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와 신앙생활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서론
흔히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은 ‘예배 출석 잘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수치’적이고 ‘물량’적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제대로’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배에 참여하되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렸느냐가 중요하고, 성경을 읽되 읽는 이유와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의 참 뜻을 깨달아야 하며, 기도를 하되 몇 시간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매우 수치적으로 생각한다. 이는 목회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노회에서 목사후보생들에게 종종 이렇게 묻는다. “하루에 기도는 몇 시간이나 하십니까?” “성경은 지금까지 몇 독을 했습니까?” 이러한 질문에는 신앙생활을 수치화하려는 생각이 매우 깊게 깔려 있다.
물론 수치를 완전히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오랜 시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을 적게 읽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고, 기도를 좀처럼 하지 않는 것을 자랑할 수 없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단순히 수치로 판단하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예배 출석을 빠지지 않고, 성경을 다독(多讀)하고, 기도하는 횟수가 잦고 길다 하더라도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다.
특히 성경읽기와 관련하여 수치화하는 경향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강하다. 그래서 연초(年初)가 되면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올해는 성경을 몇 독(讀)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다짐이 단순히 여러 차례 성경을 읽는 것에만 초점을 둔다면 개인의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신앙생활에 참된 유익을 주기 위해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Ⅰ. 계시와 성경
계시하시는 하나님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알려 주셔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시는데, 과거 구약 시대에는 꿈, 환상, 선지자를 통해, 그리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계시하셨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히 1:1; WCF 1:1).
이렇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을 사람이 아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이다(Belgic 2).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기록된 성경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은 각 시대 마다 계시하신 것을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 왕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을 통해 기록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렇게 해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성경’이다(Belgic 3).
이렇게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는 더 이상 이전의 계시 방식들은 중단되었다(WCF 1:1). 그래서 성경이 완전히 완성된 이후를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이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성령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발견해야 한다. 그 외에 다른 방식을 통해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계시다. 성경이야 말로 우리 신앙과 삶의 유일한 준칙이다(WCF 1:2).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요, 그 계시는 성경이다.
Ⅱ. 성경은 기본적으로 듣기 위한 것
성경의 기본적인 의도; 교회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
자기 자신에 관한 계시를 성경을 통해 완성하신 하나님은 그 성경이 어떻게 사용되기를 원하셨을까?
기록된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활용은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다. 성경의 기록 의도는 그 뜻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데에 가장 큰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본적으로 공예배의 설교를 위한 것으로 개개인 성도에게 있어서 성경은 ‘듣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들어야 한다. 성경은 ‘읽는 것’이기 이전에 ‘듣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이 주일 강단에서 선포될 때에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WCF 21:5).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의 계시를 주신 기본적인 목적에 부합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시려고 성경을 주셨다(참고. 마11:15; 막 4:23; 계 2:7,11,29; 3:6,13,22). 읽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듣는 것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성경을 읽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성경은 읽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듣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성경’이 ‘읽는 것’이기보다는 ‘듣는 것’이었던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소유할 수 없었다. 종이와 인쇄술이 발달하기까지 각 개인은 책이라는 것을 갖기 쉽지 않았다. 책 중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이가 아닌 양피지에 기록된 성경, 인쇄를 통한 방식이 아닌 필사(筆寫)를 통한 방식으로 전수되던 시대에 성경은 개인이 소지할 수 없었다. 종이가 발명되고 인쇄술이 발전하고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은 개인이 성경을 소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종이의 질이 아주 좋아서 성경책의 종이가 아주 얇다. 아주 얇은 종이에 양면을 인쇄할 수 있을 정도로 인쇄술도 발달했다. 그러다보니 성경책의 두께가 얇다. 하지만, 과거에는 성경의 두께가 상당했다. 그래서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혹여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집에 두고 보는 것이지 이동할 때마다 들고 다닌다든지, 교회당에 갈 때에 가지고 간다든지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둘째, 대부분은 문맹(文盲)이었다. 즉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문맹률이 오늘날처럼 낮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맹률이 높은 나라가 많다. 게다가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틴델이 영어로 번역하기 전까지는 대개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 혹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뿐이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데 개인적으로 성경을 가지고 있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1)
구약백성들이 성경을 주로 외웠고, 16-17세기의 성도들도 그러했고,2) 여수 애양원 성도들도 성경을 외웠다. 그 이유는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고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아예 외운 것이다.
또한 예배 순서 중에 ‘성경낭독’ 순서가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고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주일날 교회당에 와서 목사를 통해 성경이 낭독되는 시간에 비로소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부연설명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낭독’ 하면 ‘설교본문낭독’만을 생각하는데, 교회 역사에 보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다.3) 그 순서가 있었던 이유는 앞서 설명한 대로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오직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릴 때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 전체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있었던 순서가 ‘구약성경 낭독, 신약성경 낭독’의 순서였다. 이 순서를 통해서 성경을 연속적으로 읽어감으로써(lectio continua) 1년에 1회 혹은 2-3년에 1회 정도 성경을 1독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개개인이 성경을 소지하고, 그래서 그 성경을 날마다 읽는 삶을 사는 것은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만 있었던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전혀 없는 일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아주 열악한 국가나 문맹률이 높은 국가에서는 여전히 성경은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듣기 위한 책’이며, 예배 중에 말씀 선포자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들으라
기독교 역사 중 거의 상당 기간 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들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주어진 기본적인 의도는 ‘듣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만약 성경이 ‘읽는 것’에 기본을 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환경들을 조성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이 ‘듣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500년 전의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지 않았어도(엄밀히 말하면 읽을 수 없었어도) 그 사람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성경을 듣는 일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읽지 않는 것 자체를 단순히 나쁘다고 폄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경은 듣는 것을 기초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이기 이전에 ‘듣는 자’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들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일예배를 통해서 선포되는 설교가 성경을 듣는 시간이다. 비록 읽지 못해도 듣는 것만으로 감히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읽지 못해도 듣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참고. 딤후 3:15; 롬 10:17). 물론, 잘 들어야 한다. 바르게 이해하고 들어야 한다. 이것이 수반되지 않고 단순히 ‘듣는 행위’만 있다면 그것은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한다.
Ⅲ. 성경읽기와 신앙생활
성경은 기본적으로 듣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만, 성경의 1차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로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발달이 있었고 경제가 발달하여 그 결과 개개인의 성경읽기가 가능해 졌다.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 각 개인이 성경을 소지하게 되었다는 점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주신 성령 하나님의 ‘배려’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듣되 더 나아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은 듣기 위한 것이므로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식의 핑계를 대어서는 안 된다.
읽기의 방식 - 통독과 정독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을 읽는 목적에 따라 크게 2가지 방식이 있다. 바로 통독(通讀)과 정독(精讀)이다. 이 2가지 방식은 항상 병행되어야 한다. 이 때 그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통독(通讀)
먼저, 통독(通讀)에 대해서 살펴보자. 통독의 사전적인 의미는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훑어 읽는 것을 말한다. 글의 전체적인 주제와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두루 읽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한국교회 그리스도인의 상당수가 주로 사용하는 성경읽기 방식이다.
그러나 ‘한국적 통독’은 그 자체로 큰 유익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통독을 단순히 목표달성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1년에 몇 번 통독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면서 통독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좋은 글귀를 찾기 위한 통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본문의 앞뒤 문맥을 고려한다든지, 본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적 의미를 염두에 둔 읽기가 아닌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개인 경건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를 달성’했다는 자만(自滿)으로 인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적 통독’은 ‘묵상’이 수반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일 공예배를 통해 선포된 설교말씀에 기초한 묵상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통독만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통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통독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목표달성을 목적으로 하는 통독과 아무런 목적의식 없는 통독을 피할 뿐이다. (물론 아예 읽지 않는 것보다야 목표달성을 목적으로라도 읽는 것이 나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통독을 해야 하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읽기의 기초는 교회에서의 듣기다. 그러므로 통독은 ① 듣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② 들은 것을 되새기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 중심에 ‘듣기’가 있다.
① ‘듣기 위한 통독’은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들을 때에 다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하는 통독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파악하는데 초점을 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정보’로서 그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모르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설교자가 그러한 기본적인 내용을 설교 때 마다 일일이 말해줄 수는 없다. 설교 전체의 흐름과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통독의 목적은 설교자가 일일이 언급해 주지 않아도 알아 두어야 할 성경의 기본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듣기를 위한 통독이다. 성경 기록의 의도인 ‘듣기’라는 행위에 충실하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데 통독은 그것을 돕는 좋은 보조가 될 수 있다.
② ‘들은 것을 되새기기 위한 통독’은 설교를 통해 혹은 성경공부 등을 통해 얻은 지식을 되새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통독을 통해 교회로부터 배운 것을 재확인 하는 것이다. 주일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계속해서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되 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통독은 중요한 도움이 된다. 꾸준한 통독을 통해, 이미 들었던 말씀들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꾸준한 통독은 ‘듣기’에 도움을 준다. 게다가 참된 신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 때 어느 특정한 말씀을 그날 살고, 그 다음날은 다른 특정한 말씀을 사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오늘은 제1계명을 지키고, 내일은 제2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제1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를 지키고, 내일도 제1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를 지킨다. 건전한 성도의 삶은 어느 하루는 이 본문을 따라 살고, 어떤 날은 저 본문을 따라 살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 통독은 전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게 하는데 적잖은 도움을 준다. 이처럼 ‘성경 통독’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전체를 우리의 삶 가운데 계속해서 되새기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듣기’가 ‘읽기’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한다.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통독을 하되 1년에 몇 독을 목표로 하는 통독이 아니라 통독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생각하면서 목표와 상관없이 통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독(精讀)
다음으로 정독(精讀)에 대해서 살펴보자. 정독의 사전적인 의미는 책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생각하여 읽는 것으로, 글자와 낱말의 뜻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자세히 읽는 독서법이다. 모르는 단어나 의미를 그때그때 해결하고 문장이나 단락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며 다른 독서 방법보다 비교적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 방법은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통독에 치중하다보니 잘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정독하는 일은 성경읽기의 아주 중요한 방식이다. 성경을 정독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성경을 정독하는 것도 반드시 공예배를 통해 들은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정독의 방식 중 하나로 입으로 소리 내어 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루터는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다. 루터는 큰 소리를 내면서 읽고 반복해 읽으라고 권한다.4) 소리 내어 읽는 방식은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책읽기 방식이다.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이라고 서당에서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던 방식이다. 참고로, 눈으로만 읽는 방식은 서양적 책읽기 방식이다. 그런데 정독은 동양적 책읽기 방식에 따라 하는 것이 유익하다.
성경 통독을 강조하는 한국교회가 아주 간혹 정독을 강조하는데, 주로 QT(Quiet Time)라는 방식이다. QT는 묵상의 한 방식인데, 이에 대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QT식 묵상이 듣기를 떠난 읽기가 되거나 성경전체에 근거한 해석이 아닌 자의적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 본인도 QT식 묵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대학시절부터 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그러한 묵상을 권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묵상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것5)과 다르지 않다. 묵상은 분명히 필요하다. 묵상(meditatio)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요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이 해 오던 것이다. 시편 1:2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을 정의하기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한다. 성경은 분명 “성경을 묵상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묵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묵상해야 하는가? 시편 1:2에 나오는 ‘묵상하다’(hg"h')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개역개정의 난하주를 보면 “히.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묵상하다’는 말은 이 외에도 ‘중얼대다, 속삭이다’라는 뜻이 있다. 즉 궁시렁 거린다는 말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소리 내어 읽다’는 뜻이다. 즉 ‘묵상’이란 말씀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다.6) 말씀을 곱씹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묵상’은 불교나 힌두교의 묵상이나 명상과 다르다. 그냥 잠자코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입으로 자주 뱉어 내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돕자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양의 전통적 책읽기 방식을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내용을 곱씹는 것이다. 앞서, 루터가 성경을 읽을 때에 큰 소리를 내면서 반복해서 읽으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다. 더 나아가서 본문이 말씀하는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 걷고, 개인적으로나 의인들의 모임에서 그 말씀을 읽고 찬송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먹는 것이다.7) 늘 곱씹는 것이다.
이 때 묵상의 기본적 기초는 주일 설교다. 그리고 교회의 교리교육이다. 그것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변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이단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 성경읽기는 반드시 교회의 치리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QT식 묵상이 잘못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매우 개인적인 읽기와 묵상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QT식 묵상은 사변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이단이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성경읽기와 묵상은 반드시 ‘듣기’를 기초로 해야 한다. 이 때의 ‘듣기’는 주일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미 들은 말씀을 다시금 되 내이면서 기억을 되새기고 그것을 통해서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설교를 열심히 듣는 사람이 성경을 안 읽는 것은 문제가 덜 되지만, 설교를 전혀 안 듣는 사람이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교회 강단에서 은혜 받지 못하고 그것을 개인적 성경읽기와 경건서적 독서로 대신하려고 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Ⅳ. 효과적인 성경읽기를 위한 팁(Tip)
습관을 형성해야
성경읽기는 바쁜 일상 가운데 따로 시간을 내어서 해야 하는 것이므로, 일종의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인간의 본성상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습관 때문에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읽기 위한 습관을 들이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는 것이 좋다. 매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매주 몇 시부터 몇 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정해놓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장소도 정해 놓는 것이 좋다. 조용한 곳에서 통독과 정독을 병행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주일을 성경읽기의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다. 주일 점심식사 후 오후예배 시간까지 다른 성도들과 대화의 교제를 할뿐만 아니라 때로는 교회당 내의 조용하고도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성경읽기를 하는 것도 유익하다.
함께 읽기
신앙은 개인적이지 않다. 신앙이란 공적이고 공동체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읽기도 지나치게 개인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홀로 방에 앉아 나 혼자 펼쳐보기 위한 책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교회에 허락하신 책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공적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한 자리에서 함께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시간과 장소에 있어서의 일치가 아니라 한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읽기를 한다는 점에서 일치를 유지하게 해 준다.
특히 주의 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라는 것과 관련하여, 주일(主日)은 성경읽기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장로교 예배모범에서 가르치는 바이므로 교회 공동체가 주일에 다함께 성경읽기를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중 주의 날의 성수에 관하여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주의 날의 성수에 관하여 (Of the Sanctification of the Lord's Day)
(전략)
공적인 엄숙한 모임들 사이의 공백 시간에는 설교를 읽고, 묵상하고, 반복하는데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 특별히 가족들을 불러서 그들이 들은 바를 설명하고, 요리문답을 공부시키고catechising, 거룩한 의논holy conferences, 공적 규례에 주실 복을 위해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며, 환자를 방문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relieving, 그와 같은 경건piety과 사랑charity과 자비mercy의 의무를 하여 안식일을 기쁨delight으로 여길 것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헌법(2011년판) 예배지침 제2조 (예배) 제2장 ‘주일성수’ 제6조에서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6조 (주일에 행할 일) 주일에는 기도, 묵상, 찬송, 성경연구, 공예배 참석, 기타 전도, 구제 등 선한사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 간에 교제를 힘써야 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헌법 예배모범의 경우 제1장 제6항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1장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 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헌법(2006년판) 제4편 ‘예배와 예식’ 1-3. 예배의 시간에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3-1-4. 공중예배를 마친 후에는 그 남은 시간을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기도, 찬송, 성경공부를 비롯하여 신앙의 대화나 경건한 서적을 읽도록 할 것이며 병자 위문, 가난한 자 구제, 불신자를 위한 전도 등을 하면서 예배를 통하여 받은 사랑과 은혜가 생활에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어떤 역본을 읽을 것인가?
성경은 다양한 번역본이 존재한다. 한글의 경우 개역개정, 개역한글,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바른성경(한국성경공회), 두란노 우리말 성경, 쉬운 성경, 그 외에도 아주 많은 번역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번역 성경을 읽을 것인가? 먼저, 주일 강단에서 사용되는 성경은 교단 총회가 공식적으로 ‘강단용’이라고 지정한 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임의로 다른 성경을 강단에서 사용하는 것은 교회 질서에 어긋난다. 대신 개인적인 성경읽기와 묵상은 기본적으로는 ‘강단용’을 사용하되, 당회나 목사의 지도를 따라 적절한 번역본을 함께 읽는 것도 좋다. 필자는 두란노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상당히 좋아서 개인적인 성경읽기를 위한 좋은 역본으로 추천한다.
영어가 가능한 분들은 NIV, NASB, KJV나 최근에 나온 NKJV, ESV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8) 원어(히브리어, 헬라어)가 가능한 분들은 원어 성경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단,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나 원어로 읽으면 뜻을 더 잘 분별할 것이라는 교만함에 근거한 원어성경읽기는 절대로 추천하지 않는다. 원어로 읽을 실력을 기를 시간에 다른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이 좋다.
도움을 받아야 함
사도행전 8:26-40에 보면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대화가 나온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 수레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이 때 빌립이 그 수레에 가까이 간다. 그리고는 묻는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행 8:30) 이 질문에 대해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라고 대답한다(행 8:31). 그리고는 빌립으로 하여금 가르쳐 달라고 청하고 빌립은 그가 읽고 있는 이사야 53:7 이하의 말씀임을 알고는 사도행전 8:35에서부터 그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말한 대로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를 통해 도움을 얻어야 한다. 또한 가르치는 일에 은사가 있어서 함께 장로 된 다스리는 장로의 도움을 얻는 것도 좋다(참조. 딤전 3:2). 그리고 시중에 나와 있는 좋은 성경해설서를 참고하되 이 때도 항상 교회의 치리 하에서 하는 것이 좋다. 즉 목사에게 부탁하여 좋은 성경해설서를 추천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사적(私的)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가능케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교육을 받아’(an educated ministry)9) 그래서 가르칠 수 있도록 인허 받은 ‘가르치는’ 직분자를 없애지는 않았다.10)
유럽의 개혁교회 성도들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칼뱅의 성경주석 전집을 비치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스터디 바이블이나 단권 주석, 그 외에 성경읽기에 도움이 되는 책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단, 반드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11) 그것은 마치 ‘공적인 강도권’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서 설교를 듣는 것과 같다.12)
성경읽기와 기도
성경읽기를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읽기에 항상 필요한 것은 ‘기도’(oratio)다. 성경이 문자로 되어 있다고 해서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능력이 탁월하고 문장 해독력이 좋다고 해서 성경을 잘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성령님의 조명(照明)하심(illumination of the Spirit)이 필요하다. 이것은 ‘계시’의 독특성이다. 이러한 독특성을 무시한 성경읽기는 그저 ‘독서’가 될 뿐이다.
Ⅴ. 읽기를 넘어 삶으로
읽고, 그리고 살아라
성경은 듣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읽는 것이다(lectio). 그런데 듣고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을 살아내야 한다(tentatio). 듣고 읽으면서 정작 살지 않는다면 그 듣기와 읽기는 무의미하다. 우리의 삶이 들은 것과 읽은 것에 기초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기 위해서 성경을 듣고 성경을 읽는다. 물론 살기 위해서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완전히 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완전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고 읽고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래야 듣고 읽는 것이 유의미하다.
기도하고 읽고 묵상하며 살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신학함이다. 그래서 루터는 기독교 전통에 따라 “기도(oratio)-묵상(meditatio)-추구(tentatio)”를 강조했는데, 이것은 신학자로서의 성도가 해야 할 신학방법론이다.13)
결론
성경 읽기를 강조하는 교회도 많고 목회자도 많지만, 정작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은 지를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주일 예배를 통해서 말씀의 봉사자를 통해 사용된다. 그 기본적인 목적에서 벗어난 읽기는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다.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그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다면 이제 읽어야 한다. 읽기 위해서 잘 들어야 한다. 잘 듣는 자가 잘 읽을 수 있고, 잘 읽는 자가 잘 들을 수 있다.
Tolle lege, Tolle lege14)
(작성 완료일: 2016년 2월 5일)
1)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8절은 성경이 모든 나라의 자국어로 번역되어야 할 것을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2) 청교도 목회자 가운데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암송한 이들이 많았다. 특히 그들은 라틴어나 성경원어로도 암송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3) 교회 역사 속에서 성경낭독은 크게 3가지가 있었다. 구약성경 낭독, 신약성경 낭독, 설교 본문 낭독이 바로 그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구약과 신약을 모두 낭독하는 전통이 있었다. 4세기 말이 되자, 권위있는 예전 양식에서는 성경이 3차례 낭독되었는데, 그 중 한 번은 구약, 한 번은 복음서, 한 번은 서신서를 낭독했다. 마지막 낭독은 언제나 복음서에서 이뤄졌는데, 복음서를 낭독하는 동안에는 성도들이 일어선 상태로 있었다. James D. Robertson, Minister’s Worship Handbook (Grand Rapids: Baker, 1974), 52.
4) Willem van’t Spijker, Bidden om te Leven (Goudriaan-Kampen: De Groot, 2000), 황대우 옮김, 『기도 묵상 시련: 루터와 칼빈이 말하는 참 신앙의 삼중주』(수원: 그책의 사람들, 2012), 26, 119, 122.
5) 어떤 논증이 부당하다고 해서 그 논증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오류이다.
6) 김정우, 『시편 주석 Ⅰ』(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2005), 155; 최종태, 『시편 주석 Ⅰ』(서울: 횃불, 2006), 241.
7) 유진 피터슨은 성경읽기와 관련된 책을 쓰면서 그 제목을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Eugene H. Peterson, Eat This Book (Grand Rapids: Eerdmans, 2006), 양혜원 옮김, 『이 책을 먹으라』(서울: IVP, 2011).
8) 번역성경을 사용함에 있어서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KJV(흠정역)성경만이 가장 바른 번역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성경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씀보존학회(Word of God Preservation Society)와 성경침례교회(이송오 목사)의 주장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말씀보존학회는 이미 한국교계(통합측과 합동측)가 1998년과 2002년에 각각 이단으로 규정한바 있다.
말씀보존학회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는 D. A. Carson, The King James Version Debate (Grand Rapids: Baker, 1979), 송병현, 박대영 옮김, 『킹 제임스 버전 성경의 오류』(서울: 이레서원, 2000); 권동우,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의 망상』(서울: CLC, 2016)을 참고하라.
9) 종교개혁은 ‘가르치는 직분자’는 ‘교육받은 자’여야 함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제들이 교회를 허물었던 역사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10) R. C. Sproul, Knowing Scripture (Downers Grove: IVP, 1977), 이세구 옮김, 『쉽게 쓴 성경 해석학』(서울: 아가페, 1993), 37.
11) 가르치는 자 없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한 지적으로 다음을 참고하라. Sproul, 『쉽게 쓴 성경 해석학』, 42-43.
12) 가르치는 장로가 되기 위한 공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교회로부터 소명을 확인받은 적도 없어서 임직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돌아가면서 설교하는 형태(이른바 ‘평신도 설교’)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성경적이지도 교회사적이지도 않다.
13) 이 방법론은 루터의 것으로 시편 119편에서 얻은 것이다. Luther, Vorrede zum 1. Band der Wittenberger Ausgabe (1539), WA 50, 659ff; O. Bayer, in C. H. Ratschow, ed., Handbuch systematische Theologie 1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1994), 67-105; idem, “Wer ist Theologe,” in M. Beintker, ed., Rechtfertigung und Erfahrung (München: Kaiser, 1995), 209; 유해무, 『개혁교의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41; 유해무, 『신학: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송영』(서울: 성약, 2008), 211. 이러한 삶의 방식을 가장 잘 설명한 책으로 Willem van’t Spijker, Bidden om te Leven (Goudriaan-Kampen: De Groot, 2000), 황대우 옮김, 『기도 묵상 시련: 루터와 칼빈이 말하는 참 신앙의 삼중주』(수원: 그책의 사람들, 2012)가 있다.
14) 이 단어는 라틴어로 “집어 읽어라”(Pick it up, read it)는 뜻이다. 이 단어는 어거스틴(354~430)이 회심하게 된 동기가 되어 유명해진 말이다. 그의 고백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소리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계속 노래로 반복되었던 말은 “집어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금방 눈물을 그치고 그 말을 새겨보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 중에 저런 노래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에 그런 노랫소리를 들어 본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며 성경을 들고 펴서 첫 눈에 띄는 구절을 읽어보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Augustinus, Confessiones,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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