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예정론
(“칼빈과 일반은총”1)에서 발췌 (2))
저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영문번역: 게할더스 보스 (Geerhardus Vos, 미국 구 프린스턴 신학교 성경신학 교수)
한글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로마 가톨릭에서 믿음이란 세례 시 주입되는 은혜를 받도록 인도하는 일곱 가지 준비들 중 단지 하나일 뿐이고 따라서 종교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별 가치가 없고, 그저 구원에 이르는 완전하고 충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사랑의 보충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믿음(fides historica; ※역자주: 역사적 기록들에 대한 동의) 일 뿐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믿음이란 바로 첫 시작부터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의롭다 함을 얻는, 구원받는 믿음(fides justificans salvifica) 으로서 그것은 원리와 본질에 있어 역사적 믿음과 다르다. 그것은 그 대상으로 하나님 자신,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성경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 그 분의(그 자신의) 복음으로 입게 된 그리스도 (Christum Evangelio suo vestitum) 를 갖는다; 그것은 그 본질에 있어 변치 않는 확실한 지식이고, 머리보다는 마음의 지식이며, 지성보다는 실천이며(firma certaque cognition, cordis magi squam cerebri, et affectus magi squam intelligentiae), 이해 (apprehensio) 보다는 확신(certitudo) 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믿음은 의심을 넘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그려줬고 (Dei bonitatem perspicue nobis propositam),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 평온한 마음(tranquillis animis) 으로 설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외감의 원리로 간주된다. 이는 경건의 첫 단계가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나라의 영원한 상속에로 이끄실 때까지 우릴 지키시고 다스리시며 돌보시는 우리 아버지이심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rimus ad pietatem gradus est agnoscere Deum esse nobis Patrem, ut nos tueatur, gubernet ac foveat, donec colligat in aeternam haereditatem regni sui).
그러므로 모든 종교개혁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롭고 유효한 뜻은 복음의 배후에 그리고 믿음의 배후에 놓여있다. 아니, 이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은 복음 가운데 그리고 믿음 가운데 드러나고 실현된다. 이것이 왜 종교개혁자들에게 복음과 믿음에 대한 종교적 이해가 그들의 예정론(predestination)에 대한 신념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이유다. 이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종교적 사고의 습관을 상실했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개인적 필요를 스스로 덜 느끼고 따라서 종교적 관점으로부터 세상을 해석할 욕구도 덜 느끼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의 시대는 자연과학을 통해 사고하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연의 전능한 법칙과 전능한 힘으로 대체했고 따라서 스스로를 운명론의 손에 맡겨버렸다. 그것은 오랫동안 예정론에 대한 믿음을 능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무리 자주 그것들이 혼합되고 혼동될 지라도, 이 둘 사이에는 원리적 차이가 존재한다. 운명론은 원칙적으로 합리주의적이다; 그것은 자연법칙의 지배로부터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고 있고 주장하기를 이성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그 실제 존재하는 모습과 동일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이성적이라고 한다. 반면 예정론은 철저히 종교적인 개념이다. 자연 법칙을 인지할 수 있고 자연의 힘을 감안하지만, 예정론은 이것을 의지하거나 자연적 필연성을 역사의 첫 번째와 마지막 단어로 간주하길 거부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으로 여기기를 배운 이는 하나님의 뜻에 다다를 때까지 세상과 모든 현상 이면에서 자신의 길을 돌이킬 생각을 반드시 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따라서 윤리적 종교적 특징을 담고 있는 – 세상의 흐름의 기원과 발전과 목적에 대한 진상을 알고자 힘써야 한다. 이것은 어떤 종교적 운동이 역사에 나타나자마자 예정(predestination)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모든 종교에 해당되지만, 기독교 역사에 특별한 타당성을 가지고 적용된다. 기독교가 그 본질에 있어 참되고 완전한 종교로서, 순전한 은혜로서 뚜렷하게 체험되고 평가되는 것에 비례해서 그것은 또한 – 변증법적 연역의 필요성 없이 직접적으로 – 예정의 고백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에 [예정론에] 동의했다. 루터에게 있어 예정론이 실천적 이유로 후에 배경으로 강등되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심지어 루터조차 결코 예정론을 철회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종교개혁과 인문주의가 단번에 갈라서게 된 것은[의지의] 속박(servum) 과 선택의 자유 (liberum arbitrium(free choice)) 에 관한 논쟁에서 였다. 로마 가톨릭 수도승들에 대한 자신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Erasmus)는 계속해서 로마 가톨릭 교도로 남았다. 바로 1534년에 루터는 카피토(Capito)에게 편지를 보냈다: “노예의지론과 교리문답을 제외하고는 나는 내 책 중에 온전한 것을 알지 못한다(nullum agnosco meum justum librum nisi forte de servo et catechismum).” 따라서 예정론은 칼빈의 발견물이 아니다; 그것은 칼빈 이전에 루터와 츠빙글리에 의해 고백되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종교적 경험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원했다. 만약 칼빈이 어떤 수정을 했다면, 그것은 그가 예정론에서 가혹하고 자의적인 면을 제거했고 더 순수하게 윤리적-종교적 특성을 그 교리에 부여했다는 것이다.
모든 유사성과 일치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와 달랐다. 그는 루터의 감성적 성품을 공유하지 않았고 츠빙글리의 인문주의적 성향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가 회심했던 – 우리에게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아직 매우 불완전하게 알려져 있는 사건 – 때, 이 경험은 즉시 어떤 후속적인 수정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분명하고 깊고 조화로운 통찰을 동반하였다. 1536년 3월에 나온 기독교강요 초판은 이후의 이슈들로 확장되고 분량이 많아졌지만, 그것은 결코 변경되지 않았고, 그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야 했던 과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신의 삶의 목표로 남았다. 루터에게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fides justificans) 에 거의 전적으로 흡수되었고 츠빙글리는 일방적으로 믿음을 생명 얻는 혹은 중생 받는 믿음(fides vivificansor regenerans)으로 규정한 반면, 칼빈은 그 개념을 구원받는 믿음(fides salvificans)에 관한 것으로 넓혔다. 이 구원 얻는 믿음은 그 사람의 존재와 의식에서, 영혼과 몸에서, 그의 모든 관계와 활동에서 전인을 새롭게 하는 믿음이고 따라서 삶의 전 분야 – 교회와 학교와 사회와 국가와 과학과 예술 등 – 에서 거룩하게 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 포괄적인 과업을 이룰 수 있기 위해서 – 참으로,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구원받는 믿음(fides salvificans)이기 위해서, 믿음은 우선적으로 충분히 저절로 확신 되고 더 이상 모든 의심의 바람에 의해 앞뒤로 흔들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왜 믿음이, 루터나 츠빙글리에게보다는 칼빈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 든든한 보증이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려 준다.
그러나 만일 믿음이 그러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모든 의심의 가능성이 제거된 진리에 기초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그 자체의 증언과 힘으로 스스로가 실제임을 증명해야 한다. 거센 폭풍에 도전할 집은 모래 위에 세워질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의 배후에는 반드시 진리, 하나님의 뜻과 행동이 놓여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하나님의] 선택의 열매 혹은 결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을 경험하는 것이다.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칼빈은 이 하나님의 뜻을 상기한다. 무한히 다양한 현상, 다양성, 불평등, 부조화 그리고 정반대의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은 피조물의 뜻이나 사람의 가치나 무가치함으로부터 설명될 수 없다. 불평등과 정반대의 것이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지정에서 가장 확연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이것에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영역에서 – 사람들에게 지정된 서로 다른 거주지들에서, 몸과 영혼 가운데 그들에게 주어진 서로 다른 재능과 힘에서, 건강함과 아픔, 부와 가난, 번영과 역경, 기쁨과 슬픔 사이의 차이에서, 다양한 계층과 소명 가운데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선택 교리의 반대자들에게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고 하자: “왜 인간은 소나 당나귀보다 더 고귀한 존재인가? [그리고] 그들을 개로 창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에도, 왜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는가?” (cur homines sint magis quam boves aut asini, cur, quum in Dei manu esset canes ipsos fingere, ad imaginem suam formavit.)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숙고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더욱 의뢰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가운데서 세상의 존재와 그 본질을 위한 궁극적 토대를 발견하게 된다. 선과 정의와 정당한 보상과 징벌에 대한 모든 기준들은, 우리가 그 적용에 있어 익숙한 악에 관하여, 세상을 측정하는데 전적으로 부적합한 것으로 입증된다. 하나님의 뜻은 전 세계에 대한 그리고 그 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가장 깊은 원인이고- 그 사안의 성격상 - 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숨은 계획(absconditum Dei consilium) 보다 더 궁극적 근거는 없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세상의 신비는 지성과 가슴이, 신학과 철학이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의뢰하고 그 가운데서 안식을 찾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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