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언약적 대화!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
기도와 언약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 교제하시는 방법이다.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창 6:18) 노아와 맺은 언약이다. 그 외에도 아브라함 언약, 시내 산 언약, 모압 언약, 세겜 언약, 다윗 언약 같은 것들이 있다. ‘언약을 세우다’ 혹은 ‘언약을 맺다’라고 할 때 동사 ‘맺다’는 뜻은 ‘사람이나 실이나 밧줄을 얽어서 매듭 짓는 것’을 말한다. 또 ‘언약을 맺다’의 ‘맺다’는 ‘자르다’라는 뜻으로 짐승을 칼로 피의 언약을 맺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언약을 맺는다. 그 때 짐승을 잘라 피를 내고 반으로 나눠 놓는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하나님 혼자 지나간다. 이렇게 짐승을 잘라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맺으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 언약이다.
이 언약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 언약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약의 체결도 혼자,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셔서 이루시고 그 후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언약의 요구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그런 점에서 언약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 백성을 향한 맹세인 셈이다.
이 언약의 관계에 들어간 당사자인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기 위해 믿고 순종해야 한다. 이 언약을 맺은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특별한 혜택과 은혜를 누린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복을 누린다. 그 표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주셨다. 할례도 ‘잘라내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다. 곧 피를 내는 의식이다. 언약 자체도 피를 흘리고 그 표도 피를 흘린다. 구약에서 행해진 모든 피 흘리는 제사는 바로 이 언약적 의미가 들어 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모든 옛 언약은 새 언약의 그림자이다.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옛 언약을 완성하셔서 새 언약을 만드신다. 이제 더 이상 피 흘리는 언약 행사인 할례와 성전 제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큰 일’(Magnalia Dei)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불러주시고(소명) 언약을 통해 특별한 관계를 맺어 주시고(언약) 표와 인을 새겨주신다(할례와 세례).
기도는 언약적 관계에서 사귐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사귐을 위해 주신 복이다. 우리의 소원을 기도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생각은 기도의 일부분만 표현한 것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죄인을 하늘나라의 시민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담대하게 온 우주의 왕이신 분에게 나아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됨 자체가 은혜이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방법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를 통해 그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은혜의 방편이다.
한국인의 기도?
한국어 ‘기도’(祈禱)는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빈다’는 뜻이다. ‘빌 기(祈)’ + ‘빌 도(禱)’가 합쳐진 말이 ‘기도’다. 한국인에게 기도는 글자 그대로 ‘비나이다 비나이다’이다. 수능 시험 치기 전날 절에서 부처님께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의미의 기도이다.
이런 전통적 기도의 의미가 그대로 그리스도인에게도 들어와 있다. 기도를 단순히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하나님께 고하고 구하고 부탁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성경적 기도와는 다르다.
기도, 언약적 대화!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무엇일까? 기도는 언약의 위치에서 등장하는 은혜를 받는 방법이다. 성경의 언약은 그 기원에 있어서 일방적인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그 시행에 있어서는 쌍방적이다. 언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명령하시고 약속하신다. 그러면 언약 백성은 기도로 반응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데 대한 인간 쪽에서의 반응이다. 하나님과 사귀는 방법이 바로 기도인 셈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기도라는 히브리어, 헬라어, 심지어 라틴어 단어까지 모두 대화와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 ‘아마르’(amar)는 ‘말하다’ 혹은 ‘대화하다’라는 뜻이다. 신약 성경의 헬라어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도 ‘누구에게 말하다’이다. 라틴어 단어도 ‘오라러’(orare<oratio)로 ‘대화하다’ ‘말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어만 ‘기도’가 ‘비나이다 비나이다’(祈禱)라는 뜻이다. 기도는 언약 백성이 언약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사귀며 의사소통하는 통로이다. 기도는 말하며 대화하는 것이다.
기도, 일방통행 대화가 아니다.
많은 경우 기도를 일방적으로 쏟아놓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자기의 생각과 소원을 쏟아놓는다. 사람끼리도 대화 할 때 자기 말만 늘어놓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것은 올바른 대화가 아니다. 대화는 듣고 말하는 것이다.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 관계는 좋아질 수가 없다. 종종 금식기도는 ‘단식투쟁’이 되기 일쑤고, 철야기도는 ‘철야농성’이 된다. 40일 금식기도의 경우도 그렇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전통 샤머니즘적 기도가 우리 가운데 들어온 것이다. 이런 형태의 기도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기도, 언약에 대한 믿음의 반응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약속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는 뜻이겠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창 15:4-6)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한 아이가 나게 될 것인데 그 아이를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약속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다. 막연하게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라고 생각하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 쪽에서 그 믿음에 대해 하나님을 향한 반응의 표현이 기도이다. 기도는 당연히 대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기도가 ‘말하다’ 혹은 ‘대화하다’라는 뜻이다. 믿음의 표현이 기도인 셈이다. 기도는 말씀, 곧 약속과 분리할 수 없다. 말씀이 없는 곳에 기도가 있을 수 없다. 기도만 있고 말씀이 없으면 자기도취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자기만의 종교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기도’는 반드시 약속인 말씀, 곧 성경을 읽고 난 후 하는 것이 좋다. 교회 기도회를 보면 반드시 말씀이 있다. 설교 말씀이 있고 난 후 기도한다. 어떤 사람은 기도회에 왜 설교가 있느냐고 불만하지만, 말씀이 언약의 약속이기에 그 언약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기도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기도의 내용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 기도는 내 소원을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복을 다시 복창하는 것이 기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무슨 기도를 해야 하죠?’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기도는 대화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표현, 곧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읽은 성경 말씀과 배운 교리(교훈)를(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받고 자신의 말로 신앙을 고백하면 된다. 그것이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만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소원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가 복종하게 해 달라고 하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기도는 관계 지향적이어야
하나님과 사귀며 대화하기 위해서는 관계가 우선한다.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내 요구를 일방적으로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기도가 제대로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도의 내용을 보자.“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우리가 예수 안에 있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곧 약속이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과 머리속에 가득해야 한다. 그 때에야 비로소 바른 기도를 할 수 있다. 그 분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다. 내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방 종교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차이가 난다. 이방 종교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먼저이다. 그리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진다.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뜻이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그렇게 약속을 듣는 것이 우선이고 그 이후에 우리가 그 약속에 반응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에서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대화를 할 때 죄를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의로우신 율법에 자신들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느낀다. 기도자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의 죄와 그 죄로 인한 비참한 처지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해야 한다. 이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 만약 우리의 죄를 용서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회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자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을 믿는 자는 회개한다. 회개하는 자는 믿음이 있는 자이다. 이렇게 기도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살아가는 사람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겠는가!
교회는 자신의 세속적 실력과 성공을 자랑하며 노래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자신의 죄와 비참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성공과 일하심을 자랑하며 노래하는 곳이다. 교회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며 자랑하는 곳이 아니다.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며 슬퍼하는 곳이다. 동시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 기쁘고 복된 소리가 또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비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 가운데 고백하고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그 죽으심이 우리가 기도 가운데 고백하는 바로 그 죄를 위한 것임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크신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것이 기도 가운데 죄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복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도가 언약적 대화라는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기도는 그냥 일방적으로 내 뱉는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믿음으로 받고 기뻐하는 교제이다.
기도, 은혜의 방편
전통적으로 개신교회에서는 은혜의 방법을 세 가지로 얘기한다.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통해 불러일으키신 믿음을 굳세게 하신다(HC 65문). 그런데 기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법일까? 성경을 잘 요약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이 점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88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덕을 끼치는 데 쓰시는 통상적인 방도는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덕을 끼치는 데 쓰시는 통상적인 방도는 그 분이 정하신 것인데,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기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방편일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4장 1항), 소요리문답(88문)과 대요리문답(154문)은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왜 은혜의 방편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도의 정의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8문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인데, 우리 죄에 대한 고백과 그분의 긍휼을 감사히 인정함으로 해야 합니다.”(대요리문답 178문)
우리는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대체로 소원과 희망사항을 하나님께 빌면, 하나님께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기도를 은혜를 받는 ‘통로’ 혹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기도는 소원을 이루는 ‘만병통치’ 혹은 ‘만사형통’의 방법으로 이해한다. 수많은 기도에 대한 책들이 출판되었고 그런 책들은 베스트셀러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기도가 은혜를 받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과연 성경도 기도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 성경은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의미를 다른 의미로 가르친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멸망할 죄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죄인(롬 3:10-18)은 거룩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런 죄인이 하나님과 만나 사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기도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Christ) 기도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 말씀을 듣고 얘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기도는 은혜의 방편이다.
기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과연 그분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우리의 육체가 원하는 것은 욕망과 욕심과 탐욕일 뿐이다. 그런 것을 기도해 봐야 하나님께 올라가지도 않는다. 잘못된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롬 8:26-27).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도움을 받아 기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
이제 기도의 최종 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대요리문답 178문) 이제 우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기도의 정의에 가까이 왔다. 곧 기도란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원을 하나님께 마음껏 기도할 수 있군요’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도는 관계니 뭐니 말했지만, 역시 내 소원을 말하는 것이 기도야!’ 이방 종교에서는 그런 것만을 기도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소원을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하늘이 들어줄 것으로 믿는다. 실제로 그런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100일 기도했더니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좋아한다. 자녀의 대학입시를 위해 부처에게 기도한 사람의 자녀들도 대학에 붙기도 한다. 그러면 그들은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행복해 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아뢸 소원이 무엇이어야 할까? 기도의 내용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 6:25, 31-33)이다. 우리가 구할 것은 ‘우리의 소원’이지만, 그 소원은 사실 하나님의 뜻이며 그 분의 나라여야 한다. 우리의 소원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기도이다. 성경에는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그 분의 소원을 기도 가운데 복창해야 한다. 그것이 기도의 바른 의미이다. 그러니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지만, 우리의 세속적 욕망을 들어 달라고 떼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 감사!
이제 기도의 또 다른 면을 살펴보자. 그것은 기도를 감사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감사가 아니라, 공로로 생각한다. 열심히 기도하면 그 공을 봐서라도 들어주실 것이라는 착각이다. 기도 자체가 선을 쌓는 공덕이라고 생각한다. 기도의 고행과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은 것이다. 밤낮으로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몇 시간이고 울면서 기도한다.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울면서 중얼거리는 장시간의 기도는 감사의 기쁨에서 나오는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공로이다. 그들에게 기도는 하나님께 바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려고 하지 않고 뭔가 드리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 노력 하면 하나님께 그 나머지를 책임지신다는 공로사상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감사이다. 기도와 감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기도의 단계에서는 아직 감사가 나올 수 없다. 기도의 소원과 요구가 응답되고 성취되었을 때 ‘감사’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빠에게 ‘아빠, 출장 갔다 올 때 꼭 레고를 사 오세요!’라고 요구한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레고를 잊지 않고 사 온 순간 ‘아빠, 감사해요!’라는 감사가 나옵니다. 만약 아빠가 레고를 사오지 않았으면 감사가 나올 리 없다. 기도가 단순히 소원성취라면 감사는 조건적이다. 그러나 기도 자체가 감사인 것은 기도가 영광스런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에게 대화를 걸어오시고 어마어마한 은혜를 주신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자체가 감사의 표현이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 있던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처음 성찬에 참여하게 될 초신자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대여!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오! 이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아닌 담대함으로 나아가십시오. 다시 말하면 기도할 때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오.’(엡 3:12) 실제로 성찬예식에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주님!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쁨과 자연스러움으로 ‘아버지’라고 감히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주기도문으로 기도가 이어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기도문에서 ‘감히’라는 단어가 돋보인다. 우리가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다가가 대화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이 감사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며, 우리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죄 용서와 긍휼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기도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표현임에 틀림이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기 원하는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라. 기도가 감사이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다.
성전, 기도하는 집!
우리는 기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한다는 의미를 이사야 56장 7절 말씀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여기서 ‘내 집’은 성전이다. 성전이 왜 기도하는 집일까? 성전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하나님과 사귀려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성전에서 죄의 고백과 피 흘림의 제사가 있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이렇게 성전에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으니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전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함으로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나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는 자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과 사귐을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 향을 피우는 것!
성경은 기도를 성전에서 분향하는 것, 곧 향을 피우는 것으로 표현한다.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것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보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성전의 성소에서 제사장이 향을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 향연이 곧 기도이다. 기도는 이처럼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한다.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런 아름다운 교제가 가능케 되는 것이 기도이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 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결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 할지며,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출 30:7-9) 기도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하라는 말이다. 절대로 세속적인 다른 생각을 넣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향으로 살라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참 기도이다. 다윗도 이렇게 시편 141편 2절에서 노래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기도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향과 같다. 구약 시대에 성소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향을 피웠다. 이것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의 향기로운 교제를 말해 준다. 기도는 일방적으로 우리의 소원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죄인의 아름다운 교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요구하신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지 말고 계속하라는 뜻이다. 쉬지 말라는 말은 죽도록 힘에 부치도록 열심을 내어 금식하며 결단하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곳에는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기도하는 단체가 있다. 가정과 직장을 내팽개치고 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쉬지 말고’라는 말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니, 하나님과의 대화를 쉬지 말라는 뜻이다.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좋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좀 특별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대화가 쉽지 않다. 기도로 대화 할 수 있지만, 우린 이교적 기도의 습성에 젖어 우리 얘기만 늘어놓기 일쑤다. 이것저것 달라고만 한다. 기도해 놓고 기다리지도 않는다. 너무 많은 것들을 달라고 했기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을 위해 필요하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좋아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하나님은 기도로 대화하는 자를 가까이 하신다. 기도는 언약 백성에게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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