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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 성경읽기

오세택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6. 5. 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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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 성경읽기



재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주일 오후 누가복음 성경 공부를 다 마치는 날이었다. 24장 전체를 기적과 표적, 교훈과 강화, 설교와 논쟁이라는 장면별로 분류하고 그 의미와 교훈을 살피고 끝이 났다. 바로 그 때 사십년 동안 예수를 믿어온 한 장립집사님이 일어나 질문을 했다. 예수님의 관한 기사와 가르침이 이것이 전부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평소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이 너무 적다는 것과 처음 듣는 말씀과 기사가 너무 많다면서 질문의 이유를 밝혔다. 그가 든 대표적인 예가 ‘손님접대법’이었다. 14장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잔치에 초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잔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주인에게 다음부터 손님을 초청하려면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처럼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을 초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이 있는 줄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오면서도 몰랐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동안 자신이 성경을 잘못 읽어왔다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는 허허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온 회중도 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자조적인 말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었다. 그토록 열심히 주님을 배우고 섬긴다고 했지만 막상 누가복음을 공부하면서 주의 말씀이나 행동이 낯설고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 동안 우리는 성경을 잘못 읽어 왔다. 도구적으로 읽어왔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신문과 잡지를 보고 전문 서적들을 읽는 것처럼 성경도 그런 식으로 읽었다. 자신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구절을 찾기 위해, 자신의 답답한 심령에 위안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었다. 자기를 위해 자기의 필요를 채우며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을 위해 능동적으로 읽어왔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이런 성경읽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당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읽고 배우고 섬겨왔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참된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이며 영성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이런 성경 읽기는 주님의 말씀과 언약의 핵심인 구원에 대한 이해마저도 왜곡시키고 말았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구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고 천당 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며 도구적인 해석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예정하신 우리를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하시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 옛 사람도 죽고 주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연합한 자가 되어 다시 살아나게 되며 성령님을 부어주시므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되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타자를 위해 살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 풍성한 삶과 천국을 누리며 장차 임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인데 이 온전한 구원을 자기를 위한 도구적이고 능동적인 해석으로 죄용서와 천당으로 축소 왜곡하고 말았다(겔 36:22-31).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비민주적인 제도도, 투명하지 못한 재정도 아니다. 도구적 성경읽기로 인한 말씀의 왜곡이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의 기독교는 미신에 머물고 말 것이며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우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동적 성경읽기이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나를 찌르고 쪼개고 발가벗기도록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읽는 자를 교훈하며 책망하며 바르게 하며 의로 교육한다. 그래서 읽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한다(딤후 3:16-17). 성경은 살아 있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다(히 4:12). 내가 읽어 해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성경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내 지성을 열어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 감성과 의지를 움직인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성경을 주체적으로 읽도록 하지 말고 성경말씀이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각성시키고 고조시키고 움직인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 즉 전 인격이 말씀이 찌르고 쪼개고 깨뜨리도록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이런 성경 읽기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겸손이 필요하다. 자신의 혼, 즉 인격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내 혼,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인식과 행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내 혼은 오직 주님의 말씀이 빛으로 비춰져야만 하나님의 존재와 요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사실 인간의 지성이나 감성이나 의지란 참으로 보잘 것이 없다. 이를 밝히고 있는 것이 구약의 역사들이다. 요나의 경우를 보라. 요나의 인격이란 자신의 머리를 시원케 하는 박넝쿨 하나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고 그 넝쿨이 시들자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십이 만의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영혼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어가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던 인간이었다(욘 4:1-11).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살려달라고 회개하고 반성해도 자신의 민족적인 우월감과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읽지 못했던 인간이었다. 에스겔 16장의 비유에 의하면 요나와는 반대로 태어나지 말자 탯줄을 끊지 않은 채 버려진 핏덩이를 살려 하나님의 왕후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지나가는 이방 남성들을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행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자 인간이었다. 물고기 뱃속에 삼일을 집어넣어도, 왕후로 삼아 열국 중에 높여 놓아도 인간의 주체적인 삶이란 비열하고 가증스러웠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체적으로 살기를 철저히 포기하고 객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자신의 인격으로 성경을 읽으려고 하지 말고 성경 말씀이 자신의 인격을 흔들어 깨우도록 해야 한다.



이런 자세로 성경을 읽으면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이상을 보게 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보았던 환상을 보게 된다. 신약의 사도들이 보았던 계시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보게 되며 인간 역사의 참혹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의 결핍으로 인해 피조물에 집착하게 되며 그 집착으로 인해 온갖 죄를 짓고 자신과 타자를 고통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결핍, 그로인한 집착이 거대한 문화를 창달하지만 그 문화는 하나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허물어지면서 역사의 고통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이런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율법을 주셨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다윗마저도 그 율법을 범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아닌 새로운 왕, 메시아를 갈망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은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타자를 위해 사는 삶으로 구원받는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후 5:14-17).



그러나 수동적 성경읽기가 되지 못하고 성경말씀이 나를 찔러 쪼개고 온전케 하지 못하면 산상보훈은 결코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오른뺨을 친 자에게 왼뺨도 돌려 대라는 말씀을 피해갈 수밖에 없다.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벗어주라는 말씀을 건너뛰게 된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냐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앞세워 무시하게 된다. 이것은 천국 가서는 될 일이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일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죄인인가를 알리기 위한 교훈이지 그대로 행할 수 없다는 거짓 신학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을 수동적으로 읽기 시작하면 이 말씀 앞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왜 이런 말씀을 주셨는지를 묻게 된다. 그리고 성령님의 내적 조명으로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너희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이기에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과 맞는 사람보다 죄도 없는 사람을 치는 자가 상처받은 사람으로 그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돌려 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참으라고 하셨는지를 깨닫게 된다. 내가 주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사실들, 천국의 비밀들을 깨달으면서 진정으로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심의 소원이 무엇이며 우리를 기업으로 삼으신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남은 이 땅에서의 삶은 피동적 성경읽기 수동적 성경읽기의 시간들이 되길 바란다. 성경말씀이 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순간들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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