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고려해야 할 성경적 관점
오광만 목사
강변교회 협동목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은 인간 창조, 인간의 타락에 비춰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고려한다면, 정당한 사랑의 표현 문제다. 이 문제를 요약적으로 살펴보자.
1. 인간 창조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 그분이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라는 각기 다른 성(性)을 가진 존재로 지으신 것은 이성간에 성관계 하는 것이 순리라는 의미다. 바로 이어지는 표현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한 것은 서로 다른 성으로써 관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창 1:28).
비록 남자와 여자가 반드시 생육과 번성을 목적으로만 성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창조 자체는 우리의 성적 욕망이 이성간의 결혼 범위 안에서 올바르게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창세기 2장의 남자와 여자 창조가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것이 좋은 증거다. 창세기 2:18-25는 첫 번째 결혼을 묘사하는 부분인데, 이 본문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첫째, 하나님은 남자(아담)가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다(18절). 아담의 동반자(베필)는 짐승들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아담과도 구별된 피조물이다. 남자의 베필은 남자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이면서도 그와 (성적으로) 짝을 이루는 여자다(23절). 창세기 앞부분에는 언급이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동물들도 암수 한 쌍으로 창조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기 위해서다(참조. 창 6:19; 7:2, 3, 9 16).
둘째, 남자와 여자는 서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남자와 성(性)이 다른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합법적인 결혼의 대상임을 의미한다. 창세기 2:18-25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문제가 생육과 번성과 결부되어 언급되었다면 성관계를 통한 서로간의 관계의 친밀함과 상호 교제는 반드시 이성간의 문제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남자와 여자의 상호 보완성은 하나님의 창조에 기초한 신학적인 근거를 갖는다.
2. 인간의 타락
성경은 태초의 인간 타락이 모든 부분에서 부패한 것으로 나타났음을 증언한다. 타락 이전에는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타락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타락했다(롬 7:10-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 17:9, 10). 그래서 죄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본래 죄의 종으로 태어나며(롬 6:17), 태어날 때부터 죄성을 보유한다(시 51:3-5).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우리가 행하는 죄 된 행위를 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후 5:10).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성경에서 동성애에 관하여 가르친 내용은 요즘처럼 동성애가 유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이 시대의 현안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거나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분명한 진리는 이것이다. 성경은 동성애를 악으로 규정하고, 정욕과 자연 질서를 왜곡한 것으로 규명한다.
둘째, 동성애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목적에서 벗어난 행위다. 특히 로마서 1장에 따르면, 동성애는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결과며,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비극적인 행동이다. 바울은 동성애를 우상숭배한 사람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첫 번째 진노라고 밝힌다(롬 1:24-27).
셋째, 고대에는 동성애가 상대방을 성적으로 직, 간접적으로 착취하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두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 현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현 시대에 이르러, 동성애는 무척 복잡한 현상이 심리적 요소와 생물학적인 요소, 사회적인 요소가 결합된 복잡한 문제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 당시의 동성애에 대한 이해가 현대인들보다 순진하고 유치한 것이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창조 원리에 호소하며, 인간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권세 아래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이를 테면, 선천적인 것이라고 해서 죄성(罪性)에서 면제되지 않을뿐더러 당사자에게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동성애가 불의한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넷째, 바울은 동성애를 다른 죄보다 더 악하다고 하지 않고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취급하고 있다. 근원적인 죄는 우상숭배다. 그런 점에서 동성애는 배교에 해당하는 우상숭배와는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동성애는 극단의 예외적인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의도적으로 역행하는 타락한 인간 실존의 표현이다. 로마서 1장에 따르면, 동성애는 본성을 거슬러 행하는 행동이며, 만족할 줄 모르는 성욕에서 나오는 고의적인 선택이다.
성경적인 가르침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다른 죄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필요로 하듯이, 동성애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 동성애를 정당화시키는 여러 이론들과 이에 대한 답변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동성애는 정말 성 정체성의 문제인가? 그래서 동성애는 성 선택의 문제인가? 동성애를 개인의 천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동성애를 금지하는 성경 본문을 앞에서 해석한 것과 다르게 이해할 수는 없는가? 즉, 동성애 자체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신전에서 행하는 종교행위로써 남창을 금지하거나, 이성애자들이 동성애로 돌아선 것을 비난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질문들은 복잡한 요인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단순하게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성경에 입각하여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학문적으로 상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질문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질문 1 : 바울이 로마서 1:24-27에서 비난한 것은 이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난잡하게 범하는 동성애적 행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지, 원래 동성애적인 경향을 지닌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즉, 바울을 비롯한 성경저자들이 지적한 문제는 순리대로 쓰는 사람(이성애자)이 역리로 쓴 행위(동성애)를 비난한 것이지, 자연적으로 동성애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문제다. 이 문제를 가장 학문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보스웰(J. Boswell)이다.
대답 : 그러나 이런 해석은 용납되지 않는다. 로마서 1장에서 “바꾸어” 역리로 쓰는 행위는 개인적인 생활의 결단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 세계의 타락한 사람들의 전반적인 상태를 규명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저버린 죄인들의 본성을 문제 삼으면서 그것이 창조 질서를 파기한 것임을 강조한다. 로마서 1:18-2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이방인들 전체가 범하는 죄의 보편적인 성향이지, 개인의 독특한 성적 편향성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에서 동성애를 금지한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교 사회의 타락한 상황에 적용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물론 동성애적 성향은 이방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로마서 2:1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동성애를 범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로마서 1:24-27에서 바울은 천성적, 후천적인 것을 막론하고 이성애를 창조 질서를 따르는 것으로, 동성애를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단정한다.
여기에 첨가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종종 로마서 1장에서 여자들이 “역리로” 쓰는 것을 레스비언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들의 부자연스러운 성행위(예컨대, 구강성교, 항문성교)를 금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본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밀러(James E. Miller)가 대표적이다. 밀러는 바울이 비난하는 여자의 역리적인 행위를 여자들이 남자들의 구강성교나 항문성교를 용납한 부자연스런 (이성) 성관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츠마이어(Joseph Fitzmyer)는 이것을 본문에 없는 의미를 첨가하는 해석(eisegesis)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일축한다. 밀러의 설명은 바울의 용어를 현대적 관점으로 읽어 여자들의 피임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인데, 문맥에서 이것을 암시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을뿐더러 로마서 1장의 바울의 논지를 간파하지 못한 설명이다.
질문 2 : 성경에 언급된 남색하는 자는 동성애자들을 가리키기보다는 성전의 남창들이나 미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착취를 금지하거나 동성 간의 성행위에서 수동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비난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남색”은 미소년을 상대로 하는 성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성경에서 비난하는 남색하는 사람들은 단지 유대 전통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고, 천성적인 동성애자를 비난한 것은 아니다. 이 견해를 표명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스크록스(Robin Scroggs)와 로우린(Gerard Loughlin)이다.
대답 : 그러나 로마서 1장은 명백하게 성년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성을 성관계 파트너로 삼는 것을 거부하고 같은 성(性)을 성관계 파트너로 삼아 부끄러운 욕심을 드러냈다고 정죄한다(롬 1:26). 특히, 바울이 문제 삼은 행위는 본성을 거슬러 “서로를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여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고” 진단한다(롬 1:27). 또한 율법이나 바울이 정죄하는 동성애는 성관계에 대한 인종적인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파기한 행동임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타락이 성적 왜곡과 연결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은 전형적인 성경의 가르침이다.
질문 3 : 최근 동성애자들은 세계 인구의 10%나 된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를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인종차별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동성애에 선천적이며 유전적인 요인이 있기 때문에, 인종을 바꿀 수 없듯이 성적 성향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또는 동성애 성향을 일종의 발달상의 부적응이나 “상징의 혼동”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임상실험자들은 동성애자들을 이성애적 성향을 개발하도록 돕는 데 성공한 사례를 발표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그러한 변화가 일시적이고 그 사람의 근저에 있는 동성애적 성향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답 : 그러나 어느 개인이 선천적인 성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는 의심할 만한 소지가 많이 있다. 오히려 동성애적 정체성은 사회적인 영향 때문에 갖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이론적으로 제기되고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만, 동성애 문제는 단순히 유전학적 문제나 선천적인 문제보다는 더 근본적인 타락한 죄인의 성향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설령 동성애적 성향이 유전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동성애 행위 자체를 도덕적으로 적절하거나 합법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사회에서는 여전히 알코올 중독이나 AIDS처럼 선천적인 질병을 다 선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용인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동성애에 끌리는 현상도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세계 인구의 10%라는 말은 과장이다. 믿을 만한 통계가 아니다)이 동성애에 연루되었다고 하더라도 성경에서 죄악시 하는 것은 죄악이다. 헤이즈는 현실(is)을 근거로 당위(ought)를 주장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고 치면, 모든 죄인들도 그런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은 우상숭배자가 80%인 현실 속에서 우상숭배를 용인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질문 4 : 20세기에 동성애를 용납하는 문제는 1세기에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동성애자들을 교회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을 현재 가치로는 이해되지 않으나, 1세기에 인종간의 패러다임이 깨진 것처럼 21세기에도 패러다임이 깨져야 한다.
대답 : 이 예 역시 동성애를 받아들이려는 좋은 예가 될 수 없다. 세월이 흘러 인식이 변화되고 용납될 수 있는 사회적 통념이 있는 반면에, 시간이 흐르더라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 있다. 로마서 1:24-27에 비춰 볼 때, 동성애가 바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에 속한다. 바울이 창조 질서에 호소하면서 동성애를 반대한 로마서 1장의 교훈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질문 5 : 성경도 다윗과 요나단, 예수님과 나사로의 관계처럼 (남자끼리) 각별한 사이를 넘어 서로 사랑한 것을 제시하고 있어, 성경이 동성애자를 용인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대답 : 만일 그러하다면, 이 문제는 당대에 사람들 사이에 심각한 스캔들로 떠올랐을 것이다. 예수님이 사회적 종교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고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비난했는데(마 11:19; 눅 15:1, 2), 하물며 율법에서 금지한 동성애를 성경 인물들과 예수님이 용인하고 거기에 가담한 것을 아무런 논평 없이 언급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행위는 당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행위이고 1세기에 무척 심각한 스캔들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이들의 관계를 분명히 우정으로 취급하지 동성애라는 점을 조금도 암시하지 않는다.
4. 동성애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우리가 관찰한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동성애는 죄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은 죄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동성애자들이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취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동성애의 죄를 열거한 고린도전서 6:9-10에는 동성애와 아울러, 우상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도적, 탐욕,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들이 불의한 자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동성애를 아무리 미화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죄”인 것만은 분명하다.
로마서 1:29-31에도 동성애자와 아울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합당하지 못한 일들이 열거되었다. 여기에 열거된 악행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죄이듯이 동성애도 동일하게 가증하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교회의 역할을 살필 필요가 있다. 교회는 동성애자들을 다른 죄인들보다 더 악하거나 특별한 죄인으로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심판받을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동성애자들을 다른 악들보다 더욱 주의하고 교회가 경계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교묘하게 거슬러 순리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성애는 대인관계와 관련하여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사회적인 악이고 중독성이 있다.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들, 정신 이상자들처럼 말이다.
이들은 중독성을 끊고 재활 치료를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이 필요한 환자다.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재활 치료하는 것을 돕듯이, 동성애자들이 재활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도록 권하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
교회는 한편 영적인 부분에서 동성애자들을 복음으로 초대하는 데 노력하고, 그들을 재활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전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실제적인 방안으로, 동성애의 현실적인 원인을 분석하여 그들을 돕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성애자들이 이성과의 첫 경험에서 쓰라린 실패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이성과 성관계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그들이 이성에 대한 환상이 깨졌기에 동성을 선호하는 것은 아닌지, 또는 자기는 선천적으로 이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라고 생각하면서 성 정체성으로 혼돈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브로크백 마운틴”의 주인공들처럼 동성에게서 애틋한 경험을 하여 마음이 그리로 향한 것은 아닌지, 또는 성적 욕망이 이성애에서 만족을 못하고 동성애로 향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들의 선천적, 생물학적, 심리적, 정신적, 사회적 성 정체성 혼란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교회는 그들이 순리의 삶을 살도록 적극 나서서 도와야 하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들을 환자 다루듯이 전문가에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권해야 한다.
또한 성(性)을 상품화하고 부추기는 대중적인 가치관을 기독교 가치관으로 바꾸는 일을 시도해야 한다. 매스컴은 성이야말로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일이며,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넘어 오락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성(性)과 관련하여 바른 성경적인 가치관을 제시해야 한다.
첫째, 이 즐거운 성관계라도 그것은 합법적인 결혼생활 안으로 제한된다. 또한 이것은 이성간의 성관계를 전제로 한다.
둘째, 사랑은 동성이나 이성 간의 성관계로써 확인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안정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서도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셋째, 현대인들은 성을 오락으로 표현하며, 즐거움의 극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성관계 이외에도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 얼마든지 있다. 음악 감상하기, 수다 떨기, 산책하기, 맛있는 음식 먹기, 커피숍에서 마주하고 이야기 나누기, 문화행사 참여하기, 책 읽기, 봉사하기, 운동하기 등등. 그런 점에서 성관계로 얻는 사랑은 부차적인 것이다. 이와 아울러 성불구자와 결혼하는 사람이나 독신자로 살기로 한 사람의 가치와 의미를 새겨봐야 한다(고전 7:7, 8, 40).
마치는 말
동성애의 원인은 한 마디로 규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인 문제가 연루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 속에 자리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순리를 역리로 바꾸려는 죄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동성애자들이 죄인이라면, 모든 죄인에게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처럼, 동성애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에서 돌이키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회가 죄로 물든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동성애자들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그런 상황에서 돌이켜 “순리”의 생활을 시작해야 함을 알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신자들은 죄 아래 살던 옛 생활을 그치고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시 옛 죄를 반복하는 것을 금한다(롬 6:1-4). 여느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가르치신 순리의 삶을 살기 위해 동성애자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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