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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주일에 대한 소고(* 글: 윤성목 목사)

윤성목목사(캐나다)

by 김경호 진실 2016. 3. 29. 09:31

본문

개혁신앙에 있어서 “오늘의 교회가 회복할 주일에 대한 성경적 원리와 주일성수 문제, 그 제언.“

Ⅰ.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작정하심 가운데 전능하신 그분의 말씀의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 하셨다. 삼위 하나님의 안식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셨으나, 동시에 그분의 창조와 삼위의 섭리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으나, 생명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스스로의 불신앙적 교만으로 인하여 타락하였고, 그 결과 인간의 상태는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으로 ‘참된 하나님의 안식’을 바랄 수도, 또한 누릴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비참이요, 절망적 상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하심의 영원한 구속의 경륜과 그의 속성상 범죄한 인간에게 복음을 주시고, 여전히 그의 인애와 긍휼의 은혜로 자신을 드러내시고(계시하심) 하나님의 자기백성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으로 초대 하셨다.(구약과 신약의 자기백성에 나타난 동일한 안식의 약속과 성취아래 있게 하심---> 언약의 통일성)

무엇보다도, 이러한 전제의 간단한 이해 속에서 본 소고의 논의는 주일에 대한 원리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다른 논의를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그리고 주일과 주일성수의 문제에 대한 내용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한다. 더욱이 이러한 이해를 위하여 주일(안식일의 계명)에 대한 ‘율법의 제3사용(영원한 도덕법)의 문제’를 먼저 간단히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보다 더 중요하기에, 본론에서는 율법의 이해에 대한 신약와 구약시대의 영원한 도덕법으로서 원리와 그 정신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한 이유는 주일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정당한 근거가 있는가? 그리고 일요일을 구별하여 지킴에 있어서 어떻게 지키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것인가? 에 대한 문제 제기에 기초적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본인은 개혁신앙의 틀 안에서 본 소고가 머물기를 원하기에 먼저, 칼빈에 있어서 주일과 주일성수 문제를 먼저 살피고(기독교 강요 초판(1536),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제166-184문/1542),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 그의 주석들...) 두 번째로는 런던의 청교도 목회자요, 지도자였으며 런던의 장로교회의 지역 총회의 첫 모임에서 의장으로 선택된 청교도의 장로교 유산을 물려준 ‘William Gouge'(1578.12.25-1653.12.12)의 주장(안식일의 도덕성의 근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방향,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의 증거, 안식일에 대한 이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동기들...)을 살핀 뒤에 세 번째는 개혁신앙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그 내용을 살피려고 한다.뿐만 아니라, 준비되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교회사에서 본 주일성수에 대한 흐름을 살펴보면서, 개혁신앙의 꽃을 활짝 피웠던 17세기의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 그리고 당시에 주일을 말살하려던 무리에 대한 그들의 철저한 저항정신을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주일성수에 대한 제반 사항에 대한 문제점들과 그 문제들의 회복을 위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의 원리 안에서 제언을 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내용들을 일별하게 되었을 때에, 기대해 보는 결과는 기독교라고 하면서도 구약을 근거로 해서 굳이 토요일을 자기들의 안식일로 지키고자 하는 부류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가할 수가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일요일을 구별한다고 하면서도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는 부류와 그 반대로 지나치게 은혜의 시대라는 자유 안에서 율법의 영원한 도덕법의 정신을 망각한 채 방종하는 부류에 대하여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고찰에 근거하여 주일에 대한 보다 더 정당하고 바람직한 관점을 제시 할 수가 있으며, 그 관점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거나 시대의 사조와 주변 상황과 환경적 변화의 요인들 속에서도 이에 요동함이 없이 정당하게 주일을 구별하여 지켜갈 수 있으리라고 소원하며 기대해 보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소고를 준비하면서도 주일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점 앞에서 깊은 고민과 함께 여전히 우리의 부패함과 무능함을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진리의 정신 앞에 우리의 부패함과 연약을 어떻게 합리화 할 수가 있겠는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의 정신을 인간의 눈높이로 낮추어 설명되고 해석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진리로 역사 하시며, 진리의 내용을 진리의 영께서 조명하실 때만이 즉, 그분의 시대와 교회를 향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실 때에 주의 성도는 ‘그 시대에도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의 정신과 원리’에 서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소고를 대할 때, 많은 연구의 준비됨과 고민의 흔적이 충분히 없는 부실함에 대해서 이해를 바랄 뿐이다.

Ⅱ. 본론

1. 율법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도덕법(십계명)으로서 율법의 설명

① 율법의 의미/ ‘율법’의 문제는 오래된 문제이며, 동일한 것의 다양한 문제들로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경의 통일성 문제이며, 언약의 문제이고, 칭의의 문제이며, 또한 복음과의 문제들로 있었다. 이런 것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계시관”의 차이에 있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은 신론적으로 생각하고, 루터주의 그리스도인은 인간론적으로 생각한다. 개혁주의자는 역사안에 머물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의지까지 가는 것이고, 루터주의자는 구원사로부터 자신을 세운다.” 바빙크는 이러한 개별의 차이는 단순한 것에 머물지 않고 근본적인 것과 뗄수 없음을 말한다. 루터주의는 근원적으로 영지주의적 말시온의 교훈으로 올라가 그곳에 서 만나게 된다. 그들의 방식은 율법과 복음의 분리에 있고, 긴장과 대립으로 어느 한 쪽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루터는 교회의 규례들이 구원의 유효한 수단들이 되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떤 힘이나 그들의 집례하는 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축복과 그들의 믿음으로 받는 그들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있다는 일치된 종교개혁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오직 의식의 수행에 의해서 온다는 사실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 단순히 루터의 생각에는 카톨릭의 의식적인 부분에서 벗어나려는 것에 머문 형태로 있다. 그래서 율법의 문제를 복음과의 긴장관계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루터란 신학자인 멜랑히톤에게서 적극적으로 드러남)

그가 비록 율법을 통상적인 3구분(윤리적 계명(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으로 구분하였지만, 이 율법을 복음과 긴장관계로 설정하고 율법의 폐지를 주장하게 되었다. 특히 멜랑톤에 의하면 “율법 중 의식법만 폐지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완전한 가치가 없게 되어 이것은 노예 상태보다 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도 폐지됐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고 말한다.(율법 폐기론자의 주장의 측면)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또 다른 형태로 잘못된 극단이 있는데 이것은 복음과 율법의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서 “율법주의”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율법 폐기론에 대항한 오해의 또 다른 율법주의의 한 측면)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칼빈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어디에 있었는지 그의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② 율법의 목적과 기능, 그리고 율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 율법의 목적 /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도덕율을 율법 자체의 결정적인 요소로 여겼다. 칼빈이 생각한 도덕율은 의식법을 제외한 모세의 법의 대부분을 도덕법으로 보았고 이모든 것이 십계명안에 포괄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것을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과 민족을 위한 “참되고 영원한 의의 규범” 으로 정의 한다.그가 생각하는 ‘율법’은 1)모세의 종교 전체와 2)선민에게 특별히 계시된 도덕법(주로 십계명) 3)각종 민사법과 재판법과 의식법으로 보았는데, 특히 이 가운데 도덕법은 “의의 진정하고 영원한 원칙”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뜻을 나타내시사 계시하신 은혜 베푸심은 그 율법으로 구약 백성들을 억제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마음을 준비하고, 갈망을 일으키며, 기대를 강화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적 삶을 살아갈 때에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 및 의식적 율법도 둘 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다. 만약 여기서 율법의 형식(구체적인 명령)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목적에서 분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의의 영원성의 기준이 파괴되며 허망한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하나의 그림자와 상징(예표)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사제도를 주신 것은 그들을 분주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더 높이 들어올리시려는 것이다.

* 율법의 기능/
율법의 세가지 기능은 1)하나님의 의를 나타냄과 동시에 인간의 불의를 교정시키고 이를 정죄한다. 또한 율법은 2)그들의 구원의 날까지 악인들의 죄 지을 생각을 단념시키고 중생하지 않은 자들을 견제한다. 3)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묵상과 순종을 권고한다.

사실 율법이 완전한 의를 가르치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를 얻을 수 있다.(율법을 주신 실제적 약속/ 영원한 안식이요, 영생이며, 구원의 완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전7장20절, 왕상8장46절, 롬1장) 율법 앞에서는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이유는 먼저 신자에게 있어서 그들이 주의 뜻의 성격을 매일 철저히 배우고 확고하게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바로 성도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고, 힘을 얻으며, 죄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율법에서 중보자를 인식했다고 말한다.(육체의 몸을 입고 중보자로 오시사 완전한 율법의 의의 충족이 되시고 율법의 마침(완성)이 되심을 바라봄.) 또한 불신자들을 억제하는 기능을 가진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을 허락 한다면 사회는 혼돈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불신자들이 조금이라도 의의 기준에 충족하거나 나아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악하고 부패한 생각과 허망한 욕심은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 담고 간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율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율법은 신자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권고해서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깨어나게 하여 자신들의 결함을 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의미는 율법의 철폐로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율법이 지금은 신자들에게 바른 길을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지금은 그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으며, 당황하게 만들어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며 파멸에 몰아 넣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마5:17)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서 당시에 오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주의 오심으로 인해서 율법의 준수가 조금이라도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의 교훈은 여전히 범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더욱이 가르치며, 경고하며, 책망하며, 시정함으로서 율법은 우리가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하며 준비시킨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은혜의 시대 요, 복음의 시대라는 구호 아래 무율법주의자로(율법폐기론자) 방종하는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 가운데 폐기된 것과 아직도 유효한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율법은 폐기되었는가?
율법 폐기론자들은 ‘폐기’를 말할 때 그 권위(율법의 영원한 의의 원리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담은 그분의 계시 정신)까지도 폐기하려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그의 공로에 힘입어(갈4:4-5)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권위는 우리에게(모든 사람에게) 조금도 감해지지 않고, 우리는 여전히 항상 경외심과 복종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 그것들의 효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바울은 의식들을 지키는 것은 무용하며 그것은 그림자요, 본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다(골2:17) 결국 구약의 제사들이 참된 속죄가 약속되었고 보증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헤의 사역을 바라보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구약의 의식들은 참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구약의 의식에 대해 정의하기를 그것은 “죄에 대한 대속보다 죄에 대한 고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히10:1; 레16:21) 특별히 골2:13-14절에서“...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에서 ‘의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는데, 여기서 증서를 칼빈은 의식들에 연관시킴으로서 그러한 것은 ‘자기 죄의 고백의 증서로서의 의식들’이 있어도, 거기서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의식들은 자기들의 유죄와 불결을 공개적으로 확인하는 증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신약의 백성들과 같이 은총에 참가했으나,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총에 참여한 것이지 의식을 통해서 받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 때에 사용한 의식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희미하게 만들었으므로, 바울 사도는 의식과 그리스도를 구별하였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시 의식 준수의 수준으로 그 의무를 얽어 매려고 할 때에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이러한 모양에 끌려 의식적 율법에 예속 된다면 그들은 어떤 위험에 도로 빠지게 될 것인가를 경고했던 것이다.(골2:16 이하) 바로 그 의식은 그리스도의 혜택을 무시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완수하신 후에 매일 준수하던 그 의식을(죄를 증거할 뿐이고 말소하는데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는 의식들) 철폐하신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율법의 의미에서 통상 율법을 의식법과 시민법, 도덕법으로 분류했는데 앞서 살펴 보았듯이 시민법의 일부와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은혜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약속하셨던 그 약속에 의지하여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망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의식법들의 시행이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율법의 본질은 그의 언약 백성의 삶의 규범이며, 구약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게 하는 역할을 하며,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치지 않고 견디게 하는 것이다.


2. 칼빈에 있어서 주일과 주일성수 문제

1) 기독교 강요 초판(1536)

칼빈에 의하면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째 돌판은 처음의 네 개의 계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고 있는 의무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즉 그분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무엇보다도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그 분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며 두려워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모든 소원과 필요를 그분 안에서만 구하는 것, 항상 그 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그 내용들이다. 칼빈에 의하면 안식일 준수는 경건과 하나님 예배 양자에 관련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첫 번째 돌판에 포함되어 있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심’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강조하시지 않았다.(출31:13-17) 더욱이 선지서에서 모든 종교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실 때 주님께서는 안식일이 더렵혀지고 모독당하고 침해되어 지켜지지 않고 거룩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마치 이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이 계명은 그림자였으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적 예배를 보여주기 위해 의식기간 중에 부과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그런고로 그림자의 빛이시오, 형상의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것이 모세 율법의 잔영처럼 폐기된 것은 바울이 갈4:8-11과 골2:16-17절에서 밝히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신앙이 율법의 교육하에서 표현되었던 그 의식들과 외적 제사는 폐기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주님께서 유대인들과 우리가 공히 영원토록 가지기를 원하셨던 ‘계명의 진리’를 보유하고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82-83면)

그럼 어떻게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가? 의 질문을 제기 하게 된다. 그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우리가 우리의 사악한 욕망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육신의 모든 깨끗치 못한 일들을 버릴 때 그것이 가능하다.’ 즉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모든 일들, 즉 우리의 현세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사악함이 우리의 본성 속에 조성되게 하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될 때 가능하다.(히3:7-19; 4:9; 사35:5-8; 58:13-14) 이것은 중생자의 끝임없는 시도이며, 이 안식일 준수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일들과 성향에 대해서 죽는다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만을 명상해야만 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방법(진리의 도리) 안에서만 이 명상을 실천해야 한다는 그의 신학의 핵심적 사항을 보게 된다. 또한 그에 의하면 “진정한 안식일”이란 마치 노예의 일과 같은 이러한 종류의 모든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며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양심에 평안과 평정을 부여해 주시는) 성령에 의해 우리가 다스림을 받는 것인데(이것은 한 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성도의 모든 삶의 지속적인 상징적 예표), 이 안식일에 대해 유대인의 안식일은 그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였다.(P83) 이 안식일은 성경에서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인 일곱째 날에 할당되었는데,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명하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며, 결국 7일을 상징과 예표로 허락하신 것은 영원한 안식을 알도록 함에 있으며(히브리서/ 모두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사모하는 날), 그것이 완전하고도 적절하게 거룩해지는 일은 일곱째 날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히4:1-11)을 말씀하면서, 그 일곱째 날은 사실상 최종적이며, 영원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직 성도인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들어갔지만 아직 그것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또한 매일 진보를 이루어 마침내 이사야의 말이 실현될 때 그것이 완성될 것이기에 이 말씀의 의미에는 안식 위에 안식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사66:23). 그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될 것이다.(고전15:28/ " I will be what I will be.") 바로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완성하신 천지 창조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제 칠일에 모든 일을 쉬심으로(창2:1-3) 하나님의 모범에 의해 우리 또한 우리의 일을 쉬고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으며, 우리 모두는 제 칠일의 이 안식을 열렬히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칼빈에 의하면 이러한 내용들이 ‘주일’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주일은 교회가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듣는 것과 성례의 시행을 위해 모이도록 제정한 것인데,(갈4:8-11; 골3:16)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이러한 일들에 한 마음으로 바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기계적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중지해야 하며 이생의 행위와 관계있는 모든 추구들을 중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P84) 또한 우리가 한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는 것은 종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특정한 날에 의식의 특별성을 부여하면 또 다시 주일날이 유대인의 의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법의 폐지에서 여전히 도덕법을 유지해야 하는 원리이다.) 공통의 국가를 위한 것으로서,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떤 규정된 날을 가지고 있는 것이 교회가 어떤 날에 함께 모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모든 일들이 질서를 따라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있는 지정된 날을 두는 것이 긴요하기 때문이다.(고전14:40) 이러한 경우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일을 그침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기나 하는 양 축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한 주 가운데 어느 날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유대주의적인 발상인데, 이 같은 행태는 여전히 날을 지키는 것을 유지하면서 유대인들을 약올리 위해 날을 바꾸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셈이 된다’고 하며, ‘이 같은 제도에 집착하여 날에 얽매이는 자들은 무식하고 육적인 안식일의 미신에 있어 유대인들을 세배 이상 능가하는 것이다’. 고 보았다.(여기서 조심스러운 것은 날에 대한 집착을 주의하라(유대주의적 의식의 날에 집착하는 것)는 것에서 이러한 경고를 하는 것이지, 사실은 매일 매순간 안식의 의미를 가지고 생활 할 것의 원리가 담겨져 있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완전한 날이 오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성과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여 주신 4계명안에 머물기를 원하신 도덕법의 정신을 보아야 한다!)

특별히 인간들 사이에서 공평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또 하나의 과제로서(출20:9-10) 비인간적인 주인들이 계속적으로 종들과 짐승들을 부려 먹음으로써 적절한 한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종들과 짐승들의 노동을 면제해 주는 것, 바로 칼빈은 이 일과 관계하여 오늘 우리도 사랑의 명령에 따라 공평에 대한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P84-85)고 밝히고 있다.
정리하면 칼빈의 제4계명의 해석은 ‘우리의 구원은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안식일은 이런 은총의 기념일로 주어진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기본적인 관계로서 우리 자신의 일들을 완전히 버리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영,육의 삶의 의미가 하나님께로만 오며,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목할 사항은 안식일은 의식적으로 외적으로 준수하는 차원 이상의 것이 있는데, 즉 모든 시대를 통하여 기독교인의 공동체(교회)가 지속적으로 예배를 위하여 지정된 날과 타인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에게 휴식을 주도록 명령되어진 날의 요소로서 지켜져야 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날은 영적인 휴식의 예표적 그림자로써 하늘의 율법을 주신 분께서 앞으로 누리게 될 참된 안식을 미리 맛보게 하는 날이라는 점을 든다. 더불어 칼빈은 주님만이 이날의 참된 완성이기에 따라서 구약 시대에 칠일 중에서 한 날을 준수함으로서 상징되어 왔던 것이 이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광된 부활의 새 생명으로 새 질서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질서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교회의 모임) 지켜져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2)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1542년)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 168문에서 안식일 준수는 낡은 율법의 의식의 하나로서 그 때문에 안식일 준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으로 답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이 완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의식을 두고 말한다면 안식일은 폐지되었다.(181) 그 이유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의 죽음의 힘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우리가 그의 부활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되었기 때문이다.(182) 그럼에도 이러한 의식 외에 이 계명이 가지는 세가지 의의는? 영적 안식과 교회의 규율, 그리고 종들의 위로를 위한 것으로 주어졌다고 밝힌다. 먼저, 영적 안식은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거룩한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모든 일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172) 이일을 위하여는 우리의 육을 죽여야 하는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우리 본성과 인연을 끊어야 한다.(173) 이 일은 일주일에 한 번만 행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행할 의무가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는 이미 그 일을 시작했으므로 전생애에 걸쳐 계속하여야 하기 때문이다.(174) 제176문에서는 “왜 다른 날이 아니고 제 칠일이 정해졌는가?” 라는 물음에서 제 칠일이 정해진 이유는 “칠이라는 수가 성경에서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그것이 영원을 나타내는데 적절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은 우리의 영적 안식이 현재 생활에서는 다만 시작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결코 완전하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고 답한다.

두 번째 계명의 의의로서 교회의 규율은 우리가 항상 날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을 생각해야 하는데도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특별히 대표적인 어떤 하루가 정해진 것을 가리킨다.(178) 이날(주일)에 지켜야 할 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로 교육을 받도록,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도록, 그리고 믿음과 종교의 증거를 나타내도록 교회 공동체로 같이 모이는 일이다.

마지막 의의는 종들의 위로를 위한 것인데, 타인의 권위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휴식을 주기 위한 것으로서 그것은 일반적인 규율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쉬는 날이 하루 있으면 각자가 그 밖의 시간에 성의를 내는 습관이 붙기 때문이다. 이 날에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공중기도와 성례전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회가 세운 질서를 우리가 준수하고, 성도들 사이에 있는 영적 규율에 위반하지 않는 일이다. 이 형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대단히 큰데,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이므로 그의 지배에 우리를 전적으로 맡기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을 버리는 것이다.(184)


3)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는 율법을 주신 목적을 밝히면서 도덕적, 의식적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점에서 중요함을 가르친다. 칼빈은 율법이 명령한 의식들을(의식들을 폐지한) 복음에 나타난 완벽하고 명백한 계시의 “예표” 또는 “전조”라고 보았으며, 이 예표설은 개혁파 신학의 거의 불변하는 특징이 되었다. 십계명에 관하여는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경고하는 말에 주의해야 하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의를 거저 전가해 주시며, 중생의 영으로 의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허사란 뜻이다.” 라고 말한다.(결국 이말은 모든 사람에게 명한 규범이지만 중생된 자만이 계명의 원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요일3:24; 4:13,21; 5:1-3))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 율법을 완수 할 수 없는데, 율법은 우리를 변명할 수 없게 만들어 절망에 빠뜨리며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약속된 생명을 받을 수 없고 , 순전한 저주로 떨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주신 것은 허사가 아니기에(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알리며, 거울과 같이 우리의 죄 많음을 밝히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도록 인도한다. 율법은 행악자들과 불신자들을 억제하는데,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며(실정적 도덕법의 원리) 중생치 않은 사람들을 억제한다. 그러나 율법은 주로 신자들을 훈계해서 선행을 하도록 촉구하기에 이런 면에서 신자에게 율법이 필요하며 신자를 위해서 율법을 전폐하려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도덕적 율법은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영적(문자보다 속뜻)으로 이해하며 해석해야 하는데, 율법은 강력한 말(극단의 말씀)을 사용함으로서 우리가 죄를 더욱 미워하도록 한다.


제4계명에 관한 것으로서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호나 일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명상하며,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으로 그 명상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초대 교부들은 이 계명을 예시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어느 하루를 외면적으로 지키는 일이 다른 상징들과 함께 폐기되었기 때문이다.(의식법의 철폐) 이 계명을 준수하는 세 가지 조건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제 칠일은 하늘 입법자께서 이스라엘에게 영적 휴식을 알리시는 방법이었으며, 이는 신자는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들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히 하나님의 행적을 명상하는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밖의 남의 권위 하에 있는 사람들과 종들에게 휴식하는 날을 주셔서 그들의 노고를 쉬게 하는 때가 있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안식일에서 영적 안식의 예시가 드러나며, 안식일은 한 표징으로서 이 표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줄을 알았어야 했던 것이다. 이 표징에는 외적인 표징과 내적인 실상 사이에 아주 긴밀한 일치가 나타나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일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쉬어야 하며(내면의 안식), 우리의 의지를 바쳐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맡겨야 하며, 우리의 모든 육적 욕망을 버려야 한다.(철저히 내면적인 안식을 항상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하는 것!) 특히, 제 칠일이라고 하여 굳이 이 수를 택한 것은 ‘영구성을 표시하려는 것으로서, 마지막 날이 오기까지는 안식이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리셨으며,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되는 날까지는(고전15:28) 안식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일곱째 날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자기의 안식이 완성될 것을 백성들에게 대략 알리시며, 그들이 평생 안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명상함으로써 이 완성을 사모하며, 동경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날들의 구별을 철폐하고 매일 모이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이에 대해서 칼빈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답변한다. 영적 지혜를 위해서는 매일 얼마만큼 시간을 배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해서 매일 모일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 주신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이 날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과는 다른데 그리스도인들은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날)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날을 지키는 것은 다만 교회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나를 서로 구별하는 것을 미신으로 보았기에 이러한 미신을 없엘 필요가 있어 유대인들의 성일을 제쳐 놓았고, 교회의 예절과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날을 제정한 것이다. 결국 고대의 안식일이 대표한 저 진정한 안식은 주의 부활에서 그 목적이 실현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를 끝낸 그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림자였던 의식을 고수하며, 지켜서는 안될 것을 경고한다. 칼빈은 일곱이라는 수를 고집해서 교회를 거기에 예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들에 대해서도 미신만 없다면 비난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계명을 다룸에 있어서 세가지 실천적인 사항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우리는 우리의 모든일을 쉬는 영원한 안식을 평생 명상해서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각각 개인적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그리고 경건하게 명상해야 한다. 또 말씀을 들으며, 성례를 집행하며, 공중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일제히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압박해서는 안되며 쉼을 허락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가 세운 질서에 따른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울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


4) 칼빈의 주석들

* 출20장에서 /
모형의 영적 본질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정한 날을 정하시사 집회를 갖도록 한 것은 그러한 집회를 통해서 백성들이 제사, 기도, 그리고 그의 이름을 송축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모든 일을 쉬는 것을 성결의 완전성으로 그들 눈 앞에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구약에서도 날에 국한된 것에 있지 않고 본질적 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일의 중지에 대해서” 단순한 중지 그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유치한 미신인 것이다. 이 계명과 이것이 상징하는 것과의 유사성과 일치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일에서 손을 떼고 자신들의 이성, 계획, 그리고 육신의 모든 감정과 애정을 자신에게서 박탈하고 포기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의 생활이 하나님께로 인준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도록 하는 데 있었다.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의존되지 않은 부패한 인간의 삶으로서는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을 말한다. 특히 예외 없이 모든 일을 하지 말라(어떤 일도 못한다)는 금지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일에서 떠나가게 한 것은, 그들이 마치 자신들과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들처럼 이 땅 가운데 나그네 삶을 살아가듯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온전히 헌신케 하려는 뜻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명하신 것’이다. 결국 안식일 계명과 관계되는 성도의 성화적 모습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그들이 지상적인 성품을 포기하는(자기 포기) 가운데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아 육신이 사망하고 영이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으로 일생동안 훈련키 위한 일주일의 하루를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이사야는 안식일의 적합한 용법을 ‘자아부정’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데(사43:13)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스스로 지도되는 사람만이 참으로 자신의 일에서 손을 떼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면서, 어느 정도로 자신을 비워야 하는가? 에 대한질문을 제기 할 때 우리가 선행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그 선행조차도 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여겨야 할 것으로 본다.(삶의 모습과 방식, 생각,방향 자체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속에서 실제로 칼빈과 당대의 개혁자들은 이런 인식의 틀속에서 살았다!!) 여기에 대해 어거스틴도 ‘그 선행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천한 것이 될 것이다’ 고 말한다.

출20장의 주석된 안식일 준수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세계의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 제 칠일을 자신의 날로 떼어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자신의 종들로 하여금 모든 염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일의 아름다움, 탁월성, 그리고 적합성을 숙고 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원칙적인 면에서는 우리들이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경탄스러운 이 세상 창조와 통치에서 그의 지혜, 능력, 선하심, 그리고 공의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변덕투성이요, 망각하거나 산만하기 쉬우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성을 특별히 감안하셔서 한 날을 다른 날로부터 구별하시고 그 날만은 모든 지상적인 염려와 일을 쉬도록 명령하심으로서 어떠한 일도 그 거룩한 업무(하나님을 묵상, 영적 안식)에 방해가 되는 일이 없게 하셨다.(하나님의 은혜자체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단순히 집에서 쉬는 것으로 만족치 않으시고 “성전에서 모이는 가운데 거기서 기도와 제사에 관여하여 율법의 해설을 통해서 신앙적인 지식에 발전을 보도록 하셨다. 이러한 면에서 하루를 자유롭게 지내는 가운데 좀 더 잘 배우고 우리의 신앙을 더 잘 증거할 수 있도록 옛날 사람들처럼 안식일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안식일 계명의 의의는 “인간 본성의 타락서 때문에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전적으로 사라져 버리고(이것은 이미 있었던 원리임을 전제로 함)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있어서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 안에서 새롭게 하셨는데, 그것은 안식일이 거룩하고 침해 할 수 없는 준수에 의해서 영화롭게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출20:11, P416)

* 출31장13절에서 /
“이는 그 날이 너희에게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표현을 통해서 모세는 그들에게 ‘이 의식을 가장 거룩하고 침해 할 수 없는 것으로 준수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데, 이것은 안식에 대한 계명의 소홀로 인해 신앙의 타락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 예표적 기능/ 율법시대에 영원한 것으로 얘기된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성취된 사건들의 새로운 상태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율법의 영원성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림자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언약이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된 충만한 시기이후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출31:31, P420) 바로, 율법시대의 특유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 이후까지 계속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외형적인 준수(의식)는 오늘날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의 실체(도덕법의 정신)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다.
---> 심지어 육축과 객에게까지도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에 대해/ 이것은 "안식일에 위배되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거슬리게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뜻에서였다. 즉 이것은 소나 나귀의 경우에서 더 똑똑히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의 안식을 하나의 본보기로 정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거나, 안식일을 지켜야겠다는 자극을 받도록 하신 것"(출20:10, P414-5)이다. 또한 안식일에 임할 축복에 대한 “여러 상징이 가축과 무생물에게까지 나타난 것은 그것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며, 백성들이 냉담하게 되거나 그들의 헌신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에서였다.(출23:10, P423) 결국, 만물에 안식일 준수를 새겨두는 것을 원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어디로 그들의 눈을 돌리건 간에 안식의 본의에 참석하려는 그 준수의 마음을 계속 갖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 사56장2-7절에서(1550년) /
안식일은 첫째 돌판에 속한다. 안식일은 하나님 예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여기에는 종교의 모든 실천 내용을 포함하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반적인 예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의식으로 만족하시지 않으시며, 동시에 우리의 나태함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진지한 자기 부정을 통해서 전적으로 자신을 섬기는 일에 몰두할 것을 요구하신다. 여기에는 의식자체 보다는 진실된 신앙과 흠없는 생활만이 거룩한 생활을 살아가는 원칙이기에 이 두가지 방법 외에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언약에의 순종에 연관되어 있으며 의식보다는 완전한 거룩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유다 백성의 잘못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였는데, 그들은 외적인 의식 준수에 그쳤고 그것의 본질, 즉 생활의 개혁을 소홀히 하였다.


3. William Gouge의 “ The Sabbaths Sanctification."
서론의 각주에서 이 사람에 대해 짧은 언급이 있었기에 여기서는 그의 안식일에 대한 문답서로서 가르쳐진 교리에 대해 몇가지의 특징적(구체적인 적용) 구성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안식일에 대한 문답서에서 제1문부터 22문까지는 먼저 안식일의 도덕성의 근거(안식일의 시간 구성, 거룩한 날로서 안식일의 모든 시간에 명령되어진 경건한 의무와 자비의 일에 대해서...)에 대해서, 그리고 제23문부터 42문까지 안식일에 허락되어진 봉사의 일과 안식일에 이러한 일들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주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우리가 추구할 목적,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에 대한 일상적인 일과 특별한 일, 경건의 의무를 방해하는 일상적인 봉사, 특별한 봉사의 일로서 예,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일들이 수행되는가?의 수행 방법과 그 내용의 실제성에 대해서, 그리고 제43문에서 50문까지는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증거에 대해서구체적인 성경과 교회의 증거를 들어 답하며, 제51문에서 61문까지는 안식일의 법에 반대되게 잘못 생각하는 경우의 열 가지 질문과 답을 서술하고, 제62문에서 69문까지 네 개의 주의 안식일이 아닌 것들을 다루며, 마지막으로 제70문에서 85문까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13개의 동기들에 대해 가르친다.

여기서는 제1문에서 85문까지의 모든 질문과 답을 제공하지 못한 점을 양해하시라! (준비하는 자의 부족한 시간과 지면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 보다 구체적인 자료를 원하면 ...) 그러나, 우리가 깊이 있게 적용(생각)하지 못하던 원리에 따른 실제적인 부분만을 큰 단락을 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제1문 - 제22문까지
안식일의 도덕적인가, 의식적인가? 의 질문을 시작으로 제4계명의 원리를 도덕법으로 간주하면서 곧 삶의 규칙으로서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고 답한다. 그 근거로서 창2:2,3절에서 아담의 무죄성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무죄한 상태에서 하나의 공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허리에 모든 인류(유대인, 이방인의 구별이 없음)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법의 열 개의 교훈중의 하나(출20:8)로서 모든 계명을 도덕법으로 보는데 있다. 또한 제3문에서 안식일의 구성 시간을 24시간(창2:3)으로 그 모든 시간의 거룩함을 말한다.(출20:11) 또한 그 모든 시간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될 수 있었는가? 에 대한 답으로서 첫째는 명령되어진 것들을 지킴으로써(렘17:22), 둘째는 허락되어진 것들을 지킴으로써(출12:16) 하나님의 탁월한 주권으로 명령되어진 의무들을 반드시 수행되어져야 할 것으로 그 의무들을 바로 수행함으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 날에 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것들임과 하락되어진 일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로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려한 것으로서 이 날에 행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비록 안식일이 그런 일들 가운데 정상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런 일들에 의해서 보다 더 낫게 거룩하게 되어지기도 한다고 답한다.(문5)

명령되어진 의무로서는 “경건의 의무로 하나님과 관계되는 예배(눅4:16)와 자비의 의무(막3:4; 사58:13)인 안식일에 선을 추구함”에 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15문에서 ‘어디서 경건의 은밀한 의무를 수행하는가?’ 라는 질문에 “하나님과 그 자신 사이에 있는 어떤 은밀한 곳에서(마14:23)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그런 방법으로 수행되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그대의 영혼이 더욱 고양되고, 위선과 헛된 영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그 의무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보다 더 많은 위로를 주게 될 것이다.”고 답한다. 이제 경건의 은밀한 의무가 무엇인가?(문16) 에 4가지로 답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행8:28),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막1:35; 행10:9; 시119:164), 묵상하는 것(창24:63; 시63:6), 자신을 살피는 것(시4:4; 고전11:28)이다. 제17문 자비의 일에 대해서(영혼과 육체) 먼저, 영혼에 관계된 자비의 일(요7:22,23)은 무지한 자를 가르치는 것(고전12:1), 약한자를 세우는 것(행20:35), 의심을 풀어주는 것(눅24:38,39), 곤란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것(요11:31,14:1,고후2:7,살전5:14),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을 바로 가르치는 것(마22:29,약5:19,20), 죄인들을 책망하는 것(막8:33, 눅3:19, 고후2:6), 다른 사람을 교화시키는 모든 일(살전5:11, 롬15:2)로서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끌어 낸 가르침, 책망, 명령이기에 어떤면에서는 경건에 속한 일(이 일들을 이루는 수단의 면)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것들이 우리의 형제들을 그들이 당한 곤경과 그 영혼의 곤핍으로 부터 풀어주는 경향이 있기에 또 다른 면(지향하는 면)에서 자비에 속한 일이다.

제19문에서 육체와 관계된 자비의 일을 다루는데, 병환자와 다른 여러 원인으로 자유를 제한받고 있는 사람들을 방문(막1:29,30; 마25:36),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으로 구제(사58:7, 고전16:2...), 위험에 빠져 있는 자(것)을 꺼집어 내는 것(마12:11,눅13:16), 모든다른 시의적절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마12:1,4)이다. 이러한 경건과 자비의 의무는 다른 날에도 행해져야 하는 것으로서(문20) 하나님께서는 매일 한결같은 하나님이시기에 매일 할 수 있는 한 그 일들을 하도록 준비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다른 질문이 제21문에서 주어지는데 ‘안식일에 경건의 일을 행하는 것과 다른 날에 행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안식일에 행하는 것이 고기에 해당한다면, 다른 날에 행하는 것은 소스에 해당한다는 답을 한다.(민28:9,10) 또한 제22문에서는 안식일 날의 자비의 일과 다른 날의 행한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도 ”안식일에는 찾아져야(절대 필수적) 하고, 다른 날에는 취해져야 한다(고전16:2)고 답한다.

2) 제23문에서 제42문까지
제23문은 안식일에 허락되는 봉사의 일로서, 먼저 안식일에 적합한 일을 수행하는 것(마12:3-5)을 말한다. 여기서 관심있게 살펴볼 제24문의 질문은? “어떤 봉사의 일이 안식일에 적합한 일을 수행하도록 하는가?”에 대해서 그 답은 “안식일에 적합한 일을 수행하는 것과 관계된 외적인 의식들이다.(레24:8; 민28:9,10)” 이에 대한 설명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율법아래서는 그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바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상당한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잡다한 의식들이 있었는데, 희생제물을 죽이고, 그것들의 각을 뜨고, 제단 위에 나무를 쌓고 그 위에 희생제물을 두며, 등불을 새로 밝히고, 진설병을 진열하여 놓는 등 이와같이 많은 일들이 그것들이다. 그 때문에 이런 일들과 관계하여 예수님께서 마12:5절에서 ‘제사장들이 성전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약 다른 경우에 하나님 예배와 상관이 없이 그러한 일들이 행하여 졌다면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된다.(도축업자의 일...)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예배와 관계되어 행해졌다면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며, 그 일과 관계하여 있을 수 있는 모든 비난들을 정당화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문25에서 ‘어떤 또 다른 봉사의 일이 안식일에 적합한 일을 수행하도록 허락되었는가?’ 답, 우리의 연약한 육체가 필요로 하는 일들이다.(출12:16, 마12:1) 이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많은 연약함을 그 몸에 가져오게 되는데, 그로 말미암아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무능하거나 방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선으로 사람의 연약함을 극복하도록 항상 애쓰시면서 그의 섭리에 의해서 사람의 연약함을 돕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수단들을 제공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것을 항상 모든 기회에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으로서 주께서는 짚도 주시지 않으면서 똑같은 수량의 벽돌을 만들어 내도록 명했던 잔인한 폭군과 같지 않으신다. 그런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을 필요로 하는 특별한 일로서(문26-30) 잠(전5:12), 음식(눅14:1), 옷(삼하12:20), 모든 다른 시의적절한 도움들(막2:3,4)이 있다고 답을 한다. 이러한 방법들이 경건의 의무를 추진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보다 더 잘 하도록 함으로서(시104:14,15) 그것들이 우리의 몸에 생기를 북돋우며, 우리의 영혼을 주께로 고무시키며, 우리의 많은 연약한 부분을 보강하고 바로 잡아준다. 그렇게 함으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일을 추진하며, 그래서 성화에 이르게 하는 봉사가 그 일로 말미암아 더 잘 수행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제32문에서는 ‘안식일에 이러한 일들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주의가 필요한가?“에 대해 가르친다. 그것은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씀에 있어서 자유하도록 함으로서 우리에 대한 그가 가지시는 존중히 여김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용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것들은 역으로(반대 입장)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존경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 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많은 시간을 그에게 드리고 또한 그를 예배하는데 드림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씀으로서 방종과 남용이 되어서는 않된다.(늦잠, 게으름, 나태 , 사치, 다른 날에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

이제 우리의 관심은 다음 계속되는 질문에 있게 되는데, 문37문에서 문42문까지의 질문과 답은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민과 그에 대한 해결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문37. 봉사의 일이 때로 경건의 의무를 방해할지라도 안식일에 행해질 수 있겠는가? 에 대해서 마12장7절을 근거로 행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교회에 나가기만 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엄격하게 우리를 구속하지 않으신다.(호6:6) 그럼 비록 그것들이 경건의 의무를 방해한다고 할지라도 수행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봉사가 무엇인가?(문38)에 대한 질문에서 그 답은 ‘절대적 필요에 의한 일들’로서, 이 때 말하는 절대적이라는 그 필요는 사람의 필요와 관계(명예, 돈, 신용..취미. 등은 사실은 아님)되는데, 이런 저런 일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커다란 생명과 삶에 손해와 손실을 초래하게 될 경우의 일들을 가리킨다. 즉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이란 그 날 이전으로나 그 날 이후로 앞당기거나 미루어질 수 없는 일들인데 이같은 일은 비록 안식일에라도 지금 수행해야 할 필요성을 암시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수행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첫 번째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그 일은 주의 날에만 수행되어져야 한다는 사실만 남는 것이며, 예를 들면, 주의 날에 기와가 한 조각 떨어져 그 사람이 심한 상처로 다치게 된 경우이다. 이 사람의 치료를 위해서는 도움을 주는 일 외에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사람이 이 도움을 받지 못해서 죽게 되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일을 그 다음날로 연기해서도 안 된다. 이는 경건의 의무가 방해받는 일이 있더라도 해야 한다.(요7장23절의 이같은 목적에 대해 참고)

그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문40)에서 두가지로 나누는데 첫째는 일상적인 일과 특별한 일로 나누어 답하고 있다. 먼저 일상적인 일이란 거의 대부분이 매 안식일에 일어나는 일들인데, 때로는 이 일이 때로는 다른일이 수행되어지곤 한다. 또한 특별한 일이란 때로 생겨나기도 하고 때로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먼저 경건의 의무를 방해하는 일상적인 봉사의 일들로서 예를 들면(문41)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것과 병들고 무기력한 사람들을 지키는 것, 진통 중의 여인을 돕는 것이다.(삼상1:22/ 한나의 경우)

둘째로, 경건의 의무를 방해하는 특별한 봉사의 일들로 그예는(문42) 집에 불이 났을 때 불을 끄는 것, 댐이 터졌을 때 댐을 막는 것, 적에 항거하는 것(전쟁의 수행, 국방의 의무) 당면한 위험으로부터 생물을 구해주는 것(눅14:5,마12:11)이다. 그러므로 허락되어진 이같은 특별한 일들로 보아 안식일을 올바로 지키는 일이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힘든 멍에는 아닌 것을 알 수 있다.(사실 오늘날 힘든 것은 자신의 현실적, 현재의 당면한 이익 앞에서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다음은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증거(문43-50)를 살펴야 하지만, 이 문제는 앞에 언급한 간단한 내용과 우리가 그동안 공부한 ‘영원한 안식과 주일’(최낙재 저)의 발제자 및 공부한 내용으로 이 면에서는 생략토록 하겠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안식일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경우들을 열거하고자 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공히 공감이 가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의견과 관계되는 것과 실천과 관계되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의견이 너무 느슨하여 잘못되고(율법폐기), 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너무 엄격(또 다른 율법주의)해서 잘못 된다.
먼저, 너무 느슨해서 잘못된 경우들을 열거하면, 안식일의 도덕법으로서 주어진 율법의 제3사용의 문제를 부인하는 것과 주일날을 임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 그리고 외적인 휴식과 의식을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것, 염려해서 하게 되는 일들을 합법적으로 여기는 것 등이다. 그러나 둘째로 너무 엄격해서 잘못되는 경우는 필요한 일 조차도 불법적이라고 여기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것들이 의견에 있어서 생기는 오류들인 것이다.(문51-55)

다음으로 실천에 있어서 잘못되는 경우들은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것이 있고, 자신과 관계되는 것이 있다.(문56-61)
먼저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일로서 두 가지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날을 거룩하게 할 수 없도록 하는 것과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일로 마음을 쓰는 사람을 비웃는 일이다. 그리고 후자의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주의 날에 부득이해서 하는 일을 현실의 유익을 추구하는 세상이 주는 이익(지식, 돈, 명예, ..) 앞에 공공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주의 날을 하나님의 것과 자신의 것으로 나누는 것, 거룩한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차츰차츰 지쳐버리는 것, 주의 날을 그것을 지키는 척 하면서도 속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안식일이 아닌 것들이 있는데(4개의 주의 안식일이 아닌 것), 세상적인 안식일(그 날에 일하는 것), 에피큐레스(Epicures)의 안식일(그 날에 사람들 자신의 기쁨을 채우는 것), 짐승의 안식일(게으름 가운데 그날을 보내는 것), 마귀의 안식일(그 날을 죄짓는 날로 만드는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동기들로서(문70-85) 명시된 계명의 정신안에서(신5:12) 안식일에 연관된 계명의 앞에 덧붙여진 제시된 사항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4계명이 모든 다른 계명들을 지킴에 있어서 독자적인 도움을 가져다주며(다른 계명들을 지키도록 돕는 것), 그러한 것으로 인한 영적인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계명을 지키는 또다른 동기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사58:13), 하나님의 모범으로서(창2:2;출20:11), 성도의 실천(눅4:16;행16:30)과 의무의 공정함(출20:9), 그것으로 인한 일시적인 유익과 그것들에 주어진 약속들, 그것들을 속되게 하는 자에 대한 위협과 그것을 어기는 자에게 대한 심판의 집행,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일의 안전함(행4:19)에 그 동기가 있다.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20장.7,8절)에서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하여 적당한 시간의 분량을 구별해 바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영구한 명령을 요구하신 것이 있으니, 곧 모든 시대의 인류로 하여금 이레 중 한 날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출20:8,10-11; 사56:2,4,6-7) 이 안식일이 창세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이레 중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이후부터는 이레 중 첫 날로 바뀌었다.(행20:7) 이 날을 주일이라고 하며(계1:10) 이 날은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 지켜져야 한다.(마5:17-18, 출20:8,10)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위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나니,
그들은 마음을 준비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데 지장이 없도록 일반적인 사업을 미리 정돈해 놓고, 세상 사업과 오락에 관한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일체 중단하고 안식할 것이며(사58:13, 출16:23,25-26,29-30;20:8;31:15-17;느13:15,19-21), 그 날의 모든 시간은 공예배와 사적예배를 위하여, 또는 부득이한 책임과 자비 시행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마12:11)


6. 교회사에 있어 정통개혁주의 신앙의 꽃을 피운 17세기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

칼빈에게 있어서 의식법을 제외한 모세의 법의 대부분을 도덕법으로 이해함과 이 도덕법은 십계명안에 집약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중생된 이후에도 그 법의 사용을 열어 놓았으며, 이는 제4계명 안식일 준수도 “도덕법”으로 해석함으로서 중생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의식적인 성격을 제외한 주일의 개념 아래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켜져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퓨리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였다. 그들은 주일만을 지키고, 도덕법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의식법에 속한 유대절기들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중용주의자로서 당시의 정치적 목적으로 진리를 훼손함.)에 이미 주일날 백성들의 오락을 위한 공적인 스포츠가 허용된 이래(1583) 이것은 퓨리탄들의 비판(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는 퓨리탄들의 이러한 안식일의 도덕법의 정신을 가지고 지켜져야 할 원리를 따르자, 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1618년 8월 25일에 처음 법정과 주교들이 결정되어 제임스 1세의 왕명으로 출판된 “퍼스의 5개 조항”을 만들어 결국 목회자들에게 강요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또한 개혁주의 퓨리탄들의 번성을 막고자 하여 소위 “오락의 책(A Declaration to encourage Recreation and Sports on the Lord's Day)"을 출판하여 목회자들에게 읽도록 강요한 사건들이 제임스 1세 때(1618)와 챨스 1세 때(1633)에 있었다. 특별히 퍼스의 5개 조항은 스코틀랜드 총회에서 불법으로 통과되었기 때문에 계속 스코틀랜드 교회의 저항의 대상이 되어 왔다가 1638년 총회 개혁에서 처음으로 그 총회의 결정이 무효화되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퓨리탄들에게는 "퓨리탄들의 순수성"(non-conformity)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것은 이러한 ‘주일성수와 예배의식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그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교리와 신앙고백)을 지키는데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핍박의 모습으로 당시에 교회에 가해진 ‘오락의 책’에 대한 저항정신과 ‘퍼스 5개 조항’에 대한 거절은 모든 퓨리탄들(장로교적 퓨리탄, 독립교회적 퓨리탄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진리의 정신으로서, 역시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의 확고한 정신이었다.

유럽대륙에서도 이런 퓨리탄 정신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들(G.우데마누스, W.텔린크,J.스필야두스)이 1612에 강한 주일성수를 강조함으로서 논쟁이 시작되어 도르트회의(1618년)에서도 논쟁이 되었고, 1620년 이후의 당시에 많은 논쟁으로서 주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오늘날은 이 문제에 대해 거론 조차도 하지않는 세상과 교회가 아닌가!) 당시에 이러한 논쟁속에서 기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퓨리탄들의 기본 입장의 정신은 카톨릭주의와 영국국교회자들의 주일의 세속화, 그리고 재세례파와 퀘이커교도, 다른 이단들이 주의 날을 버리는 운동, 또한 이러한 이단들에 대해서 관대하고 관용함으로서(여기에 바로 진리의 훼손과 변질이 있다.) 상업도시들이 세속화됨으로 “주님의 날”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 저항하고 반대함으로서, 퓨리탄들은 “강한 주일성수”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 중 우리가 위에서 살핀 바 있는 William Gouge는 사도행전20장7,11절의 주석에 근거하여 24시간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퓨리탄들의 주일에 대한 예배의식에서 당시의 예배의식을 파괴하려는 무리(퍼스5개 조항)에 대해 개혁주의 신앙의 정신을 가지고 정리하기를 “장로교인들은 예식서의 사용을 불법적이라고는 하지만, 정해진 예식서에 제한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과 장로교인들은 주일 이외에 부활절(Eostre라는 이방여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대체함), 성탄절(로마의 신 Saturn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을 축제로 지키고 있음), 등의 절기들을 의식법의 폐지와 도덕법의 원리로서 절기를 지키지 않음을 보게 된다. 또한 세례시 십자가의 상징을 하지 않음과 견신례의 의식을 거절하며, 성만찬의 예식을 사적으로 집례하지 않을 것”을 개혁 신앙의 성경적 진리의 원리안에서 분명히 정리하였던 것이다.

또한 개혁주의 퓨리탄의 번성을 막기 위해 오락에 관한 포고문서(1633년 10월 18일)의 내용에 대해서 이들은 목적은 명목상은 주일날 오락을 허용한 것을 민생복지 차원에 목적을 두었다하여 신민들(그리스도인)은 주일내내 심하게 일하는 천한 자들이기에 그들의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집어넣기 위해서 오락을 허용해야 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된다는 논리로 이러한 명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그 포고문서의 동기는 퓨리탄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종교세력의 교황주의를 견제하는 정치적 목적) 그 당시의 오락과 스포츠의 금지는 주일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성일에도 타당한 것이었으나, 그 왕명포고문서는 교묘하게 주일성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였고 다만 일요일 저녁 기도 후, 일요일 오후, 혹은 모든 신적인 예배종결후 그러한 오락이나 스포츠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청교도인들(Puritans)과 엄격한 이들(Precisians)은 온종일 주일성수를 강조하여 동시에 어떠한 정숙한 오락이나 건전한 놀이까지도 관대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바로 이러한 퓨리탄의 정신들이 장로교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예배모범에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실제로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의 예배모범에 주일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가 제공되고 가르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현실의 상황과 우리의 공통된 편리함을 위해 아무런 가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고문서에 불과하다!)


7. 한국교회의 주일 성수에 대한 문제와 그 제언.

지금 한국교회의 주일성수 문제는 ‘전통적 의미’로서는 이미 흔들리는 정도를 넘어선, 주일의 본의에 대한 진리의 원리가 상실, 왜곡됨으로서 작금의 성도들의 인식에는 ‘주일이 무엇이며, 이 날에 대한 그 원리와 정신이 무엇인가? 주일을 성수하는 성도의 삶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현실의 자기안위적 암매함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무엇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 주일을 지키는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과 생각조차 없는(하지않는-왜? 진리의 원리를 찾으면, 시대의 현상 앞에 서있는 모두가 자기기준의 신앙에 대한 상대주의로 머리만 아프고, 서로의 신앙에 대한 참견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한 세상이기에...)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만이 교회의 주일이라는 한번의 모임에 자위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이상한 것도 아닌 당연한 결과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원리에 벗어나 살던 구약의 많은 곳에 나타나던 실예의 한 모습이도 한 것이다.(구약의 백성들이 안식일의 본의를 모르고, 자기 기준으로 안식일을 지킬 때 나타나던 그 시대의 타락과 하나님과의 참된 예배(경배)가 더럽혀 지고, 그로 인한 참된 하늘의 평안의 교제가 없이 삶을 살다가 선지자들의 경고 속에서도 결국의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 한 것을 보라!!!)

오늘의 성도는 주일이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의 생동감을 찾게 하는 휴식(육적, 영적)의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두고 산다. 이것은 주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의 뜻을 보이시고, 그의 백성들이 어떤 목적으로 이 나그네 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지 않는 것이다. 온통 주일의 예배와 교제와 휴식이 인간(자기 본위) 중심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일을 맞이하면 주일예배 한 번(혹은 두번..)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자신들이 하나님께 축복받고 살아가는 것인 양 만족한다. 결국 이것은 예배 한번의 참석으로 모든 성도의 의무를 다했다는 것이요, 이제는 이후의 모든 삶의 가치는 세속적(세상적 기준)인 삶을 즐기는 것으로 나아가 조금도 꺼리낄 것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단지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주일에 세속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주일에 꼭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목적과 참된 경배의 가치와 그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의 베푸심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잃고, 그들의 인간적 사고에 젖어 ‘진리에 대한 소원함’의 생각도 없어짐으로서(교회에 한번 나오지만 진리의 각성이 이루어 질 수가 없다!) 주일의 전 모임을(예배, 교회로서 모이는 모임...)소홀히 하게 되고 희미해져 가게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일 성수의 흔들림을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에서 많이 찾기도 한다.

그것은 지난날의 사회적, 정치적, 안보적, 여러 가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타나던 불안과 어러움과 긴박감에서 살아갈 때에 주일날 교회에 나옴으로서 어떤 인간사의 해결책으로서 교회의 가치와 큰 낙으로 제공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이러한 갈등과 불안이 사라져가고, 나아가 급속한 경제 성장과 생활의 여유로 사람들의 눈이 세상으로 돌아감으로서 많은 문제들을 이제는 경제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있게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바로 주일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율법의 제3사용으로 주신 영원한 하나님의 도덕법의 백성으로 살지 않고,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양태는 보이지만 실제적 내면의 삶은 세상의 기준과 인간관계의 긴밀한 유지로 교회를 찾는 인간 중심적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성경의 경고는 “하나님과 또 다른 그 무엇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이 시대의 교회(성도라면..)는 서야 하며, 각성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세상적으로 기울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더욱 기울어지게 한 것은 여가산업의 발달이다. 최근의 한 마케이팅 연구소가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행동”이란 책자에 설문 조사한 통계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우선 즐기고 보자’라는 생각에서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도 이러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주일을 맞이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우리의 만족을 위한 시간과 휴식으로 변화해 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일에 하지 못한 우리생활에 부족한 여유를 해결하는 휴식일로 탈바꿈한 것이다.(사실 여기서 성도는 평일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풍성하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연구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구제하고, ..... 성도로서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할 것이 너무 많아 시간이 부족할 정도인데....) 그래서 오늘의 교회들은 이들의 여가생활을 즐기도록 기회를 제공하고(제1부예배;7시, 제2부예배;9시,... ‘골라잡아’ 자기 편리한 시간을 이용하여 한번 모이고( 그래도 자칭 교인인데, 혹시 예배라도 한번 안보면 보는 사람의 시선이 있으니까...) 얼굴도장이라도 찍고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내가 너무 비판적인가?, 논문이 조잡해져 가는 느낌!)

주일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요인은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대중문화의 영향이다. 이것은 경제성의 부요와 여가생활과도 맥을 같이 하지만, 이러한 대중문화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대표적인 예는 국가가 행정의 편의를 내세워 주일날 치르는 각종 공무원 시험과 인간사에 필요한(사실 절대적인 것은 아닌데...) 충족을 채우기 위한 자격증 시험이다. 이것은 국가가 대중문화를 등에 엎고 교회를 무시하는 진리를 파괴하는 핍박의 한 형태인 것이다. 또한 은밀하게 방해하는 대중문화가 가지는 속성은 그 자체에서 나타나는데, 곧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비 기독교적이요, 세속적인 것이요, 더 교묘하게는 인간 중심적인 것이다.

문제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러한 대중문화에 당당히 진리의 원리로 맞서거나, 싸우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문화에 대한 마찰 없이 공존하기를 원하며 더욱이 세상에 대한 이질감을 먼저 해소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교회(성도)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침으로서, 진리를 무너뜨리고(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며, 교회를 빠지지 않고 열심을 가진다는 사람들도 진리의 교리,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고민하지도 않는 자기 기준(자기 경험의 신앙)의 틀로서 서 있기에...) 주일의 본의도 무너짐으로서 대중문화에 끌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날 한번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잘(?) 해결되었다고 자위하기에 세속문화가 갖는 결혼식이나 동창회 모임, 계 모임, 자신의 관심을 가지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들...에 끌려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회 외적인 요소에 원인이 있다면, 중요한 문제는 교회의 자체의 문제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진리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시간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가 가져오는 세상의 그 모습 앞이 어떠할 것인가?(성도에게 낙관적인 세상인가? 아니면 비관적인 세상인가?)를 드러내고, 과학의 시대, 첨단 테크노 문화의 시대가 성도에게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와서 성도로서 이 세상 앞에 서 있어야 할 것인가? 도전과 각성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고신의 박우삼 목사는 교회의 주일성수가 흔들리는 교회 내적 이유를 교회의 매력 상실로서 교회가 주는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하는데 원인’을 돌린다. 한국교회가 성장을 위해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화(개교회주의, 성공목회, 대교회주의, 물량공세, 물질주의, 등등)하는데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으나, 교인들의 의식의 변화에 대한 문제를 참 진리의 말씀으로 세우지 못하고, 복음의 희미한(초보적인 교훈) 부분으로 인간적 감성만을 자극한 결과로서 보는 것이다.

분명 중요한 것은 “참된 진리가 없기에 진리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요, 개혁신앙의 고백되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신조요 신앙고백서인 교리가 무시되고 교육되지 못한 한국교회의 당연한 타락의 열매요, 진리를 진리로 고백하지 못하였던 개혁 교회의 교리 부제의 귀결”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주일의 구체적인 원리를 교리적 차원에서 살펴보았듯이,(더 풍성한 진리의 원리가 있겠으나) 교리의 교육이 딱딱하거나 당장의 교회의 성장에 유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실제의 교리의 구체적 적용과 진리의 은혜를 받기에 충분한 신앙교육의 지침서”로서, 지금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도 절실히 교육되고 회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왜? 신앙의 모든 원리가 제공되며, 성경의 진리를 바로 보게 하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Ⅲ. 나오는 말.
주일에 대한 결론을 맺자니, 서론과 본론의 모든 부분에서 결론적 내용을 담으며 서술하였기에, 기회가 된다면 조심스럽게 보다 깊은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은혜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 오늘 우리 신앙의 한 본질은 바로 도덕법으로 주어진 주일의 본의의 그 정신을 회복함에 있으며, 이러한 정신아래 살아가는 성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삶이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진리(교리) 기준이 무너진 암매한 현실 앞에 서 있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앙의 양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할지라도상황을 보거나, 급격히 변화하는 환경을 보거나, 이로 인한 잠시의 눈앞의 이익(현실 유익)을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고백해야 하며, 결국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실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그날이 있음을 약속(택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언약의 약속)을 통해 믿고 하나님의 베푸신 은총 아래서만이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누구를 판단하여 주일을 주의 날로 드리지 못함에 정죄 할 필요도 없다.(부패한 사람인지라 잘 않되지만...) 도리어 현실의 상황과 그렇지 못한 무리들이 많은 시대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개혁신앙의 진리를 소원하며, 자신을 진리의 원리로 점검하며,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보다 자신을 그 곳에, 그 본의의 정신(도덕법)아래 서 있기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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