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J. A. Hodge의 저서 What is Presbyterian Law?가 개혁주의 교회정치의 지침서가 될 수 있는가?
이차식 목사/ 김천 덕일교회
시작하는 글
지난 2003년 2월 1일(토요일)자 기독교개혁신보 7면에 “한국 장로교 헌법의 발전역사와 그 실태”라는 주제로 글이 실린 바 있다.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필자와 한가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 내용은 “J. A. Hodge의 교회정치문답조례가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를 축조 해석한 문답식의 치리상의 지침서로 한국 장로교회가 교회정치를 개혁주의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지침서를 얻게 되었다”라고 한 부분이다.
과연 J. A. Hodge의 저서 What is Presbyterian Law?가 개혁주의 교회정치의 지침서가 될 수 있는가?
1. 개혁교회에서는 상회(Higer Court)나 최고회(the Highest Court) 또는 하회(Lower Court)라는 말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최고회, 상회, 하회라는 말은 권위의 높고 낮음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장로교에서는 노회나 총회를 ‘상회’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그 상회를 가리켜 ‘대회’ 혹은 ‘광회’(Major Assembly, Broader Assembly)라고 부른다. 노회를 당회보다 높은 치리회로 보지 않으며, 총회를 노회보다 높은 치리회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총회의 사역의 성격을 높은 것이 아니고 넓은 것이요, 통치적이 아니요 봉사적이요, 영속적인 것이 아니요 일시적인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헌법, 교회정치 제17장 총회 제3조). 따라서 치리회의 모임의 권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지교회의 파송에 근거한 것으로써, 교회의 일들을 모두 다 주장하지 못한다고 밝히고 있다(헌법, 교회정치 제17장 제3조).
그러나 J. A. Hodge는 상회, 하회, 하급 재판관, 상급 재판관, 최고회, 최고치리회, 최종심의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J. A. Hodge, Presbyterian Law, 1882, pp. 260-62, 267, 270). 이것은 감독정치에서나 취급하는 용어라 할 수 있기에, 개혁교회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개혁교회의 근간이 되는 웨스트민스터 헌법에서는 총회를 가리켜 최고회 또는 최고치리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총회의 권위는 최고일 수가 없으며, 절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치리회는 그 구성원들이 교회 상호간의 협력과 봉사를 위하여 대표의 이름으로 파송되어 구성되는 것일 뿐이며, 주님께서 그들에게 여러 교회를 감독할 수 있는 직분이나 상회를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지금의 장로교에서 부르는 ‘상회’ ‘하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임을 이끄는 자를 ‘의장’이라 하고, 회의가 마치면 그 동시에 ‘파회’한다. 그러나 Hodge는 ‘의장(Moderator)’과 ‘회장(President)’을 구별 없이 사용하였고, 또한 ‘파회(dissolve)’와 ‘폐회(adjourning)’라는 말을 혼용하고 있다(Ibid., pp. 304, 267).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에 위배되는 것이다.
2. 개혁교회의 정치와 권징의 원리는 노회나 총회 자체가 갖는 고유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노회나 총회가 결정했기 때문에 무조건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회나 총회가 종종 오류를 범한 일이 있었음을 교회 역사를 통해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치리회 자체에 권위를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헌법의 총회의 직무 조항을 살펴보면,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지배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교리나 권징에 관한 문제들을 취급할 때나, 헌의된 교회 헌법을 해석할 때조차도 ‘봉사한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봉사하는 자세로 탐구하고 협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지, 주장하는 어떤 전권을 부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Hodge의 글에 의하면 ‘전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와 비슷한 총회의 고유한 권한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총회는 전 교회의 관심사를 지도 감독한다”라고 하였다(Ibid., p. 271). 그런데 우리 헌법은 “총회의 치리회는 성경 말씀대로 수종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헌법, p. 315)라고 하며, “감독한다”는 표현을 쓸 때는 언제나 “사랑으로 감독하고”(헌법, pp. 307, 311)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Hodge는 “총회만이 헌법을 해석할 수 있다”(Hodge, p. 267)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곽안련이 번역할 때 ‘전권’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총회만이 교회법을 전권으로 해석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권’이라는 말은 웨스트민스터 원본이나 미국 장로교 헌법에는 없다.
Hodge는 총회의 권위에 대하여는 “총회의 결의와 답변은 권위가 있다. 그 이유는 총회의 결정은 최종적이니 반드시 순복해야 한다.”(Ibid., p. 271)
총회와 노회와의 관계에서는 “총회가 노회의 형성 및 한계를 결정한다”(Ibid., p. 272) 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총회는 노회를 설립, 분립, 합병하며, 노회의 구역을 정하는 일에 봉사하되, 해당 노회와 협의해야한다.”(헌법 p. 317) 박윤선은 “총회는 노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독단을 피하고, 노회 의견을 존중하고 돕는 태도여야 한다.”(박윤선, 「헌법주석」 p. 163)라고 하였다.
총회와 목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Hodge는 “교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는 이유가 충분할 때 총회가 목사 해임을 노회에 명할 수 있다.”(Hodge. p. 274)라고 하였다. 그러나 박윤선은 총회는 자체의 힘으로 신자들의 양심을 구속할 명령 선포의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박윤선, p. 163)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의 정치원리는 소수보다 다수에 의한 결정으로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치리회가 갖는 고유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증거 단체일 뿐 세력 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총회는 말씀 수종의 권위 외에는 그 자체적으로 어떤 특정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에 위배됨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양심은 거기에 구속을 받는 것이다.
Hodge는 치리회의 고유한 권한을 인정하였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충실히 구현하려고 한 우리 헌법은 교회 안에 인간의 권위가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만을 왕으로 모시고 교회를 바로 이루기 위해서 이를 배격하고 있다.
3. 개혁교회는 어떤 목회자 개인의 독특하고 고유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혁주의 정치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교회직분과 사역상의 균등 혹은 평등이다. Hodge도 이것을 주장한다(Hodge, p. 11). 그러나 Hodge는 실제적으로는 목사를 임시목사(stated supply), 동사목사(co-pastors), 원로목사(pastor emeritus), 부목사(pastor's Assistant), 무임목사(Minister without charge)로 구별하고 있다(Ibid., p. 48). 하지만 이것은 한국 장로교회의 모체라 할 수 있는 미 장로교회의 정치 본문에도 없는 것이다.
형식상의 칭호로 동역자간의 차별을 가져오고, 당회권이나 치리권과 같은 목사 고유의 직무에 있어서 계급적인 차별을 가져온 것은 개혁주의 성격에 배치된다. 목사의 직분은 직책과 사명에 있어서나, 권위와 영광에 있어서 전혀 서로 다르지 않다. 개혁교회의 목사 위임은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 위임을 받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목사 위임식이 잘못되었다거나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칭호상의 구별은 Hodge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에만 있는 것으로써, 특별히 목사 상호간의 동등권이 무너지면 계급적이고 교권적인 직임상 차별이 발생하므로, 교회의 건전한 발전은 물론 목사의 직무 수행뿐 아니라, 교단의 발전과 성도의 교육목적에 과연 도움이 되고 있는지 고려해 보아야할 과제라고 본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찬탈한 교황권과 감독정치를 성경적인 교회정치로 회복하는 운동이었다. 개혁주의 생활원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선양하고, 사람을 높이거나 사람에게 공로를 돌리지 않는다.
마치는 글
본인은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J. A. Hodge의 What is Presbyterian Law?라는 저서를 개혁주의 교회정치의 지침서로 받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박윤선 목사가 헌법주석에 13회에 걸쳐서 인용할 정도로 개혁주의의 중요한 내용들도 담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개혁주의교회 정치형태보다는 감리교회나, 회중교회의 정치이념에 가까운 부분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의와 규례는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며, 돌트 신조에 나와 있는 개혁주의 교회의 질서를 표준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서, 각 교단의 헌법의 교회정치, 권징조례 및 예배모범등을 잘 살펴보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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