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트로이의 목마: 어느 목사의 신학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09. 8. 2. 16:39

본문

   트로이의 목마: 어느 목사의 신학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오는 10월 31일 이 되면 종교개혁 491주년을 맞게 된다.  그로부터 5세기가 지나는 동안 기독교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 난지 얼마 안 되어 급진파 개혁주의자들 (Radical Reformers) 이 일어났고, 이어서 침례교 나 감리교, 또 퀘어커 교단 구세군 등의 교단도 생기게 되었고,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계몽주의, 이에 따른 독일에서의 자유주의, 종교사학파, 자연신교,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사이비종파들이 앞을 다투어 우수죽순 처럼 생겨나고 20세기에 들어 순복음 운동과 함께  미국에 자유주의 신학이 침식하여 프린스톤 신학교가 자유주의로 변하게 되니 1929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새로 설립되었고 웨스트민스터는 풍상 속에 그간 세 번에 걸친 소용돌이 속에 오늘까지 개혁주의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1960년대는 미국 기독교의 전환점이다. 1965년 New Johnson 대통령의 “New Immigration Act” 은 미국에 이득보다는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Patrick Buchanon 은 그가 쓴 “The Death of the West" 라는 책에서 그렇게 강조한다.  동양계 소수민족의 미국으로의 이민이 홍수처럼 일어났고 이에 편승하여 힌두교와 불교 및 이슬람 같은 미국의 건국정신에 위배되는 종교 지도자들이 대거 미국에 유입되어 미국의 기독교적 건국정신은 점점 퇴색해 지기 시작했다.  

또한 1960 년대에는  Shirley MacLaine 이나 Benjamin Creme, Alice Bailey 등의 뉴에이지 운동이 일어났고, 힌두교 구루들이 미국 Oregon 주 Antelope 에 들어와서 Ashram 을 만들었고 당시 전쟁으로 실의에 차서 영적으로 방황하던 수많은 미국 청년들은 이에 심취하여 기독교 문화를 부정하여 처음으로 “이상한 반 기독교적 정서” 가 싻트기 시작했다.
오늘에 와서는 기독교는 “박물관에 소장되어야 할 낡은 종교” 로 인식되어지는 경향이다.

이와 함께  노스틱 주의도 부활하여 교회마다 노스틱 바람이 불어 교회는 금욕주의 및 직통주의를 믿는 신비주의에 접어들었는데 신비주의 운동은 Richard Foster 에 이르러 극치에 달했다. Kenneth Copeland, Charles Cabbs, Napoleon Hill Benny Hinn 등의 기복신학은 기독교의 교리를 미신화해 버렸다. 요즘은 소위 Emergent Church 운동이 만연하여 <기독교를 재해석 하자> 는 반 기독교적 신학 운동이 온 교계를 풍미하고 있다.  Brian McLane 이나 Doug Pagitt, Tony Jones 등이 그 중심에 서서 이런 퇴폐적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게다다 프랑스 소로본느 대학의 Michel Foucault 을 위시하여 Richard Rotty 나 Jacques Derrida 같은 이들이 주축이 된 Postmodernism은 사람들이 잉상생활에서 새활의 pattern 이 되었는데 postmodernism 의 중요한 가르침이 상대주의와 주관주의 이다  그래서 성경도 신학도 진리문제도 모두 Postmodernism 적으로 해석하자는 운동이 학자들 간에 성행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속에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목사들이 늘어만 간다.  그리고 <기독교는 폭을 넓혀 지금까지의 배타적 성격을 버리고 모든 것, 모든 신앙체계, 모든 종교를 포용해야한다> 고 주장하는 성직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간다.  이런 신학풍토에서 오늘은 가슴 아픈 어느 유명 목사의 신학 견해를 성경에 비추어 생각해 보고 저 한다. 가명으로 이름을 <그 목사> 라 하자.

얼마 전  중앙일보에는 “초보 개신교, 불교 내공과 천주교 성숙 배워야” 라는 제하에 중앙일보 모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 게재되어 본 선교회 회원 여러 사람들로부터 제각기 신문기사를 가위로 오려서 본 선교회 앞으로 보내왔으며 인터넷 전자메일로도 여러 사람으로부터 문의가 답지했다. “그 목사는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헌신적인 목사인데 어찌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가? 이제부터는  목사라고 부를 수없다“ 라고 모두 흥분했다. 이에 필자는 그 기사를 직접 읽어 볼 기회가 있었고, 역시 많은 글을 올려준 분들이나 정성스럽게 그 신문 기사를 오려서 나에게 우편으로 보내 주신 분들과 의견을 같이하여 그들에게 나의 입장과 본 선교회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기독교의 유일성 (uniqueness of Christianity) 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그가 한 말을 음미해 보고 그의 말이 과연 기독교의 하나님이 기뻐하실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비성경적인 말을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는지 판단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그날에 H목사님을 직접 판단하겠지만 그가 한 말이 이 땅에 살면서 신앙 생활하는 크리스챤들이 수용할 수 있는 말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모두 그가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니 그의 발언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한 가지 미리 부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 된 동역자의 한 사람으로 같은 동역자의 인격을 훼손하려는 생각은 없다. 단지 그의 신학을 성경에 조명하여 과연 그 목사의 인터뷰 내용이 성경적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발언들인가 여부를 가리자는 목적뿐, 그가 활동하는 다른 사역이나 그의 정치 이념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밝혀 둔다. 여기서는 그 기사의 사소한 일까지 다루지 않고 Calvin 의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이나  Francis Turretin 의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나 1647년의 Westminster Confession of Theology 에 비추어 고찰 하고 저 한다.  이런 신앙고백서들은 누구나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는 사람이라면 모두 인정할 개혁주의 적 문헌들이니 누구도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목사는 “한국 사람들은 비빕 밥을 많이 먹어서 다른 종교의 공존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기독교와 함께 다른 종교도 존속해야 될 이유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다른 종교도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그목사가 말하는 다른 종교에 영향을 주어서 천지의 대주 재이신 야웨 하나님을 알게 할 사명을 정통기독교 신자가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그목사의 생각은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목사의 <불교 예찬론> 이다. 그 목사의 말을 들으면 불교나 천주교는 우수하고 발전했으니 기독교는 아직 유치하므로 그들에게서 배우라는 어조로 들린다.

그 목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엔 별 사람이 다 있다” 고 하며 불교를 핍박하는 기독인이 있음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불교를 예찬하면서 불교의 좋은 점을 거론한다. 그 목사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불교는 세 가지로 한국에 공헌했는데 수천년 민족사에 정신세계를 이끌어 왔고, 둘째, 호국 불교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셋째는 수행이 뛰어 난다“ 는 등 세 가지로 불교 예찬론을 말하고는 기독교가 불교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과연 예수 이름으로 안수 받은 기독교 목사가 할 말인가?  불교에서 배우다니... 무엇을 배운다는 말인가? 우상을 배우라는 말인가?  그 목사는 불교를 우상으로 인정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우상을 우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가 믿지 아니하는 자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어찌 해석하는가?  (고후 6:15-16).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은 종교를 공부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사상체계로 기독교가 수용하지 못한 가르침인 것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 불교에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무엇을 배우라는 말인가?

그목사는 “캐톨릭은 개신교의 형님” 이라고 말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목사는 인터뷰 도중에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배워야 하는데 천주교는 형님뻘 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우지 않고 그의 형님인 천주교의 교황에게서 배워서 목회하는 모양이다. 천주교에서 기독교가 무엇을 배우는가?  과거의 천주교를 생각하면 기독교 신자들은 자다가도 펄떡 일어날 천인공노할 종교단체이다. 천주교가 과거 얼마나 많은 개신교 성직자와 성도들을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죽였는지 그 목사가 모를 리 없다. 그도 신학을 공부하며 교회사를 알고 있겠기 때문이다.

1572년 8월 23-24일 밤 프랑스에서 이른바 천주교의 <성 바돌로메오의 날> (St. Bartholomew's Day" 전날 밤 천주교를 믿는 프랑스에서 30년 간 나라를 통치하던 대왕대비였던 Catherine de Medici가 명령하여 위그노 족 (프랑스에서 칼빈주의를 믿는 개신교 성도들) 의 지도자 G. de Coligny 를 사살하고 그날 밤 프랑스 전역에서 개신교 목사 평신도 모두 합해서 10 만여명을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한 사건을 그 목사는 알고 있는가?  스페인의 종교재판에서 얼마나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이단 화형법” 에 따라 죽임을 당했는지 아는가?  영국에서 Henry VIII 가 죽은 다음 <사탄의 화신> 인 Mary 여왕이 등극하여 얼마나 많은 개신교 목사들을 죽였는지 아는가?  

지금 영국 Oxford 대학 교무처 앞 교정에 가서 순교자들 몇 사람이 서로 어깨동무하고 웅크려서 불에 타 죽는 모습을 한 청동상을 보라,  여기서 유명한 Cambridge 대학의 교수였던 Thomas Cranmer 도 Hugh Latimer (1485-1555), Nicholas Ridley (1500-1555) 등이 모두 천주교 신자 Mary 여왕의 손에 Oxford 대학에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서 몸이 거멓게 거슬려 가는데  Latimer 목사가 같이 불 속에서 죽어가는 15세 연하의 Ridley 목사에게 한 말은 아주 유명하여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명언으로
우리 개혁 성도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고통을 이기기 힘들어 하는 Ridley 목사에게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고함질러 주위의 구경나온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Be of good comfort, Master Ridley, and play the man.
              We shall this day light such a candle by God's grace
              in England as I trust shall never be put out."

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리 개혁성도는 이런 순교적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이 말을 대충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렇다: “리들리 목사, 크게 위로 받으라. 그리고 남자답게 행동하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믿기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촛불을 켜고 있단 말이요.”  아, 이 순교자들이 불에 타 죽으면서 켜 놓은 그 촛불 덕분에 지극히 적은 숫자이긴 해도 오늘의 성도는 아름다운 개혁주의 신앙의 진수를 아직도 누리고 있는 것임을 아는가가?  이래도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배워야 하는가?

불에 타 죽으면서도 “O Lord open the eyes of the King of England" (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 하고 외치던 순교자 William Tyndale 이 있었기에 우리는 훌륭한 영어 성경을 볼 수 있고 천주교와는 별천지의 아름다운 성경적인 참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33세 젊은 나이로 영국 Scotland 의 St. Andrews 성당 앞에서 못된 천주교 대주교 David Beaton (1494-1546) 에게 St.Andrews 성당 앞 인도에서 장작더미 위에 세운 기둥에 몸이 묶인 채 화형을 당하면서도 “주여, 나 같은 죄인이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시니 주여 은혜를 감사 합니다” 하면서 죽어간 George Wishart (1513-1546) 가 있었기에 우리는 Scotland 를 <장로교의 본산지> 라고 하고 George Wishart 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Wishart 교수의 호위병으로 양편에 날선 검을 지참하고 다니며 그를 호위하며 그의 말씀을 사모하던 John Knox (1514-1572)를 <장로교의 아버지> 라고 부른다.

Knox는 그의 mentor 인 Cambridge 대학 교수 Wishart 가 순교한 다음 천주교를 믿는 나라였던  프랑스 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프랑스의 상선에서 강제로 galley slave (노를 젓는 노예) 로 19 개월 동안 고생하다가 석방되어 영국의 Edward VI 의 궁정에서 court preacher (궁정 설교가) 로 일하다가 다시 Scotland  에 와서 Edinburgh 에 St. Giles Church를 세우고  Scotland 의 Mary 여왕과 파나는 싸움으로 개혁주의를 지켜나가며 1560 년에 나온 Geneva Bible (가장 좋은 제네바 성경) 의 도움으로 온 Scotland 의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장로교 정치 체제의 기반을 만들었다. 한편 Wishart 교수를 불에 태워 죽인 천인공노할 St. Andrews 성의 천주교 대주교 David Beaton 은 Wishart 가 순교한 그 다음 해인 1547년 바로 그 St. Andrews 성당에서 비참하게 암살당했다.  기독교의 원수 천주교의 Beaton 은 그렇게 죽었다. 천주교가 우리의 형인가?  천주가 우리의 동역자인가?
아니면, 우리의 원수인가?

여기서는 종교개혁 사를 강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 사람들이 천주교에게 박해 받으며
귀한 목숨을 잃어간 이야기는 끝이 없다. 오늘의 천주교는 더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죽이고 있다.  영적으로 죽이고 있다.  온갖 미신적인 그릇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하고 해치고 있다. 특히 죽은 John Paul II 라는 교횡은 마리아를 숭배하며 기독교의 CCC 의 Bill Bright 나 Billy Graham (올해 90) 같은 사람과 같이 합작하여 사역하면서 기독교의 독특성 (uniqueness)을  인멸하려고 했다. 정신이 이상해진 기독교의 몇몇 목사들이 1994년에 소위 <ECT> 를 만들어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이 손잡고 세계 선교운동을 하자고 나서고 있다. ECT 란 Evangelicals snd Catholics Together 라는 긴 이름의 약자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개신교 천주교 합동 세계 선교 협력기구” 이다. 이 가운데는 J. I. Packer 라는 Oxford 대학 출신의 Regent 대학 조직 교수도 서명하고 회원으로 들어 있다.

필자는 1994년 미국 서부의  모 한인 신학교의 학감으로 일하면서 Packer 박사에게 편지를 낸 적이 있다.  그 편지의 골자는 “개혁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당신이 천주교의 교리를 잘 알면서 어떻게 교리 타협이 없이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이 선교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에게서 온 대답은 “ECT 는 Charles Colson 이 천주교 지도자들과 만든 것인데 나는  측면에서 도와주는 것 뿐이라” 고 말했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교리를 타협하지 않고 무슨 일인들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유명한 D. Martyn Lloyd-Jones 목사가 쓴  “Unity in the Lord” 라는 소책자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들아야 한다.  교리가 다른 사람하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이다. ”주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주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하가 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천주교가 형님이니 형님인 천주교에서 배우라”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그 목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  <정의구형사제단> 이라는 천주교 단체가 한 동안 매일 데모로 순진한 청년들을 선동하여 반정부 운동을 하며 북의 김정일 정권에게 유리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만의 잘 못이 아니고 빗나간 개신교 목사들도 똑같이 비난 받아야 마땅하므로 그들 천주교 단체만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천주교 전체의 신학은 개신교와 아주 다르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그 목사에게는 형님이 될지 몰라도 다른 기독교 <정통신학, the orthodox theology> 을 믿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형이 아니라 전도의 대상인 집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천주교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들의 미신 같은 <마리아 숭배> 나 <여공의 교리> 이나 <연옥의 우화> 나 <수세 중생설> 이나 <화체설> 이나 성경에도 없는 <7성례>를 배우란 말인가? 칼빈은 27 세 되던 1536년에 <기독교 강요> 원고를 쓰면서 천주교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Calvin 이 죽은 후 그의 신학을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정확히 정립하여 후세에 전한 Francis Turretin 은 그의 방대한 걸작 <기독교 논증강요> 에서 천주교의 비성경성을 강하게 그리고 정당하게 비판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구미의  모든 조직 신학 책들은 모두 그의 이 책을 참고했다.

천주교에서 배울 것이 있다는 그 목사의 신학에는 문제가 많다. 누구도 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그 목사의 신학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이름이 있는 분이니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따질 것이 없이 진리일 것이고 따라야한다” 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는 교계 전반이 통제할 수 없이 타락해 가고 있다.  오늘 누구를 믿을 것인가?  바른 말을 하는 목사가 오늘의 교계에 과연 몇이나 되는가?  Warren 이나 Osteen 이나 Wilkinson 이나 Schuller 가 모두 목사이건만 그들이 과연 성경적인 바른 말을 하는가?   아니다. 이들이 얼마나 성경을 곡해하고 왜곡하는가?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이 교인들에게 독약 (venom) 을 먹이고 있는가를 눈뜨고 보라.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Stott), 하나님은 미래를 모른다 (Boyd), 기독교의 목적은 사회정의 구현이다 (Rauschenbusch), 손바닥을 아래위로 향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은헤가 온다 (Foster), 옛날 성경은 무효고 새로 나온 <A Course of Miracle> 만이 예수님이 참 말씀이다 (Schucman), 성경은 원래가 여성 위주로 기록했는데 중간에 누가 남성위주로 변개했으니 여성위주의 성경으로 고치기위해서 “도마복음”을 참고하자는 사람 (Pagels), 아무 종교를 믿어도 선행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Graham),  visualize 하면 무엇이나 기도하는 제목을 하나님이 들어 준다 (조용기). 관상기도가 참 기도이다 (이동원), Rick Warren 의 일을 적극 추처하는 사람 (옥한음), 예수께서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이며 이   말씅을 믿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유광수) 등 참으로 기독교계는 요지경 이다.이런 와중에서 기독교의 원로급인 그 목사가 “불교와 천주교의 성숙함을 기독교가 배워야한다” 는 말은 바로 믿는 많은 성도들을 실망시킨다.


그 목사는 “불교는 맏형이고 천주교는 둘째 형이고 기독교는 막내이니 기독교가 천주교나 불교에서 배우라” 고 가르친다. 그 목사 개인으로는 그런 집단에서 배울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을 바로 믿는 사람들은 고후 6장에서 하나님이 엄격이 명령하듯 그런 집단과는 상관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상관할 것도 없고 그런 집단에서는 배울 것도 없다.

그 목사는 또한 “기독교가 타종교를 배타하는 것” 을 꼬집는다. 성경말씀대로 타종교를 배타는 참 기독교 성도들을 “ultra-conservative Christian" 이라고 비난하지만 기독교를 바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모두 ”Ultra- conservative Christian" 이 안 될 수 없다.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자는 하나님이 뱉어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믿으려면 ultra-conservative 로 민어 “불의” 는 추호도 용서치 않는 것이 참 성도의 길이다. 예수를 열심히 바로 믿으면 그것이 고쳐야 될 <비정상 신앙 상태>란 말인가?  앞서도 언급했듯 모든 순교자나 Calvin 이나 Knox 같은 사람들은 그 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Ultra-conservative 한 사람들이니 모두 저들의 신앙태도를 고쳐서 천주교와 불교ㅔ서 배워야 할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 목사가 갖고 있는 신학은 무엇인가? 그는 우리 모두가 사이비 신자가 되어 적당히 아무 종교나 모두 대등하게 수용하기를 주장하는가?  기독교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진리는 하나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다 고 요한복음 14:6에 진리이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야웨 하나님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제1계명에서 엄하게 명령하신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apodictic law (필연적 율법) 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는 성격상 두 가지가 있다. Apodictic Law 는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말라“ 고 명령하는 율법이다. 십계명은 이에 해당된다. 한편 Casuistic Law (결의적 율법) 은 case law 이다. 즉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하라 는 식의 율법을 말한다. 가령 사람이 남의 양을 훔치면 4배를 같아 주라“ 는 식의 율법을 말하다.  십계명은 모두 Apodictic Law (필연적 절대적 율법) 이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고 하나님이 명령하면 그대로 지켜야한다. 거기에 반항하면 그는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사랑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야웨 하나님 말고 어떤 다른 신도 두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참 신앙이다.

그 목사의 신학은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개혁주의 정통신학으로부터 괴리가 생긴다.  그는 인터뷰에서 <기독교의 유일 신관> 에 대한 주앙일보 기자의 질문에 “그건 [기독교는 유일신관 (唯一神觀, monotheism) 이므로 다른 종교를 포용할 수 없지 않은가? 라는 기자의 질문] 유일 신관에 대한 오해입니다. 다른 이론을 배타하는 유일신 이 아니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유일신 이지요. 기독교인 아닌 사람을 거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가 다른 종교인에게 마귀소리 하는 것은 초보라서 그렇습니다” 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이 기독교 신학에서 수용될 수 있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로 수용될 수 없는 극히 비성경적인 언사이다.  유일신 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성경이 말하는 “유일신” 의 개념은 어떤 것인가?  그의 말대로 무엇이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혼합주의(syncretism) 사상일 뿐이다. 기독교는 혼합주의를 배척한다. 성경이나 <Westminster 신앙고백서> 나 어떤 역사적 신앙고백서도 그렇게 유일신이 모든 종교룰 수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기독교는 가장 배타적인 종교이며 가장 순수성을 요구하는 종교이다. 이유는 야웨 하나님은
독특하시고 유일하시며 그 앞에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 거룩하고 인격적이며 영원하고 스스로 계신 분으로 세상에서 “신”이라고 일컫는 어떤 피조물과도 견줄 수 없는 진리 바로 그 분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신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우상들이고 우상은 피조물이며 조물주가 아니다. 그 목사의 성경에는 “다른 모든 것을 포용하라” 고 되어 있는지 몰라도 정통 개혁주의 성도의 성경에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고 분명히 명령했는데 이 말은 다른 신을 인정하지도 말며 그런 신을 칭송하지도 말며, 그런 신과 상관도 하지 말며 그런 신에서 배울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성도는 바울의 말대로 <정결한 신부> 이다 (고후 11:2).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사도요한의 말대로 “진리 안에서 행 한다 (요삼 4).

또한 그 목사는 “나는 개신교 수도원을 만들겠어요. 개신교는 영성이 약해요. 개신교에 대한 비판을 달게 받아야지 알레르기를 일으키거나 거부감을 이르킬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나는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진보적으로 행동 합니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일부는 필자도 수긍한다.  요즘 기독교가 참다운 성경적 영성이 결여된 것은 누구나 참 성도라면 눈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얼마나 교회가 잘 못되어 가고  있는가? 참으로 요지경 세상이다. 개혁주의자들은 탄식한다.  칼빈주의(개혁주의)를 따르는 성도들의 눈으로 볼 때 “예루살렘의 여자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서 울라” 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때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 애곡해도 눈물이 없는 세대이다.

그 목사님은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은 진보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표리가 같아야 하므로 행동도 보수적이면 얼마나 바람직할까 생각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같은 차원이어야 한다.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을 보수적으로 믿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인가? 그것이 그가 말하는 대로 ‘ultra-conservative Christian" 으로 매도당할 신앙태도란 말인가?  언어도단이다.

이런 잚 못된 신앙관 때문에 오늘의 한국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적당히 믿는다면  과거에 우리 앞에 간  그 많은 성도들이 로마의 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살을 찢기며 사지를 찢기며, 혹은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타 죽을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들은 그 목사가 말하는 ultra-conservative 한 Christian 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 ultra-conservative 한 신앙 태도를 고치지 못해 바보처럼 죽어갔단 말인가?

“개신교를 비난하면 알레르기를 일으키거나 거부감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기독교는 비난의 대상이고 천주교나 불교는 기독교의 mentor 라는 말인가?  그 목사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의 구원의 도리를 잘 알 수 있는 사람으로 본다. 만일 그 근본적 차이를 안다면, 즉 사도행전 4:12에 “천하 만민에게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만민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 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 같다.  참 성도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at face value) 믿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자 (절대자란 상대할 자가 없다는 말) 이며 천상천하의 대 주재이신 우리가 믿는 <야웨 하나님>의 정확무오하신 말씅이기 때문에 그 야웨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피조물인 인생은 무릎을 꿇고 청종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이다.

그 목사가 <수도원을 만드는 것> 을 누가 말리겠는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만들 수 있겠으나 성경은 중세의 수도원 같은 seclusion  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다하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더 원하신다.  수년전  <중앙일보 종교란> 에 게재되었던
재미있는 기사가 생각난다. 한국의 합동측 (합동측에는 교단이 많다) 의 어느 교단에
속한 목사가 여자 전도사 몇 명과 같이 충북 “보은” 근방 산속에 “나살원” 이라는
“수도원” 을 만들어 산속에서 기도하며 성경 보며 마치 옛날 사해(死海) 서북편 Qumran 지방의 Essenes 족처럼 수도 생활 한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필자는 중앙일보의 그 기사 작성자에게 e mail 로 사실을 확인한 결과 “목사님, 그것이 이단의 무리라면 기사화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기사는 한국의 정통인 합동측 교파에서 일어난 사건이라서 기사화
한 것입니다“ 라고 하는 답신을 받고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해 가는구나?  종교개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던 노력은 어디가고 다시 천주교를 모방하다니... 쓴 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

<목사가 특권화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란 그 목사의 말씀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목사가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오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분들, 진리이신 주님이외에 다른 어느 종교도 관심이 없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영이 하나님에게 속 했는가 시험하여 보고 믿으라” (요일 4:1) 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 요리문답서>  제56문에 적힌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며 경종을 울린다:

제56문 질문: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3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제56문 대답: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3계명을 지키라 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죄를 지으면 사람의 형벌은 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형벌은 절대로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 목사의 가르침은 절대로 본받고 싶지 않다. 그의 신학이 개혁주의 정통신학으로 돌아와서 오늘의 생각이 바뀌어 지리를 바라는 마음이다. 헬라어에서 회개한다는 단어인 metanoeo 라는 단어는 “생각이 바뀐다”는 말이고, 히브리어의 “shub" 라는 말은 ”가던 기을 U turn 하여 되돌아 온다“ 라는 의미이다.  이런 변화가 그 목사에게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아주 놀라운 것은 인터넷 Google 을 검색한 결과 그목사의 이 이색적 인터뷰 기사에 대해 이견(異見)을 말한 사람은 목사나 평신도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흘러가는 방향을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한국의 기독교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1521년 꽃피는 4월 종교개혁가 Martin Luther 는 Worm 성에서 자기의 주장을 모두 취소하라고 다그치는 독일 황체와 로마 교황 앞에서 “내가 주장한 말이 성경에 위배된다면 취소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Stehe hier ich> (Here I Stand)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돌아가는 길에 천주교 사람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챈 Saxony 의 제후인 Frederick 의 지략(智略)으로 그를 Wartburg 성으로 납치하여 그곳에서 Martin Luther 로 하여금 자유로이 글을 쓰게 하고 성경도 번역하게 하여 1522년 일 년 만에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이 나왔고 1534 (혹자는 1536) 년에는 그 유명한 Martin Luther 의 신구약이 완성되었다. 그의 성경은 원어 성경 다음으로 정확하여 필자는 한글성경이나 영문성경이 모호할 때 Martin Luther 의 Heilige Schrift 를 참고한다.

특히 우리 성경 가운데 일부가 옛날 창세기 4:8에서 빼먹었던 가인의 말이 마틴 루터의 성경에는 들어 있어서 후세 학자들이 다시 루터의 성경처럼 그 성경구절을 고쳐 놓았던 사실은 이 성경의 우수성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그 빠진 대목은 창세기 4:8 중에 Da sprach Kein zu seinem Bruder Abel "Lass uns aufs Feld gehen." 란 부분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한글 성경에서 “우리가 들로 나가자 라고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라고 되어 있는지 살펴 보라. 아마 빠진 부분이 발견될 것이다. 그 빠진 부분을 Luther 의 성경에서 회복하 수 있다.

그는 요즘의 안일한 대부분의 목사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십자가의 군병>이었다. 그는 찬송가도 작사 작곡하였는데 384장 ”Mighty Fortress is Our God, 내주는 강한 성이요” 이 찬송은 바로 루터가 쓰고 그가 곡을 붙인 찬송이고 바로 이 찬송가가 필자가 운영하는 “튤립 신학 연구원 / 튤립 교육선교회”  의 교가 (校歌이며 주제가(主題歌) 이기도 하다. 우리 선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에는 이 찬송이 배경음악으로 들어간다.  그 찬송의 가사의 일부는 이러하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라고 3절을 끝내는데 이런 찬송시의 신앙고백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 Martin Luther 는 <Stehe hier ich 라고 자신의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못 박은 것이다. 이 얼마나 멋있는가?  오늘 이런 신앙의 인물이 아쉽다. 이런 신앙의 인물들을 발굴하여 같이 개혁주의 신학을
펴나가기를 기도해온지 20년이 흘렀건만  그런 인물은 교계에서나 신학교에서나 보이지 않는다. 진리 운동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루터의 신앙이 그리운 때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들어보라:

“나는 성경과 내 분명한 이성을 통해서 수긍하기 전에는 교황이나 공회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서로 상반되는 의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어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내 말은 취소할 수 없노라.”
(Philp Schaff. “History of Christian Church-Reformation 편” 중에서)  

우리 모두는 천주교나 불교가 아닌  위대한 종교개혁가 Martin Luther 와 John Calvin 에게서 배우자. 사진은 내년에 탄생 500 주년을 맞는 제네바의 종교개혁가 John Calvin.                                                                                -끝-

글: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회장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칼빈신학교 대학원 원장
10/8/08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