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경건, 그리고 칭의와 성화'
김재성 교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두 가지 분명한 성취동기가 발생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면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열망으로 넘치는 것이다. 일부 한국 기독교 교회에서는 신령하고 거룩한 삶에의 모든 노력과 수고를 과소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칼빈에게서 찾아보고자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과 의무가 따른다.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게 되고, 분명히 세속과는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을 따라서 생활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거역하면서 율법을 거부하던 자들과는 다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은 내적으로 가지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대한 확신과 함께, 십계명에 따라서 진실하게 살려는 거룩함이 수반된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잘 소개한 신학자가 칼빈인데,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의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자세히 살펴서 제시한 바 있다. Arthur C. Custance, The Sovereignty of God (Philipsburg: Presbyterian & Reformed, 1979), 67-78, 칼빈은 중세의 잘못된 선행론을 교정하고자,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서 성도들을 의롭다 하시되, 그들의 인격과 그들의 행위 모두 다를 의롭다고 하시는 ‘이중적 의로움’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은 어떻게 죄인이 구원을 얻는가에 대한 질문의 해답에 관한 것이다. 오직 은혜로만 (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만의 공로에 의해서 (solo Christo), 그리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sola fide) 죄인이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개신교회의 답변이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러한 은혜들 위에다가 인간의 선행을 추가해야하고, 행위에 의해서 은총이 입증되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이러한 구원론의 결정적 근거로서 교회 회의와 주교의 권위를 통해서 행사되는 교회의 권한에서 찾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를 확정적인 원리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1) 믿음으로 얻는 두 가지 축복: 칭의와 회개
이러한 기초적인 근거 위에서 구원에 관한 교리는 칼빈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칼빈은 루터처럼 ‘믿음’과 ‘칭의’에 대해서 각각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기독교강요」제 3권에서 칼빈은 맨 먼저 믿음을 다루면서 성령이 최초로 사용하는 축복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칭의를 가장 길게 다루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조항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루터와의 차이점이 돋보인다. 루터는 값없이 주시는 칭의를 훼손시키지 아니하려고 기독교 신자가 순종의 생활을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동기 제시를 분명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중적 은혜”(duplex gratia Dei)라는 용어로서 믿음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게 된 축복을 설명하였다: 첫째 은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그리스도의 순결함을 통해서 이룩한다는 것이다. 둘째 은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여 흠 없고 점도 없이 생활의 거룩함을 이루어간다. Institutes, III.xi.1.
인간 차원에서 행하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성화’‘선행’‘회개’‘인간의 노력’등이요, 다른 하나의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의로움이라고 설명하였다. Cornelis P. Venema, "The 'Twofold Knowledge of God' and the Structure of Calvin's Theology," Mid-America Journal of Theology 4 (1988): 156-82. 따라서 칼빈의 신학에서는 값싼 은총이란 있을 수 없다. 철저히 피 흘리기까지 인간은 은총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입으로만 믿는 ‘낙천적 맹신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칼빈은 두 가지 은혜를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하였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서 믿는 자들을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시는 은택이다. Institutes, III.xi.2.
중생 (혹은 회개 혹은 성화) 는 성령에 의해서 진행되는 일상의 기독교 신자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거룩하게 하심과 순종 가운데서 새롭게 되어진다. 그리고 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다. Institutes, III.iii.5, 9. 칼빈은 회개를 중생으로 해석하였다.
칼빈이 각각 성화와 칭의를 각각 매우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규정 한다: 회개는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이키는 것이요, 그분에게 진정하고도 순수한 두려움으로 인하여서 돌이키는 것이다. 이는 육체와 옛사람의 죽임과 성령으로 인한 살려냄으로 구성되어진다. Institutes, III.iii.5.
따라서 우리는 칭의를 단순하게 받아들이심이라고 정의하는 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들로 그의 호의 가운데서 받아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에는 죄의 제거와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로 구성되어졌다고 말한다. Institutes, III.xi.2.
칼빈의 칭의론에서 주목할 사실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전가 받는다는 교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의의 전가 (imputation)라고 하는 것은 로마서 5:12-19절에 나오는 아담의 원죄를 전가 받는다는 것과 유사한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다. Instittues, III.iv.30; III.xi.23; III.xiv.12; III.xv.4. John Murray, The Imputation of Adam's Sin (Grand Rapids: Eerdmans, 1959).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이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움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전가에 의하여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의롭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얻는 의라고 하는 것은 그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자신의 은혜 안으로 우리를 영접하심이다. 죄 사함이라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전가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주님의 의로우심의 전가를 가져오는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전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두 가지 측면이다. 두 가지 모두 다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교리로부터 얻게 되는 결론적인 교훈은 죄 사함을 받은 후에라도 결코 우리는 실제로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칭의를 수반하고 있는 성화, 아니면 적어도 칭의와 함께 시작하는 성화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먼저 성화를 다루고 난 후 칭의를 다루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칭의론을 가장 많이 다루었지만, 먼저 회개를 소개하여야만 인간의 행위라는 것이 결코 완전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서만 칭의가 주어진다는 점을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칭의는 단순히 용서하는 것으로서, 그 이전에 회개에 대해서 설명하여 줌으로서 칭의와 성도의 선행으로 다시 전개시켜 나가려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칼빈을 ‘성화의 신학자’로 만들고, 루터는 ‘칭의의 신학자’로 해석하는 칼 바르트의 이중화법은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칼빈은 성화를 먼저 다룸으로서 칭의를 손상시킬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화는 일생동안 진행되어질 일이지만 결국에는 완전함에 이룰 수 없어서 이것으로는 하나님의 기대치를 만족할 수 없으므로, 그저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것임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칭의와 회개의 삶은 각각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들을 무작정 섞어놓아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각각 명확한 개념규정을 시도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각각의 은택들에 대한 명쾌한 이해를 해야만 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양성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이 중요한 은택들을 혼합시켜서는 안 된다.
둘째로, 그렇다고 해서 성화와 칭의를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칼빈은 성화 없이는 칭의도 없다고 강조한다. 기독신자의 노력과 순종과 회개와 거룩한 삶이 없으면 칭의란 있을 수 없다. 개혁주의자들이 칭의론 만을 붙잡고 있는 관계로, 성화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난은 잘못된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마치 손바닥의 양면과 같다. 두 가지는 결코 혼합시키거나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었다 (고전 1:30).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통 가운데 있는 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받는다.
셋째, 회개와 선행 등의 생활이 결코 칭의를 얻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칭의를 얻기 위해서 성화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성화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의 삶을 통해서 열매로 나타나야만 한다. 기독교 신자의 삶은 감사와 은혜를 표현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 두려움으로 억지로 거룩함을 따라간다거나, 의무감에서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무게중심이 칭의론 으로 옮겨 가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이미 칼빈의 칭의론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성화를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김재성, 「칼빈과 개혁신학의 기초」제 5장 “신앙의 요체: 칼빈의 칭의론과 트렌트 종교회의”, 177-207.
(2) 경건한 삶: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
경건은 칼빈의 생애와 신학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경건(pietas)이란 “하나님의 은혜들을 아는 지식이 포함된 그분의 사랑과 결합된 존경심이다”고 칼빈은 정의하였다. Institutes, I.ii.1.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두려움을 포함하는데, 율법에 언급된 합당한 예배를 수행하는 가운데 기꺼이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건은 믿음, 두려움, 존경심, 지식 등이 함께 결부되어져 있다. 여기에 표현되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공포심에 사로잡힌 자들의 도피심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려는 열망이다.
그런데 칼빈은 경건의 내부적인 의미라는 것은 반드시 공적인 요소들로 나타나야 하는데 (officia pietatis) 그 핵심은 주일성수와 예배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형식적인 예배만으로 그친다면 거짓 경건이라고 질타하였다. Institutes, I.iv.4. F. L. Battles, The Piety of John Calvin (Grand Rapids: Baker, 1978), 13-26.
칼빈은 성령의 사역을 특징짓는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로,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시킬 뿐만 아니라 교통케 하는데, 그 과정은 옛 사람을 죽이고 (mortificatio) 새 사람을 소생시키는 일 (vivificatio), 두 가지를 양면적으로 성사시키고 있다고 정리하였다. Institutes, III.viii.1.
그리고 이러한 온갖 종류의 고통과 핍박을 이기면서 십자가를 지는 삶은 궁극적으로 부활의 소생을 향한 종말신앙에서 나온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우리 성도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성도들이 거룩한 생활을 유지하도록 교통하시면서 도움을 준다. R. Tudor Jones, "Union with Christ: the Existential Nerve of Puritan Piety," Tyndale Bulletin 41, No. 2 (1990): 186-208.
주님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칼빈은 너무나 간략하면서도 선명하게 잘 기술하였다. 그의 「기독교강요」제 3권 6장에서 10장 사이에 들어있는데,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중생의 목표는,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자들의 순종 사이 에 하나의 완벽한 조화와 일치를 성도들의 생활 속에서 입증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자녀로서 받아들여졌다는 양자됨을 확증하는 것이다. Institutes, III.vi.1.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인간의 완전한 순종이 완벽하게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관계되어진다. 성도들은 확실하게 순종하면서 선한 생활을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율법에서 가르쳐진 교훈들을 따라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모범을 보여준 삶을 따라가야만 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이런 기독교인의 생활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명령이다. 성도들은 자신의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를 받고자 하는 진실된 열망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라면 마땅히 인간의 지혜와 욕망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칼빈은 기독교 신자가 가져야할 생활의 좌우명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self-denial)이라고 명명 하였다. 「기독교강요」제 3권 제 7장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다루고, 8장에서는 자기 부인의 한 부분으로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다룬다. Institutes, III.vii. "ubi de abnegatione nostri" (The Sum of the Christian Life: the Denial of Ourselves). John Leith, John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89), 38-45.
그는 마태복음 16장 24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에 주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양떼들을 돌아보시고, 간섭하여 주시는 것을 알면 알수록, 칼빈은 사람의 절망적인 죄악의 실상을 철저하게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자긍심을 부정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일 진대, 과연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이성과 의지를 신뢰하던 습성을 벗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바른 동기를 가지고 살아야 하며, 마음속에 있는 헛된 야심과 더러운 생각을 떨쳐야만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 땅위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일상생활에서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누구에게나 허용하시는 섭리 가운데서 벌어지는 일이다. 고난에 대한 칼빈의 확신은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모두 다 현재 세상의 어려움들과 불행한 일들을 같이 나누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들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죄악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가지는 단 하나의 충고는 하나님의 진노이며, 아담의 파멸 속에서 우리가 가진 것과 그것들의 결과는 영혼을 망치는 일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런 고난들로 인하여서 주님에게 더욱 다가가게 되며, 그들의 몸속에 주님의 죽으심을 짊어지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 속에 어느 날 입증되어지게 만들어질 것이다.
나는 지금 고통당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하여 짊어져야만 하는 것이다……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지 않는 한, 베드로 전서 4:13절에서 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어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자기와 함께 임재해 계셨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의 위로함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무너뜨릴만한 병들로 인하여서도 정복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Calvin's Commentary on II Corinthians 1:5.
이것은 칼빈의 고난의 신학이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이론적 설명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어떻게 그의 생애에 나타났는가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자신의 건강문제로, 또한 가정문제에서도 많은 고난을 이겨내야만 했다. 1541년, 남편을 여읜 프랑스 출신의 아내와 결혼하여 함께 살았던 생활은 9년간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미 첫 번째 결혼생활에서 두 자녀가 있었던 이들레 부르는 칼빈과 재혼하여 아이를 낳으려다 병을 얻었다. 그래서 칼빈의 내조자로서 큰 활동을 하지 못하고, 1549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칼빈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는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고 말았다. 아내가 첫 번째 결혼 생활에서 얻은 딸이 열병으로 고생하여서 애간장을 녹여야만 했었다.
3년간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1541년 제네바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될 때에, 칼빈이 성도들에게 보낸 공개적인 서한에서 자신을 드리고자 원하였다. 이 때의 칼빈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려는 순교자적인 결심을 하고, 독일과 프랑스 접경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 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좌우명과 같은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라는 말을 담아서 자신을 향해 그토록 간절하게 제네바로 돌아가 개혁 작업을 계속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기욤 파렐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서울: 이레서원, 2001), 서문과 제 10장을 참고할 것.
1538년 4월에 추방명령을 받고 불명예스럽게 떠나야 했던 제네바는 불과 3년여의 종교개혁이 정립되지 못하여 신학적으로 큰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 것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신 신학적인 분별력은 너무나 정확하고 명료한 대답이었다.
칼빈은 자신의 고향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의 시대를 경험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뇌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1555년 처음으로 그가 사랑하던 조국 프랑스 여러 지방에 (파리, 모, 쁘아띠에, 부르쥬, 오를레앙, 뚤르즈, 르네즈, 리용 등) 칼빈주의적인 개혁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잇단 국왕들의 서거와 암투가 지속되는 프랑스 궁전의 불안함에서 비롯된 개신교 박해로 인해서 긴박한 시간들을 맞이해야만 했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원했던 이런 건전한 개혁 교회의 건설에서 승리하지 못하였었다. 아직도 로마 카톨릭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였고, 일부는 조직적이요 의식적으로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인격적으로 감화력을 발휘한 시기는 1555년부터 1564년 죽을 때까지 마지막 10년간이었다. 그 때는 아무도 감히 공개적으로 이 위대한 개혁자에게 대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정신과 내용과 하나님을 향한 진심을 이해하게 만들고,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쟁과 대적자들과 싸워야만 했다. 내적으로는 시의회를 장악하려는 아미 뻬렝과의 싸움이 가장 어려웠었고, 신학적으로는 세르베투스의 처형이라는 극한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빈의 신학은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편협한 대중적 이미지만으로 성급한 판단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외적인 모습은 욥의 고통스러운 시련기와 매우 유사하다. 그의 얼굴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수척해졌으며, 숨 쉬는 것도 자유스럽지 못했으며, 등은 굽었고, 몸에는 고열로 인한 고통이 역력하였다. 편두통, 발열, 신장결석, 치질, 폐결핵 등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야만 했었기에 외적인 모습도 역시 욥의 경우와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 욥이야말로 칼빈이 가장 잘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었던 주제였다. 오직 죽음만이 칼빈으로 하여금 이런 고통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칼빈주의는 하나의 훈련과목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주의는 금욕의 최정상까지, 매우 견디기 어려운 지점까지 끌어올리는 제자 됨의 연단과정을 중시한다.
칼빈주의를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된다. 칼빈주의는 ‘제네바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칼빈의 사상과 신학은 칼빈주의 속에 용해되어 버렸다. 프랑스의 종교적 부산물이 제네바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었고,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정복해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다. Bernard Cottret, Calvin: A Biographie, (1995), tr. M. Wallace McDonald (Grand Rapids: Eerdmans, 2000), 239.
칼빈주의라는 체계는 이제 칼빈이라는 인물을 한 개인에 불과하게 만들어 버렸고, 하나의 거대한 성경적 교리체계, 마치 이데올로기처럼 느껴지는 사상체계로 발전하였으며, 심지어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종교처럼 인식되어질 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문화로서 드러나게 되었다. "칼빈주의“라는 말은 함부르그의 루터파 목회자 요아킴 베스트팔이 성만찬에 대한 설명에서 루터파와 구별되는 칼빈의 견해에 대해서 별로 달갑지 않은 별명을 붙이려고 처음 사용하였다. 칼빈은 이 용어로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려는 자들의 시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1552년 ‘칼빈주의’라는 용어의 출현과 칼빈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개혁신학의 광맥」(서울: 이레서원, 2001), 32-33을 참고할 것. 라틴어 판 1563년 예레미야 주석 서문에서 쓴 프레데릭에 대한 헌사 (1565년 프랑스어판): “They find no great insult to attach to us... than this word 'Calvinism,' but it is not hard to conjecture where such a mortal hate as they have for me to comes from."
칼빈은 한 시대에 자신의 임무를 마쳤고, 그것은 네델란드 정통 신학자들과 영국의 퓨리턴들과 뉴잉글랜드 개척자들의 손으로 빚어지면서 칼빈주의라는 독특한 신학체계가 형성되어졌다.
(3) 종말론적 구조
오늘의 삶은 미래의 소망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로마의 박해와 어려움에 직면했던 성도들을 향해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격려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었던 모든 성도들이 넘치는 소망의 하나님에 대한 기대치로 가득하였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교통하심을 이루어 가고 있는 성령의 사역은 종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주님 안에서 이미 단번에 완성된 구원 (already)은 현재 성도들의 모든 경험에서 모범적인 모델로 제시되어서 따라가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므로 (not yet) 마지막 최종적인 완성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게 한다. 이것은 성령의 임재와 권능으로 믿는 자에게 내주하는 성령이 하시는 지속적이 사역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죽을 몸을 입고 있으면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 가운데서 살아간다 (고전 6:19). 미래에 주님의 재림이 다가오면 죽은 몸이 다시 일어나고 능력과 권능 가운데서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고전 15:42-29).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미래의 생명을 맛보며 살아간다.
믿는 자들의 마음에 있어야할 종말론적인 신앙은 이미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약속과 언약을 통해서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그 백성들 가운데 친히 머물러 계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머물러 임재 하였다. 하지만 성령의 내주하심이 어떤 구체적 심리현상을 동반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범위까지 깨달아 알도록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점이다.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9:29). 출애굽 이야기 속에서, 구약의 여러 왕조시대를 거치면서, 그리고 오늘의 성도들까지도 미래와 연결된 언약의 옛 약속들과 새 약속을 맛보고 살고 있다. 이미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나타났고, 마침내 그의 재림의 날에 최종적으로 완전한 실체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말론에 관한 논의에서 성령의 역사 보다는 대체로 정통신학자들의 저술들을 파헤치면서 그들의 신학방법론에서 담긴 스콜라적인 요소들, 기독론에서 영원한 작정의 문제, 칭의와 예정과 보전에 관한 구원론적 질문들은 많이 다루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과 후기 정통신학자들의 종말관에 대해서는 연구가 적었다. 종말을 인식하고 개신교 신앙인들이 좀 더 예민하게 대처하게 되기까지는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16세기 성도들이 가졌던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하여서 그들의 신앙 속에서는 종말론적 요소들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일제하에서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는 데에도 종말에 대한 신앙이 중요하였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므로 종말론적 동기들을 밝혀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의 종말론을 검토하기 위해서 일찍이 하인리히 퀴스토르프가 「칼빈의 종말론」이란 글을 발표하였다. Heinrich Quistorp, Die letzten Dinge im Zeugnis Calvins : Calvins Eschatologie(Gutersloh : C. Bertelsmann, 1941); English transtation,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tr. by Harold Knight (London, Lutterworth Press, 1955).
그 후로 칼빈의 종말론에 대한 연구들은 단편의 논문에 그쳤고, 본격적인 단행본으로 나온 종합적 연구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R. H. Bremmer,. "Enkele karakteristieke trekken van Calvijn's eschatologie," Gereformeerd Theologisch Tijdschrift 44 (1943): 65-96. Thomas Forsyth Torrance, “The eschatology of hope: John Calvin,”in Kingdom and Church ( Edinburgh: Oliver and Boyd, 1956), pp. 90-164. Erhard Kunz, “Die Eschatologie Johannes Calvins,”in Handbuch der Dogmengeschichte. Band IV. Faszikel 7c Protestantische Eschatologie von der Reformation bis zur Aufklarung (Freiburg: Herder, 1980), pp. 31-41. Richard A. Muller, “Christ in the Eschaton: Calvin and Moltmann on the Duration of the Munus Regium,”Harvard Theological Review 74 (1981): 31-59. M. A. van den Berg, “Op Weg naar het Vaderland: De eschatologie bij Calvijn,”Theologia Reformata Vol. 39, No. 4, (1996): 265-287. Willem Balke, "Some characteristics of Calvin's eschatology," in Christian Hope in Context, Vol. I. (Zoetermeer, Netherlands: Uitgeverij Meinema, 2001), pp. 30-64.
노만 콘은 그의 저서, 「천년왕국의 추구」에서 16세기 초반에 주목할 만한 종말론적 운동들이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Norman Cohn,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때부터 (1517년) 개신교를 인정하게 된 30년 전쟁의 종결 (1618-1648)에 이르기까지, 루터교회 내에서 신학자들과 성도들 사이에 종말론적 신앙의 발전이 매우 널리 퍼져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Robin Bruce Barnes, Prophecy and Gnosis: Apocalypticism in the Wake of the Lutheran Reformation (Stand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8). I. John Hesselink, "The Millennium in the Reformed Tradition," Reformed Review 52, No. 2 (1999): 97-125. William James Grier, "The Reformers and the Millennium," in The momentous event: a discussion of scripture teaching on the second advent and questions related thereto (Belfast: Evangelical Book Shop, 1959), pp. 23-25.
하지만, 16세기 후반 칼빈주의 정통신학자들의 종말론에 대해서 추적한 연구들은 다른 주제에 비하면 아주 적은 실정이다. 특히 영어권에서 더 관심이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제3세대의 개혁신학자들까지 내려오면서 결코 소홀히 취급한 주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우 좁은 관점에서 극소수만을 취급하여 균형을 잃어버린 연구도 있었다. James Perry Martin, “The last Judgement in Protestant Orthodoxy”in The Last Judgement: In Protestant Theology from Orthodoxy to Ritschl (Grand Rapids: Eerdmans, 1963), pp. 1-27.
마아틴의 입장은 정통신학자들의 역사는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으로부터 현저히 다른 역사, 즉 원래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전형을 왜곡한 역사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앞장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하인리히 헤페의 '핵심교리'라는 연구 방법은 대단히 잘못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아틴은 그 방식을 따라서 개신교 정통주의 스콜라신학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종말론은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핵심교리가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 John L. Farthing, "Christ and Eschaton: The Reformed Eschatology of Jerome Zanci," in Later Calvinism, ed. W. Fred Graham, Sixteenth Century Essays and Studies, vol. XXII (Kirksville: Sixteenth Century Journal Publishers, 1994), pp. 334-5.
종말론이란, 마아틴에 따르면,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걸쳐서 지엽적인 것으로 취급을 받았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고 보았다. 오히려 성경해석의 역사, 해석학이 보다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정통신학자들의 종말론을 파헤치기 위해서 성경해석부분을 깊이 살펴야 하는데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개신교 스콜라 정통신학자들은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원칙을 잃어버리고, 마치 로마 카톨릭처럼 성경과 전통을 함께 붙잡고 있는 듯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마아틴이 정통신학을 비판하는 핵심은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원리와 함께 개신교 종교개혁 초기 지도자들이 가졌던 그리스도 중심적인 이해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의 후예들이 너무나 지나치게 스콜라적 개념을 내세우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과 형이상학을 채택하였다는 것, 기독교 공동체의 사회적이며 연합된 희망을 추구하기 보다는 개인주의적으로 흐르고 말았다는 점, 타락전 선택설과 같은 엄격한 작정교리에 집착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역사의 우연성이나 인간성 같은 주제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색과 영원의 개념에 매료된 나머지 함몰되어 버렸다”고 하였다. Ibid., p. 6: "the contingencies of history and of personality were removed in favor of a history of eternal ideas or thoughts of God."
리챠드 뮬러 교수는 정통신학에 대한 비판적 주장에 대해서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였다. 개혁주의 종말론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서로 공감할 수 없는 다른 전제에 근거하여 이론적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Richard A. Muller, Christ and the Decree (Durham, N.C.: Labyrinth, 1986); idem,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Grand Rapdis: Eerdmans, 1988).
걸출한 종교개혁의 사학자 하이코 오버만 박사는 1990년 미국 칼빈대학의 칼빈 연구소에서 개최된 ‘세계 칼빈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칼빈의 초기 신학적 발전과정을 검토하면서 그의 초기 저술 속에 담긴 종말론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Heiko A. Oberman, "Initia Calvini: The matrix of Calvin's Reformation," Akademie van Wetenschappen Mededelingen: Afdeling Letterkunde Vol. 54, No. 4 (1991): 106-47.
칼빈은 평생을 난민이자 디아스포라 (흩어진 자들)의 인식을 가지고 수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환경적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종말신앙에서 나오는 경건과 거룩함에의 열망이었다고 하여야 더 옳다. 칼빈을 비롯한 16세기 성도들의 개인적 형편은 분명히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말신앙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에서 새로운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지혜와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 J. H. Van Wyk, “John Calvin on the kingdom of God and eschatology,”In Die Skriflig Vol. 35, No. 2, June 2001, 191-205. P. F. Theron, “The Kingdom of God and the Theology of Calvin: Response to the paper of Prof. J. H. van Wyk”In Die Skriflig Vol. 35, No. 2, June 2001, 207-213.
이처럼 칼빈을 비롯하여 박해받던 옛 성도들이 종말론이 어떻게 발전했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4)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의 영광을 위하여
기독교 신자가 가지야 할 바른 신앙의 출발점과 목표점을 연결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먼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견고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와 성취동기를 정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바로 성령의 교통 가운데 사는 자들은 이와 같은 구체적인 삶의 동기를 갖게 된다. 칼빈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분명히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그의 전체적인 신학의 정립과 목회활동 그리고 설교 중심의 예배생활은 이 목표와 성취동기에 집약되었다.
바른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아야 하며, 말장난이나, 의심이나,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우리의 생활을 변혁시켜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소망을 가지며,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서 우리가 행동하기를 알게 한다. 칼빈전집 54:292.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ed. G. Baum, E. Cuniz, E. Reuss. 59 Volumes (Corpus Reformatorum). (Brunswick and Berlin, 1863-1900).
칼빈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원하였고, 그 원리들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앞에 인용한 칼빈의 디모데후서 3:16절에 대한 설교문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던져 준다. 칼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가르치는 믿음의 원리에 대한 통일성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모두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한 것은 아니다. 칼빈이 성경에서 주된 관심사로 삼은 것은 통일성이었다. 다니엘서, 신명기서, 미가서 혹은 갈라디아서 등 어디에 대해서 설교하든지, 신학적인 설명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저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한 사람의 저자인 성령님 때문인데, 그분은 항상 자신에게 머무르고 계신다.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의 말씀 또는 하나뿐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통일된 메시지의 본질이 무엇인가? 칼빈은 “믿음”“교리”“복음”“메시지”(message, doctrine, the Gospel, the Faith) 등이라고 불렀다. 칼빈은 용어들은 거의 같은 동의어로 사용하여 ‘바른 교훈’을 뜻하는 말이다. 목회 서신에서는, “바른 교훈”의 구체적인 설명과 요구가 들어있으며, 목회 사역에 대한 지침이 제시되어 있다. 바른 교훈은 성경의 메시지가 지닌 특징이었다. 우리는 칼빈이 신조를 신학적인 구성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는 이런 것을 해석의 의도적인 원칙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는 때때로 설명할 때 필요하면 그 때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경적 메세지, 교리, 또는 복음, 믿음의 개요를 제시하여 주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신조 속에서 이미 압축된 바 있다. 1536년판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이제 믿음의 본질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소위 사도적인 상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인데, 그 속에 간략하게 개요가 축약되어있고, 소위 보편적인 교회들이 동의하는 믿음의 대략이기도 하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Grand Rapids: Eerdmans, 1986).
그러나 신조 그 자체와 믿음의 대략이란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의 대략이요, 개요이다.
성경이 증거 하는 참된 교리의 원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는 일이다. 참된 교리의 원천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강요」 첫 구절에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인간을 아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제시된 참된 교리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칼빈은 “참된 교훈”과 “믿음”의 개요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하였다. 참된 교훈, 즉 믿음이란 우리의 하나님을 아주 구체적인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 분 안에서 전적으로 안식을 얻게 되어질 것이요, 우리가 그 분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외치는 것이요, 우리가 그 분께서 우리를 들어주실 것임을 의심하지 않게 되어질 것이요,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요, 우리에게 약속하셔서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구원에 관한 것이다. 칼빈전집 53:31.
디모데전서 1장5절,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의 믿음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안목은 그분에게만 전적으로 확고하게 고착되어져 있어야만 하며, 그를 떠나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왜냐면, 우리는 스스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른 교훈을 가져야 할 것을 칼빈은 거듭해서 강조하였다. 디모데전서 6장 3절, “만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참된 교리의 요약을 하자면, 인간에 대한 바른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 대한 바른 교리를 강조한다. 우리 안에는 비참함과 타락함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찾고 추구하여야 한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시와 방법에 따라야 한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한 것은, 우리가 그분이 주신 은혜를 굳게 붙잡는 일이다. 이로 인해서,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원이 되어지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며, 궁극적으로 하늘나라에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는데, 우리의 필요한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 오사 나눠주신 축복들로 인해서 부요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을 의지하는데 담대하여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올바로 다스려 나가도록 착수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이 섬길 자를 고안해 내지 않을 것이다. 칼빈전집 53:557.
칼빈이 강조하는 바른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사람을 바로 아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1:13절,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가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믿음이란 참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상상력이나 우상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우리 아버지로서 그분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에게 우리의 신뢰를 두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담대하게 부르고, 우리의 간구한 것들을 들으셨으리라고 의심치 않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참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된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요 구세주로 붙잡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확신케 되어질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참된 신뢰 가운데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만일 우리가 은총을 입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흠잡을 데 없이 순결하게 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칼빈전집 54:71.
칼빈이 이해한 복음의 핵심교리는 매우 단순한 원리를 지켜나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이 단순한 교리를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칼빈이 발견한 복음의 내용은 긍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과 인간에 대한 간략한 교리들은 모두 다 매우 긍정적이다. 칼빈의 인간론은 매우 우울하고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인간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교리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단지 “비참함과 타락함”의 상태와 우상숭배의 금지를 말할 때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가 알도록 하셨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이다. 이 주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내용에서 전체적으로 취급되어지고 있다. 인간에 대해서 말한 모든 부분도 역시 이 주제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엄격하게 말한다면 이 주제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특징들이 전체적으로 넘치는 행복감과 확신과 희망의 밝은 빛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 교리, 믿음 등은 칼빈에게 있어서 참으로 거대한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5) 성령이 머물러서 교통하심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갖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두 가지 열매 (칭의와 성화)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근거는 성령이 머물러 계시면서 성도와의 교통하심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하여 믿는 자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리스도인은 구속의 날을 위해서 인을 쳐 주신 성령을 근심케 하여서는 안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엡 4:30).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 속에서 유지되는 성도의 삶이 거룩을 향하여,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확고히 새로워진 지식을 유지하면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칼빈의 설명을 연결 지어 묶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성부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성자의 은혜에 의존하는 한편, 성령의 교통하심(koinonia) 가운데서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고후 13:13, 빌 2:1). 우리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기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이겨내는 능력을 성령의 교통하심에서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3-14)는 사실은 때문에 감격과 환희에 가득 차서 모든 난관을 이겨낼 수 있다.
성령의 구원론적 사역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n with Christ)라는 중요한 기초적 교리에 근거하여, 성령은 이제 지속적으로 내주하시면서 그리스도와의 교통 (communion with Christ)이라는 사역을 성취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하시면서 교통하셨듯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성령의 교통하심 속에 살아간다. 성령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상 함께 하였듯이,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동일한 권능이 함께 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의하여 아들의 형상을 본받은 자 되도록 성도들을 인도 하신다 (롬 8:29). 칼빈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되어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교통 이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였다. 이로 인하여서 성도들은 거룩함을 이루고자 노력한다.
끝맺는 말
개혁주의 칭의론과 성화에 관한 가르침을 좀 더 큰 안목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에, 바른 예배로 귀결되어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중심적인 번영의 신학을 정립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임을 절감하는 ‘송영의 신학’이 더욱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 헌신된 것이요, 모든 성도는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예배는 이런 일반적인 봉사행위 (general service)보다는 좀더 특수한 모임 (specific worship)으로 하나님의 특수한 임재 하에 이루어진다. 요한복음 1장 17절과 고린도후서 3장에 근거하여 볼 때에 예배는 특수한 헌신이다. 예배를 드리는 곳에서 듣게 되는 교회의 말씀 선포에는 주님의 임재가 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하나님의 면전에서의 두려움“을 강조하고 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G5Tb/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