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35-39. 율법에 매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 |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 |
1. 사랑받음 그리고 사랑받음에 대한 감격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스스로의 부족과 그 부족에 대한 자각’을 통한 애통함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마태복음5:6)’가 되게 하고 그 의가 삶에 드러나기 위해서‘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마태복음5:10)’가 만든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를 하나님은 인정해준다. 그가 비록 집을 아버지의 죽음을 선포하며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집을 나간 아들일지라도 아버지를 바라보고 돌아오면 그를 맞아줌으로 위로를 준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는 이유는 애통하는 자는 유대인들처럼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고, 율법의 자구에 매이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루어지는 율법의 참 의미를 드러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들은 율법을 초월한 율법적인 삶, 즉 율법에 매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 최소한의 규정을 이야기하는 율법의 한계를 넘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따라가는 삶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4)’라고 말한다.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마치 주검에 매여 서서히 죽이는 로마의 사형법에 의한 처형을 받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죄에 대한 문제가 율법 안에는 해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은 마음에 원하지 않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마서7:20)’때문이라는 말이다.
2. 유대인들이 율법에 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긴 역사를 살면서 종교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열방의 힘에 의해 망하고 난 이후, 그리고 귀환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율법적’으로 변했는데, 이것이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이 된 이유이다.
유대인들은 고레스 이후 귀환하면서 성전 재건에 힘을 쏟았는데 성전재건이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서부터 가능한 사역이기 때문에 이들은 특별히 외형적인 성전재건과 함께 공동체의 재건을 위한 율법 준수를 강조한 것이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에스라의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에스라7:6)’라고 말하는 것이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는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함으로 이방 사람들과 통혼한 이스라엘의 현실 앞에서 에스라는‘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에스라9:3)’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에스라9:10)’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런 에스라의 개혁은 점차적으로 종교적인 모습을 띄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율법주의, 즉 인간의 공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행칭의(以行稱義)’사상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근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본질을 외면하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겨워 스스로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의 노력과 나의 공로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3. 그래서 ‘이신칭의(以信稱義)’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한다.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8:2)’라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로마서8:26)’하심으로 드러난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더욱 더 확연해진다. 하나님은‘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로마서8:32)’이 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고, 결국 우리는 그 사랑을 알기에 또 그 사랑을 통해 살기 때문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로마서8:35)’라고 묻는다. 아무도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믿음으로 알기 때문이다.
4. 바울은 혹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마서8:35)’의 위협을 당하거나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로마서8:36)’을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넉넉히 이긴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런 이김의 이유는 당연히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를 애통하게 만드는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의 문제 앞에서도 당당히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 앞에서 그 고난의 잔을 피하기를 원했던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담담히 삽자가를 향해 가실 수 잇었던 것 아닐까?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못 미치는 자신의 가난함을 애통해 한다.
그리고 그 애통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에 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1956&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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