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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통일 운동 (Interfaith Movement) (I)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09. 7. 26.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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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종교 통일 운동 (Interfaith Movement)

                                                                                                  튤립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기독교가 오늘 까지 우리에게 전수되어 오는 동안  여러 가지 수난을 당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는 초대교회대로 온갖  이단 사상이 교회를 침식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문제는 주로 영지주의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영지주의 (Gnosticism)는 헬라의 철학사상을 기독교 및 다른 종교와 접목한 비성경적이고 비 기독교 적인 이교도적 이원론적 사상입니다.  이런 철학이 교회에 침식하면서  아직도 교리가 오늘처럼 완전하게 정립되지 못했던 그 당시 성도들은 많은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가만히 교회에  들어와서 교인들을 유인하며 다른 복음을 전파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유다서 골로새서 등에서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 영지주의 자들이 얼마나 교회를 파괴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1서를 기록하면서 영지주의를 경계하라는 뜻에서  4:1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영이 하나님에게 속 했나 시험하여 보라” 라고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 4:2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니“ 라고 했는데 왜 이런 말을 썼을까요? 정통으로 믿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인성을 입고 오신 것, 즉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런 교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를 믿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교리가 정립된 것은 Ireanaeus 나 Tertullian, Augustine,  Chrysostom 같은 교부들의 시대에 와서 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에게 받아 성경을 기록했고, 그 뒤를 이은 속사도들은 교리를 연구하고 정립하기보다 기록된 말씀을  그들의 문헌에 그대로 인용하는데 신경을 썼으므로 이들에게서 교리의 정립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속사도> 란 영어로는 <Apostolic Fathers> 라고 하고 Ignatius 나 Polycarp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죽고 난 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교회사에서 <교부> 영어로는 <Church Fathers> 라고 하고 이들 중에는 Tertullian, Irenaeus, Origen, 그의 스승이던 Clement of Alexandria, Augustine, Chrysostom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부들도 처음부터 완전한 교리를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성경 그 자체는 원본에 있어서 조금도 틀림이 없는 정확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의 교리는 완전하여 조금도 수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그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지혜가 부족하여 시행착오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같은 성경을 대하면서도 각자 해석이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theological schools, 학파> 가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에 잘못이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 이를테면 오늘의 패역한 Emergent Church 운동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재해석> 해야 한다고 하고, Elaine Pagels 같은 학자는 공관복음을 영지주의 복음인 <도마복음> 에 비추어서 다시 수정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Gnostic Gospels, N.Y.: Vintage Press, 1987).

처음 신약 성경이 기록될 때는  소문자 (miniscule)는 사용하지 않고 모두 대문자 (uncial)로만 기록했고 게다가 단어와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도 없었고, 구두점도 없어서 긴 문장이 계속 되어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 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 학자들 간에 신약 본문 비평에서 같은 성경구절을 두고 이런 저런 다른 해석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인합니다. 본문비평은 중요합니다. 본문 비평은 오늘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신약사본들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어느 것이 원본 (autograph) 에 가까운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가령 한국말에 “아버지가방에들어간다” 란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아버지가 방에 들어 간다” 고 해석하고 어떤 분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갔다“ 고 해석 할 수도 있는데 물론 후자의 경우는 상식에 맞지 않는 말로 어떻게 사람이 가방 속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를 들자면 단어와 단어 사이에 간격이 없는 문장은 해석상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예를 영문에서 들어보면, “Godisnowhere" 입니다.  이 문장의 뜻은 무엇일가요? 어떤 분은 ”God is now here“ 라고 해석하고  어떤 분은 ”God is nowhere“ 라고 해석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긴 문장에서 어느 단어 사이를 끊는가? 어디서 구두점을 찍느냐? 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게 마련이었습니다.

가령 원문에서 보면 로마인서 5:1에 “화평을 누리자” 인가? 아니면 “화평을 누리고 있도다” 인가? 하는 문제도 대두 됩니다. 물론 이것은 단어와 단어 사이의 분리나 구두점과는 관계가 없고 단어의 철자 문제에 따라 서로 두 개의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경우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 보면, 어떤 성경에는 “화평을 누리도다” 라고 되어 있고 어떤 성경은 “화평을 누리자” 라고 되어 있음을 봅니다. 다른 이유는 복사하는 사람이 글자 한자를 잘 못 받아 썼기 때문에 일어난 혼란입니다. 영문에서는 “Let us have peace" 인가? 아니면 ”We have peace" 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전자는 문법적으로 “직설법 indicative mood" 이고 후자의 경우는 문법적으로 ”접속법, subjunctive mood" 를 쓰는 "hortatory sentence"입니다.

옛날에는 성경을 파피루스 (papyrus) 나 양피지 (parchment) 에 기록했고 이런 것들은 오래 갈 수 없어서 6년 내지 7년에 한 번씩 교체했습니다. 성경을 복사하고 옛 사본은 불태우든지 아니면 독에 넣고 땅굴속에 넣어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947년에 발견된 것이 유명한 “사해두루말이 Dead Sea Scrolls"입니다.  성경을 복사할 때 복사기로 한 것이 아니고 대서사 (amanuensis) 서너 사람을 모아 놓고 한 사람이 성경을 불러 주었습니다. 받아쓰는 사람은 틀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복사 하는 과정에서는 사람이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같은 단어를 두 번 중복해 쓰기도 하고 어떤 분은 한 단어나 한 줄을 빠트리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문제의 로마서 5:1 은 어떤 사본에는 echomen eirenen" 또 어떤 사본에는 ”echwmen eirenen" 으로 되어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exw" 라는 동사의 직설법 현재이고 후자의 경우는 "exw" 동사의 접속법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화평을 누리도다” 란 말이고 후자의 경우는 “화평을 누리자” 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한 글자 “0" 인가 혹은 ”w" 인가 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등비평 즉 사본학 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경을 정확히 읽도록 도움을 주기 위하여 Robert Estienne (로베르 에스띠엔느) 라는 종교개혁 시기의 프랑스의 인쇄업을 하던 사람이 신약성경을 오늘과 같이 대문자, 소문자를 구별하여 쓰고 단어와 단어를 띠어 쓰고 구두점을 바른 곳에 찍었습니다.   Robert  Estienne 혹은 Robert Staphanus (로베르 스테파누스) 라고 불리우는 학자가 이런 놀라운 그리고 엄청난 일을 해 냈습니다. 우리가 교회사 특히 “종교 개혁사” 를 공부하면서 사람의 이름이 두 개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위험한 종교의 핍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명을 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Robert Estienne 도  Robert Staphanus 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Robert Estienne 는 1503-1559 에 산 프랑스 사람으로 인쇄업을 하고 있었지만 학자로서 종교개혁기에 성경을 많이 연구한 분이고 1551년에 성경의 절수를 구별 짓는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그 분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성경을 원어로 읽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누군가가 다른 분이 그동안에 그 일을 담당했겠지만 Estienne 은 그런 놀라운 일을 해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초대교부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정립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조직신학의 인간론,  죄론, 기독론, 교회론, 성령론, 구원론, 종말론 등을 정립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쳐서 점차적으로 기독교의 믿는 교리가 완성되었는데 가령 예를 들자면 185-254 까지 살았던 Origen 같은 사람도 처음에는 “사람은 원래가 하늘에서 신의 존재로 존재하다가 출생하여 인간으로 태어날 때 흙으로 인간의 몸을 입는다” 라고 가르쳤으니 오늘의 모르몬교와 같은 가르침을 주었고  또한 “사람이 죽으면 다시 교육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 고 하였으니 오늘의 천주교의 “연옥의 교리” 를 가르쳤습니다.

물론 이런 그의 가르침은 나중에 그가 깨닫고 나서 모두 바른 신학으로 고쳤지만 처음에 갈팡질팡 하면서 교리를 연구할 때 그런 잘못도 저질렀던 시기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도 교리룰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 교리를 완벽하게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바로 정립했으므로 다시는 교리의 수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새로운 교리를 발견했다고 떠들며 다른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 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 4세기에서 5세게 까지 살았던 Augustine (354-430) 도 처음에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 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합하여 이루어 진다” 고 가르쳤으니 다른 말로 말하면 “협력구원설, synergism) 을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나중에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그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독력구원설, monergism)을 주장하면서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 진다"는 성경적 진리를 알게 되어 다행이지만 우리가 알 것은 교부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정립한 것이 하루아침에 모두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자체가 모호해서가 아니라 성경은 분명하지만 그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제한된 지혜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거려서 오늘에 이릅니다.


교리를 최종 점검한 것은 종교개혁기입니다. 종교개혁 기에는 르네상스 (Renaissance)의 영향을 받아 고전을 깊이연구하면서 성경에 관심을 쏟았고 지금까지의 교회의 잘 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았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의 사상을 모두 지지한 것은 아니고 종교개혁이 완성된 다음 어떤 사람들은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요구하면서 교리보다는 오히려 실천생활에 중점을 두는 교파도 생겨났습니다. 이를테면 필라델피아 Lancaster 에 있는 “Amish 파” 나 Bethlehem 에 있는 “Moravian 파” 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이론, 즉 교리보다 실천생활을 강조하여 검소한 생화로 일관했습니다.  

그 후에 감리교와 침례교, 또 Quaker 교도가 출현했고 기독교의 교리보다는 사회봉사를 중점으로 하는 William Booth 의 “Salvation Army 구세군”이 생겨났습니다. 구세군이 “자선  냄비” 로 많은 사람을 돕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참교회의 세 가지 특징 중  하나인 성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통적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Quaker 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왕실이 William Penn 의 가족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하여 William Penn 에게 미국 식민지의 Pennsylvania 지방을 하사했는데 그는 자기 이름을 따서 Penn 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숲이라는 Latin 어 인 Sylvanus 를 합하여 Pennsylvania 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후 Pennsylvania 주는 “Friends's Meeting Hall” 이라고 불리는 Quaker 교도의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고,  George School 을 창립한 George Fox 도 유명한 Quaker 교도였습니다.  이들은 성례식이 없고 말씀의 선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회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성시대로 접어듭니다. 17세기는 “이성주의 시대, The Age of Rationalism" 으로 특징 지을 수 있습니다. John Locke (1632-1704) 나 Rene Decartes  (1596-1650)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무엇이든지 이성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시기는 유럽에서 화약이 발견되고 갈릴레오 (Galilelei Galileo 1564-1642) 나 Copernicus, Nicolas 1473-1543) 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Johann Gutenberg (1398-1468)이 활자를 발명하는 등, 과학이 발달할 때 이므로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도 이성에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이성주의는 18세기 프랑스 혁명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프랑스의 Notre Dame 사원도 프랑스 혁명이후 과격분자들은 다른 이름으로  개명할 정도였습니다. Notre Dame 은 많은 수난을 거처 오늘에 이릅니다.  이성주의는 계몽주의로 계몽주의는 다시 고등비평으로 이어졌습니다.

미국에 이런 사상이 상륙한 것은 1910년대 즉20세기 초엽입니다. 프린스톤 신학을 강타하여 프린스톤 신학이  변질되어 갔습니다. 자유주의가 개혁주의를 능가하는 풍토로 변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침례교가 앞장을 서서 근본주의를 부르짖었고 장로교 감리교도 뒤따랐습니다만 역부족으로 자유주의는 이미 미국에 너무 많이 퍼져 나갔습니다. 1910년에 발행된 “The Fundamentals,근본주의 교리" 10권은 자유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서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자유주의에게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미국의 교계를 보면 이름만 ”기독교“ 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혼합주의 와 신비주의 일색입니다.

1960년 대 부터는 영지주의가 들어오고 Michel Foucault 의 Postmodernism 이 들어와서 기독교는 점점 핵심 교리 (cardinal doctrines) 를 상실한 채 과격하게 변질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주의적으로, 주관적으로 감정주의 위주 와 개인주의로 변함으로 성경을 다른 종교의 경전과 다를 것 없이 모두 동일하다는 사상이 대두합니다. 이 무렵 Anton LaVey의 “Satanic Bible, 사탄 경" 도 1967년에 출판되어 그해에 등장한 ”The First Church of Satan, 사탄 제일 교회“ 의 공식 신조로 대두되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종교 통일 운동” 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UN 에는 이를 위해서 Temple of Understanding 이라는 종교기관을 만들어 어느 종교를 믿건 모두 같이 모여서 명상하는 장소를 만들었고 인도의 New Delhi 에 New Age 본부를 만들어 UN 지도자들이 그곳에 가서 영적 훈련을 받고 옵니다. 자세한 내용을 볼려면 David Jeremiah Film 의 “Gods of the New Age" 라는 video 를 참고 바랍니다. 일반 성도들의 눈으로 볼 때는 별로 의심이 가지 않지만 훈련된 신학자의 눈으로 볼 때 요즘에 나오는 책들은 옛날 나오던 책들과 성질이 매우 다른 것을 느낍니다.

요즘에 나오는 기독교 출판물들이 이전과 어떻게 다른가 하면 교회가 하나의 기업체처럼 되어 갑니다. 그래서 옥성호 씨는 이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책을 펴냈습니다.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서울: 부흥과 개혁사 간행)”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널리 추천합니다. 꼭 사서 보십시오. 오늘의 많은 목사들은 교회를 하나의 기업체 운영하듯 하고 영적인 성장 즉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숫자를 증가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예배가 교인중심이며 결코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예배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교인의 편이와 쾌락 중심이고  교인이 좋아하는 교인중심의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열린 예배” 라는 것이 바로 기독교를 파괴하는 “예배 아닌 예배”입니다.  

예배의 내용도 변하는데 <명상, Contemplative Meditation> 에 중점을 두고 <인간의 잠재능력, human potentiality> 에 중점을 둡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명상을 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특별한 명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뉴에이지의 경우는 Mantra (주문) 를 외운다던지, 말하지 않고 가만히 머리를 비우고 명상만 한다든지, 외계와 신접 (神接) 을 한다든지, 요가를 한다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동양의 신비종교를 기독교에 도입하여 기독교의 독특성을 파괴하고 하나의 공통적인 세계 종교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계종교 운동은 구체적으로 우리들 주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봅시다.

요즘 사탄의 전술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것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비 진리인지 구별을 못하게 하는 것> 입니다. 모두 그럴 사하게 포장하는 것입니다. 모두 <예수 이름으로> 나옵니다.  요즘 나오는 모든 소위 “기독교 서적” 들이  모두 이전과는 달리 성도들이 보다 기분 좋게 믿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유혹합니다. 사람들은 유혹에 빠져 들어갑니다. 목사들마저 얼마나 많이 빠져 들어가 저주 받을 다른 복응을 양떼들에게 먹입니다. 

J 목사는 “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머리에 그림을 그리면서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다” 거짓말을 가르칩니다 (Fourth Dimension, Bk I, pp.60-70).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것을 받아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머릿속에 그려보라는 말도 한 적이 없고 더욱이 기도하면 모든 것을 응답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응답되는 것입니다. 고후 12장의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육신의 가시” 를 위해서 세 번 기도했어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기도가 J 목사보다 못했기 때문 입니까?  바울이 기도할 때 J 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머리에 육신의 가시를 제거당하는 그림을 그리며”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마십시다.  요한복음 15:7 이나 롬 8:26 을 읽어 보십시오. 해답을 찾을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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