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거만은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에게 닥친 앗수르의 공격을 이야기하는 열왕기하 18장의 내용 가운데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과의 대화를 ‘성 위에서 이루어진 대화’이고, 이때 사용된 언어를 성위의 언어라고 불렀다. 성 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세상의 언어이다. 세상의 언어는 힘의 언어이고,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힘의 논리에 의한 언어이다. 성 위의 언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을 때 사용된 언어이기도 하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유대인들의 간교한 언어일 뿐 아니라, 폭동을 두려워하는 소신없는 정치가인 빌라도의 언어이다. 성 위의 언어는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했던 중세 로마 카돌릭 교회의 언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던 뻔뻔스러운 언어였고, 교회를 가장한 사탄의 언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성위의 언어를 쓰면서 산다. 현대어로 세상의 언어는 갑질의 언어이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 앞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반면에 성 아래에서 사용된 언어는 기도의 언어이다. 성 아래의 언어에는 힘의 논리가 없다.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자자에게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열왕기하19:3)’라고 기별했던 것 같이 성 아래의 언어는 온 몸에 힘이 빠졌음을 고백하는 언어이다. 나로서는 어찌해 볼 여지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언어가 성 아래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이 사용된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면서 침묵하셨던 것은 성 아래의 언어로 이야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성 아래의 언어는 기도하는 언어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언어가 성 아래 언어가 된다.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열왕기하19:3)’라는 기별을 보내면서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열왕기하19:4)’라고 기도를 요청하는 언어이고, 또한 스스로도 기도하게 하는 언어이다(역대하32:20). 이사야서에서는 히스기야가 이때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이사야37:17-20)’라고 기도했다고 전해준다. 즉, 성 아래의 언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언어이고,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겠다는 고백이 담긴 언어이다. 그래서 성 아래의 언어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언어가 된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언어가 성 아래의 언어이고, 그래서 성 아래의 언어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이고,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는 언어이다.
삶의 규모가 작았던 과거에는 성 아래의 언어가 성 위의 언어 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큰 공동체에서는 성 위의 언어가 강하게 된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힘의 논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 아래의 언어를 가르치는 곳이다. 기도를 가르치고, 용서함을 가르치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사랑이 성 아래의 언어의 바탕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돌아보자.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성 아래의 언어를 쓰는가 아니면 힘을 바탕으로 하는 성위의 언어를 쓰는가? 우리 교회가 어떤 언어를 가르치는 데 그리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데 집착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