푯대를 향하자
빌립보서 3장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다.
13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또 13~14절 하반절에 “앞에 있는 것을 잡으러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다.
유대적 율법주의는 과거주의가 신앙을 대치하였다.
반도덕적 완전주의는 방임적 자유행위 그 자체가 신앙을 대치해 버렸다.
그것은 둘 다 육체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바울은 미래지향적인 소망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 있는 푯대가 무엇인가?
•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떤 예수인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시 심판하러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위에 것을 찾고 위에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 최종 부활에 이를 신자 자신들의 장래 부활이다.
이것은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에게 필수적으로 도래하는 영원한 영육의 완전부활이다(계 20:5~6).
빌립보서 3장 11절에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고 하였다.
3장 21절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다.
• 부름의 상이다.
빌립보서 3장 14절에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다.
그 부름의 상이 무엇인가?
선행의 결과 얻어지는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시들지 아니 하는 면류관이라고 생각한다.
곧 행위에 대한 극치로운 보상이라고 생각한다(갈 6:7, 계 20:12).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였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하였다.
미래 지향적인 푯대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우리의 영화로운 부활이요,
우리 신앙행위에 따른 상급이다.
그래서 바울은 푯대를 향하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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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수적 사랑은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심으로 나타났다. (0) | 2015.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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