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자의 소명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직분과 관직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 직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지만, 관직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 직분(목사, 장로, 집사 혹은 권사, 더 나아가 노회나 총회의 직위)을 관직으로 혼돈해 직분을 탐하고 선거 운동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직분의 왜곡이며 교회의 타락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직분의 자리에서 일하는 사역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는 것임을 밝히려 한다. 그것을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으로 살펴본다.
섬김으로서의 직분
요즘 ‘직분’(office, officium)이라는 말 대신 ‘봉사’(섬김, ministry, ministerium)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직분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교권적, 성직자 중심적인 부정적 인상을 피하려는 의도이다. 주로 회중교회적 경향에서 비판하는 것인데 그 결과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그 부정적 영향이 직분의 권위를 손상시키게 되어 안타깝다.
모든 봉사가 직분은 아니지만,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다. 그래서 ‘직분적 섬김(봉사)’(official service)이라고 말한다. ‘직분’ 혹은 ‘섬김’으로 번역되는 ‘디아코니아’(diakonia)는 이웃을 위해 섬긴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청지기는 식탁에 수종(隨從)드는 자로서 음식을 식탁에 나르므로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돕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직분자는 자기의 영광이나, 물질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섬김으로서의 직분은 오직 한 길, 곧 그리스도의 섬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전 생애를 하나의 큰 섬김으로 이해했다(눅 22:26-27; 요 13:13-17; 막 10:42-45).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빌 2:7).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다(막 10:45).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직분적 봉사는 ‘섬기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요 12:26; 13:14).
그리스도인이 받은 각종 은사는 섬기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섬김과 무관할 수 없다(벧전 4:10). 그리스도의 종은 ‘교회의 일꾼’(골 1:25; 고전 3:5)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를 닮아 그의 말씀을 교회에 성실히 봉사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직분은 신약적 디아코니아의 시작이요 기초다. 그리스도는 디아코니아란 말로 그의 전 생애를 요약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사명은 화목의 말씀을 겸손히 이 세상에 전하고 봉사하는 것이었다. 봉사신학의 출발은 기독론에 의존한다.
경륜(오이코노미아)으로서의 직분
‘오이코노모스’(Oikonomos)는 ‘청지기’며 ‘종들의 머리’다. 집안의 모든 일을 잘 돌볼 책임을 지고 종들의 생계를 돌보는 자가 청지기다. 직분자는 청지기의 의미가 있다. 청지기란 말에는 다음 네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집 주인의 계획적 사역, 둘째, 주인을 통한 일의 위촉, 셋째, 일의 시행을 위해 청지기가 받은 권한, 넷째, 집 주인에 대한 청지기의 책임이다. 이런 의미는 곧 직분자에게 고스란히 부여된다. ‘경륜’이라는 단어가 ‘비밀의 경륜’(엡 1:9; 3:9), 곧 ‘구원의 경륜’에서 드러나듯이 직분적 봉사를 통해 이루어진다(골 1:25). 그리스도인의 은사와 섬김과 청지기적 봉사가 한 구절이 잘 나타난 곳이 베드로전서 4장 10절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기에 ‘은사’와 ‘봉사’와 ‘경륜’(청지기)가 함께 등장한다.
직분자의 중요성
누가 교회를 주관해야 하는가? 당연히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선포와 그리스도의 교육과 그리스도의 목회와 그리스도의 구제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위해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일하신다. 이 때 그리스도께서는 직분자를 쓰신다. 직분자(diakonos)는 섬기는 자다. 교회의 직분자는 사람을 섬기는 자이지만, 사람의 종은 아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종이다. 직분자는 사람이 투표해 뽑지만, 사람의 대표나 일꾼이 아니다. 투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세우는 과정에 불과하다.
전통적으로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에는 교회의 직분자로 목사, 장로, 집사를 둔다. 하나님은 은사를 주셔서 직분으로 부르시고 일하게 하신다. 그래서 은사를 가진 자가 직분자로 세우지지만, 모든 은사가 직분자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직분자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과정을 통해 세워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셔서 직분을 주실 때는 그 권위도 함께 부여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위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것이 직분자의 과업이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영광스럽고 그의 과업은 중대하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도구이고 대언자가 되기도 한다. 개혁신앙적 직분의 의의는 직분 그 자체가 아니라, 직분을 위임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있다. 만약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직분이나 직분자가 있다면 잘못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직분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계시된 것에서 출발하며, 그 직무의 수행 또한 그러하다. 구약시대의 대표적 직분자는 제사장, 선지자, 왕이다. 신약시대의 대표적 직분자는 사도, 목사, 장로, 집사 등이다. 장로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직분자로 인정한다.
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교회에 세워진다. 직분자가 되는 것은 스스로 자임함으로 될 수 없다. 먼저 하나님의 소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내적(은밀한, 개인적) 소명(calling)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교회를 통한 소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외적(공개적, 공적) 소명(calling)이라고 부르자.
1. 내적 부르심
하나님이 사람을 직분으로 부르실 때 인간의 내적 지정의를 사용하신다. 사람의 감정과 지식과 의지를 사용하신다는 뜻이다. 직분을 사모하는 생각과 마음과 의지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데 그것이 내적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desiring a noble task)이 은밀하게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이런 내적 부르심의 모습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 받아 내적으로 다음과 같은 움직임이 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바울도 그렇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없이 직분자가 되는 경우도 있을까? 그런 자가 있다. 그런 자들은 거짓 직분자다.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나는 하나님의 소명을 확신하는가?
둘째, 나는 직분의 사역을 사모하는가?
셋째, 나는 직책에 참여해야 한다고 느끼는가?
그런데, 내적 부름은 개인적이고 은밀하기 때문에 거짓과 참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 거짓 부름도 많다. 구약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아합 시대에 400명의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이다(왕상 22장).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참 선지자인 미가야의 뺨을 치며 참 선지자 노릇을 했다. 거짓 부름으로 확신에 찬 거짓 직분자는 언제나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내적 부름이 없는데도 목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선망해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 고시를 통과해 목사가 되기도 한다. 혹은 성도가 장로나 혹은 집사 직분을 얻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 띄는 주차 봉사나 혹은 찬양대, 혹은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 투표수를 많이 얻으면 교회의 직분을 감투로 얻는다. 이것은 직분의 타락이며 왜곡이다. 하나님의 복은커녕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참 하나님의 부르심인 내적 부르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직분자가 된 사람은 본인과 교회를 위해 큰 피해를 줄 것이다.
혹시 내적 부름이 없는데도 장로나 혹은 집사로 선택된 사람은 그 다음 단계에서 내적 부르심이 없음을 밝히고 물러날 수 있다. 내적 부름이 없는데도 직분자가 된 사람은 영적으로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교회에 큰 손해를 준다.
2. 외적 부르심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우선하며 먼저다. 그러나 내적 부름을 확정할 수 있는 기준이 모호하다. 내적 부르심은 언제나 외적 부르심으로 확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 모두 중요하다. 스스로 직분자로 부름 받았는지를 확신하려면 내적 부름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외적 부르심을 통해 확증을 받아야 한다. 개인 스스로 하나님의 부름을 확인하려면 두 가지가 모두 있어야 한다. 교회적으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 하려면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예를 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가 바로 사도적 사역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사도로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불러 세워 외적 부르심을 확정한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1-3)
이런 공적인 부르심은 그가 가진 외적인 모습들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즉 내적 부르심이 외적 부르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다른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에 제시된 직분자의 자격을 보면, 내적인 경험과 부름 받은 느낌에 대한 것보다는 외적 부름에 대한 것으로 가득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에서 목사의 직분의 외적 부르심에 대해 다룬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딛전 3:1-7)
목사로 내적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가정과 사회에서 적절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가르침과 다스림, 그리고 돌봄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적 부르심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적 부름이 있는 사람은 다음의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목사로 부름 받은 합법적 자격이 갖추어졌는가?
둘째, 교회 성도들로부터 목사로 부름 받았음이 확인되는가?
셋째, 목사를 위한 필수 은사들이 있는가?
넷째, 목사 직분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는가?
외적 부름만 있고 내적 부름이 없는 경우는 허용불가이다. 어떤 사람이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에서 일정 기간 강도사로 사역했지만, 내적 부름이 의심 되면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그런 자를 목사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 한국 교회의 현실은 부목사의 청빙에서 외적소명을 검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다. 부목사 청빙은 대체로 당회의 결의로 이루어질 뿐 교인들의 투표로 선택되지 않는다. 이것은 고쳐져야 할 부분이다. 심지어 목사가 되어 사역하고 있는 경우에도 내적 부름이 확실하지 않으면 목사직분에서 내려 와야 한다. 이것은 장로와 집사 직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내적 부름은 있지만 외적 부름이 없으면 당연히 허용불가이다. 목사에게 요구되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정 기간의 수련기간과 교회의 질서 속에서 요구되는 과정들이 하나라도 부족하면 하나님의 부름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외적 부름이 분명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든가 때로는 중단해야 한다.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내적 외적으로 나눠서 확인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서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이 교회 안에 계시며 일하신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종처럼 그분의 교회와 그 분의 나라를 위해 일한다. 중요한 그 일 때문에 세우는 그 과정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직분자가 없어가 아니라, 직분자를 잘못 세워서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직분자를 잘 세워 주님의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져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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