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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제1장 (성경에 관하여) 해설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09. 7. 26.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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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제1장  (성경에 관하여) 해설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에게 “당신이 믿는 신조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대개 “개혁주의”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럴게 말하는 그들의  신앙자세나 생활태도를 보면 전혀 개혁주의 와는 다르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날마다 성경에 가깝게 개혁해 나가자는 것인데 개혁주의 신앙을 좋아하고 신봉하다면서 생활이 정반대가 되면 그것은 두 가지 중 한가지이다. 첫째는 개혁주의가 좋다는 말은 들었으므로 자신의 신앙을 위장하려는 술책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주의를 도모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를 받아 드린다.  개혁주이 신앙고백서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가 제일 세련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은 1643-47에 영국에서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첫 부분인  제1장을 같이 공부하고저 한다. 목적은 개혁주의 신앙의 성경관을 정립하기 위함이다.  부디 다음 글을 읽고 다시 읽으면서 개혁주의 성경관을 정립하기 바란다.

제1장은 <Of the Holy Scripture> 즉 <성경에 관하여> 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모두 10절로 되어 있는데 지금부터 한절씩 원문을 읽고 해설을 가하고저 한다. 처음에는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고, 그 다음엔 그 조항을 설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제1절:
   “자연의 빛과 또 창조의 섬기가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권능을 나나태어 사람이 핑계할 수 없게 하나 그것들이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하 지식을 충분이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 때에 여러 방식으로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제시하시며 자기의 뜻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며, 또 욱체의 부해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고 위안하시기 위하여 그 동일한 진리를 전부 기록에 맡기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로 한 원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신 옛 방법이  지금은 그쳤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

        1. 세상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하나님의 자연 계시로 나타나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 구원의 도리를 알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별계시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주셨다는 말이다.  계시 중에는 일반계시로 특별계시가 있는데 일반 계시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방법이다.  길가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다.  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빤짝인다.  태양계의 그 많은 혹성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끌면서 자신을 유지해 나간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이런 것들은 우연히 되어 진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뒤에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운행해 가는 어떤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마인서 1:19 을 읽어 보라.   그 절대자란 바로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구원의 계획 등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길가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알게 하는 특별계시를 주셨다.

        2. 두 번째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옛적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었던 여러 가지 방법 즉, 꿈, 환상, 방언(외국어)  등의 방법이
성경완성과 함께 끝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는데 꿈, 환상 천사의 방문 등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만들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 후로는 그런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는 다는 말이고 옛날과같은 방법은 그쳤다는 말이다. 개혁주의는 <계시의 종결> 을 믿는다. 순복음은 <계시의
계속> 을 믿는다.   그래서 성경은 맨 끝 책인 요한계시록의 맨 마지막 장인 22장의 끝부분인 18-19절에서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에 더 보태지도 더 감하지도 말라” 고 엄히 경고하는 것이며 또한 히브리서 1:1에서도 이제 이런 방법들이 그쳤음으로 가르쳐 준다.

제2절:
    “성경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칭 아래 헌재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 책들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 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을 전부 수록하고 있으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외경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은:

        1. 정경은 구약 39권 즉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이며 신약은 27권 즉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라는 것이며
        2. 정경은 원본에 있어서 글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정확하며 결코 교리를 오도할 수 없이 무오 하다는 말이다. 디모데후서 3:16을 읽어 보라. 물론 사본하는 과정에서 잘 못 복사 한곳이 여러 군데 있다.  그러나 원본에 있어서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필사 하는 과정에서 빠진 대목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보충하여 알 수 있으므로 구원의 도리를 아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며
        3. 정경은 우리 신앙의 표준이고 생활의 표준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살아 갈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는가?  나라에는 헌법이 있다.  하나님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면서 살아가는데 그 법은 바로 성경 말씀이다.  성경엔 순종해야 한다.

제3절:
“보통 외경 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성경 정경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무 권위도 갖지 못하며 다른 인간의 작품으로 인정할 것이며 사용할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
소위 외경 영어로는 Apocrypha 라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있지 않으므로 성경의 일부로 간주되어질 수 없고 하나의 인간의 문학 작품이외의 다른 가치를 갖지 않는 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공동 번역 이라는 성경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구약과 신약사이에 7권의 책들이 들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외경이다.  이런 것들은 히브리 성경인 TANAK 에 들어있지 않다. Masoretic Text 에도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교양서적으로 사용하던 것들로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좀 설명이 필요하다.  외경 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외경 이란 숨겨진 글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교양서적으로 성경 외에 다른 책들을 좋아 했다.  예를 들면,
마캐비 상하, 스잔나의 노래, 삼동자의 노래, 전도서,  허마의 목자, 벨과 용 등 실로 많다.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성경에 들어 있지 않다.  TANAK 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성경을 말함인데 T라는 글자는 구약의 모세 오경 즉 율법서를 Torah라고 히브리어로 말하는데 그 첫 글자를 딴것이고 N 이란 글자는 선지서를 말하는 Nabim이라는 히브리어의 첫 글자를 딴것이고, K 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성문서 란 말인 Ketubim 의 첫 글자를 딴것이다. 그래서 세 글자를 합하면 TNK 가 되는데 음편 상 중간에 A자를 넣어서 TANAK 라 하여 TANAK 라고 하면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구약 성경을 말한다.  천주교의 성경에는 신약과 구약 중간에 이런 외경이 7개 들어있다. 공동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들은 성경이 아니고 하나의 교양 서적이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이를 정경과 같이
권위를 부여한다.

     마소라경 이라는 것은 영어로 Masoretic Text 라고 하는데 기원 10세기에 유대나라  갈리리 근처의 한 마을에   Masorah(마소라) 라는 이름을 가진 학파가 있어서 성경을 많이 연구하였다. 그들은 많은 학적 공헌을 하였지만 특히 구약성경에 모음자를 붙여서 외국인들이 히브리어 성경을 쉽게 읽도록 하였는데 이런 성경을 Masoretic Text 혹은 마소라 경 이라고 칭한다.

     이 말은 설명이 필요한데, 히브리어에는 원래가 모음자가 없이 22 글자가 모두 자음자 이다.  우리나라 글은 자음자 14개, 모음자가 10개 로 되어있고,  일본 글은 자음자와 모음자가 같이 붙어 있어서 51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는 모음자가 없다.  모음자가 없이 22글자로 되어 있어도 그들은 그 자음자만 가지고 자기의 의사를 소통하며 글을 써나간다.  구약 성경은 원래가 모음자 없이 자음자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외국인들은 읽기가 불편하다.  그래서 마소라 학파는 이점에 착안하여 그들의 모음자를 창안하여 그들의 성경에다 모음자를 글자 밑에, 혹은 위에 혹은 사이에 넣어서 소리를 내어 읽기 편하도록 하였다.  이런 성경을 Masoretic Text 혹은 마소라 성경 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신학교에서 사용하는 구약 성경은 마소라 경 이다.  그런데 이런 마소라 경 에도 외경 은 들어 있지 않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4절:
“마땅히 믿고 순종해야 할 성경의 권위는 어느 한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직 진리 자체이시며 저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거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렇게 받아 드려야 한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은:
        1.  누가 성경을 해석하는가?  한 사람이 해석한 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또 교회가 해석한 것을 교인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리가 있다.  어떤 교파에서는 일반 교인들은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없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누구나 읽고 기도하면서 연구하여 생활에 적용하도록 만들어 진 것이며 어느 한 사람이 말한 것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2. 성경은 누가 썼는가?  물론 십계명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쎴으나 다른 부분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동원하여 기록하셨다.  베드로후서 1:21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했다” 고 말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16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란 말도 풀이하면 그 의미는 “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어 기록했다” 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벡서 에서 말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 바로 그 분이시므로 거짓말을 하실 수 없고 따라서 모든 성경 말씀은 진리의 밀씀이며 그 말씀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예언했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신약성경에서 그대로 이루어 진 것은 좋은 예가 된다.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이 사단에게 선전포고한 사건은 지금도 그 영적인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사단이 타락한 문화를 도입하고 심지어 교회에까지 음악을 통해서 파고 들어와 공격해 온다.  창세기 49:10에서 메시야는 야곱의 자손 중 유대지파에서 나올 것을 예언했는데 그대로 이루어 졌다.  미가서 5:2절에 메시야는 베틀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는 <빵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틀레헴 (Bethlehem) 에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  시편 22편에 주님 돌아가실 때 옷을 제비 뽑겠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예언한 대로 성취되었다.  또한 찔림을 받아 죽게 되는데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대로이다.  은 30에 주님이 팔릴 것을 스가랴서 11:13에 예언 했는데 그대로 이루어 졌다.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리라고 이사야 7장14절에 예언한대로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이사야 53장 9절에는 주님의 무덤이 부자의 묘실에 장사되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과연 주님은 아리마데 요셉이 평생 돈 모아서 사두었던 무덤을 주님에게 제공했다.

제5절: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따라 성경을 높이 평가한다. 내용의 고귀함과 유효성, 문체의 장엄성, 모든 부분의 상호 일치,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려는 전체의 목적, 인간 구원에
구원에 관한 유일한 길의 충분한 발견, 기타 비할 데 없는 우수성과 전체의 완전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이 증명하는 변론들이다. 그러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하여 우리가 믿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말씀으로서 또는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경의 내적 사역에 의한 것이다.“

여기 제5절에서 가르치는 교훈: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경의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로 입증이 되는데 성경의 내적 증거를 말하면서 성경 자체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라고 하였고 이는 구체적으로 구약에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기 몇 백 년 전에 이미 예수님이 나실 땅, 나실 지파, 그가 버리심을 받을 일, 죽으실 일, 부활하실 일, 승천하실 일 등이 정확히 기록되었는데 이 모든 일들이 모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의 내적인 증거이고 외적인 증거들이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외적인  증거가 있는지 알아보자:
        1)  교회사를 더듬어 보면 대대로 교회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렸다. 물론 교회는 잘못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모든 것을 입증하기는 어려워도, 암흑기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믿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2) 성경은 다른 세상의 문헌과는 달리 하나님이 특별하게 보존해 주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권위가 있다. 사람의 권위란 것은 항상 자기보다 위에 있는 분을 말한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권위 밑에 있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누구의 권위 밑에 있게 되는가?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어떤 교파에서는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은 교회의 증언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가령 Baltimore 요리문답서 제1327문에 보면, “옛날의 문헌들 중에서 어느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어느 것이 아닌지는 교회의 전통에 의거 한다” 라고 가르친다.  최근에 나온 리플리 ( F.J. Ripley) 가 쓴  평신도를 위한 천주교 신학 이라는 책 원문으로 말하면 Catholic Theology for Laymen 의 제41면에 보면,   “성경의 말씀이 분명히 말씀해 주기는 해도 그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근본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이 성경을 입증할 수는 없다.  성경자체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  가끔, 어떤 계시나, 또는 무슨 고고학적 발견이 있으면 그것을 빙자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 이외에 어떤 다른 것들을 성경보다 높이는 결과가 되고 피조물들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불신자와 이야기 할 때 가끔 이런 함정에 빠져 들어 간다.  불신자를 따라, 성경은 믿을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하면서 세상적인 여러 가지 문헌들을 통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입증하려 땀을 흘리지만 어떤 외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성경 자체의 증거만한 비중을 갖지 못한다.  

     성경은 스스로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 씀이라고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피조물인 인간은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다.  믿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지혜롭다는 교만에 의한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가 없게 되는데 그는 하나님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겸손을 강조한다. 같은 책 제45면에는 “교회가 없이는 성경의 권위의 보장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이 쓰신 자신의 말씀의 권위를 보증 못한다는 말인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증명할 수 있어도 하나님 자신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말씀의 권위를 보장 못한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감동함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성경 말씀으로 기록했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타락한 품성에 문제 가 있다.  타락한 인간은 심성이 모두 타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려는 능력을 상실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은 사람의 죄성이 용서함 받고 심성이 거듭날 때 이루어지는 결과 이다.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 무오함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다.

제6절: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모두 성경에 명백히 적혀 있거나, 선하고 필요한 결과로서 성경에서 추론할수 있는데,  이 성경에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 계시나 사람들의 전통등 아무것도  추가할수 없
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에 계시된 것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이해하는데 성경의 내적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교회 정치에 관하여서도 항상 지켜야 될 말씀의 일반 법칙에 따라 본래의 이성과 그리스도인의 식별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
  첫째,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영적인 필요를 충족해 준다는 것과  
  둘째, 성경은 어느 때나` 충족하므로 더 이상 가감할 수 없다는 것과
  셋째, 성경은 일반적인 원칙만을 말하며 자세한 부분은 일반 원칙을 인간이  하나님의 뜻  을 따라서 그 때 그때 사정에 따라서 적용하여 해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충족성 (充足性, sufficiency) 을 주로 다루고 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신앙과 생활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더 이상 성경에 가감하지 말라는 말이다. 계시록 22:18을 읽을 것.  그리고  성경은 어느 사소한 일까지 모두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가령 주일에 몇 시에 예배를 드릴 것인가?  야외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가 한가 그렇지 못한가?  교회의 집사는 몇 사람이나 뽑아야 하는가?  설교는 몇 분 동안 해야 하는가?  이런 세부사항은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주일에는 말씀을 강론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릴 것과 교회에는 교회를 봉사할 일꾼들을 세울 것을 말하고 있을 뿐, 사소한 일까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야외에서 예배를 드려도 경건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법도대로 예배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장소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야외예배가 오락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심지어는 catacomb 이라는 지하 묘지에서 예배를 드렸다. 또한 예배를 10시에 드리건, 11시, 오후 2시에 드리건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감옥에서 예배드렸고 사도행전 20장에서는 바울은 밤늦도록 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드릴 것이다.  설교를 한 시간할 것인가? 15분 할 것인가도 일률적으로 성경이 시간을 정해 주지 않는다.  두 시간을 설교해도 10분 설교하는 것 보다 못한 설교를 할 수 있고, 15분간 설교해도 다른 사람 두 시간 동안 설교한 것 보다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15분내지 20분간에 말한 내용을 가장 잘 기억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어서 어떤 이들은 이를 참고로 15분간 설교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30분, 어떤 분은 1시간 설교하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이건,  형식에 매일 필요는 없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신 일반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신실하게 행하면 되는 것이다.  신실하게 행하는 것 하나 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갈멘 산에서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 아세라의 선지 등 850명과 대결할 때 신실하게 행하기는 바알신이나 아세라신을 믿는 사람들이 숫자도 많고 그들이야 말로 신실하게 예배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신을 믿으며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멸망했다.

     또한 레위기 10장에는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열심히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은 불에 삼킨바 되어 죽임을 당한 일을 성경에서 읽어 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주셨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예배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의식으로 예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이 중심이 되어져야한다.  세례도 성찬식도 말씀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예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감격하며 감사하며 나가서 전도하며 신앙인의 아름다운 향기 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말씀이 없이 의식만 행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그러므로 참다운 교회의 3대 특징은 1) 말씀의 바른 선포,  2) 바른 성례, 3) 바른 권징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바로 풀어서 바로 전해야 하며, 성례식 즉 세례와 성찬식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잘못하면 그 사람을 징계하는 제도가 마땅히 있어야 참다운 교회 인데 오늘 그런 교회가 몇 개나 되는가?  이런 것을 제일 철두철미하게 지키며 행하는 교파는 미국의 정통장로교단,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OPC) 라는 교단이다.  또한 RCUS 즉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라는 교단이다.  오늘의 많은 교단 중에 이 두 개 교단만큼은 아직도 건전하여  세상의 물결을 억누르고 굳게 신앙을 지켜 나가는 전전한 교단들이데

     특히 미국 정통장로교단은 NAPARC (북미주 장로교단 및 개혁교단 협의회)에서 초창기 1975년부터 오늘까지 항상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 미국의 정통장로교단에서는 방언을 하거나 계시를 보거나 이적을 행하면 그날도 목사인 경우 해임당하고 일반 교인인 경우는 징계를 받는다. 불순종하면 출교(黜敎, excommunication) 한다. 정통장로교단은 철적한 개혁주의 신학을 가장 성실하게 따르는 교단으로 오늘 몇 개 남지 않은 훌륭한 교단이다. 교회를 찾지 못하고 있는가? 정통장로교단에 출석하라.

제7절: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그 자체가 일률적으로 분명하거나 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명백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며 믿고 준수해야 할 것들은 성경의 여기저기에 아주 명백하게 설명되며 공개되어 있어서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옳은 방법을 바로 사용하면 충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은,  
     1)성경은 구원에 이르고 우리가 살아갈 생활의 지침을 교훈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성경의 어떤 부분은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지만 유식한 사람이건 무식한 사람이건 잘 연구하면 성경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성경 자체에 있는 것이며 어느 한 사람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스스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여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제8절
“옛날 하나님의 백성의 말인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당시에 여러 민족들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 졌던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독특한 보호와 섭리로 인하여 세세에 순수하게 보전되어 왔으므로 믿을만하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상의 논쟁점에 있어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신구약 성경에 호소하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명령은 받았지만 성경을 읽을 권리와 관심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원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자국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 안에 풍성히 내주하며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방식으로 예배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인내와 위안을 통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
1) 성경이 처음에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것,  
2)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있다는 것,  
3) 성경의 권위는 이 원본에 있다는 것,  
4)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경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성경이 순수하게 보존되도록 섭리하셨다는     것, 그리고
5)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읽고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각 나라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  이렇게 다섯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영국 Scotland 에 가면 세인트 앤드류즈 (St. Andrews) 라는 도시가 있고, 그 도시에는 St. Andrews 대학이 있고 St. Andrews 대학에는 매튜 불랙 (Matthew Black) 이라는 학자가 있다.  그 분은 책을 한권 썼는데 An Aramaic Origin of Gospels  라는 책인데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아람어로 시작된 복음” 인데 우리말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그는 그 책에서 말하기를 복음은 원래가 아람어 (아람어 [Arabic} 이 아니고 Aramaic) 로 기록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온갖 학설을 펴낸다.  

     언젠가는 모세가 모세 오경 즉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을 쓸 수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유는 당시 문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6년에 발굴된  Ebla 문헌 으로 인하여 모세 시대만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22 세기에 이미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는 허구(虛構)의 도시이며 실제로 존재한 도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던 학자들도 있었는데 Ebla문헌 발견으로 인하여 잠잠해 졌다.  우리는 성경을 헐뜯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참으로 경각심을 높여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분명히 구약은 일부분이 아람어(Aramaic) 로 기록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경은 모두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성경관의 근본적인 차이는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까닭에 잘못이 있는 것이니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것이고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은 사람이 제 멋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감화 즉, 입김을 불어 넣어서 기록한 것이므로 원본에 있어서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세상을 떴지만  가령 칼 빨트 (Karl Barth) 라는 스위스의 신학자는 창세기 1장에서 10장까지는 믿을 수 없는 신화 (saga)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1919년 그가 펴낸 로마서 주석책에서 말하기를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들어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성경은 사람이 기록했으므로 인간적인 요소를 배제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카루소의 예를 들고 있다.  Enrico Caruso 는 유명한 이태리의 테너 가수이지만 그의 훌륭한 노래를 들으려면 음반에서 잡음을 없이 해야 깨끗한 그의 노래를 정확히 들을 수 있다고 그 책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오늘 교회는 대부분 자유주의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들은 성경을 성경대로 믿으려 하지 않고 성경에 인간의 생각을 가미하여 판단하여 믿을만한 것은 믿고 이성이나 경험으로 판단해서 믿을 수 없는 것은 모두 부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님의 부활 등은 믿기 어려운 <수수꺼끼> 로 취급한다.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 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즉, 신약의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생애가 나타나는데 모두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미화(美化)하고 각색(脚色)해서 기록했으므로 원형태(原形態)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를 양식비평 (樣式批評, Form Criticism, Formgeschichte) 라고 한다..  모두 잘 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늘 존경하는 아프리카 Rambarne의 알버트 슈바이쳐 (Albert Schweitzer) 박사도 그의 신학박사 논문은 Jesus as Psychic 이라는 제목이었을 정도로 예수님을 하나의 마술을 하고 신비한 비술(秘術)을 가르치는 분 정도로 착각했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확하다는 말은 성경 원본에 있어서 글자 한자 한자에 이르기까지 틀림이 없다는 말이고 무오하다는 말은 성경은 교리를 잘못 인도할 수 없다는 말다. 영어로는 Inerrant and Infallible 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을 증거한다.  영감이라는 말은 Edison 이 영감으로 전기를 발명했다는 말과는 다르다.  영감이라는 말은 Latin 어로 입김을 불어 넣었다는 의미이고 또한 헬라어에서도 퓨뉴마토스 (pneumatos) 로 역시 입김을 불어 넣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라고 길게 되어 있으나 원문인 헬라어에서는 ”데어프뉴스토스“ (theopneustos) 라는 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을 입어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시여 하나님의 입김으로 기록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바로 그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각별하신 섭리로 잘 보존해 주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번 복사되어 사용 되었다.  당시의 사정으로는 인쇄기도 없었고 복사기도 없었고, 사람이 손으로 복사해서 여기 저기 돌려가면서 읽었다.  그리고 복사된 사본은 파피루스 (papyrus) 로 된 경우 5년이나 6년을 넘기지 않고 다시 복사한 후 옛 사본은 모두 불태우거나 혹은 항아리에 넣어서 땅속에 묻어두어서 아무도 오래된 성경 사본을 사용 못하도록 신경을 썼는데 이유는 오래된 사본은 글씨가 희미한 것들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성경을 쓰면, 성경이 다른 의미로 해석될 우려가 있고 이런 성경이 다시 복사된다면 다른 글씨로 복사되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이 변질될 우려가 있어서 6년간을 사용하고는 반드시 새것으로 대치하면서 성경을 순수하고 정확하게 보존했다.  복사한 성경에는 잘못 복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잘못 복사된 부분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아서 능히 알 수 있으며 구원의 도리를 아는 데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의 가르침이다.  

     16세기 영국에서는 이른바 ”나쁜 성경” (Wicked Bible) 이라는 성경이 출판되었는데 그 성경을 “Wicked Bible" 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성경의 출애급기 20장을 인쇄하면서 식자를 잘못하여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에서 “not" 이라는 단어를 뻐트려 버리는 실수를 한 때문이다. 그러니까 ”간음하지 말지어다“를 ”간음할지어다“ 로잘 못 인쇄한 것이다.

     당시 영국 <캔터베리 추기경> (Archbishop of Canterbury) 이던 William Lund 가 출판사에 2만 파운드의 벌금을 과한 일이 있다.  사본에는 틀린 곳이 가끔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하등 비평가(下等批評家) 들은 늘 성경의 많은 사본들을 비교 연구하면서 성경의 원본에 가장 가까운 사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중 대표적인 기관은 영국 맨체스터 (Manchester)에 있는 맨체스터 대학교 (University of Manchester) 의 존 라이랜드 도서관 (John Rylands Library) 이다.

     성경은 또한 각 나라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은 읽고 그대로 살라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다.  읽을 수 없다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 예배하는 법, 생활하는 법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세시대에는 교회만이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일반 성도는 성경을 읽을 권리가 없었고  성경 자체가 어려운 Latin 어로 되어 있어서 아무도 그 어려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는 성경은 반드시 자기 나라말 (vernacular) 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천주교에서도 처음에는 불가타판 (Vulgate Bible) 이라고 하는 Latin어 판 성경만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줄 곧 그것만 사용하더니 근자에 와서는 Douay 판 이라 하여 영문판을 사용하게 되었고 요즘에는 각 나라말로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공동번역 이라는 성경이 나와서 읽히고 있는 실정이다. 공동번역 이라는 성경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합작하여 번역한 성경으로 영어 성경으로 말한다면 Jerusalem Bible 과 같은 것이다.  Jerusalem Bible이 바로 구교와 신교가 같이 번역한 영문 성경이다.  


     모든 사람이 원어를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지 않을 수 없으나 번역에는 두 가지 철학이 있다.  원문에 충실하면서 문체가 다소 매끄럽지 못할 수가 있고, 반대로 원어에는 다소 무리가 가도 문체가 매끄러워지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직역(直譯)이고 후자는 의역(意譯) 이다. 그러나 성경은 문체가 다소 매끄럽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고 해도 원문에 충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늘 영어성경의 종류는 100가지가 넘는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다른 성경판이 니오고 있다.  그중에는 정확히 번역된 것도 있고 정확히 번역되지 못하고 번역이 아니라 성경을 해설해 놓은 성경 도 있는데 이를 Paraphrase Bible (해설성경) 이라고 한다.  성경의 해설은 주석일지는 몰라도 성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성경은 성경에다 성경 구절의 설명을 달아 놓은 성경도 있다.  그 설명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가 있다.  이런 성경들이 많이 범람하고 있으니 주의하며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살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가령 새번역 이라는 성경책이 있는데 새번역 에는 요한복음 2장4절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예수님과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어머니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번역했다.  큰 실수이다.  원문을 통해서 보면,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여,” 라는 의미이다.  “어머니” 라는 단어는 헬라어에 <메테르>“meter" 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  본문에 사용된 단어는 <구네이> ”gunei" 라는 단어이다. 헬라어의 <구네이> “gunei" 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즉 “여자” 혹은 “아내” 의 의미 이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아내여,” 라고 했을 리가 없다면 그는 “여자여” 라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요즘에는 고친 듯하다. 마찬 가지 이유로 요한복음 19장에서도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 이니이다” 라고 했다.  이런 말들이 “어머니”라고 번역될 수는 없는 말들이다  마리아도 누가복음 1:47에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했다.  마리아도 똑같이 구원이 필요한 분이요 구세주가 필요한 분이다. 이런 새번역 성경이 요즘은 바로 고쳐 젔다는 소문이니 무척 다행이다.  성경은 자국어로 번역이 되어져야 하지만 누가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경 중에는 잘 못 번역된 곳들이 많이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성경의 원본은 없어 졌으니 아무리 보수주의자들이 성경의 원본에는 틀림이 없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한다.  대답해 보자.  인쇄기가 없는 시절이라 성경은 복사되어 왔는데 복사하면 잘못이 생기지 않는가 하는 말이지만 물론 잘못이 생길 수 있다.  한줄 빠질 수도 있고, 글자가 틀릴 수도 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복사 하는 사람이 가령 6명이 앉아서 복사한다면 복사 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곳에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혹 한 군데 잘못을 범한다 해도 다른 사본들을 보고 고칠 수 있으므로 결국은 원본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제9절.
“성경 해석의 정확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구의 참되고 온전한 의
미 (의미는 여가가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밖에  없다) 에 관해서 문제가 생길 때 보다 더 명백하게 말하는 다른 성구에서 그 의미를 알도록 하여야 한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은:
   1) 성경은 성경으로 풀이한다는 것.  
   2) 성경의 애매한 구절은 더 명백하게 기록된 성경의 다른 부분을 보아서 해석한다는 것
   3) 성경의 의미는 항상 하나이지 한 가지 이상이 될 수 없다 는 것 등을 배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제9절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 우리 주변에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성경해석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성경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즉 <이현령비현령> 이라고 하지만 성경 해석의 원칙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성경은 절대로 <이현령비현령> 이 아니다.  성경은 해석하는 법이 따로 있다.  성경해석 방법을 몰라서 교회에서도 신앙문제로 논쟁이 있고, 또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서부 지방에는 이단의 무리들이 다른 곳보다 더 창궐해서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좀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예를 들어 신학교 강의실에 들어가면 많은 학생들이 마가복음 3:29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 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 성경은 어느 한 구절을 읽어서는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성경 전부를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느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방금 예로 들었던 마가복음 3장29절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  성경을 해석할 때는 원칙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고 그 말은 성경의 문맥을 통해서 그 성경구절의 의미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위험한  것은 사람들이 성경의 어느 한 구절만 가지고 그 성경 구절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 하려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예를 들어서, 예례미야 7장 16절을 읽으면, “기도 하지 말라” 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저기에 기도하라는 말이 많이 있다.  만일 성경 해석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이 예레미야 7:16절 한 절만 가지고 나와서 기도할 필요 없다고 교회를 시끄럽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한 개의 예에 불과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의 너무 많다.  성경해석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은 가만히 보면 모두 성경 해석의 원칙을 알면 쉽게 해결될 문제들인데 그 원칙을 몰라서 어려움을 겪는다. 루이스 벌콥
(Louis Berkhof) 박사가 쓴 Principle of Biblical Interpretation (성경해석 원칙 ) 이라는
책을 사서 보라. 우리말로 번역되어 팔리고 있다.

     그러면 이제 문제의 <마가 복음 3:29> 에 다시 되돌아가서 무엇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이며 무엇이 용서 받지 못할 죄인지 알아 보자.   어느 성경 구절을 앞에 놓고 그 의미가 애매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성경구절이 들어 있는 앞뒤를 읽어 문맥을 파악하는 일이다.  마가복음 3장29절을 보라.  문맥을 잡기 위해서 마가복음 3장 22절 부터 읽어 가면 예수님이 이적과 기적을 행하였는데 그 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하는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행하는 것이라고, 즉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고 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23절 이하에서 이를 반박하면서 나중에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사하심이 없다”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문맥을 보아서 예수님의 병고치는 일이나 이적 행한 것이 귀신의 힘으로 행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믿지 않는 분이요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영원히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참고로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지장사역에서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성을 안 믿는 무리들이 1920년대에 미국에 건너와서 당시 미국 북장로교 (UPCUSA) 는 1920년에 근보주의 5대교리 를 제정한 것이다. 다시 본문에 돌아와서 이 말씀은 마가복음 3장30절 말씀이 입중해 준다. 30절 말씀을 보라. “이는 그들이 그가 귀신들렸다 함이러라”  라고 이유가 나와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앞 뒤 문맥을 보면 어려운 성경 구절들이 잘 풀리고 또한 오해할 소지도 적어진다.  

     나중에 예를 들었던 예레미야 7장 16절도 마찬 가지이다.  그 앞이나 그 뒤의 성경 구절을 계속해서 읽어서 문맥을 잡으라.  어떤 사정 속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본문 예례미야 7장에는 유다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특히 16절 이하를 보면 하늘의 황후를 섬기기 위하여 아이들은 나무를 줍고, 아비는 불을 피우고 아낙네는 떡 반죽을 하여 하늘의 황후를 위하여 제사를 준비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백성에게 노하시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죄를 상습적으로 짓는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다.  요한1서 3장 9절에는 “하나님께로 난자 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거듭난 사람은 상습적으로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는 다” 는 의미이다.  전혀 죄를 짓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부흥사들은 “거듭 난 사람은 조금도 죄를 짓지 않는다” 고 설교하지만 요한1서 3:9의 원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습적으로 날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복을 비는 것은 심히 가증한 일이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늘 거역하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달라고 청하는 것이 어찌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겠는가?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요한복음 2:19절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세우리라” 라고 했는데 이 말씀만 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인 요한복음 2장20절을 보면 이것은 주님이 자기 몸을 말하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46년간 걸려서 지은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경 해석의 원칙이다. 꼭 알아 두자. 잊지 말자.

     성경해석 중 어두운 곳은 다른 밝히 들어 난 곳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것도 알아 두셔야 한다.  성경에는 모든 것이 똑같이 명백히 알기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럴 때는 억지로 풀면 안 된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붉은 말은 쏘련이고 흰말은 미국이라는 해석은 억지의
해석이다.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 어디 있는가?  특히 부흥사들은 남 다른 말재주를 가지고 무엇이든 제 멋대로 해석해 버리면서 대중의 인기를 추구한다.  

     성경 한 구절을 가지고 제 멋대로 해석하려고 마음먹으면  그 성경을 뒷 받침하는 듯한 성경 구절을 여기저기서 긁어 모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긁어모은 성경 구절은 그 자체의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하는데 문맥의 내용을 벗어나서 자기가 만든 교리에 억지로 맞추려한다면 무식한 일반 성도는 말재주에 그냥 속아 넘어 갈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한 부흥회는 되지 못한다. 바로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린다.  

     Christian Science 라는 교파가 있다. 이 교파에서는 수혈도 금하고 병이 들어도 약도 먹지 않는다.  이들의 구원관은 인생의 슬픔, 고통, 죽음 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이고 그 죄에서 구원 받는 길은 그런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창시자 교수 메리 에디 베이커 (Mary Eddy Baker) 는 야고보 1:5 즉 “너희중 지혜가 부족하거든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라” 란 성경 구절 한 절을 독립해서 해석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지혜를 주시는 것으로 알고 새로운 교파인 Christian Science를 시작했다. 대개 이런 사이비 종파들은 교주의 계시로 인하여 시작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성경완성 이후의 계시를 인정치 않는다. 하나님이 그런 이를 못해서가 아니라 하실 필요가 없어서 안 하시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제1절 참고). 성경의 어두운 곳은 성경의 다른 밝은 곳에 비추어서 해석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해석하려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을 알아야 하며 특히 의미를 알고 저 하는 그 성경구절의 앞뒤를 상세하게 읽어 문맥을 잡아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제1장 제9절이 가르치는 또 하나의 교훈은 성경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는 한 개 뿐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면 얻어 지는 결론은 하나라는 것이다.   시편 18편 2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하나님을 산성이나 요새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갖고 있는 속성을 은유법(metaphor) 으로 말한 것 뿐이다.  성경에는 은유법, 직유법, 제유법 등 수사학사의 기교(技巧) 가 많다.  성경도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것이 사실일진대 인간의 언어가 갖고 있는 모든 수식적 용법을 사용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수식적 용법이 사용 되었다.  가령 누가복음 13:32에 나오는 “여우” 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성경구절에서 여우는 짐승 여우를 말함이 아니요 <헤롯왕을 지칭하는 경멸의 은유법> 이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여우라고 해석한다면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할 것이다.  한 성경 구절의 의미는 그 성경구절이 들어 있는 문맥에서 찾아야 하므로 그 문맥 속에서는 하나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맥을 무시한다면 바른 성경 해석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제10절:
“모든 종교상의 논쟁들을 결정하고 모든 회의들에서 결정되는 것, 초대 교부들의 문헌들, 인간의 교리, 그리고 개인의 영들을 검토하고 그 결정에 순종해야 하는 최고의 심판 주는 다른 이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님이시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
        여기서는 무슨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  이 말씀은 나중 제31장 <각종 회의> 라는 항목에서 자세히 다루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만 교회의 각종 회의, 또 노회나, 대회, 총회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대로 결정지어 성도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을 구속받아서는 안 된다. 가령 어떤 교파에서는 교회 안에 무슨 문제나 논란이 생겼을 때, 교회 즉 교황이 무엇이든 그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면 다른 신도들은 그 말씀에 아무 조건 없이 순종해야 하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 그들의 양심은 속박되어 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잘 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의 생각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는 모든 치리 기관에서는 성도들의 양심을 속박할 권리가 없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아무도 핑계 하지 못하도록 함이요 모든 안건들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성경에 근거하여 토의하고 발언하고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힘 있는 어떤 사람이 자기 주관대로 모든 일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결정짓고 그것을 다른 성도들에게 따르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성도는 누구나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성경 말씀에 따라서 양심의 구속을 받지 않고 당회나, 노회나, 대회나, 총회의 결정이 비 성경적이면 마땅히 시정을 축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아마도 정치 체제에서 성경적인 개혁교단들과 그렇지 모한 다른 교단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대부분의 비 성경적인 교회에서는 성경을 자기 주관대로 해석해 놓고, 또 모든 치리회의 의 결정도 마음대로 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결정해 놓고는 성도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는데 이는 잘 못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곱백서 제1장 강해, 끝-

튤립 교육 선교회 제공
www.tulipministri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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