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1:12-17. 삶의 기준 : 예수님 | |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 |
1.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들은 언제나 선악을 판단하며 산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안 돼 혹은 잘했어’라는 말을 들으면서 생을 시작하고 안 되는 것과 되는 것 사이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다가 잘 죽었는지 혹은 잘 못 죽었는지 또는 아깝게 죽었는지등의 평가를 받으며 생을 마감한다. 문제는 이런 ‘판단 내지는 평가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있고, 사람들은 이 평가의 기준을 가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기 원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추상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단어들, 즉 사랑, 신실함, 근면 등은 사람이 지금까지 생각해온 가치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가치를 쪼개서 이성과 이성 사이의 사랑, 혹은 친구와의 사랑, 형제 사이의 사랑, 부모와의 사라 또는 어떤 공동체에 대한 사랑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실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근면함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가치들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하거나 이웃을 판단한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고린도 사람들에 대한 비아냥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고린도 사람 같다’는 말은 음란하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은 자신들에게 있는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고린도 사람 같다’는 말을 한 사람은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일반적인 가치에 못미친다는 의미이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그 말을 한 사람의 판단으로 볼 때 자신이 일반적인 가치에 못미쳤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어떤 기준으로 삶의 선과 악은 판단된다. 아브라함 하셀은 철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사람은 누구나 선악을 분별하기 위해 무엇인 올바른 가치인가를 질문하며 살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가 된다. 일반적인 종교는 이런 가치에 대한 질문의 답을 인간적인 방법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종교에는 답이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전도를 막자는 산헤드린의 토의 중에 바리새인 가말리엘이‘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사도행전5:36-37)’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전하려는 예수님이 참된 가치가 아니라면 없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2.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기준을 예수님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다. 바울이 스스로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된 것처럼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고린도전서 11:1) 바울에게 삶의 기준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즉 예수하기(Doing Jesus!)가 삶의 목표라는 말과 같다. 예수님은 갑진 진주의 비유나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참된 가치가 무엇이고 그 가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말씀하셨고, 잘못된 가치를 추구했던 집 나간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 잘못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잘못된 가치를 통해 얻은 만족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야 말로 가장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다르지 못하는 자신이 날마다 죽어야 함을 말하면서도 예수를 본받는 자신을 닮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3. 워드워즈가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한 이유는 ‘닮아가는 것 혹은 흉내 내는 것’에 있을 것이다. 예수하기(Doing Jesus!) 역시 예수를 닮는 것, 혹은 예수의 삶을 흉내 내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예수를 따라 살았던 자신의 삶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디모데후서3:11)’라고 말한다. 디모데가 보았던 것 같이 바울이 이런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신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이 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디모데전서1:13)’던 자신이지만,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기신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디모데전서1:16)’에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예수하는(Doing Jesus!) 자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바울의 삶의 본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본을 따라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디모데전서1:12)’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울은 가치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가 보았던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참된 가치를 따라가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가는 삶이라고 말한다(디모데후서3:17).
4.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참된 삶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 경건하지도 않고, 부족한 것들뿐이고,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 헤매며 산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우리가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닮아야 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가 아니면 세상이 주는 쾌락과 안락인가? |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1921&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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