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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객관성 어디서 찾아야 하나 / 김향주 교수

김향주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5. 5. 22.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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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과 주관성의 차이점이 희미해지는 오늘의 세대에 신학의 객관성을 찾기에는 너무나 무의미한 작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에서는 신학 논문도 원리론 보다는 통계학이 인기를 더해 가고 있다. 혹자는 신학교에서 여러 가지 신학의 이론을 가르쳐야 하며 비성경적인 신학까지도 가르칠 뿐아니라 받아 드려야 한다는 볼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렇다면 신학의 객관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로 이루어지는 객관적 신앙고백보다 비성경적 신학이라 할지라도 성경적 신앙 고백과 공통분포를 만들겠다는 아리송한 객관주의가 되어 가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다. 이는 참으로 객관이라는 미명 아래 영적 독초를 가지고 물밑에서 지뢰를 설치하는 영적 대 학살극을 준비하는 위험 천만한 짓이다. 이렇게까지 주장한다면 우리가 신학의 객관성을 정의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성경을 고백하는 우리는 신학적 객관성을 올바로 정의해야 막힌 더러운 봇물을 쏟아 낼 수 있는 근원이 형성될 것이다.

  2000년 교회사는 교리신학의 투쟁사로 점철됐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피는 변해도 성경교리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교리 역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신학의 객관성은 다양한 혼합주의가 아니고 신앙고백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절대주의에 기초한 객관주의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한다면 교리의 순수성에 기초한 신학적 객관성은 비성경적인 신학과 서로 접착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절대성을 고백하는 순수성을 가지고 그 절대화 밑에서 공동고백을 형성해 가는 전제주의에 기인한다는 말이다.

  벤틸 박사는 강의실에서 항상 주장하기를 “시커면 잉크 물이나 한 방울이 떨어진 잉크물이나 어느 것이든지 마실 수가 없다. 희미하게 잉크물이 배어 있다고 해서 약간은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강조하면서 성경의 전제가 주어진 이상 우리는 항상 겸손하고 낮아지는 자세로 성경의 순수성을 고백하는 개혁자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연합주의적 객관성과, 성경과, 다른 이설과 접촉하여 공통분포를 형성하려는 이상한 객관주의를 만들려고 한다면 이는 신학적 객관주의가 아닌 혼합주의만을 형성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아예 로마 카톨릭이나 비기독교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이다.

  왜 기독교란 이름의 탈을 쓰고 비기독교의 교리와 야합하려 드는가? 이런 교리를 방어하기 위해 초대교회에서부터, 아니 인류의 조상 때부터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이 땅을 적셨는가? 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벨의 피로부터 지금까지의 순교자들의 부르짓음이 귀에 명명백백하게 들려 오는 듯 함을 어떻게 금할 수 있으랴? 지상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 몸부림칠 때 가장 영광된 교회로 승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역사가 증명했다. 교리사를 보면 천재보다도 정치의 힘이 앞섰고 정치의 힘보다는 순교의 피가 더 앞섰다는 사실 앞에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은사의 다양성과 사역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와 목회에 있어서는 더욱이 그렇다. 단지 신앙고백을 교리화하여 신학의 객관성을 성경에다 기초로 하여 바른 객관성을 세워 나가자는 것이다. 12 제자를 보아도 그들의 사역과 은사의 다양성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과 은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은 한결같이 동일하며, 맑으며 정확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교리에 대해 무지한 자들로부터 유식한 것 같이 들리는 모하고 잡다한 소리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신학과 신앙은 다르다.” “신앙고백은 하나이나 신학 교육은 다양해야 한다.” “교리는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오직 성경이면 된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을 목회에 적용하면 목회가 안 된다.”는 등의 달콤하고도 매력적인 말들이다. 그러나 이는 패배자의 항변으로 밖에 들리지 아니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이런 말들이 들릴 때는 가슴이 복받혀 숨이 막히는 일을 어떻게 절제할 수 있을까?

  분명히 경고하고 싶다. 그것은 신학의 타락은 목회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이 타락은 바로 교회를 사탄의 소굴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신학의 객관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과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이 전제 아래서 절대성을 기초로 하여 객관화된 신학이라는 데서 찾아야 한다.

  만약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비성경적인 신학과 접촉을 시도하여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 들인다면 이는 악마와 함께 상에 앉아 야합을 시도하는 수작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이는 악마주의적 주관주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신학의 객관성이 아니라 야합의 객관성으로 변하기 때문에 말이다.

  다시 한번 경고하고 싶다. 얄팍한 말장난에 귀가 열려 악마를 교회에 끌어들이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교리 한 구절을 바로 세우기 위해 무수한 피를 흘렸던 순교자들의 신앙을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개혁 신학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이 소중한 신앙을 다시 일깨워 주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교단과 특히 우리 신학교 위에 영원하기를 바란다.

  주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함께 하소서.

 

 

대한신학대학원교수 김향주 박사/http://cafe.daum.net/Creed/6xB3/14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Ftu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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