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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송영목목사(부산)

by 김경호 진실 2016. 3. 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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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송영목 목사(고신대 신학과 교수, 삼일교회 협동목사, 부경성경연구원장)

들어가면서

현대의 다양한 해석 방법론들은 요한계시록 해석에도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계시록을 해석하는 데는 4가지 방법이 있어 왔다(참고. 페이트, 1999:19-41): (1) 본문의 의미를 1세기 요한 당시로부터 찾으려는 과거론적 해석(preterist interpretation); (2)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미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미래론적 해석(futuristic interpretation); (3) 구체적인 역사성을 무시하고 하나님(교회, 선)과 사단(악) 사이의 대결로 이해하려는 이상주의적 해석(idealistic interpretation); (4) 주석가 자신이 처한 세상의 형편과 교회의 상황에 따라 해석하려는 세상-교회 역사적 해석(world-church historical interpretation).

한국에서는 렌스키, 헨드릭슨과 레온 모리스와 같은 복음주의자들의 주석의 영향으로 이상주의적 해석이 복음주의 진영에서 많이 소개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거론적 해석을 제외한 나머지 해석은 ‘의미’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의의’를 찾는 적용의 차원으로 볼 수 있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상주의적 해석은 계시록이 문학 장르 상 묵시-예언적 서신이므로 1세기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주석에 있어서 철저히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약점이 있다.

과거론적 해석의 수정된 형태인 부분적 과거론적 해석(partial preterist interpretation)에 개혁주의자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유는 1세기의 배경 속에서 계시록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다른 해석방법들보다 더 철저하며, 동시에 계 20장 이후를 미래적인 측면으로 정당하게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부분적 과거론적 해석 안에도 두 의견이 있다: (1) 계 4-19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후 70년을 정점으로 배교한 유대인들을 심판하시고 교회는 구원하신다는 것을 중심 주제로 보는 철저 부분적 과거론(the consistent partial preterism); (2) 계 4-11장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주제로 하지만 계 12-19장에는 주제의 전환이 일어나서(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의) 초대교회의 박해 세력인 로마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한다는 전환적 부분적 과거론(the transitional partial preterism).

요한의 1차 수신자는 소아시아에 살고 있었는데도 예루살렘 멸망을 이렇게 주요 주제로 보는 이유는 디아스포라에게 있어서 주후 70년 이전의 예루살렘은 여전히 사상과 종교의 중심 역할을 했기 때문에, 70년 사건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모든 디아스포라에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판적 측면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구원을 동시에 함의한다(참고 욜 3:1-2).

풀러신학교의 랄프 마틴(2000:564)은 ‘신약의 초석’에서 혼합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미래-역사-이상론적 해석은 사실상 의미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적용이므로, ‘what it meant’를 찾는 석의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1세기의 관점에서 계시록을 해석하는 부분적 과거론과 개혁주의 주석의 정점인 구원계시사적인 해석,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간본문적인 해석을 차례로 살펴보자.

1. 계시록의 부분적 과거론적 (Partial preteristic) 읽기

현대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1세기는 과거이다. 'Prete-'라는 말은 라틴어로 '과거'란 뜻이다. 따라서 이 해석은 미래적 해석과 완전히 대립적이다. 이것은 16세기 예수회의 Alcarsar가 주장한 것인데, 17세기 보에티우스가 수용하여 개신교에도 잘 정착-확산된 견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견해는 16세기 교회 개혁가들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부분적 과거론의 현대 주창자들은 Christian Reconstructionists들인데 後천년주의자들로서, 러쉬도니, 젠트리, 드 마르, 조단 등과 Texas주의 Tyler의 테일러 학파(Tyler school)이다.

부분적 과거론의 전제 중 하나는 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다양한 내증과 외증에 근거하여 주후 65-66년경으로 보는 것이다. 또 다른 전제는 계시록은 1세기 수신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박해받던 소아시아 7교회에게 직접적인 위로가 되는 방식으로 속히 성취될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계시록도 서신으로서 다른 바울 서신이나 신약과 동일한 원리로 먼저 해석되어야 하지 신비한 방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물론 계시록의 묵시적인 상징을 다른 성경 보다 더욱 고려해야 함은 당연하다.

부분적 과거론은 두 부류로 나누인다: (1) 철저 부분적 과거론(consistent partial preterism): 주창자: Chilton, Gentry, Jordan 등. 계시록 1-19장의 전체 내용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2) 전환적 부분적 과거론(transitional partial preterism): D.S. Clark, A.M. Ogden, M. Stuart, J.E. Adams는 계시록에 내용과 주제의 전환이 나타난다고 본다: 계 4-12장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주 내용. 계 13-19장은 로마에 대한 심판이 주 내용. 따라서 이 두 입장은 계 20-22장은 주로 재림 전과 세상 역사 이후에 있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본다.

이 때문에 ‘부분적인’(partial) 과거론이 된다. 이 두 가지 부분적 과거론 중에서 무엇이 옳은가? 답은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 or)로 볼 수 없고 보조적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다의성을 지닌 상징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의 1차 독자들의 두 부류도 고려해야 한다. 유대인 독자와 이방인 독자. 같은 메시지일지라도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받았던 유대인 성도 독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방인에게서 박해를 더 받았던 이방인 성도는 로마의 박해로 보았을 것이다.

2. 계시록의 기독론적-종말론적-구속사적 읽기

소아시아의 7교회를 포함한 초대 성도의 사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세 가지 실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실제
(2) 구원받은 사람의 새로운 삶의 실제
(3) 자료로서의 구약의 실제 (이 말은 구약을 배제한 구속사와 계시사는 없다는 의미이다)

계시록에서 성경 66권의 결론으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결론에 도달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계시록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가 지금까지 감추어 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계시와 더불어 결론에 도달한다.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계 1:1). 실제로 계시록에는 언약적인 종말론을 담고 있는 표현이 많다. ‘디아쎄케이’ (언약: 계 11:19)라는 말이 계시록에 한번만 나타나지만, 요한은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인 7교회의 관계를 종종 구속의 관점에서 밝힌다. 계시록은 ‘언약적인 서신’(covenantal epistle)인데 다양한 환상과 위로의 표현을 담고 있다.

그리고 큰 왕이신 예수님과 그의 신하인 교회의 언약적인 관계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과 가치를 선명히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언약관계 속에서의 신하(7교회)의 의무는 이전에 (그리고 계속하여) 무언가를 이루어 주신 큰 왕의 선하심에 기초한다. 사실 신하에게는 죽음과 고난 속에서도 이 의무를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다.

큰 왕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3시제를 반영한다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계 1:4). 이 3시제를 살펴보자:

(1) 큰 왕이신 예수님의 과거의 사역

죽임 당하신 어린양은 그리스도의 과거의 십자가 위에서의 사역을 의미한다. 계시록 안에 역사적인 예수님에 대한 언급과 상징은 주로 죽음과 부활과 승귀에 초점이 모아진다. 단회성을 강조하는 아오리스트형으로 표현된 ‘이겼다’(enikeisen)라는 반복적인 표현은 주님의 영단번의 구속 사역을 가리킨다(계 3:21; 5:5).

(2) 큰 왕이신 예수님의 현재의 사역

현재라는 말은(예수님의 승천에서부터) 요한 당시를 의미한다. 계시록의 강한 종말론적인 강조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언급보다는 현재적 사역을 더 많이 소개한다. 현재에 그리스도는 우주의 승귀한 왕이시다. 예수님이 과거에 흘린 보혈은 현재에 유효하며(12:11), 예수님은 지금 교회 안에 거하신다(1:13; 2:1; 3:19).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현재 말씀하신다(1:1; 2:7; 2:24; 4:1; 16:15; 22:6; 22:20). 주님은 지금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일하신다. 참고로 현재분사형으로 나타난 ‘이기고 있는 자’(ho nichon)는 예수님의 과거의 승리의 사역을 믿고 계속하여 승리하는 사람을 강조한다.

(3) 큰 왕이신 예수님의 미래의 사역

대부분의 예수님의 미래적 사역은 요한이 서신을 쓰는 시간과 종말 사이에 일어날 일이 아니다. 주님의 미래적 사역은 요한이 계시록을 쓰고 있는 때와 재림 사이에 일어날 일들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재림과 관련된 일들이다.

이상의 예수님의 3가지(과거-현재-미래) 사역으로부터,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의 사역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귀하신 주님의 현재적인 활동을 다룬다는 점이다. 따라서 계시록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 위에 일곱 교회 안에 임한 것을 강조하며, 계속하여 7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시적으로 이루어 가는 현재적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과거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요한의 교회론은 언약적이며 구속사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7교회는 이미 개인적인 고백과 경건한 삶의 태도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표로 살고 있다. 사실 7교회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요한 신학은 기독론이며, 그의 기독론은 구원론이다. 환언하면,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7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imitatio Christi) 구원을 계속 이루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야 한다.

이 사실은 신약 전반에 나타나는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종말론적인 도식과 일치한다. 보좌 앞에 서 계시는 주님은 이제 성부 하나님을 대신하여 구속사역을 성취하시도록 계속해서 일하신다. 일을 다 마치신 후 주님은 보좌에 앉으신다(2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니’를 시간의 경과로만 이해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통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계 1:4절에서 이런 시간의 경과 차원의 흐름이 깨어진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앞으로도 계실 분이 아니라 ‘장차 오실 이’로 하나님을 소개한다. 이 사실은 계시록의 신론과 시간관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즉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을 위해 계속해서 역사하시고 움직이시는 동적인 하나님이 중요하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할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강조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장차 오심'(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함)의 관점에서 현재와 과거가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과거의 승리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교회가 이루어야 할 현재와 미래의 모든 승리를 결정지어 버렸다.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종말이 이미 이루어 졌다. 성도의 비폭력적인 충성은 세상에 그들이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증거하는 종말론적인 충성이다. 하나님이 시작과 마지막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을 때에만 이 왜곡된 세상에서 비폭력적으로 살 수 있다. 여기서 열심당원과의 차이점을 본다. 요한이 비록 악의 활동을 많이 그리고 있지만, 계시록은 근본적으로 비관적이지 않고 소망적이다. 이 이유로, 계시록은 고난당하는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제이다(계1:7, 8; 17:14).

계시록의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소망의 메시지임을 더 살펴보자. 예를 들어, 간주(interlude)로서의 계 7장(6째 인과 7째 인 사이의 간주)과 10-11장(6째 나팔과 7째 나팔 사이의 간주)은 도피의 상황을 묘사하지 않고 이내의 기간을 묘사한다는 사실은 7교회가 세상에서 나와서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능동적으로 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계시록의 현실 도피적인 묵시적인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외치는 현재에서 활동하는 선지자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에 대한 비관적인 사상으로 오로지 새 하늘과 새 땅에만 요한이 초점을 두고 있다고 보면 안 된다. 여기서 유대묵시 문학과 계시록의 차이가 드러난다. 유대 묵시문학에는 이미 (already)라는 면이 약하다는 말이다. 무천년주의나 전천년주의자의 비관주의적인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 사건은 사탄에게 영적인 치명타를 입혔지만,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치명타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하나님의 승리는 자신의 지상에 이룰 승리를 보장한다. 계시록 안에 나타난 7개의 복(makarism)과 “하나님의 주권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1:1; 22:6)는 표현 역시 비관주적인 요소를 부정한다.

요약하자면, 기독론적인 종말론의 핵심은 하나님은 자신의 역동적인 나라 즉 역동적인 왕권(kingship)을 새 언약의 기간 동안 이루어 가신다. 그 방법은 교회의 충성이며,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 때이다. 우리가 계시록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계시록의 언약의 중심성을 더욱 잘 알게 된다. 고난 중에서도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교회는 활동해야 한다.

3. 계시록의 개혁주의적 간본문적 읽기

계시록 안에 구약의 직접 인용은 하나도 없지만, 암시나 간접 인용은 수백 개에 달한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관련본문과 계시록의 본문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간본문적 해석과 계시록의 반복 이론의 상관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반복이론(recapitulation theory)은 3세기말의 Pettau의 Victorinus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일곱 대접은 일곱 나팔을 시간적으로 따르지 않고, 대신 더 강한 어조로 같은 사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에 주석가들은 이 이론을 더 심화 발전시켜 일곱 인의 내용을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이 세밀하면서도 더 강한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약간 다른 각도에서 내용을 강화하는 경우가 많음에 주목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현 공식(theophany formula, 4:5; 8:5; 11:19; 16:18, 21)과 마지막 전투 주제(the last battle motif, 19:17-21; 20:7-9)도 이런 반복 이론으로 설명되어 왔다. 따라서 반복이론에 반대되는 연대기적 진행(chronological progression)의 이론을 도식화 시켜보면 아래와 같다(참고. Jauhiainen, 2003:544-545).

Marko Jauhiainen은 6-7번째 인들과 7번째 나팔 그리고 7번째 대접에서 연대기적인 진행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본다. 대신 주로 1-6번째 심판에서는 반복 이론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고 보기에 반복과 연대기적 이론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지만 후자를 더 강조한다(2003:559). 하지만 종종 그는 미래론 혹은 이상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기에, 1세기 문맥을 간과하거나 계시록의 계시사적인 ‘이미’(already)의 측면을 간과하는 한계성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반복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 전통적인 해석 주창자들이 있는데 바로 미래론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계시록은 미래의 청사진을 밝히 보여주는 것이기에 시간적인 진행의 흐름이 강조된다. 하지만 계시록 안의 간본문적인 연관성(intratextual relevance)을 살펴보면 비록 표현상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내용상 일치하는 부분이 대부분이기에 반복이론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참고로, 요한계시록을 처음으로 간본문적 관점에서 해석한 영국의 Steve Moyise교수의 홈페이지(www.ucc.ac.uk/theology/html/Moyise)를 참고하라.

나오면서

이상적, 미래적, 세상-교회 역사적 해석은 일단 요한과 7교회의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실수가 있기에 그들을 향한 적합성이 문제가 된다. 적용이지 실제적인 석의는 아니다. 따라서 부분적 과거론이 계시록 해석을 위해 중요하고 바람직하다. 철저 과거론은 이단적인 요소 특히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중 미래적인 측면을 무시한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계시록을 해석하다 보니 이단적인 사상을 가지게 되어 비난을 받는다.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은 여기이고 미래의 몸의 부활도 없고 세상의 악에 대한 더 이상의 심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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