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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38-42. 종교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마리아

사랑

by 김경호 진실 2016. 10. 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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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38-42. 종교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마리아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1. 우리는 다름을 이야기했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혹은 거룩한 자들, 즉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세상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세상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에게 있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히브리서12:2)바라보는 것인데, 그 이유는 예수님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이야기한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바라본 분일뿐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갖고 우리와 같은 삶의 고난을 당하신 분이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4:15)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과 다른 삶을 즉, 거룩한 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해서 세상과 다른 삶을 살게 된다.

 

 

 

2. 다름은 세상의 가치와 일반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포기함으로 만들어진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상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포기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창세기12:1)갔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삶의 모습을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빌립보서3:7-8)긴다고 말한다. 따라서 포기함은 하나님을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믿음으로 세상적 가치와 세상의 삶의 방식을 포기한 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믿음으로 그들은 지금을 내려놓은 사람들이고, 그렇게 믿음으로 지금을 포기한 자의 가장 확실한 모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본다. 예수님은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과 분리시키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다름을 이루는 원리는 그래서 사랑이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22:37-39)고 말씀하시면서 이 두가지의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태복음22:40)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상황과 환경에 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5:16-18)가 된다. 여기서 요구되는 기쁨과 기도 그리고 감사는 환경과 상황에 매이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고난과 아픔 가운데에서도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된다.

 

 

 

3. 이런 다름은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게 만든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온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체를 상세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이야기가 전하기 원하는 멧세지를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본문은 더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마리아가 취한 이 좋은 것은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이 좋은 것을 취하지 않은 이유를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는 이런 마르다의 상태를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누가복음 10:40)함 이라고 말한다. 마르다는 내가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했다는 말이다. 이런 마르다의 태도는 내가 신에게 다가가는종교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불만스럽게 된다. 그래서 마리아에 대한 불만을 예수님께 말씀드린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태도는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 서는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믿음은 언제나 들음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음은 상대방의 인격과 나의 인격이 만날 때 가능한 일이다. 마음이 분주한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고, 마르다처럼 자기주장을 하게 된다. 충분히 이유가 있는 주장이고, 당연한 요구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들음은 분주함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태도에 대하여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도리어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누가복음10:42)많은 것으로 분주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기쁘게하는 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말씀을 듣는 것은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인격과 인격 혹은 나의 전부와 말하는 자의 전부와의 만남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위해서 예수님은 이웃과의 불화나 갈등을 해결할 것을 말씀하신다. 마음에 앙금이 있는 자는 하나님과의 만남,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을 들은 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마르다가 택한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 가운데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대접으로 분주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분주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고, 심지어는 종교적인 중독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르다 처럼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201610월이 지나간다. 가을이 깊어지는데, 이 가을날에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에 열심을 내어봄은 어떨까?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1991&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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