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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교회론

by 김경호 진실 2017. 2. 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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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

칼뱅이 본 교회의 구조

               

미셸 조네 박사(Dr. Michel Johner)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장칼뱅대학 학장

A. 서론

2009년 칼뱅의 탄생 500주년을 맞아 종교 개혁자 신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발표됐다. 하지만 칼뱅의 교회론을 다루는 연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칼뱅의 교회론은 대부분 ‘기독교 강요’에도 나와 있지만, 매우 발전되고 완전한 교리로, 한 전문가에 의하면 ‘개혁자 신학 중 가장 잘 구성된 집합체다’.

특히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라틴어와 불어로 1536년부터 1562년까지 출판된 ‘기독교 강요’의 여러 판을 보면 칼뱅이 27세부터 53세까지 (사망 2년 전까지) 교회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살아 있는 그림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B. 가시성과 불가시성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

1) 근본적인 차이

칼뱅의 교회론은 근본적으로 칼뱅이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라고 칭하는 두 개념의 근본적인 구분을 중심으로 완성된다.

1543 라틴어판에서도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성경은 교회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 때로는 ‘교회’라는 용어를 쓰면서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오직 양자 됨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들인 자들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속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이 교회에는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성도들만이 아니라 세상이 시작된 이래 모든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교회’라는 명칭이 땅 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의 무리를 지칭하기도 한다. 곧, 세례를 통하여 믿음에 속한 생활을 시작하고, 교리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계명이 따라 설교를 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한다.

이 교회에는,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저 이름과 외양 뿐인 많은 외식자들이 뒤섞여 있다 : 야심을 가진 자들과, 탐욕스러운 자들, 쟁투를 일삼는 자들, 악담하는 자들, 그리고 생활이 매우 부정한 자들이 거기에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일시적으로 용납되는데,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증거가 없거나 권징이 언제나 합당하게 정상적으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불가시적 교회를 우리가 마땅히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는 것으로 믿어야 함과 마찬가지로, 가시적 교회를 존귀히 여기고 이 교회 안에서 교통를 유지하도록 (MJ :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다 ».

칼뱅에게 있어서 성경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없다. 성경은 교회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으며, 신학에서도 이를 구분하고 지켜야 한다.

2) 두 개념의 관계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잘못된 이해

교회에 대해 말하며 칼뱅은 또 다른 표현 조합도 사용하는데, 가시성×불가시성과는 다른 것이며 혼동하지 말하야 한다.

a. 참 교회와 거짓 교회 ?

예를 들어 교회와 거짓 교회에 대해 말하는데, 참 교회와 거짓된 교회는 모두 가시적이며, 각각이 매우 구체적이다. 교회가 ‘거짓될 때’ (즉, 제도로써의 교회가 교회 ‘표지’를 잃어버릴 때) 그 순간 불가시적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 교회가 모두 죽는다면 더이상 문제가 없을텐데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면도 있다. 교회로 인정받은 교회는 불가시적이게 되지 않는다(다양한 성육신의 모습을 유지하기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a. 지역 교회와 우주적 교회

지역 교회와 우주적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칼뱅에게 가시성과 불가시성은 동시에 우주적 교회와 지역 교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가시성×불가시성 관계는 조각×전체의 관계가 아니다. 조각(지역교회)은 마찬가지로 이중성을 띈다. 우주적 교회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불가시적이지 않으며, 오늘 (프랑스, 네덜란드와 한국의 개혁교회의 만남처럼) 우리 만남처럼 성육신화 되고 가시화 되어야 한다. 교회의 가시성을 우주성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전 기독교적(에큐메니칼) 작업의 소명이다(물론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 부분임은 틀림없다).

c. 변증법적 관계

칼뱅의 가시성×비가시성 관계의 문제는 개신교 전통 내에서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

…. 두 개념간의 관계성을 강조하든지 (P. Althaus,)

….두 개념이 반대됨을 강조하기 위해 (E. Brunner, P. Tillich)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한편, 칼 바르트는 두 개념간의 ‘변증법적 관계’ 에 대해 말한다. 칼뱅의 글에 대해 과한 합리화나 강요된 조화를 피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이다. 하지만 칼뱅은 일관적이고, 조화롭고 풍성하다고 판단한 부분을 오히려 너무 빠르게 모순적이거나 역설적이라고 결론 짓는다는 큰 단점이 있다.

a. 언약과 선택

결국 내가 볼 때 아우구스트 르쎄르프가 칼뱅의 가시적 교회론을 자신의 은혜의 언약 교리와 연결하고, 칼뱅의 불가시적 교회론을 자신의 선택 교리와 연결지으며 가장 적절한 설명을 제시해 주었다.

… alliance de grâce et élection sont en effet distinctes, dans la pensée de Calvin, tout en étant corrélatives, la première étant la « pépinière (nurserie) ou le tremplin de la seconde, … le cadre juridique ( a priori) / la modalité historique par laquelle il plait à Dieu que l’élection de ses enfants se révèle dans l’histoire (a posteriori) .

3) 변증적 이중 관점 : 가톨릭교와 재세례파

마지막으로 사전에 말씀드려야 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칼뱅의 교회론이 발전한 배경인 변증적 이중 관점이다.

먼저 칼뱅은 자신의 교회론의 오른쪽에는 가톨릭 교회, 즉 교회 또는 그리스도의 몸을 시간적인 교회 제도, 즉 로마 가톨릭 교회와 하나로 보는 가톨릭교와 구분되고자 했다.

이러한 싸움 속에서 칼뱅은 루터가 말하는 ‘교회의 불가시성 선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칼뱅은 자신의 교회론의 왼쪽에는, 즉 정 반대편에 있는 (재세례파 등) 개신교 급진파의 교회 개념과 구분되고자 한다. 이 극단적인 신령주의나 신비주의에 의해 결국 교회 제도와 제도적 사역의 필요성이나 적극적인 신학적 입장을 공허하게 만들고, …이들의 교회론은 칼뱅이 볼때 불가시성 속으로 사라질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이 두번째 변증적 관점과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시간, 그리고 부세르의 영향으로 칼뱅이 가시적 교회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게 된다.

칼뱅이 볼 때 가톨릭교와 재세례파가 보는 교회는 위험한 해석이며, 첫째로는 불가시적×가시적 교회를 혼동/융합함으로써, 그리고 두번째로는 두 개념을 나눔으로써 성경의 가르침에 등을 돌리고 있다.

4) 세 개의 축인 머리, 척추, 역사적 기초를 중심으로

이 변증적 이중 관점에서, 그렇다면 칼뱅은 어떻게 교회에 대한 생각을 ‘기독교 강요’의 여러 출판본을 따라 세워 나가는가 ?

칼뱅은 압축할 수 없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차례로 설명을 전개하려 한다.

세 개의 그림 :

a. 칼뱅의 교회론에는 먼저, 온전히 불가시적 영역에 해당하는 머릿돌이 있다 : (그리스도의 숨겨진 몸과 그리스도의 묵상의 절대적인 효율성(을 주장하는)) 기독론과 선택 교리가 그것으로, 교회의 머리가 그것이다.

b. 또 (이번에는 가시적 영역에서) 척추에 해당하는 부분은 말씀의 대중사역과 성례가 있으며, 추후 칼뱅이 가시적 교회의 어머니 되심이라고 부르게 될 개념의 (말 그대로) ‘몸을 조성한다’.

c. 마지막으로, 계속 가시적 영역에서, 은혜의 언약 교리인 역사적 (그리고 시간적) (및 제도적) 기초가 있다. … 인간경험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의 기초가 되고 틀이 되는 요소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의 선물을 담아서 그리고 그 선물을 전해주시는 용도로 쓰시는 포장과도 같은 것이다.

C. 머릿돌 : 로마 가톨릭교에 반대되는 교회의 불가시성

1536년 라틴어 초판 ‘기독교 강요’ 는 그리스도의 ‘숨겨진 몸’의 교리만을 다루고 있다. 27세 나이로 칼뱅은 교회의 본질은 초월불가시성에 있다고 주장하며, 가톨릭교에 부여된 내재성과 권력 남용에 대한 그의 반응이기도 하다. 칼뱅에 따르면 (교황권을 포함해) 교회의 주권에 대한 인간의 주장은 모두 제거해야 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주권만을 주장해야 한다.

1)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

루터파가 ‘교회의 구조와 교회의 몸의 하나됨을 파괴한다’고 주장하는 반대자들에게 칼뱅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리스도가 아버지 우편에서 통치하는 한, 지지를 받는 그 손으로, 무장한 그 갑옷으로, 강화된 그 덕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여태까지 살아있고 계속 살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창조자이자 주인되시는 분의 하늘의 왕권에 의해 존재하고 유지된다.

2) La doctrine de l’élection

Dans ce texte fondateur de 1536, Calvin fait aussi largement référence à la doctrine de l’élection, pour donner à son ecclésiologie des appuis et formes de solidités supplémentaires.

C’est parce que la grâce du salut ne peut pas se perdre, que l’Eglise est indestructible. Et c’est parce que Dieu conserve ceux qu’il a élus / ou prédestinés, que l’Eglise peut survivre au milieu des erreurs et des ténèbres qui la défigure (jusque « dans la confusion de Babylone » ou « dans les flammes de la fournaise ardente »)

3) 필연적 확신

a.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을 아신다

칼뱅은 또 교회의 불가시성을 (그 후 고전적인 개신교 주장이 될) 실리적 고찰로 해석한다.

그 중에서도 구원과 선택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을 아신다 고 주장한다.

칼뱅의 관점에서 사람의 판단은 사물의 외형에만 치중해있다. 말과 행동의 외형적 일관성 또는 모순만을 판단하며, 관점 오류는 언제든 가능하다 (알곡와 가라지 비유 참조).

하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는, 개개인의 깊고 은밀한 진실 속에서,

하나님만이 (궁극적으로) 유일한 심판자이시며 유일한 심판자 되실 것이다.

b. ‘혼합된 몸’으로서의 교회

칼뱅에게 교회의 불가시성의 또다른 면은 바로 가시적 교회 백성 중에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절대로 섞일 수 없는데 있다. 여기서 가시적 교회란 세상 끝 날까지 신자와 불신자가, 그리고 양과 이리가 함께 사는 혼합된 몸이라는 확신을 엿볼 수 있다.

순수한 자들의 교회, 또는 완벽한 신성함의 재세례파적 비전에 맡서는 긴 연설 중, 칼뱅은 여러 복음적 비유를 기준으로 삼아 반박한다 : 알곡와 가라지 (마 13:24-41), 그물 비유(마 13:47), 밭의 비유 (4개의 땅), 부패한 고린도 교회.

이 부분에 대해 재세례파인들의 권징이 과하게 혹독하고 엄격한 것을 칼뱅은 비난하고 있으며, 이 땅 위, 교회 안에서, 정결한 자들과 부정한 자들을 가르고, 완벽한 자들의 교회를 구성하려고 하는 이 시도는 잘못된 야망으로, 성경에서도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분은 또 칼빈에게 교회론 속에서 종말론에 중요성을 부과한다. 칼뱅의 관점에서 교회는 이 세상 끝 날까지 완전하고 정결해질 수 없다.

Les fruits de l'élection éternelle de Dieu ne seront visibles de façon totale, ne pourront etre touchés par les doigts des hommes, qu'à la fin du temps présent (qui est le temps de l'Église, précisément). … une perfection qui englobe, non seulement de la constitution de l'Église (c'est-à-dire du rassemblement de tous les élus, du point de vue quantitatif), mais également leur totale et parfaite sanctification (du point de vue qualitatif).

알곡와 가라지의 비유에도 보면, 마지막에 가서야 주인이 직접 알곡와 가라지를 나누는 작업을 한다. 예수님께서도 종말론적 시대 착오에 대해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즉, 종말론적 구분을 앞당겨서 하게되면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데- ‘가라지와 함께 알곡도 함께 뽑는’ 효과를 초래하는, 즉 외형에만 너무 치우쳐 하나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사람에 대해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c. 산 자와 죽은 자들의 교통

칼뱅은 또 신자들 전체를 아우른다는 뜻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불가시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 현재와 미래의 신자들 뿐 아니라, 과거의 신자들까지도 아우른다.

완벽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모든 자들의 교통를 뜻한다. 모든 자들에는 ‘죽은 자들도 포함된다’고 칼뱅은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신자들을 아우른다. 오늘날까지 그 어떤 누구도 교회의 완벽한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이런 면에서 또한 교회는 신학적 표현의 의미에서 믿음의 눈으로만 분간할 수 있는 하나의 ‘신비’이다.

d. 신조에서 말하는 교회

요점을 정리하자면 : 칼뱅에게 있어서 불가시적 교회의 개념은 신조의 ‘나는 교회를 믿습니다’에 정당히 해당하는 확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믿음의 산물이며, 단순한 경험과는 다르며 경험적 지각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교회는 우리의 지식으로는 절대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오감으로 완전히 지각할 수 없는 현실이다.

루터는 이미 1530년 ‘계시록’ 서문에서 ‘교회는 볼 수 없으며’, ‘가장 좋은 안경을 쓰고 있을지라도 믿어야만 한다 !’라고 재차 말했다. 마찬가지로 칼뱅도 ‘교회를 믿어야’하며,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눈으로는 바라볼 수 없다고 말한다.

D. 척추: 재세례파와 상반되는 교회의 가시성

A. 일반적 관점

이 시점에서, 계속해서 (1541년 번역된) 1539년 판 기독교 강요에서 칼뱅은 처음으로 교회의 가시성에 대해서 말한다.

불가시적 교회에 대한 초판 원고를 쓴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아, 칼뱅은 ‘우리의 지각으로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교회의 신비를 묘사하고자 한다.

기독교 강요 4권의 제목에서 나와 있듯이 여기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이끌고 머물게 하기 위한 외부적 수단이나 도움’에 대해서 다루게 된다.

Le tome IV comprend vingt chapitres qui se décomposent comme suit :

2 chapitres pour comparer la vraie église et la fausse,

1chapitre pour décrire les ministères de la vraie église

10chapitres pour critiquer les formes de l’église romaine

4chapitres sur les sacrements dans lesquels la critique de l’église romaine

occupe une large place.

2chapitres qui la concernent exclusivement

1chapitre sur le gouvernement civil

1539년 이전에는 칼뱅은 교회의 불가시성에 대해서만 다뤘지만, 1539년을 기점으로 이전에 주장했던 내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시성에 대해 추가로 가르치고 있다.

이런 변화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 역사학자들은 1539년 출판본은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 머물 때와 시대가 일치한다고 얘기한다. 신학자 마르틴 부써의 영향을 받아, 부써가 대립하던 급진파와 재세례파와 칼뱅이 직접적으로 대립하던 때이다.

A ceux pour qui le corps de l’Église importe si peu qu’il pourrait disparaître,

Calvin oppose que l’ecclésiologie répond aussi à une exigence d’incarnation. ..

이 균형 회복은 그 후 출판된 ‘기독교 강요’ 발행본에서 더 강화된다.

이 때부터 칼뱅은 자신의 모든 관심을 교회의 설립(establishment)에 필요한 교회 제도와 도구에 쏟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드러난 실수나 신령주의, 또는 반대로 급진적 개신교의 완전주의의 실수는 범하지 않으면서, 이 땅 위에서 교회가 이상적 교회에 가장 근접할 수 있도록 어떻게 교회 제도를 세우고, 조직하고, 구조화하고 권징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B. 가시적 교회의 표지

그렇다면 (니케아 신경 - 하나됨, 거룩성, 가톨릭×보편성, 사도성과 혼돈하지 말하야 하는) 참 교회의 ‘표지’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참 교회는 무엇인가 ? 거짓 교회는 무엇인가 ? 이 땅 위에서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할 수 있는 표지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

On appelle « marques » les critères par lesquels sont distinguées, parmi toutes les groupements religieux qui peuvent exister, ceux qui sont des authentiques Églises chrétiennes. Ou a contrario : quels sont les critères minimaux, en dessous desquels, on ne peut plus considérer être en présence d'une légitime Église.

a. 표지 교리의 실제적 중요성

153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 중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그룹들이) 하나같이 전통 교회임을 주장하며 서로 갈라서는 것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칼뱅은 정의를 내릴 필요성을 느낀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분파 및 분리주의 운동이 늘어나는 것을 지켜본 칼뱅에게 있어서 표지 교리는 전혀 이론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음의 매우 구체적인 두 질문에 답하기 위함이다 :

a) 어떤 기준으로 한 종교 공동체로부터 갈라설 때, 이것이 죄나 이교신앙이 아니요, 잘못되고 오만한 분리주의가 되지 않으며, 복음의 하나님이 정죄하시지 않는 분리인가 ?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

Quelle est la limite en deçà de laquelle les hommes doivent faire confiance à leur communauté ecclésiale et à ses ministres, et se soumettre à leur autorité pastorale ? malgré tous leurs défauts ? .

b) 반대로 : 어떤 선을 넘어설 때, 이 같은 분리가 정당하고, 어떤 경우는 불가피할까 ? 오히려 분리되지 않고 남는 것이 타협(오염), 배교와 공모가 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죄받지 않을까 ?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4).

이 두 현실적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외국인 입장에서 네덜란드 역사를 보면 개신 교회의 극단적 분리는 충격적이며 그리 중요하지 않은 교리 내용으로 인한 것이었다. 모든 시도가 정당한가 ?

b. 두 개의 고전적인 표지

그렇다면, 참 교회의 표지는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기독교 전통에서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제안이, 4, 6, 12, 15, 또는 100 가지의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기적, 환상, 선임, 숫자 등) 대부분의 제안들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받아드릴 수 없다고 판단, 진실과 오류를, 그리고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동시에 보여주는 ‘모호한’ 부분이 많은 표지들이라는 것이다.

모호하지 않고 (좀 더 정확히 말해 덜 모호한) 표지로 칼뱅이 고려한 것은 두 가지 이며, 고전적 표지가 된 : ‘올바른 말씀 선포’와 ‘신실한 성례 시행’으로, 개신교 전통에서 ‘은혜의 방편’이라고도 부르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설교하고 귀담아 듣는 곳, 그리스도의 제도에 따라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연 맞는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칼뱅은 말한다.

칼뱅에게는 이 표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시행하는 교회의 외적 교통을 떠나있는 이들에게는, 목사의 자격을 핑계삼더라도, 어떠한 변명거리도 없다’ … 이 두 표지는 ‘진정한 교회의 권위를 구성하는 요소로, 그 견책이나 충고를 거부해서는 안되며, 하물며 하나된 교회로부터 멀어져 끊어져서도 안된다’.

c. 교회 권징이 제 3의 표지가 될 수 있을까 ?

부써와 같은 일부 종교 개혁가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교회 권징’이라는 제3의 표지를 추가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쯔빙글리도 칼뱅도 이 제안을 따르지 않았고, 재세례파의 ‘교회 완벽주의’에 반대했다. ‘열매가 교리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 즉시 재세례파는 교회가 없다는 잘못된 판단을 한다고 말한다’.

d. 표지 교리의 한계

표지 교리는 개신교 교회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한계도 가지고 있다.

칼뱅이 ‘올바른 말씀 선포’와 ‘신실한 성례 시행’에 대해 물론 말하고는 있다. 하지만 올바른 말씀 선포란 무엇인가 ? 누가 그 정의를 내리나 ? 어떤 기준을 근거로 ?

교리의 차이로 인해 두 개신교 그룹이 분쟁하고 나뉠 때에도, 일반적으로 ‘정결한 말씀 선포’에 대한 두 개념이 대립한다. 한 쪽에선 다른 쪽이 거부하는 교리를 따르거나 (예 : 밀레니엄, 유아 세례, 안식일, 의복 등)… 한쪽에서는 중요한 (필수적인) 교리적 확신으로 삼는 것을 다른 쪽에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부수적이라고) 판단하는 경우다.

이 경우 순수한 말씀 선포라는 기준만으로는 두 그룹을 화해시키고 분리를 막는데 역부족이다. 더군다나, 두 그룹 모두 ‘올바름’에 대한 공통된 정의를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 일 수도 있다.

‘순수한 말씀’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칼뱅도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중요하고 부수적인 것을 과연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어려운 질문에 답을 찾아야 했다.

…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면은 부인/배교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반박할 수 없은 점과, 그 하나됨을 보장하지 않으면서, 교회 내에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성경 말씀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듯이),

Calvin : Parmi les points fondamentaux :

ilyaunseulDieu,JCestDieuetFilsdeDieu,notresalutestdanssaseulemiséricorde,etc..

Points qui sont en débat dans l’Eglise sans rompre son unité :

ex : est-ce que les âmes vont tout de suite au ciel dès la séparation d’avec le corps, ou demeurent (provisoirement en Dieu en un lieu indéterminé (psychopanikia)

Cf. CALVIN Jea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mise en français moderne par Marie de Védrines et Paul Wells, Aix-en-Provence et Charols : Kerygma et Excelsis, 2009, tome IV/II/ p. 974 et surtout IV /I/12 p. 958.

(마찬가지로) 올바른 성례 시행과 관련해 :

개신 교회 역사상, 성례(성찬과 세례)의 교리와 권징만큼 문제시 되고, 논란이 되고 분리를 초래하는 주제가 또 있을까 ?

내 관점에서 두 표지의 교리가 신학에서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분간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시된 해답 중 가장 적절하다. 그렇다고 또 두 표지의 교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것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3) 가시적 교회의 ‘어머니 됨’의 표지

표지에 대한 주장의 연장선 상에서, 칼뱅은 교회론 중 그 다음으로 교회의 몸에 ‘신비로운/숨겨진’ 인격의 형태로, ‘어머니’의 개념을 부여한다.

1539년 판 ‘기독교 강요’ 4권 1장의 제목은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 되시는 참 교회와 우리가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제4항의 제목은 ‘가시적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다.

키프리아와 어거스틴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가톨릭 표현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칼뱅도 비슷한 말을 하는데, ‘교회 품 밖에는 죄의 용서도 없고, 구원도 없다 (…)’. 교회를 떠나고 분리하면 재앙이나 죽음에 이를 수 있다. .

Positivement, Calvin exprime ici la conviction que l'Église visible n'est pas seulement le résultat de l'action de la Parole ou son fruit – idée à laquelle les protestants sont très attachés - mais qu’elle est aussi un organe ou un instrument, par lequel les hommes entrent et sont maintenus dans la communion avec Dieu.

Dieu, par l’institution ecclésiale, tient compte de notre infirmité et tendance à la paresse, et nous donne des moyens générateurs et éducatifs, ayant pour but d’épanouir notre vie de foi jusqu’à la fin de notre parcours terrestre (et pas uniquement à ses débuts). Les plus matures, les plus avancés dans l’Église, restent dépendants de ces béquilles (= cannes). Telle était sa vision. .

1) 교회의 어머니됨에서 제도화된 사역까지

마지막으로, 칼뱅의 가시적 교회에 대한 논리를 보면 :

가시적 교회의 어머니됨을 바탕으로 칼뱅은 제대화된 사역의 교리를 다시 언급한다.

‘기독교 강요’ 마지막판 4권은 교회내 사역(들)의 행함에 대한 논문의 형태로 나타난다.

칼뱅에게 가시적 교회의 어머니됨 및 교육적 영향은 추상적 현실이 아니다 : 교회의 영향은 임직받은 목회자들의 사역, 정확히는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시행하는 사역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 두 가지는 마치 어머니된 교회가 아버지의 자녀들에게 젖을 먹이는 두 젖통과도 같다.

특히 말씀 선포를 통해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의 양식을 받아먹으며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루터의 경우 사역의 제도화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즉 가변적인) 것으로 봤는데, 부써와 칼뱅은 이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서부터 온 것으로 봤다.

부써와 칼뱅의 관점에서 ‘사역은 교회의 행복(well-being)에 속한 것이 아니라, 존재(being)에 속한 것’이다.

칼뱅이 사역의 제도화를 표지론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 목회 사역의 여부에 따라 교회가 생존하거나 사라지거나가 결정된다 : ‘그리스도가 교회 내에서 강조하며 명령하신 사역이기에, 사역이 죽으면 교회 또한 죽는다’.

E. 모퉁이돌 : 교회의 역사적 기로초서의 연약

마지막으로 인간 경험 관점에서 가시적 교회에 속한 첫 요소는 무엇인가 ? 그 역사적 출발점은 무엇인가 ?

머리와 척추 다음으로: 발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표지인 세례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내 소속감의 역사적 ‘출발점’는 무엇인가 ?

칼뱅에 의하면, 간단히 말해 (할례를 잇는) 세례는 ‘약속의 백성’에 속한다는 표이다 (하이델베르그 참조) …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은혜의 약속의 표로서, 언약을 통해 대대손손 전해져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 역사적 백성을 구성하게 한 약속이다.

이 연구를 통해 내가 가시적 교회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은, 칼뱅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전에 제도화 하신 법적 및 역사적 틀, 즉 ‘은혜의 언약’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발판’ 역할을 하긴 하지만 바울의 선택 교리와 혼돈하지는 말 것).

칼뱅에게 있어서, 역사 속에서 주어진 이 약속은, 말씀 선포와 성례 시행 (은혜의 방편), 권징 시행, 그리고 개인의 믿음의 고백과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주관적인 축복을 앞서고, 그 틀을 구성하고, 조건으로 작용한다.

F. 결론 : 비평 재조명

결론적으로, 좀 더 개인적인 코멘트를 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이번 세미나에서 여러분의 생각을 좀 더 자극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칼뱅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래서 ‘기독교 강요’ 4권을 새로 출판한다면 어떤 부분이 남고, 추가되거나 삭제되어야 할까?

A. 긍정적 평가

I. 특히, 개인적으로 칼뱅의 교회론 중 신약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 것이 매우 좋았다. 이 해석 속에서 교회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자연스레 자리잡고, 제약이나 강제되거나 왜곡된 해석이 없다. 성경 주석을 강제하는 (MJ 혹은 그 위에 권위로 작용하는) 교의적 강제는 없다.

Des passages comme Hébreux 10:29 (parlant de ceux qui dans l’Eglise ont méprisé le sang de l’alliance par lequel il sont été sanctifiés), Jean 15 :1-8 (le Cep et les sarments) et nombre des « paraboles du Royaume » trouvent ici une place naturelle dans l’ecclésiologie, sans pour autant faire de l’ombre à la doctrine paulinienne de l’élection et de la prédestination.

II. 한편, 칼뱅은 감히 교회론 중심에 있는 가장 복잡한 질문에 답을 제시한다 : 불가시적 교회가 어떻게 가시적 영역에 들어가는가 ? 성육신의 요소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

성령의 영감 속에서 사건이 어떻게 제도와 연결되는가 ? 칼뱅은 이 질문에 답을 제시한 몇 안되는 개신교 신학자 중 한 명이다.

III. 또 (순결주의와 완벽주의에 반대되는 견해로) 교회를 구성하는 멤버들의 인간성이든 (이상화 또는 제도적 신성화에 반대되는) 리더십의 인간성이든, 교회의 인간성의 매우 현실적인 이해에 기반한 교회론이다.

IV. 하지만 그렇다고 이 현실주의가 교회 멤버들을 절망 속에 가두지는 않는다.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인식되긴 하지만, 교회론에서 이들을 가장 영광스러운 하늘 언약과 연결하며, 이 언약들을 통해 역동적이고 이상적으로 무한한 성화 과정 속에서 동원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묵상만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에 대한 은혜와 이해의 도덕으로부터 온전히 영감을 받는다.

V. 칼뱅의 교회론은 이 땅 위에서 교회 구성원이 겪고 있는 (세례가 인감 역할을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자신 앞에 항상 남아있으며 더 나아질 수 있는 이 소명에 대한 개인적인 신실함 간의 긴장감을 잘 보여준다. 루터가 말한 ‘simul peccator et justus et penitens’(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며, 또한 회개하는 자)와 자연스레 연결되는 교회적 개념이다.

B. 비평적 의문

a. 제도화된 칼빈주의적 신학은 신적인 법으로서의 사역으로의 회귀인가?

칼뱅은 우리가 언급했듯이 먼저 가톨릭 교회론에 때로는 격렬히 반응했다. 그는 교회의 불가시성에 대해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그 어떤 교회 기관의 너무 빠른 동일시화에 반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교회론 구상을 마치며 가시적 기관에 긍정적 신학적 입지를 인정하며 칼뱅은 제도화된 사역에 가톨릭교에서 말하던 ‘신적 권리의 지위’와 유사한 지위를 다시 부과하지는 않고 있나?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즈음, 27세 초기에 그가 비판했던 것과 유사한 사역 교리로 되돌아 오지는 않았는가 ?

b. 교회와 국가의 혼동

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21세기 서양의 독자가 칼뱅의 교회론을 읽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칼뱅이 (16-18세기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국가의 영역을, 또 교회와 정치적 시민권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칼뱅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구상은 복잡한 주제로, 이 주제만으로도 여러 날 컨퍼런스를 진행할 수 있다.

칼뱅은 일평생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싸웠고 ‘황제 교황주의적’ 간섭의 퇴치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칼뱅은 같은 열정으로 교회에 대한 국가의 자유를 위해 싸웠을까 ?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또한 그 때문에 제네바에 신정정치를 세우려 했다고 비난받았다).

칼뱅에게 국가 교회와 연결된 가시적 교회는 다소 모호한 현실이며, 그는 정치적 강제가 교회에 줄 수 있는 지원과 공권력 행사를 거절하지 않는다.

(십계명 앞 부분에 해당하는 국가 역할에 대한 라로셸 고백 후반부에 대한 논의 참조).

군주가 신하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 수 있는 ‘cuius regio; ejus religio’ 원칙은 한 번도 칼뱅에 의해 반박된 적이 없다).

교회와 국가의 범위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칼뱅의 ‘기독교 강요’ 속에서 ‘군중의 교회론’을 찾아볼 수 있고, 몇 몇의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그렇게 해석했다. 또 칼뱅이 크게 동의한 국가 교회의 개념을 통해 여러 개신교 국가에서 강화된 사회주의적 개신주의를 지지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Trouve-t-on dans l’Institution chrétienne le modèle de ce que de nombreux calvinistes aujourd’hui appellent une « église de confessants » (à laquelle appartienen notamment dans le calvinisme hollandais ou américain, peut etre Coréen ?) ? Pour y arriver, il faut encore, dans la lecture des textes de Calvin, dénouer l’étreinte (= arriver à séparer ce qui est dit) de l’Église et de l’État, pour que l’ « ecclésiologie confessante » apparaisse telle que nous la concevons aujourd’hui .

c. 선교와 전도 신학의 발전?

마지막으로 끝맺는 말로 앞의 내용에서 자연스레 다음 질문을 할 수 있다: 칼뱅의 교회론은 진정한 선교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는가? 이미 기독교화되고 교회가 세워진 나라 외에 실질적으로 선교와 전도의 도약을 불러일으켰는가?

나는 칼뱅이 선교 신학의 기초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심치 않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학적 기초가 있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칼뱅은 유럽과 개신교회, 그리고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게 지칠 줄 모르는, 어떤 때는 영웅적인 방법으로 지원을 제공한다 (‘십자가 아래의 프랑스 교회’에 대한 지원, 라로셸 신앙고백 등).

La célèbre expéditions des « quatorze calvinistes chez les Topinambours » (au Brésil, Guadamara) est aussi une illustration symbolique de cette ouverture internationale.

하지만 칼뱅이 (대부분의 동시대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주 권위 아래에 설립된 ‘국가 교회’ 사상과 분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터득한 선교적 사상이나 전도 개념의 수준으로는 발전시키지 못했다. … 그리고 특히 서양 개신교의 역사를 살고 있는 사람은 아마 칼뱅이 아닌 19세기 이후 부흥 운동과 전도 운동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경청해주셔 감사합니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4/4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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