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그 이후'
이차식 목사 / 김천 덕일교회
1. 중생의 이중적 측면
중생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들은 중생이라는 말을 이중적 의미로 사용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행하시는 내적 갱신으로서, 순간적이면서 과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돌트 신경에서는 회심과 중생이라는 단어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제Ⅲ/Ⅳ,제11-13조).
사람은 어려서부터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여,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하이델베르크 제8문답).
그러나 성령으로 회심하게 되면,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하이델베르크 제89문답)
이라고 과정으로서 말한다.
중생은 대체로 갱신의 첫 부분을 말하나,
이것에 제한되지 않고 중생의 열매로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며 계속 진전된다.
2. 중생은 오직 성령의 사역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은혜와 자유의지는 각각 회심을 일으키는 부분적인 원인들”이라고.
그 말은 사람이 자신의 중생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회심은 사람의 도움이 없이, 오직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돌트 신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은 우리의 도움이 없이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 살아나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것이요, 가장 강력하며, 가장 기쁘고, 놀랍고, 신비롭고, 형용할 수 없는 사역이며 …
창조나 죽은 자의 부활의 효력에 뒤지지 않는 사역이다”(돌트신경 제Ⅲ/Ⅳ,12조).
성경은 중생을 창조와 부활에 비교하여 그 효력들에 뒤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실패 없이 유효하게 중생하게 되고 실제로 믿음에 이르는 사실을 말씀한다(엡1:19,20).
창조와 부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인 것처럼 중생의 사역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3. 중생, 그 이후
중생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사이다(벧전 1:3,23).
하나님의 중생하게 하시는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해하려고 배우며, 그것을 순종하게 된다(고전 2:12-16).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라고 해서 내재하는 죄에서 완전하며 자유하는 것은 아니다(돌트신경 제Ⅴ,1조).
그 이유는 우리는 아직도 죄의 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어떤 사람이 중생하면 영적으로 생각하기를 배우며, 악으로부터 돌아서기 시작하게 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60문답에서,
“내 양심이 슬프게도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거슬려 심각하게 죄를 범하였고,
그 모든 계명 중에 어느 하나도 결코 지키지 못했고,
아직도 모든 악으로 향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져 있다”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 주시고,
성령을 보내사 타락한 사람의 의지를 말씀으로 소생시켜 주셨다(빌 2:13; 시 50:10,11; 엡 2:4,5).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실 때 우리의 의지와 개성을 사라지게 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적으로 소생시키고, 치료해 주고, 바르게 하고, 부드럽고 능력 있게 만들어서
이전에는 육체적인 반역과 거역함이 있던 사람을 말씀에 진지하고 영적인 순종이 있도록 하신다.
중생하기 전에는 죄에 빠져서 육신의 반역과 저항이 완전히 지배했으나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바꾸어주신 후에는 성령님의 자발적이고 진지한 순종이 우세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중생이 시작된 정확한 순간을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들을 알고,
내가 마음으로 구주를 믿고 중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점점 분명하게 성장해간다.
우리는 중생한 후라도 너무나 연약하여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한 순간도 서 있을 수 없으나
주님께서 성령과 말씀으로 완전한 승리를 얻기까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보존해 주신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 1:23).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지배나 율법 아래나 사망 권세에서 벗어났으나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매일 매일 죄를 회개해야 하며,
악으로부터 돌아서야 하며, 경건의 훈련을 하여야 한다.
사도는,
“내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고 하였다.
이 구절은 중생 이전의 상태인가, 이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많은 논쟁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다윗이나 베드로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심히 반역하고 죽어 마땅한 죄를 범하고,
성령님을 탄식하게 하고, 믿음의 역사를 방해하고, 양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느낌마저 버릴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돌트신경 제Ⅴ,5조).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제 아무리 심각하게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성령님을 완전히 거두시거나, 양자의 은혜를 상실하게 하시거나,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하게 내버려두시거나, 전적으로 멀어져가게 하거나,
영원히 멸망에 빠지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신다(돌트신경 제Ⅴ,6조).
이차식 목사 / 덕일교회
Hodge의 저서 What is Presbyterian Law?가 개혁주의 교회정치의 지침서가 될 수 있는가? (0) | 2015.07.02 |
---|---|
우리는 '소진화'라는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0) | 2015.07.02 |
칼빈의 언약 사상에 대한 이해 (0) | 2015.07.01 |
목사의 청빙에 대한 교회론적 이해 (0) | 2015.07.01 |
왜 교회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신학교를 가져야 하는가? (0) | 2015.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