

 

 

     이 사실을 오늘의 신약 본문 고린도후서 6:14-18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인이 누구와 결혼하면 안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4절“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여기에서 ‘멍에’라는 말은 소가 밭을 갈 때에 등에 끼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두 마리의 소가 밭을 갈려면 두 소가 하나의 멍에를 끼워서 밭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는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합니다. 소도 아닌데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멍에를 함께 멘다는 것은 함께 밭을 간다는 말입니다. 함께 밭을 간다는 것은 함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말합니까? 여기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 라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지난 번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제정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이루어가는 것,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해 가는 것, 교회의 확장 등에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와는 이 일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와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을 함께 수행할 수 없고, 함께 도울 수 없습니다. 불신자와 함께 교회를 확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고린도후서 6: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Do not be yoked together with unbelievers....)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께 일하는 일에 어찌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믿지 않는 자와 함께 결혼하여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이 땅에 드러내고,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는 일을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는 사람(거듭난 사람)과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는 함께 멍에를 질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대한 반론과 그에 대한 답

 

 

     이렇게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린도후서 6:14을 결혼으로 적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멍에를 지지 말라’라고 한 말은 오히려 불신자와 동업을 해서는 안되고, 불신자와는 거래를 하면 안된다는 내용이지, 결혼과 관련있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고린도후서 6:14은 사도 바울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구약성경 신명기 22:10 말씀을 토대로 하는 말입니다.6) 신명기 22:10을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Do not plow with an ox and a donkey yoked together)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겨리하여’(yoked together)라는 말이 소와 나귀를 같이 일시키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로 ‘멍에를 메다’(yoked together)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과 표준새번역 성경에 보면 ‘겨리’라는 말이 ‘멍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7)

     그러면 여기에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명기 22:10은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을까? 왜 소와 나귀에게 이런 명령을 하고 계실까? 이 말씀은 소와 나귀를 위한 말씀일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신명기 22:13 이하의 내용을 통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신명기 22:13 이하를 보시면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용은 결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자~ 이제 다시 돌아와서 왜 사도바울은 신명기 22:10을 인용하면서 고린도후서 6:14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Do not be yoked together with unbelievers....)라고 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4에서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지하면서 의도적으로 신명기 22:10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약성경 신명기 22:10의 의미를 다시 한번 더 상기시켜 주고,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엄격한 간음입니다.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 바로 제7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본문의 언약적 표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불신자8)와 멍에를 함께 멜 수 없음을 보다 더 강조하기 위하여, 5가지의 병렬대조(juxtaposition)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와 불법9), 빛과 어두움10), 그리스도와 벨리알11),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은 매우 언약적입니다. 게다가 “어찌 함께 하며”(14), “어찌 사귀며”(14), “어찌 조화되며”(15), “어찌 상관하며”(15), “어찌 일치가 되리요”(16) 라고 하는 이 모든 표현들이 아주 언약적입니다. 창세기 2:24에서 표현된 ‘합하여’라는 말과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16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말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18절“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라는 말은 바로 언약을 말할 때에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구절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언약’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언약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분명히 해야 하며, 또한 그러한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완전한 결혼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와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언약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구약의 증거

 

     이러한 사실은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의 많은 부분에서도 나옵니다. 창세기 6장의 노아에 관한 기사를 보십시오. 노아 당시에 사람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6:1-2에 보면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를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혼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결혼과 가정의 존재 목적과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던 시대에12) 모든 사람을 다 멸망시키시고 오직 노아 가정만을 남겨두신 것입니다.13)

     창세기 34:14을 보십시오.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과의 결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7:1-3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던 당시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조심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나안 족속과 혼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2절에 보면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이어지는 3절에서는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보면 ‘언약’과 ‘혼인’을 함께 열거하고 있습니다.

     구약 역사상 아주 악한 시대로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시대였던 사사시대. 이 사사시대의 특성에 대해서는 사사기 1-3장, 7-21장에 나와 있는데,14) 그 중에서 사사기 3:6에 보시면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삿 3:6; cf. 신 7:3-4)라고 해서 불신결혼이 판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 참 좋은 왕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쌓았고,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뛰어난 지혜를 가졌고 이스라엘을 평화롭게 잘 다스린 왕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의 말년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하나의 나라였던 이스라엘이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주된 이유가 뭔 줄 아십니까? 열왕기상 11:1-4을 다함께 보겠습니다. “(1)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3)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4)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는데요, 1절에 보시면 솔로몬이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2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였고, 3절에 왕은 후비가 700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절에는 결국에 왕비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불신자와의 결혼이 이스라엘 분열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15)

     느헤미야 13:25-27을 봅시다. “(25)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26)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27)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금하면서, 그 금지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옛날 솔로몬 왕이 범한 죄(왕상 11:1-4)를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느 13:26).

     말라기 2:11-12을 봅시다. “(11)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2)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라고 말씀하는데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말라기 선지자가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보면 구약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불신결혼 때문에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절대로 불신결혼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불신결혼이 안되는 이유

 

 

     이렇게 성경 곳곳에서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불신자와 결혼해서 그 사람을 전도하면 되지 않느냐?”, “불신자와 결혼해서 그 사람을 전도하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입니다. 꼭 평소에는 전도도 잘 안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불신자와 사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불신자와 결혼하고 나니까 미안한 사람들이 꼭 그런 말들을 합니다. 아니면 성경에 전혀 관심없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들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의 상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그럴까요? 과연 불신자와 결혼한 이후에 그 사람을 전도하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될까요?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냥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해서 그 사람을 전도해라.”라고 말해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복음전파를 그토록 강조한 사도 바울이 왜 결혼 문제를 다루면서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해서 그 사람을 전도해라”라고 명령하지 않고, 오히려 “절대로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결혼하고 나서 전도한다구요? 스스로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자기가 조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전도의 열매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의 결과와 열매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다 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왜 아직도 불신자가 그렇게 많습니까? 안그렇습니까?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굳이 불신자와의 결혼을 막으셨겠습니까? 차라리 ‘불신결혼 장려책’을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이 신자가 되도록 결혼을 이용하시는 것이 더 지혜롭지 않습니까?

     결혼하고 나서 전도한다구요? 과연 결혼하고 나면 전도가 될까요? 그렇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성경은 오히려 다르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함께 신명기 7:3-4을 보겠습니다. 3절을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이라고 해서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서 4절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특이하게 말합니다.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이 말씀을 보면 불신자와 결혼을 하면 그 불신자를 전도를 하는게 아니고, 오히려 전도를 당한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사사기 3:8에 보면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라고 해서 신명기 7:4의 원리대로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1:4에도 보면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라고 해서 신명기 7:4의 원리대로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신자와 결혼해서 그 사람을 전도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가정의 목적의 관점에서 동일신앙인 간의 결혼의 당위성

 

     이렇게 까지 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제7계명을 다룰 때에 처음 보았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만나서 아이 낳고 잘 먹고 잘 사는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이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16)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적합한 배우자를 만나서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불신자와의 결혼은 가정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출발부터 실패하게 됩니다. 아예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찌 불신자와 하나님의 명령을 함께 실천하겠습니까? 어찌 불신자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습니까? 아내가 주일날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죽어도 못하게 한다고 한다면 그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습니까? 남편이 성경공부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아내가 교회는 주일에만 가고 우리 가족끼리 놀러갑시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가정이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가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4장 3절의 증거

 

     지금까지의 말씀드린 내용들을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에서 잘 다뤄주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24장 2절에서 결혼 제도의 제정 목적에 대해서 언급한 뒤에 3절에서 배우자의 조건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조건이 무엇입니까?


제 24 장    결혼과 이혼

Of Marriage and Divorce


     3. 판단력judgment을 가지고 자기의 동의를 표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은 합법적이다.5) 그러나 오직 주 안에서 결혼하는 것to marry only in the Lord이 신자의 의무duty이다.6) 그러므로 참된 개혁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불신자infidels, 로마 가톨릭 신자Papist, 그 외의 우상숭배자other idolaters와 결혼해서는 안된다should not marry. 또한 경건한 자는 그 생활에 있어서 심각하게 악한 사람notoriously wicked이나 저주받을 만한damnable 이단사상을 주장하는maintain 사람과도 결혼하여 멍에를 같이 해서는 안된다neither should be unequally yoked.7)


5) 히 13:4; 딤전 4:3; 고전 7:36-38; 창 24:57,58   6) 고전 7:39   7) 창 34:14; 출 34:16; 신 7:3,4; 왕상 11:4; 느 13:25-27; 말 2:11,12; 고후 6: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강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주 안에서만 결혼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가리켜서 “신자의 의무duty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참된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른 이교도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고린도후서 6:14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맨 마지막 문장에 보면 “멍에를 같이 해서는 안된다neither should be unequally yoked.”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고린도후서 6:14에서 온 표현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안된다”(should not)라는 표현이 가능성 자체를 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우리의 선배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배우자 선택의 범위를 분명하게 한정해 놓았고, 이것이 우리가 성경과 신앙고백을 따라 지켜야 하는 내용입니다. “오직 주 안에서 결혼하는 것to marry only in the Lord이 신자의 의무duty이다.”라는 말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동적으로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절대로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해 집니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주 안에서만 해야 하니, 주 밖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결론이 나와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39문답의 증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39문답을 보십시오. 여기에서도 짧게나마 다루고 있습니다.


139문: 제7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7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들을 등한히 하는 일neglect 외에,1) 간음adultery, 음행fornication,2) 강간rape, 근친 상간incest,3) 동성애sodomy, 모든 부자연스러운 정욕all unnatural lusts,4) 모든 부정한 상상과 생각, 목적, 애정affections,5) 모든 부패한 혹은 추잡한filthy 교제, 혹은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6) 음탕한 표정wanton looks,7) 뻔뻔스러운 추태나 경솔한 행동impudent or light behaviour, 단정치 못한 옷차림immodest apparel,8) 합법적인 결혼을 금하는 것9)불법적인 결혼의 시행,10) 매음stews을 허락allowing, 관용tolerating, 보존하며keeping, 음녀들에게 가는 것resorting,11) 독신 생활에 얽매이는 서약entangling vows of single life,12) 결혼의 부당한 지연,13) 일시에 두 사람 이상의 아내나 남편을 가지는 것,14) 부당한 이혼15) 혹은 버림desertion,16) 게으름idleness, 지칠 줄 모르는 정욕gluttony, 술취함,17) 순결치 않은 교제unchaste company,18) 음탕한lascivious 노래, 서적, 그림, 춤, 연극과19)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음란을 자극시키는 것provocations이나 음란의 행위를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20)


1) 잠 5:7   2) 히 13:4; 갈 5:19   3) 삼하 13:14; 고전 5:1   4) 롬 1:24,27; 레 20:15,16   5) 마 5:28; 마 15:19; 골 3:5   6) 엡 5:3-4; 잠 7:5,21,22   7) 사 3:16; 벧후 2:14   8) 잠 7:10,13   9) 딤전 4:3   10) 레 18:1-21; 말 2:11-12   11) 왕상 15:12; 왕하 23:7; 신 23:17-18; 레 19:29; 렘 5:7; 잠 7:24-27   12) 마 19:10-11   13) 고전 7:7-9; 창 38:26   14) 말 2:14-15; 마 19:5   15) 말 2:16; 마 5:32   16) 고전 7:12-13   17) 겔 16:49; 잠 23:30-33   18) 창 39:10   19) 엡 5:4; 겔 23:14-16; 사 23:15-17; 사 3:16; 막 6:22; 롬 13:13; 벧전 4:3   20) 왕하 9:30; 렘 4:30; 겔 23:40     


     ‘불법적인 결혼의 시행’이 바로 제7계명에서 금지된 죄들 중 하나임을 강조하면서, 말라기 2:11-12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혁교회, 장로교회와 결혼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의 증거에 따라 정통적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는 결혼을 단순히 개인의 일, 가정의 일로 보기보다 오히려 교회의 일로 봅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신자와만 행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교회를 확장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교회법 제63조에 보면 “당회는 교회 성원들이 주 안에서만이 결혼을 하도록 하고,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결혼만을 주례하도록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7)

     우리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총회의 헌법 헌법적 규칙 제6조(결혼식) 제2항 결혼예식의 주례에 보면 “성도들은 마땅히 주 안에서 결혼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통적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교인들은 마치 자녀들이 부모의 허락을 받아 결혼을 하듯이, 성도는 성도의 어머니인 교회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부름받은 당회는 성도의 결혼을 심사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합당한 결혼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회는 잘 살펴서 그 결혼을 인정하고 비로소 성도는 결혼예식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사례

 

     사실 한국교회에서도 이러한 전통이 잘 지켜져 왔습니다. 1960-1970년대 만 하더라도 교인이 불신결혼하면 바로 치리(벌)를 받았습니다. 해방 이후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 권징이 해이해 지게 되었지만, 한때 교회에는 권징이 확실하게 시행되었습니다. 그 때에 여러 가지 치리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불신자와의 결혼문제”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의 경우에도 초기 당회록을 보면 당회가 치리한 것 중에 공예배 출석치 않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음을 비롯하여 불신자와의 결혼, 혼인 전에 몸을 조심하지 않음, 술취하거나 흡연하여 덕을 세우지 못함, 빚을 갚지 않음 등의 내용으로 권징한 사실이 있습니다.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하셨던 ‘초량교회’의 경우에도 당시 엄격한 권징이 있었는데, 불신자와 결혼한 자를 중점적으로 징계했고, 1931년에는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들에 대해 4건을 치리했습니다.18)

     경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에 하나인 마산문창교회의 경우 불신자와 결혼한 교인을 권찰 직분에서 3개월 간 해임했습니다. 불신자와 결혼한 자를 ‘유아세례명부’에서 제명했습니다.19) 창원 가음정 교회(2007년에 100주년)는 1900년대 초, 불신자와 결혼한 자 뿐만 아니라 딸을 불신자에게 출가시킨 부모조차 제명할 정도로 엄벌을 내렸습니다.20) 이처럼 과거 한국교회는 불신결혼을 아주 금기시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불신결혼을 해도 교회가 그냥 눈 감아주고, 오히려 온 교인이 가서 축하해주고, 심지어는 불신결혼에 대해 목사가 주례까지 서주는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장로나 집사들의 자녀가 불신결혼을 일삼고 있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불신결혼이 교회 안에서 판을 칩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전도’라는 미명 아래 불신결혼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풍토에 젖어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이미 교회 안에 불신결혼에 대한 위험이나 잘못을 모르는 경우가 팽배합니다. 그냥 가볍게 여깁니다. 제7계명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실제로 제 주위에도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대학시절에 함께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토론하고, 교회의 개혁를 두고 고민했던 친구들 가운데 오히려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는 젊은 시절 함께 고민했던 모든 조건들은 뒤로하고 그저 돈 많이 버는 의사에게 시집가 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결혼 전만 하더라도 절대로 안 그럴 것 같던 자매가, 기독교 서점에서 결혼에 관한 책이란 책은 다 사서 읽어본 자매가 결국에는 결혼을 할 때가 되면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용납하고, 타협하면서 “괜찮겠지. 앞으로 잘 하면 되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21)


실용적인 접근의 위험성

 

     어떤 사람은 불신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를 성경과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과 결혼하면서 사는 게 살아보니까 좀 더 낫더라 하는 식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성경적 이유가 아니라 매우 실용적 이유 때문에 불신결혼을 지양하는 경향입니다만, 그런 것 역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용적인 문제 때문에 결혼의 조건을 말할 수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이 명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결혼의 조건이 정당화 되어야 합니다.


불신결혼하게 하는 사탄의 목적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불신자와의 결혼을 바람직한 것으로 오해하도록 지속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러한 결혼도 성경이 언급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결혼이 곧 ‘언약’(covenant)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가 또 다른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와 맺는 언약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은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관계를 이 땅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제도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단순히 삶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결혼’이라고 하는 ‘언약’의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왜곡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관계를 깨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은 불신자와 결혼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22) 사탄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여~! 이제 당신이 불신자와 언약을 맺었으니 이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과 언약을 맺어라”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앞서 신명기 7:3-4을 통해서도 보았습니다만, 잘못된 결혼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도록 만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7계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결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여 하나님과 함께 끝나야 합니다. 우리가 맺은 결혼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결혼은 우리의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과 그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온전한 의미에서 우리의 결혼은 우리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입니다.23) 결혼은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실 불신자와의 결혼은 그 자체로서 결혼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습니다.24) 성도가 말씀을 떠나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욕심을 따르는 것이며, 우상숭배요, 간음입니다. 불신자와의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벨리알과 언약을 맺는 간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제7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결혼은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결혼의 전제조건은 언약입니다. 언약을 맺은 자와의 결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7계명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제7계명이 말하는 간음은 단순히 부부라는 범위를 넘어선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는 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간음입니다. 육적 간음이요, 영적 간음입니다. 이 간음 죄에 빠지지 맙시다. 제7계명을 지킵시다.


 

 


1) 개역한글판에서는 ‘십계’라고 기록되어 있다.

2) ‘결혼’(結婚)이라는 표현과 ‘혼인’(婚姻)이라는 표현 중 어떤 표현이 적합할까? 일단 한글성경은 ‘혼인’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마 22:2; 요 2:1; 딤전 4:3; 히 13:4 등). 그리고 김홍전 박사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진영의 사람들은 주로 혼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결혼(結婚)이라는 표현은 일본식이라는 김홍전 박사의 생각(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서울: 성약, 1994), 66)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단어는 이미 18세기의 『명듀보월빙』이나 『셩교절요』(1864)에 사용되는 것으로 그 표현이 ‘일본식’이라는 것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필자는 오히려 ‘결혼’이라는 표현이 더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아내의 친정’이라는 뜻의 ‘혼’과 ‘사위의 집’이라는 뜻의 ‘인’이 결합된 것이지만, ‘결혼’(結婚)이라는 말은 “혼약을 맺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서 결혼제도의 ‘언약’(言約)적 의미를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언약(言約)이라는 말의 ‘약’(約)이라는 말이 묶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3)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 간의 언약이 성립되었음을 말해 준다. William J. Dumbrell, Covenant and Creation: A Theology of Old Testament Covenants (Nashville: Thomas Nelson, 1984), 최우성 역, 『언약과 창조: 구약 언약의 신학』(서울: 크리스챤서적, 2001), 52-53; O. Palmer Robertson, The Christ of the Covenants (Grand Rapids: Baker, 1980), 김의원 역, 『계약신학과 그리스도』(서울: CLC, 1983, 19958), 73;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권수경, 이상원 역, 『조직신학 (상)』(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426; Van der Waal, The Covenantal Gospel, (Inheritance Pub., 1990), 명종남 옮김, 『반더발의 성경언약연구』(서울: 도서출판 나침반, 1995), 102.

4) ‘언약’이라는 용어가 비록 창세기 6:18에서야 비로소 등장하지만, 이미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성은 언약적 모습을 드러낸다. Willem A. VanGemeren, The Progress of Redemption (Grand Rapids: Zondervan, 1988), 안병호, 김의원 공역, 『구원계시의 발전사 Ⅰ』(서울: ESP, 1993, 20044), 69; Michael Horton, God of Promise: Introducing Covenant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6), 10.

5) 유해무, 『개혁교의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139.

6) Philip E. Hughe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62), 244.

7) 공동번역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워 밭을 갈지 말라.” 표준새번역 “너희는 소와 나귀에게 한 멍에를 메워 밭을 갈지 말아라.” NIV "Do not plow with an ox and a donkey yoked together."

8) David E. Garland는 불신자(unbelievers)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지에 대해서 5가지 가능성(candidates)을 가지고 논의하고 있는데, 굳이 이러한 논의가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David E. Garland, Second Corinthians, NAC vol 29A,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 1999), 331-332.

9) 이 관계에 대해서는 시 45:7; 히 1:9; 요일 3:4; 살후 2:3-10; 딛 2:14를 참조하라. Hughe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247.

10) 이 관게에 대해서는 골 1:13; 요 8:12; 9:5; 마 4:16; 요 3:19; 요일 1:5; 벧전 2:9를 참조하라. Hughe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247.

11) ‘벨리알’(Belival)은 히브리어 l['Y'liB] (무가치, 사악)의 음역이며, 사탄의 이름이다.

12)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119.

13) 이에 대해서는 O. Palmer Robertson, The Genesis of Sex: sexual relationships in the first book of the Bible (Phillipsburg: P&R, 2002), 강규성 역, 『성의 시작』 (서울: CLC, 2006), 50-55;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276-283를 참조하라.

14) 사사기는 2개의 서론(1:1-2:5/2:6-3:6)과 2개의 결론(17-18장/19-21장)을 가지고 있다. 여성민, 『꼭꼭 씹어먹는 사사기 1』(서울: 낮은울타리, 2002), 19.

15) Robertson, 『성의 시작』, 60.

16) 송영찬, 『세례와 성찬』(서울: 깔뱅, 2006), 26.

17) 허순길,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총회출판국, 1994), 184.

18)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 본문과 현장사이, 2000), 364. 이 외에도 공예배 불참, 주일성수문제, 주초문제, 아내 구타 등등의 내용이 있었다.

19)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367. 불신자와 결혼한 자를 ‘유아세례명부’에서 제명한 것은 사실상 바람직하지는 않다.

20)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369.

21)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284.

22) Robertson, 『성의 시작』, 63.

23) Engelsma, 『이혼』, 96.

24)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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